제 1장 마지막 선택
금산에서 백십이 년 여섯 달 보름을 보냈고, 세상으로 나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그런데.......
단목숭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열 구의 시체가 너부러져 있다. 목이 잘린 자, 허리가 잘린 자,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수직으로 잘린 자들.
도살당한 가축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자들은 마림 가솔들이다.
가장 먼저 나율은 육십 년을 함께 살았고, 계망과 운모상은 백십이 년 여섯 달 보름을 함께 보냈다.
드디어 바깥세상을 보게 됐다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이제는 정말로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겠다면 크게 웃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전부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나왔다.
“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어. 영감들은 아주 큰 실수를 한 거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목숭을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앞에는 열 두 명이 서 있다. 아니 허공에 숨어 있는 여자까지 합치면 열세 명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 저들 중 약자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가장 약한 자가 목령공을 익힌 자인데 그의 무공이 막내 나율보다 더 높았다.
그리고 특히 검은 철립, 검은 장포, 검은 궤짝을 멘 특이한 자.
그는 단 하나의 암기로 마림의 이인자인 운모상을 없애는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바로 구림세가 무인들에게 바깥공기를 쐬게 해준 연우강이다.
물론 금산을 연 자는 조천신이지만, 그 또한 연우강이 없었더라면 금산을 열 생각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결국 자신을 비롯한 구림세가 무인들은 연우강에 의해 밖으로 나왔고, 연우강의 손에 죽어가는 꼴이다.
“ 나를 비롯한 구림세가 무인들은 네가 살고 있는 명나라를 건국한 건국 공신들이다. 우리가 없었더라면 너희들은 아직 달탄 놈들의 지배를 받고 있을 거란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단목숭을의 목소리가 커졌다.
명나라 건국에 젊음을 바쳤다. 그런데 백여 년이 지난 지금 주원장의 후손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자신은 후손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 사실이 미칠 것처럼 화가 났다.
“ 요점이 빗나갔어, 영감. 영감과 나는 내 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투정은 자금성으로 가서 해야지.”
“ 요점이 빗나간 게 아니다. 연우강. 난 지금 명나라 전체가 우리 구림세가에 빚을 졌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 그래서 구림세가 무인들이 이걸 달라고 하면 말없이 내줘야 한다는 거야?”
연우강은 제 머리를 가리켰다.
“ 우린 맹세를 했을 뿐이다.”
“ 금산에서 꺼내주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그 맹세를 말하는 거야?”
“ 그렇다.”
“ 그래서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않은 나를 죽이려고 떼거리로 몰려왔다고?”
“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지켜지지 않으면 그건 맹세가 아니다.”
“ 그럼 조천신이 내가 아니라 황제를 없애달라는 요구를 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연우강은 단목숭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 그건......”
단목숭을은 대답을 못했다.
감히 황제를 죽여달라는 요구를 해올 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럼 북경에 있는 열 살 이하의 어린애들을 전부 없애달라는 요구를 하면 그땐 어떻게 할 참이었지?”
“ 요, 요구는 사, 상식 선에서 일우어져야 한다.”
단목숭을은 더듬거렸다.
“ 그럼 혹시 전에 나 본 적 있어?”
“ 없다.”
“ 그럼 우리 아버지 알아?”
“ 모른다.”
“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는?”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 나 또한 당신이 상식에 어긋난다고 말한 황제나 열 살 이하의 어린아이나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는 거야.”
“ .......”
단목숭을은 할 말이 없었다.
구구절절 연우강의 말이 맞다. 악연도 안면도 없는 연우강을 없애려고 이곳으로 왔고, 역으로 가솔들이 당했을 뿐이다.
“ 우리 좀 솔직해지는 게 어때?”
“ 솔직해지자는 건 무슨 말이냐?”
“ 영감이 이곳 묘봉산으로 온 건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공 자랑을 하기 위해서야. 영감은 금산의 문을 열어준 조천신이 사람 한 명을 죽여 달라고 하자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을 거야. 어쩌면 금산을 열어준 대가치곤 너무 쉽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아니 그랬을 거야. 백십이년 여섯 달 보름을 헤아리고 있을 정도로 명나라에 깊은 원한을 쌓고 있던 자들이니까. 내 말이 틀려?”
“ ......!”
단목숭을은 연우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리가 뛰어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구림세가인들의 내심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 맞다. 연우강.”
단목숭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우리가 왜 전혀 반항도 하지 않고 금산으로 들어간 지 아느냐? 그건 바로 명나라 때문이었다. 우리가 반기를 들면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명나라는 다시 전쟁 속으로 빠져들 테고 달탄으로 도망쳤던 원나라 잔당들이 이 장성을 건너 쳐들어올까 봐 그곳으로 들어간 거다.”
“ 하지만 금세 나올 줄 알았겠지?”
“ 물론이다. 최소한 오 년 또는 십 년 안에 풀어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고, 삼십 년, 사십 년, 오십 년이 지나도 그들은 우릴 꺼내주지 않았다. 아니 우리를 잊었다. 주원장 그놈은 우리 가문으로 찾아와서 제발 도와달라고, 한족을 위해 나서달라고 바닥에 머리를 수십 번도 더 찧었다. 그랬던 놈이 우리를 잊었단 말이다.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 잊은 건 주씨들뿐만이 아니지.”
“ 우리도 잊은 게 있단 말이냐?”
“ 내가 보ㄱ;ㅣ엔 그래. 당신네들은 금산으로 들어간 이유를 잊고 있는 것 같아.”
“ 금산으로 들어간 이유는 방금 말했다. ”
“ 자신들의 일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야, 영감. 영감이 금산으로 들어간 건, 명나라를 위해서가 아냐. 권력다툼에서 패해서 그곳으로 도망을 쳤던 거야. 금산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전부 뒈질 상황이었으니까. 세월이 흘러 그 당시에 살았던 자들이 아무도 없다고 그럼 안 되잖아. 영감은 패자일 뿐이야. 인생의 패자 말이야.”
“ 아니다, 놈! 우린 명나라를 위해, 주씨를 위해 대승적인 결단을 내렸을 뿐이다! 결코 패해서 그곳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아니란 말이다!”
단목숭을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 됐어. 영감. 대승적인 결단이었다고 믿어줄 테니까 진정해.”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 맞다. 연우강. 우린 대승적 결단으로..... 개자식!”
여간해서는 욕을 담지 않는 단목승울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지금껏 연우강에게 우롱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어린 놈의 놀림감이 됐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나는 모양이지?”
“ 죽여 버리겠다, 놈!”
단목승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 지금 내 심정이 그랬어. 난 영감들하고는 일면식도 없어. 그런데 어떤 개자식들이 날 죽이겠다고 나타난 거야. 더 더러운 건 뭔지 알아. 날 죽이겠다고 나온 새끼들이 백십이 년 여섯 달 보름 전에 발악하느라 짖었던 말을 지킨다면서 여기로 왔다는 거야.”
“ 죽여주겠다. 연우강!”
단목승울이 이를 부드득 갈며 내기를 끌어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고 싶었다. 하지만 연우강은 마림의 이인자였던 운모상을 암기 하나로 없앴다. 감히 태만할 수 없었다.
열린 단전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내기가 삼백육십 개의 혈도를 채우자마자 마치 석양 같은 불그스레한 광채가 단목승울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그 불그스레한 광채는 점점 강해지더니 어느 순간 피처럼 붉게 변했다.
그것은 구림세가 중 마림의 최고 내공심법이라고 할 수 있는 혈천수라결이었다. 혈천수라결을 바탕으로 펼치는 혈천구마해가 단목승울의 독문 무공이었다.
“ 흐흡!”
단목승울은 깊게 숨을 들이마셔 들끓는 노화를 진정시켰다. 흥분한 상태로 목숨이 달린 일전을 치를 수는 없었다.
‘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평생 동안 무공을 익히면서 그가 얻은 교훈이었다.
붉은 기운이 전신을 감싸자 그는 살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것은 살기만으로 생명체를 없앤다는 의형살인강이었다. 끌어올린 의형살인강을 몸 주위로 퍼뜨리자 온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이 검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뿌려댔다.
“ 이제부터 빚을 받겠다. 연우강.”
단목승울은 두 주먹을 지그시 말아쥐며 소리쳤다.
“ 난 네게 빚진 거 없어. 그리고 늙어서 관으로 들어갈 때가 다 된 영감과 싸우는데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고, 아무 때나 시작해.”
“ 건방진 놈! 타하!”
단목승울이 우렁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양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전신을 감싸고 있던 불긍ㄴ 기운이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붉은 구름처럼 한꺼번에 나아가는 그것은 혈천구마해의 1해인 혈운이었다.
“ 특이한 무공이네.”
연우강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여덟 가주 중 두 번째로 강자가 단목승울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듯했다.
빠르게 다가오는 저 덩어리는, 별다른 힘을 내포하지 않은 구름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각을 조금만 끌어올려 보면 저 커다란 운무가 강기 덩어리란 사실을 금세 알게 된다.
놀랍게도 단목승울은 강기를 구름처럼 만들어 상대편을 향해 쏘아 보낸 것이었다. 저 구름에 휩싸인 순간 온몸은 강기 폭풍 속에 노출된 상태가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굳이 겪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온몸의 살점이란 살점은 갈가리 찢겨져 나갈 테고, 뼈는 작은 조각으로 부서질 것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잔인한 무공.
그 무공이 바로 저 붉은색의 강기 덩어리였다.
“ 강기에는 강기가 제격이겠지?”
연우강은 양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양손 장심에서 붉은 기운이 천천히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혈잔수로 만들어 낸 기운이었다.
엄청난 열기를 동반한 붉은 기운은 커다랗게 벽을 형성했다. 가로세로 반장 크기의 강기 벽은 붉은 구름을 향해 쏘아져 갔다. 붉은 강기 구름과 강기 벽은 주변 기운을 밀어내며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퍼억!
낭떠러지 위에서 커다란 바위가 떨어질 때와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목승울은 얼른 연우강이 찍은 발자국을 보았다. 반발력으로 물러나는 경우 발자국은 많은 정보를 준다. 더 많은 발자국을 찍으며 물러나거나, 발자국 수는 같은데 깊이가 더 깊다면 약하다는 뜻이 된다.
‘ 놈!’
단목숭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연우강의 발자국이 더 깊었던 것이다.
“ 차아앗!”
단목승울의 입에서 조금 전보다 더 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그의 몸 주변에는 붉은 운무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가슴 앞에 뭔가를 세워두고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것처럼 양손을 번갈아 가며 휘둘렀다.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칠 때마다 붉은 운무가 실처럼 가늘게 변하면서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이었다. 마치 옆으로 내리는 비를 연상시키는 그것은 혈천구마해의 2해인 혈우였다.
“ 이것도 나쁘진 않네.”
연우강의 손 또한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양손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 듯 가볍게 몸 곳곳을 치자 검은 광채가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검은 광채는 사망묵의 곳곳에 꽂힌 사망마비였다.
따앙! 땅! 땅땅!
사망마지는 정확하게 붉은 광채 끝을 때렸다.
강한 반발력과 함께 단목승울이 쏘아낸 붉은 광채가 스러지고, 연우강의 사망마비 또한 튕겨져 나갔다.
‘ 나는 혈우를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다. 연우강.’
단목승울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는 연우강의 무기가 비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비수는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혈우는 다르다. 강기의 변형이기 때문에 내기가 고갈되지 않는 이상 무한정 만들어 낼 수 있다.
결국 무기가 한정돼 있는 연우강이 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휘리릭!
“ 응?”
단목승울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멀이 튕겨져 나갔던 검은 비수들이 집을 찾아들어가는 새처럼 연우강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연우강에게로 돌아간 비수들이 잡아채기 가장 좋은 위치에 멈춰 선다는 것이었다.
탁! 탁!
슉! 슉!
“ 으음!”
단목승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건 허공섭물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이기어검술과 궤를 달리 한다. 어떤 기술을 사용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난생 처음 대하는 무공이었다.
‘ 만일...’
단목승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혈우의 단점 때문이다.
혈우는 손을 휘두를 때마다 하나씩 만들어지고, 만드는 데도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옆귀 옆에서부터 휘두르기 시작한 손이 전면에 도달했을 때 하나의 혈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손을 천천히 휘두르는 건 상관없지만, 원래 휘두르는 속도보다 빨리 휘두른다고 해서 혈우를 만들어내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내기를 이용해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형의 내기로 만들어 낸 암기가 아닌, 쇠로 만든 암기는 준비만 제대로 갖춰지면 얼마든지 던지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실질적인 비수를 던져내고 있는 연우강이 훨씨 유리한 상황이었다.
‘ 너 또한 전력을 다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땅! 땅땅땅! 땅땅! 땅땅! 땅땅!
혈우와 사망마비가 부딪치면서 날카로운 소성이 흘러나왔다.
“ 좀 싱겁지?”
“ 응?”
단목승울은 깜짝 놀랐다.
자신 또한 전력을 다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연우강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녀석은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 것 같아.”
“ 멀다고?”
단목승울은 연우강과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와 연우강 사이의 거리는 오 장 가량으로 암기를 무기로 사용하는 자들에게는 최적의 거리다. 그런데 그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한 것이다.
“ 난 괜찮은데 구경꾼들이 하품을 해서 말이야.”
연우강은 오른편에 서 있는 유설연 일행을 턱으로 가리켰다.
“ 그건 우강이 네 말이 맞아. 손에 땀도 차지 않고 숨이 가빠지지도 않아. 소금 치지 않은 국물을 마시는 것처럼 밍밍해.”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하고 있을 뿐 그는 눈조차 깜빡지이 않고 단목승울이 만들어 낸 혈우와 연우강의 사망마비를 좇았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면 붉은 빛과 검은 물체가 우연히 부딪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감각을 끌어올리면 달라진다.
아니 굳이 감각을 끌어올릴 필요도 없다. 줄처럼 이어진 붉은 광체와 사망마비 아래를 보면 저것들이 얼마나 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붉은 광채가 나아가는 곳과 사망마비 아래쪽 땅바닥에는 뿌연 먼지가 풀썩이고 있다. 그것들은 붉은 광채와 사망마비로부터 흘러나온 기운에 의해 흙이 곱게 빻아지면서 생겨난 먼지 구름이다.
원래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야 하지만 공간을 장악한 두 힘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저렇게 맴돌고 있는 것이다. 만일, 저 힘이 상대방에게로 쏟아져 들어간다면 둘 중 한 사람은 한순간에 가루로 변해 버리고 말 터였다.
“ 그래서 지금부터 소금을 칠 참이야.”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오른발을 내디뎠다.
따앙! 따앙! 따앙!
단지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그런데 혈루와 사망마비가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커지고, 두 힘이 나아가는 경로 아래쪽의 먼지 구름은 더욱 거칠게 요동쳤다.
“ 나도 전진하지 않을 수 없구나.”
마림 가주의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고, 호승지심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단목승울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발을 내디뎠다. 그가 걸음을 내딛자 조금 전 연우강이 발을 내디뎠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 이왕 시작했으니까....”
연우강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연우강이 앞으로 나아가자 단목승울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거리는 오 장에서, 사 장으로, 사 장에서 삼 장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거리가 이 장으로 좁혀지면서, 혈우와 사망마비가 부딪치는 소리는 바닥이 들썩일 정도로 커졌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꿀꺽!
밀사신장 유덕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붉은 혈우와 사망마비를 좇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깜빡이지 못하여 흘리는 눈물이다.
‘ 눈 깜빡할 새’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눈을 깜빡이는 건 ‘찰나’라고 부를 정도로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덕은 눈을 깜빡일 수가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승부가 나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휘두르는 손동작은 느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손에서 쏘아져 나가는 붉은 광채와 검은 비수는 육안으로 좇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유덕이 바라보는 건 바로 그 붉은 광채와 검은 비수였다.
처음엔 단목승울이 공격하고 연우강이 방어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연우강도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허점을 노리고 혈우와 사망마비를 던져내고, 또 다른 혈우와 사망마비를 발출하여 그것들을 막아낸다.
그리고 또다시 혈우와 사망마비를 이용해서 공격을 하고 있다. 그것도 이 장 떨어진 짧은 거리에서.
“ 몇 개나 됩니까?”
두 사람의 쏘아낸 물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유덕이 물었다.
“ 암기의 수를 묻는 거야?”
유설연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붉은 광채와 사망마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네.”
“ 저기 붉은 광채는 혈우라고 불리는 데 전부 열 개야.”
“ 그럼 연 공자의 사망마지도 열 개겠군요.”
“ 맞아.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이 장 공간에는 총 스무개의 암기가 들어있어.”
유설연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내기를 사용하는 무인들에게는 엄청나게 짧은 공간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빛살보다 더 빠른 암기를 던지고 방어하고 있다.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팔 수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데도 단목승울과 연우강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하다.
두 사람 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라는 뜻이었다.
“ 맙소사!”
유덕의 입이 쩍 벌어졌다.
멈췄던 연우강이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앞으로 내딛는 연우강의 오른 다리가 발목까지 땅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연우강이 앞으로 나아가자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거의 진공상태로 변했다.
“ 드디어 역장이 형성됐어.”
유설연은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 무슨 말입니까?”
유설연의 부르짖음에 깜짝 놀란 유덕이 물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두 사람 사이에 묶여 있었다.
“ 저긴 우리가 서 있는 곳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공간이라고 보면 돼.”
“ 간단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 저 두 사람이 있는 저긴 우리가 있는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라고.”
“ 진식같은 거라고보 보면 되는 겁니까?”
“ 진식보다는 수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해하기 편할 거야.”
“ 수조라고요?”
“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계속해서 중첩되면 어느 순간 균형을 이루면서 커다란 공간이 형성되게 돼. 그걸 일컬어 역장이라고 불러.”
“ 그러니까 저 두 사람이 뿜어낸 힘이 수조 안의 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말입니까?”
“ 맞아. 그런데 그 힘은 집채만한 바위를 한순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엄청나. 그렇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한쪽이 약해지면 어떻게 될까?”
“ 역장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힘이 그쪽으로 쏠릴 거란 말이군요.”
“ 그렇지. 저 상황에서 물러난다는 건 곧 역장을 형성한 벽이 약해진다는 걸 뜻해.”
“ 그럼 방금 연 공자가 걸음을 내디딘 것은?”
“ 상대를 향해 역장 전부를 밀어붙이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거야.”
“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단목승울 또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 응!”
소금을 타지 않는 국물처럼 밍밍하다고 하였던 유설연의 얼굴에 처음으로 긴장의 빛이 어렸다.
파앙! 파앙! 파앙!
혈우와 사망마비가 부딪치며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단목승울도 연우강을 따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역장이 압축되면서 대기가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쾅! 쾅! 쾅쾅쾅! 쾅쾅!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혈우와 사망마비가 부딪치는 소리가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마치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전고 소리 같았다. 그 상황에서 연우강은 다시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고오오!
역장은 살아 있는 괴물처럼 괴성을 질러댔다.
쿠웅!
둔탁한 소리를 남기고 연우강의 오른발이 무릎까지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 허억!’
단목승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사실 단목승울은 혈우로 승부를 건 상태였다.
더 강한 초식이 일곱 개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승부를 걸었던 것은 대결의 성격 때문이었다.
보통 무인들의 대결을 보면 초식이 주가 되고, 내공은 부가 된다. 즉 내공은 초식을 받쳐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공이 비슷하면 뛰어난 초식을 가진 자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물론 내공 대결 또한 없는 건 아니지만, 내공 대결은 설사 승리를 한다고 해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정말로 다급한 순간, 요컨대 함께 죽을 결심을 하고 덤비는 동귀어진의 수법으로나 택하곤 한다. 즉 최후의 수단이 내공 대뎔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우강과의 대결은 달랐다.
처음엔 초식 대결이었다가 역장이 형성되는 순간 자연스럽게 내공 대결이 더해졌고, 지금은 초식과 내공을 동시에 겨루는 특이한 상황이 된 것이다.
초식과 내공을 동시에 겨루는 상황으로 발전하자 단목승울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다른 건 다 양보한다고 해도 내공만큼은 자신이 더 높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강한 초식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혈우로 승부를 걸었다. 유리한 상황인데 굳이 변화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내공이 약할 거라고 확신했던 연우강이 역장 전체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 나아가지 않으면 죽는다.’
단목승울은 오른발을 번쩍 들어 올려 내밀었다.
고오오오!
그가 발을 앞으로 내밀자 두 사람 사이의 대기가 거칠게 들끓었다.
쿠웅!
둔탁한 소성과 함께 단목승울의 발이 지면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의 발 역시 연우강처럼 무릎까지 파고들어 간 상태였다.
“ 아주 좋아.”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이번에는 왼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왼발을 천천히 내밀었ᄃᆞ.
‘ 어떻게....’
단목승울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미 뱃속에서부터 내공을 익히고 나왔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내공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양손은 쉬지 않고 암기를 날리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 우욱!’
갑자기 엄청난 압력이 미려오자 단목승울은 왼발을 들어 올려 앞으로 내밀었다.
끼이익! 끼이익! 끼이익!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역장이 압축되면서 쇠와 쇠가 마찰할 때나 들을 법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천천히 왼발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양손은 쉬지 않았다.
단목승울은 계속해서 양손을 후려쳐 혈우를 생성해 냈고, 연우강은 사망마비를 내던졌다.
“ 엄청나네.”
유설연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우강도 연우강이지만 단목승울 또한 대단한 무인이었다. 다른 자들 같았으면 진작 가루로 흩어졌을 터인데 그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
문득 지금까지 구림세가 무인들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따. 구림세가에서 가장 강자는 이세연이 아니라 단목승울이었던 것이다.
‘ 하지만 우강이 저놈은 더 엄청나지. 아무튼 재수 없는 놈은 어쩔 수 없어.’
유설연은 단목승울을 보았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단목승울이 이곳에서 연우강을 만나지 않았다면 남은 세월 동안은 무인으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그런데 연우강이란 거대한 벽을 만나 이곳에서 스러지게 된 것이다.
‘ 하긴 주원장을 선택한 것부터가 운이 없었다고 봐야겠지.’
문득 유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움을 주는 인연과 그렇지 못한 인연.
단목승울을 비롯한 구림세가 무인들에게 주원장은 해가 되는 인연이었던 것이다. 도움을 주는 인연이었다면 저들은 지금 대야벌을 뒤로하고 강호 무림의 주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 혹시 술 가진 거 있소?”
바로 그때 무료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설연은 고개를 돌렸다.
군무옥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서 있었다. 그런 군무옥의 얼굴엔 따분함이 가득했다.
“ 이 와중에 술을 마시겠다는 거야?”
유설연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똥 싸는 건 대장인데 내가 힘 줄 필욘 없잖소.”
“ 그래서 술을 마시겠다고?”
“ 가장 좋은 방법은 저 영감의 뒤통수를 냅다 까버리는 건데....”
군무옥은 단목승울을 가리켰다.
“ 말릴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해보지 그래.”
“ 저 역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진작 그렇게 했을 거요.”
“ 그럼 돌이라도 암기를 던져서 저 영감을 없애 버리는 건 어때.”
“ 그것도 해봤소.”
“ 정말?”
“ 이놈이 던지고 남은 거요.”
군무옥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주먹 크기의 돌멩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 킥!”
유설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대책이 안 서는 녀석들이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연우강의 명예를 지켜준다면서 절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군무옥은 곧바로 돌을 던져 단목승울을 암습한 것이었다. 설사 비겁하고 비열한 짓이라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해내는 자들. 그들이 바로 연우강을 비롯한 군무옥 일행이었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거라고 배웠소.”
“ 전쟁터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살아남는 거라고?”
“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소.”
“ 누가 그랬는데?”
“ 대장이 그랬소.”
“ 우강이 말이 맞아. 일단은 살아남아야 복수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명예로운 죽음은. 개밥으로나 주면 되는 거야.”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굵고 짧게’가 아니라 ‘얇고 길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됐지?”
유설연은 다시 군무옥이 쥐고 있는 돌멩이로 시선을 주었다.
“ 직접 보시오.”
군무옥은 돌멩이를 힘껏 내던졌다. 내공을 잔뜩 머금은 듯 돌멩이는 빗살처럼 날아갔다.
“ 저 정도면....”
유설연은 말끝을 흐렸다.
단목승울을 향해 날아가던 돌멩이가 일 장 정도를 남겨둔 지점에서 가루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 내공 가미한 거 맞아?”
유설연은 미덥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 돌멩이가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내공을 주입했소.”
“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하겠지.”
“ 보통 무인이라면 대가리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는 될거요.”
“ 그렇겟지”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연우강과 단목승울이 얼마나 강자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군무옥 또한 약자가 아니고, 구림세가의 가주를 없앤 실력자다. 그런 그가 던진 돌멩이가 두 사람이 만등러 낸 역장에 막혀 가루로 변해버린 것이다. 대단한 실력들이 아닐 수 없엇다.
“ 술... 있소, 없소?”
“ 우강이 걱정은 안해?”
“ 걱정한다고 결과가 달라진다면 이 자리에 앉아 펑펑 울겟소.”
“ 흑랑기에서는 그랬어?”
“ 여자와 자는 것보다 더 익숙했던 게 죽음이었으니까.”
“ 우강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까 그때가 생각나는 모양이구나. 가마 안에 보면 상자 있을. 아니다. 밀사!”
유설연은 유덕을 불렀다.
“ 알겠습니다.”
유덕은 그제야 비로소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가마로 가서는 상자를 열어 술병 몇 개를 꺼내 가져왔다.
“ 이쪽으로 와라!”
유덕이 술병을 가져오자 군무옥은 앞이 잘 보이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러고는 사마윤 일행을 불렀다.
전장을 주시하고 있던 세 사람은 군무옥 곁으로 다가왔다.
“ 무인들은 참 편하게 써우는 것 같아.”
사마윤은 군무옥 앞으로 앉으며 말했다.
“ 그러게 말이야.”
군무옥은 피식 웃으며 술병을 건넸다.
네 사람은 술병을 하나씩 들고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 만일 말입니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 유덕이 전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왜?”
유설연이 말을 받았다.
“ 저자가 주화입마를 택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유덕은 단목승울을 가리켰다.
“ 주화입마?”
유설연은 시선을 돌려 단목승울을 보았다.
지금까지 그걸 잊고 있었다. 초식 대결은 한순간에 끝나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주화입마에 드는 경우는 거의 없ㄷ.
하지만 내공 대결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승부의 방향이 정해진다. 게다가 무인이라면 내공 대결에서 패배는 곧 패인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런 경우에 패하는 쪽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게 되는 데 그 승부수가 보통 주화입마이다.
단목승울 또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그러니까 단목승울이 주화입마를 택하면 우강이 견뎌낼 수 있을지 그걸 알고 싶다는 거냐?‘
유설연은 다시 물었다.
“ 네.”
유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영감!”
술을 마시던 군무옥은 유덕을 불렀다.
“ 왜 그러는가?”
“ 술 한잔하겠소?”
군무옥은 술병을 내밀었다.
“ 저자가 주화입마에 들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술이 들어가는가?”
“ 원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이 더 좋은 법이라고 했소.”
“ 여기서 먹고 죽은 귀신이 왜 나오는가?”
“ 저자가 주화입마에 들고, 대장이 감당하지 못하면 우리도 이렇게 될 거 아뇨.”
군무옥은 술병으로 목을 스윽 그었다.
“ 그래서 죽기 전에 술을 마셔둔다는 건가?”
“ 그래야 하지 않겠소?”
“ 일리가 있구먼.”
유덕은 술병을 받아 들었다.
“ 크억!”
바로 그때였다.
연우강과 단목승울이 있는 곳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유덕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곧 그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피를 토한 사람이 연우강이 아니라 단목승울이었던 것이다.
잠시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연우강과 단목승울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일 장으로 좁혀져 있었고, 연우강의 두 다리는 땅속으로 무릎 위쪽까지 파고들어가 있었다.
단목승울 또한 상황은 비슷했다. 아니 연우강보다 더 심했다.
그의 몸은 거의 허벅지까지 박혀들어 갔고, 허리는 약간 구부정하게 구부려져 있었다. 그 상태에서 양손을 번갈아 휘둘러 혈우를 쏘아대고 있는데 턱 아래로 검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이제.....”
유덕은 술을 마실 생각도 못하고 단목승울을 보았다.
지금 상태에서 단목승울이 선택할 것은 한가지밖에 없는 듯했다.
유덕의 예상대로 단목승울은 거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이젠 더 이상 놀랄 정신도 없었다. 금산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구림세가의 최강 무인은 은성황 이세연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그였다.
그래서 금산에 갇힌 백여 년동안 그 서열을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마림의 내공심법인 혈천수라결이 용황신공보다 더 뛰어난 무공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엔 해냈다.
이제 남은 건 구림세가 가솔들에게 밝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순위다툼에 연연하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어 버렸고, 살아남은 구림세가 가솔들이 너무 적었던 탓이다.
아니 세상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무공 자랑을 한다며 비웃음을 당할 것 같아 차마 말을 못했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는 은성황 이세연을 이겼다는 뿌듯함이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왔으니까 이제 다른 무인을 상대로 그 사실을 증명하면 될 터였다.
그런데 앞에 있는 연우강이 그 백여 년의 세월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초식, 내공, 실전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압도했다.
“ 난 이제 목숨을 걸고 혈천수라결이 최강 무공이란 사실을 증명할 참이다, 연우강!”
말을 하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엄청난 압력이 온몸을 강타했다.
“ 우엑!”
단목승울의 입이 쩍 벌어지고 역류한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단목승울은 미소를 지었다. 내기의 역류는 그가 바라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은 극한 상황에서만 나타는 잠재력을 끌어내게 만들고, 그 잠재력에 내기를 더해 주면 주화입마로 이어진다.
유덕의 예상대로 단목승울의 마지막 선택은 주화입마였다.
투두둑!
단목승울은 단전에서 뭔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머릿속으로만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흐르던 내기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단전을 통해 흘러나오던 내기는 역으로 흘러들어 갔고, 생명수라고 할 수 있는 선천지기를 이끌고 나왔다. 그것들은 곧 심장에서 뿜어낸 피처럼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번쩍!
단목승울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쏘아져 나왔다.
풀려 있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가고 금산을 나오면서 걸쳤던 비단 장포는 바람을 머금은 듯 잔뜩 부풀어올랐다. 그리고 아주 무거운 뭔가가 가슴속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열사의 사막을 걸을 때 느끼는 그런 갈증처럼 계속해서 가슴 속을 압박했다.
“ 크아아아!”
단목승울의 입에서 짐승의 포효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잠시잠깐 가슴속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목승울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허공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허벅지까지 파고들어 갔던 동체가 천천히 떠올랐다.
고오오오!
변화는 단목승울의 몸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역장 또한 급격하게 변했다 역장을 형성하고 있던 모든 힘이 연우강 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투두둑!
땅속에 박힌 커다란 바위가 폭풍에 밀려가는 것처럼 연우강의 동체는 깊은 골을 만들며 뒤로 밀렸다.
“ 공격해!”
술을 마시고 있던 군무옥은 벌떡 일어나 단목승울을 향해 내달렸다. 주화입마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초반에 잡지 못하면 연우강도 견딜 수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 차앗!”
“ 타아!”
“ 이얍!”
군무옥, 사마윤, 마장승, 백을상 네 명은 함성을 내지르며 단목승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쓰쓰쓰!
가장 먼저 마장승의 곤오신도가 불을 뿜었다.
그것은 구유잔백일천도의 마지막 초식인 일천지옥이었다. 무려 일천 개에 달하는 검은 점들이 광포한 기세를 머금은 채 단목승울을 향해 밀려갔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불을 뿜은 건 사마윤의 우주일만검결이었다. 그의 검에서 흘러나온 군마가 미친 듯이 질주하고 사마윤이 펼친 백무탈혼마검의 백무가, 군무옥이 펼친 광풍파랑십삼절의 파도가 폭풍처럼 밀려갔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여전히 천하 최강 무공이라고 평가받는 무공이 단목승울 왼편으로 작렬했다.
콰앙! 쾅쾅! 쾅쾅쾅!
커다란 폭음이 역장의 가장자리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단목승울과 연우강이 만든 역장은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는 듯했다.
“ 건방진 놈들!”
단목승울은 오른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에서 검붉은 운무가 흘러나와 역장을 뚫고 나아가더니 군무옥 일행을 덮쳤다.
놀랍게도 부지불식간에 펼친 단목승울의 무공은 혈천구마해의 칠해인 마운이었다.
“ 썅!”
“ 젠장!”
네 명은 다급하게 무기를 들어 올렸다.
콰콰쾅! 쾅쾅! 쾅쾅!
“ 크아악!”
“ 으악!”
“ 아악!”
“ 크윽!”
군무옥 일행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튕겨나갔다.
“ 우엑!”
“ 우욱!”
“ 으엑!”
삼 장여를 나가떨어진 네명은 일제히 피를 토했다.
“ 좃또!”
“ 씨팔!”
“ 개새끼!”
“ 한 번 해보자 이거지!”
대충 피를 닦아낸 군무옥 일행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역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네 명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유설연과 팔신장의 여섯 명이 함께 몸을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