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27화 (227/232)

제 4장 성공한 기녀

“ 헉! 헉헉! 헉!”

조천신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좌군도독부 무인들에게 쫓기기 시작한 건 이틀 전 화악곡에서 나온 후였다. 그가 화악곡에서 머물렀던, 아니 숨어 있었던 기간은 정확하게 오 일이었다.

구룡천군 무인들이 연우강에게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은밀하게 물러났다. 그리고 백여 장 떨어진 곳에서 싸움을 지켜보았다.

구룡천군의 전멸로 싸움이 끝나자 곧바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화악곡을 나가지 않았다. 묘봉산 곳곳에 금의위 위사 수천 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악곡을 나가지 않았던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구룡천군 백여 명을 혼자 없애 버린 연우강과 몇 배에 달한 금의위 위사들을 없앴던 동창의 특수부대.

그들이 있는 한 묘봉산에서 안전한 장소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장 큰 싸움이 있었던 화악곡이 가장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땅굴을 파고 그 안에 숨었다. 그런 다음 오 일 동안 꼼짝도 하지 않다가 주변이 잠잠해지는 듯하자 화악곡을 나왔다.

화악곡을 나와서도 조심했다.

주변을 살피고 또 살피며 금의위 위사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금의위 위사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인기척을 감지하고는 그곳으로 가다가 오군도독부 무장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무작정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오군도독부 무인들은 사방에 깔려 있었다.  다. 가을  그들을 피해 몸을 숨기고, 절벽을 오르고, 낭떠러지를 뛰어내리며 도망을 쳤다. 하지만 놈들도 집요했다.

모든 노력을 다해 몸을 숨겼는데도 그 흔적을 찾아 쫓아왔다.

“ 하지만 이젠.......”

조천신은 멀리 보이는 벌판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저곳은 다름 아닌 묘봉산의 동남쪽 장광평이다. 저 장광평을 지나면 묘봉산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장광평에서 이십 리가량 남족에는 금의위 안가가 있다. 거기까지만 가면 놈들을 따돌리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 이제......”

장광평에 들어서자 그는 신법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조천신도 알지 못했다. 그는 미친 듯이 발을 놀려 벌판을 벗어났다.

그가 장광평을 벗어나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연우강과 이철상이었다.

“ 점점 발전하는 것 같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처음 팔괘만상미혼대진을 펼칠 때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는데 이젠 중간에서 잘랐다가 이어 붙이기도 한다. 무공이 발전하는 것처럼 진식을 펼치는 기술도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 그러게 말입니다.”

이철상은 웃으면서 커다란 나무 막대기 하나를 땅바닥에 꽂았다.

스스스!

어디선가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특이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비로 팔괘만상미혼대진이 발진하면서 생성된 기운이었다.

“ 된 거냐?”

“ 들어가 보시든지요.”

이철상은 어깨를 으쓱했다.

“ 됐어, 인마. 그런데 안으로 들어간 놈들은 언제 나오지?”

“ 내일 저녁 무렵입니다. 나오는 장소가 여기가 될 테고요.”

“ 그럼 내일 오면 되는 거야?”

“ 네. 가보시게요?”

이철상은 조천신이 도망친 곳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없애야 할 놈이니까.”

“ 시간은 충분하니까 다녀오십시오.”

“ 그동안 수고했어.”

연우강은 이철상의 어깨를 툭 쳤다.

“ 수고는 무슨... 즐겁게 작업했는데요.”

이철상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여몽을 엮은 거야?”

“ 여몽이 그물입니까? 엮게. 다 제가 너무 멋지게 생긴 바람에......”

“ 그러니까 잘되고 있단 말이지?”

“ 잘되고 있는 게 아니라 잘됐습니다.”

“ 좋은 일이네. 아무튼 수고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곧 억새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 오빠!”

멀어지는 연우강을 바라보고 있는 이철상의 귀에 여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철상은 환하게 웃었다.

“ 어서 와요.”

잠시 후 여몽이 이철상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커다란 궤짝 하나를 들고 있었다.

“ 저녁 챙겨 온 거예요?”

“ 내일 저녁까지 다 챙겨 왔어요. 그런데 방금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던데?”

궤짝을 내려놓으며 여몽은 두리번거렸다.

“ 대장이에요.”

“ 몸은 나았대요?”

“ 전보다 더 강해졌으니까 나은 거겠죠?”

“ 더 강해져요?”

여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원래 대장은 주화입마를 겪고 나면 더 강해지는 체질이거든요.”

“ 그런 체질도 있어요?”

“ 대장만 그래요.”

“ 희한한 체질이네요.”

“ 그렇죠?”

“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어디로 간 거죠?”

“ 조천신을 쫓아갔어요.”

“ 그 자식이 나왔어요?”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는 그녀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요동쳤다.

“ 남쪽으로 갔어요.”

“ 남쪽이면 금의위 안가가 있는데 거기로 갔나 보네요?”

“ 그런 것 같아요.”

“ 그럼 지옥으로 갔네요.”

“ 지옥?”

“ 네, 우리 밥 먹어요.”

여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궤짝을 열고 음식을 꺼냈다.

“ 어떤 지옥이 있다는 거죠?”

“ 열심히 준비해 왔는데 배 안 고파요?”

여몽은 이철상을 흘겨보았다.

“ 아, 아니에요. 지금 아사 직전이에요.”

이철상은 황급히 젓가락을 쥐었다. 그러고는 여몽이 꺼내놓은 음식을 집어들었다.

“ 먼저 술부터 한잔해요.”

여몽은 빙긋 웃으며 꺼내 놓은 술잔에 술을 채웠다.

“ 좋죠.”

이철상은 술잔을 받아들었다.

“ 건배해요.”

“ 뭘 위해 건배하죠?”

“ 음....... 황홀한 밤을 위해.”

“ 황홀한 밤?”

“ 싫어요?”

“ 아닙니다. 기다리고 기다린 말입니다. 여 소저.”

이철상은 헤벌쭉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 위하여!”

“ 위하여!”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치며 활짝 웃었다.

“ 그런데 이 음식 여 소저가 한 건가요?”

술안주를 ㅤㅁㅓㄲ어보던 이철상이 물었다.

“ 어때요?”

“ 아주 맛있습니다.”

“ 그럼 혼인을 하게 되면 그곳에서 밥을 대 먹으면 되겠네요.”

“ 밥을 대먹어요?”

“ 사향의 향주 사향금 여몽이 밥을 할 줄 알거라고 생각진 않겠죠?”

“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죠?”

“ 방금 뭐요?”

“ 밥을 대 먹으면 되겠다는 말을 하기 전에....”

“ ‘혼인을 하면’이라고 했잖아요.”

“ 그, 그러니까 나와 혼인을 하겠단 말이에요?”

“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싫어요?”

“ 시, 싫기는 요. 제, 제가 가장 바라는 일입니다.”

“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 내 표정이 어때서요?”

“ 혼인 허락을 받았으면 먼저 입을 맞추고 그 다음엔 배꼽을 맞춰야 하는 거잖아요.”

“ 그, 그래도 돼요?”

“ 아무튼....”

여몽은 술잔을 휙 던지고는 허공섭물로 이철상을 끌어당겼다.

부욱!

이철상의 얼굴이 여몽의 가슴을 덮는 순간 옷이 뜯겨나가며 가슴이 불쑥 튀어나왔다.

“ 헉!”

짧은 비명과 함께 이철상은 여몽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잘하면서 내숭은......”

여몽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 잘 나가는 기녀는 돈 많고 명 짧은 늙은이의 첩이 되는 년을 말하고, 뛰어난 기녀는 돈 많고 젊은 놈의 첩실이 된 년을 말하고, 성공한 기녀는 미래가 보장된 젊은 놈을 치마폭으로 휘어잡는 년을 말한다. 너희들 모두가 성공한 기녀가 되길 바란다.

기녀로 머리를 올리기 전 총루주가 했던 말이었다.

“ 난 성공한 기녀야, 성공한 뇨자.”

여몽은 가슴에 얼굴을 박고 있는 이철상의 머리를 꽉 틀어쥐었다.

[ 그건 무슨 말이죠?]

머릿속으로 이철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방금 이철상이 보내온 전음은 입술을 달싹거리지 않고 의사를 전달하는 고절한 수법인 혜광심어였다.

혜광심어를 보낼 정도면 초극 고수라는 말이었다. 무공이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혜광심어까지 보내는 수준일 줄은 몰랐다.

젊고 잘 생기고, 무공 강하고, 천하제일인의 군사, 이철상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 이 여몽은 당신 소유라는 말이에요. 당신이 원하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하는 당신만의 여자요.”

[ 정말이에요?]

“ 그래요, 오빠!”

여몽의 목소리가 색감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

“ 이제......”

쫓아오는 사람도 없지만 조천신은 쉬지 않고 달렸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땀이 숨어 있었는지. 수십 번을 더 땀으로 목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흘러내렸다.

콰앙!

안가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요란하게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천신은 태연했다. 안가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가로 들어온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방으로 달려가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는 큰 대접에 물을 퍼서 곧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 우엑!”

꿀꺽꿀꺽 물을 마시던 조천신은 목을 틀어쥐었다.

물맛이 소태보다 더 짰다. 잔뜩 말라 있는 목에 소태보다 더 짠 소금물이 들어가자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급하게 다른 물을 찾았다.

물통에는 전부 물이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조천신은 물을 뜨지 못했다. 대신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폈다.

“ 그렇게 살필 필요 없다. 조천신.”

부엌 쪽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천신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살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금향의 두심향이었다.

조천신은 슬며시 좌우로 눈동자를 굴렸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서였다.

“ 도망칠 생각이면 꿈 깨는 게 나을 거야. 네놈이 마신 물에는 소금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 소금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고?”

“ 아마 독도 집어넣었을 거야.”

휙!

독이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천신은 부엌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콰앙!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오고 부엌 안쪽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그가 뚫고 나간 곳은 안가의 비밀 통로 중의 한 곳이었다. 원래는 기관 장치를 눌러 문을 열어야 하는데 너무 다급하여 부수고 나간 것이었다.

“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저승 가는 시간이 빨라질 뿐이다. 조천신.”

두심향은 뻥 뚫린 구멍을 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내 몸을 돌린 그녀는 장작이 가득 들어 있는 커다란 아궁이를 향해 지풍을 쏘았다. 삼매진화 기운이 실린 지풍이 마른 장작에 구멍을 뚫자 불길이 확 올랐다.

불은 금세 활활 타올랐다.

불길이 오르자, 아궁이에 걸린 거대한 솥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이미 물이 데워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오른편으로 가서 커다란 욕조를 가지고 왔다. 그녀가 목욕 준비를 하는 사이에 솥 안의 물은 부글부글 끓었다. 솥 안의 물을 욕조 안으로 집어넣고 찬물을 섞어 온도를 맞췄다.

“ 적당하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장미꽃을 곱게 빻은 가루를 집어넣었다. 부엌 안은 순식간에 장미향으로 들어찼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느려 터진 손길로 옷을 벗었다. 마치 누군가의 애를 태우려는 것처럼.

상의를 벗고, 하의를 벗고, 알몸이 된 그녀는 부엌문을 바라보며 똑바로 섰다.

“ 어때요?”

그녀는 나직하게 물었다.

“ 북경에 자주 올 것 같아요.”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걸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천신을 쫓아 이곳으로 온 연우강이었다.

연우강이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두심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정말이세요?”

“ 최고예요.”

빈말이 아니었다.

사십대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몸은 아름답다. 물론 나이의 흔적이 없지 않다. 그런데 그런 흔적들조차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이십대의 탄탄함과 사십대의 농염함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연우강은 두심향을 바라보면서 옷을 벗었다.

그가 철립을 벗고 장포를 벗고 옷에 걸친 옷을 벗는 동안 두심향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연우강이 알몸으로 변하자 활짝 웃었다.

“ 당신도요.”

두심향은 손을 내밀어 연우강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단지 손을 잡은 것뿐인데 온몸이 쩌릿쩌릿했다. 온몸에서 열이 오르며 숨이 거칠어진다. 두심향은 굳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상대 앞에 알몸으로 선다는 건 비밀 한 조각 없이 모든 것을 다 연다는 말과 같다. 불타는 감정을 이성으로 억누를 필요도 없고, 거친 숨결을 삭일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지금 상태 그대로 그에게 보여주면 될 테다.

연우강과 나눴던 뜨거웠던 광경을 떠올리자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 원앙음고가 배설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배설물은 곧바로 머릿속을 장악했고, 심장의 피를 데웠다. 뜨겁게 데워진 피는 엄청난 속도로 온몸 구석구석으로 흘러갔다.

입술이 마른 듯 그녀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원앙음양고 암컷이 활동을 시작하자 수컷도 덩달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수컷의 활동은 암컷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녀석은 엄청난 분량의 최음제 배설물을 쏟아냈다.

“ 음!”

연우강은 저도 모르게 두심향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 헉!”

두심향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돌려 연우강에게 등을 대고 기댔다. 그러자 연우강의 양손은 바쁘게 오갔다.

풍만한 가슴을 쓰다듬고 매끈한 아랫배를 쓸었다. 그의 손이 온몸을 누빌 때마다 두심향은 쉴새 없이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손 또한 쉬지 않았다. 연우강의 옆구리와 배 그리고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다.ㅏ

두 사람은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이었다.

두 사람의 손은 빠르게 또는 느리게, 깊게, 또는 얕게, 악기를 쓰다듬었다. 악기는 이미 완벽하게 조율이 된 상태였다.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충실하게 소리를 내주었다. 탄주를 빨리하면 고음의 소리를 연속적으로 내고, 깊게 탄주하면 깊은 소리를 낸다.

“ 크아악!” 은 모든 감각을 주변으로 풀어놓은 채 은밀하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자 두 사람은 악기 연주를 멈췄다.

“ 놈인가 봐요.”

연우강은 두심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그럴 거예요.”

두심향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욕조 안으로 들어갈까요?”

“ 그렇게 하고 싶어요?”

두심향은 뒤로 돌린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 조금 있다가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 저, 저도 그래요. 머릿속에 있는 원앙음양고가 발광하고 있어요. 만일 계속 참아야 한다면 전 미쳐버리고 말 거예요.”

“ 저도 그래요.”

“ 저는 가끔 인간을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 왜요?”

“ 가장 이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거든요.”

“ 어떤 면에서요?”

“ 사랑을 나누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거예요.”

“ 사랑을 나누는 측면?”

“ 네발로 걷는 짐승은 교미를 할 때 한 가지 자세밖에 나오지 않아요.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되죠. 하지만 인간은 달라요. 마주 볼 수도 있고,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도 있어요. 누워서도 가능하고 서서도 가능하죠. 그 말은 곧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해요.”

“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 호호호! 지금 기분을 조금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횡설수설한 거예요.”

두심향은 손을 위로 올려 연우강의 머리를 당겼다. 그러고는 얼굴을 옆으로 돌려 입을 맞췄다. 얼굴이 최대한 가까워지자 머릿속 원앙음양고들은 발작을 시작했다.

흥분이 극에 달해 소리가 코를 통해 흘러나오고 두 사람의 혀는 서로의 입 안을 헤집고 다녔다.

두 사람이 금의위 안가를 나선 건 다음 날 저녁 무렵이었다.

“ 땅속에 술을 묻어야 할까 봐요.”

“ 제가 북경으로 찾아가면 축배를 들게요?”

“ 네.”

“ 술이 익기도 전에 바닥나고 말 거예요.”

“ 그럼 또 담그면 되죠.”

“ 다음에 찾아갈 게요.”

“ 몸조심하세요.”

“ 걱정 마세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북쪽으로 아스라이 멀어졌다.

연우강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두심향은 몸을 날렸다. 그녀가 가는 곳은 북경 방향이었다.

연우강이 장광평에 도착한 것은 한 식경 후였다.

장광평에는 짐을 운반하는 짐마차 수백 대가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남색 무복을 걸친 동창 무인 천여 명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대인.”

연우강이 다가가자 동창 무인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자리를 텄다. 연우강은 그들 사이를 지나쳐 걸어갔다.

“ 크악!”

“ 아악!”

“ 으악!”

동창 무인들 진영 끝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연우강은 시선을 들었다.

진식의 출구에 동창 무인들은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금의위 위사들의 목을 치는 자들은 유설연이나 우성연이 아니라 다름 아닌 동창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줄을 맞춰 서 있다가 진식 안에서 금의위 위사나 오군도독부 무장들이 걸어나오면 곧바로 목을 치고 있었다.

‘ 영악한 자식.’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무방비 상태에 있는 금의위 위사들과 오군도독부 무장들을 없애는 일은 자칫 잘못하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유설연은 그 일을 북경에 상주하고 있는 동창 무인들에게 맡겨 버린 것이었다.

비밀리에 이루어진 전쟁이라 북경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며칠 후에는 이 모든 사실이 알려질 테고, 북경은 발칵 뒤집힐 게 분명했다. 그동안 금의위나 오군도독부의 권력에 의존했던 자들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고, 범인으로 동창을 지목할 것이다.

어쩌면 금의위와 오군도독부를 전멸시키는 것보다 그 전쟁이 더 힘들지도 모른다. 특히 병부와의 전쟁은 치열할 게 분명하다.

그 전쟁을 치러야 할 자는 유설연이다.

유설연은 그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동창 무인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저들에게 금의위와 오군도독부 잔당의 목을 치게 하는 것도 또한 같은 맥락에서다.

동창 무인들은 지금까지는 방관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금의위 위사나 오군도독부 무장의 목을 치는 순간 이해 당사자가 되고, 유설연을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다. 이제 저들은 유설연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동창의 독주를 견제하려고 하는 또 다른 권력자들과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연우강은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잠룡 십 조 대원들과 묘봉산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연락을 도맡아 했던 사향의 향녀들이 앉아 있었다.

“ 어서 와요!”

“ 어서 오세요.”

“ 어서 와요!”

연우강이 가까이 오자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맞았다.

“ 수고 많았어요.”

연우강은 수여설과 남궁운화를 보며 말했다.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처음 대야벌로 들어갔을 때 들었던 대화공황증이란 말 때문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는, 어떻게 들으면 건방진 말투였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연스레 관심이 갔고, 오년이 지난 지금 잠을 자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그는 처음 만난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늘 한결같은 사람, 그는 그런 삼이었다.

“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 그 후엔 어떻게 할거죠?”

“ 이렇게 할 거예요.”

연우강은 달려가는 것처럼 양손을 빠르게 앞뒤로 휘둘렀다.

“ 빨리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 도망칠 때도 이렇게 하잖아요.”

“ 도망치고 싶어요?”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누구로부터?”

“ 세상으로부터요.”

“ 도망쳐서 뭐할 건데요?”

“ 황금백수가 돼야죠.”

“ 아직도 그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 저의 영원한 꿈인 걸요.”

“ 꿈이란 좋은 거죠.”

수여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 그 웃음의 의미는?”

“ 아무 의미도 없어요, 다만....”

“ 다만?”

“ 연 공자는 참 간도 크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에요.”

“ 가, 간이 크다고요?”

“ 어떤 사람들은 간이 크다는 말을 간이 배밖으로 나왔다고 표현하기도 해요. 때로는 겁을 상실했다는 말로 쓰기도 하고요.”

“ 내, 내가 겁을 상실했다고요?”

“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 크악!”

“ 아악!”

“ 으악!”

“ 억!”

“ 헉!”

처절한 비명에 이어 깜짝 놀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렸다

“ 난 좌군도독부 도독 제승기다!”

동창 무인들이 신음을 내지른 이유였다. 오군도독부 무장들을 없애고 있는데 느닷없이 좌군도독부 도독 제승기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유설연을 발견한 제승기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보는 대로야.”

유설연은 시체를 가리켰다.

“ 설마...”

제승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눈앞에 있는 시체들뿐만이 아니라 주변이 온통 혈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맞아. 제승기. 우린 지금 살육의 향연을 벌이고 있어. 오군도둑부 도독들은 물론이고 공오인까지 전부 죽었어. 이제 너만 죽으면 북경엔 우리 동창만 남게돼.”

유설연은 개작두 날을 들어올렸다.

“ 동창이 아니라 너겠지.”

“ 내가 바로 동창이야.”

유설연은 차갑게 말하며 개작두를 휘둘렀다.

스악!

“ 크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잘려 나간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제승기의 목을 단칼에 쳐버리자 작업 속도는 빨라졌다. 그 후로도 고위급 인사가 몇 명 나왔지만 동창 무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작업이 끝난 건 삼경 무렵이었다.

죽은 자가 몇 명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모든 마차에 시체가 실리자 동창 무인들은 옷을 바꿔 입고는 마차를 몰고 장광평을 떠났다.

“ 교랑!”

연우강은 이철상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 목적지는 알아?”

“ 알고 있습니다.”

“ 그곳에 가서 대기해.”

“ 알겠습니다.”

이철상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인사를 마친 잠룡대 대원들은 걸음을 옮겼다.

“ 연 공자는 어디로 갈 거죠?”

수여설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 개봉에 들렀다가 갈게요.”

“ 개봉이면 구룡천문?”

“ 네.”

“ 혼자 가도 되겠어요?”

“ 혼자가 아니에요.”

“ 군 공자 일행과 함께 갈 건가요?”

“ 이 얼굴도 있고, 이 얼굴도 있고, 이 얼굴도 있잖아요.”

연우강의 얼굴이 요료대사, 창천진인, 자하검신의 얼굴로 계속 바뀌었다.

“ 함께 가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네요.”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요.”

“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 그렇게 하세요.”

[ 남궁 가주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세요. 가주 자리도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 알았어요.]

“ 좀 걸을래요?”

남궁운화 옆으로 간 연우강은 손을 살며시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 보, 보잖아요.”

연우강이 손을 잡자 남궁운화는 잔뜩 움츠린 채로 주변을 살폈다.

“ 내가 손 잡는 게 싫어요?”

“ 무슨 소리에요?”

남궁운화는 화들짝 놀라며 연우강의 손을 꽉 틀어쥐었다.

“ 그런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요.”

“ 그건.......”

“ 고마워요.”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며 말했다.

“ 뭐가요?”

“ 날 위해 여기까지 와주었잖아요.”

“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고맙다고 말하면 섭섭해요.”

남궁운화는 서운하다는 듯이 연우강을 보았다.

“ 내가 잘못한 건가요?”

“ 연 공자는 만일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오지 않을 건가요?”

“ 가야죠.”

“ 저도 그렇게 했을 뿐이에요.”

“ 하지만 내가 달려가면 남궁 소저는 고맙다고 할 거잖아요. 그래서 나도 고맙다고 한 거예요.”

“ 이젠 고맙단 말 안 하기로 했어요.”

“ 고맙단 말을 자주 하면 거리감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 네.”

“ 그래도 하는 게 좋아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 정말 그럴까요?”

“ 난 그렇게 생각해요.”

“ 그럼 고맙단 말을 해야겠네요?”

“ 그게 나을 것 같아요.”

“ 알았어요. 그럼 감사하다는 말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게요.”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 그럼 동정호에서 봐요.”

연우강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이번에도 파릉전어석 사줄 거죠?”

“ 일 끝내고요.”

“ 그럼 동정호에서 봐요.”

남궁운화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연우강은 허공을 밟으며 나아갔다.

[ 수고했어.]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데 유설연의 전음이 들려왔다.

[ 지금부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북경의 모습이 달라질 거야. 잘해.]

[ 중원에서 가장 멋진 도시로 만들어 놓을 테니까 걱정 마라, 그리고 자주 들러.]

[ 북경에 뭘 볼 게 있다고 자주 들르냐, 난 일 끝나면 바로 튈 거야.]

[ 나 말고 두심향과 봉연을 보런 오란 말이야, 자식아.]

[ 두 루주하고 봉연?]

[ 정확하게는 봉연이야. 두 루주는 덤이고.]

[ 봉연이 왜?]

[ 한 달 동안 함께 살기로 약속했다며?]

[ 그것도 말하데?]

[ 한 달 휴가를 신청하더라. 그래서 다그쳤더니 너와 한 달 동안 살기로 했다고 하더라.]

[ 그래서 준거야?]

[ 앞으로가 더 바쁜데 어떻게 휴가를 줘!]

[ 그럼 바쁘다고 하고, 휴가는 나중에 준다고 하면 되잖아.]

[ 나도 약속을 했어.]

[ 무슨 약속을 했는데?]

[ 널 유혹하는 데 성공하면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단 말이야.]

[ 그런 약속을 왜 했는데?]

[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하는 애라서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여겼거든. 물론 너도 믿었고.]

[ 날 믿어?]

[ 아무 년에게 막 주는 그런 놈인지 몰랐다는 거야!]

[ 난 총각이야, 자식아!]

[ 아무튼 한 달 휴가를 원했어.]

[ 걔 너무 소심한 거 아냐?]

[ 그만큼 너와 자고싶다는 거겠지. 아무튼 그 녀석에게 휴가를 줄 수는 없고......일 끝나면 할 일도 없는데 네가 오는 수밖에 없겠더라.]

[ 와서 한달 동안 놀다가 가라고?]

[ 금향 근처에다가 근사한 집 한 채 구해 놓을게.]

[ 금향 근처에?]

[ 응!]

[ 생각 좀 해보고.]

[ 생각은 무슨 생각, 자식아, 잔말 말고 와.]

[ 일 끝난 다음에 생각해 보자.]

연우강은 강하게 허공을 찼다. 그의 신형이 금세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온대요?]

멀어지는 연우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봉연의 전음이 들려왔다.

[ 두심향에게 가서 배워.]

[ 뭘 배우라는 거죠?]

[ 사내 죽이는 기술 배우란 말이야. 이것아.]

[ 그것 때문에 안 온대요?]

[ 올 거야.]

[ 근데 사내 죽이는 기술을 왜 배워요?]

[ 한 달 아니라 적어도 육 개월 이상은 그 녀석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 이것아!]

[ 그러니까 절 위해서가 아니라 소제독을 위해서 그가 필요하다는 거네요?]

[ 낮에만 쓰고 밤엔 널 주면 되잖아.]

[ 그런데 육 개월을 붙잡아 둘 명분이 없다 이거죠?]

[ 맞아. 그러니까 두심향에게 가서 그 녀석을 죽이는 기술을 배워.]

[ 그는 전문간데 죽일 수 있을까요?]

[ 황제는 그 녀석보다 더 전문가야. 그런데도 수시로 죽어넘어갔어.]

[ 저도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 너 하기 나름이란 거야. 아무튼 내일부터 금향으로 출근해.]

[ 그런데 두심향이 절 싫어하지 않을까요?]

[ 우강이 녀석 북경행을 너보다 더 반길 사람이 두심향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알았어요. 내일부터 금향으로 출근하도록 할게요.]

봉연은 환하게 웃었다.

한 달이 아니라 육 개월을 함께 살게 해 주겠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전부 실었습니다. 소제독.”

동창 무인 한 명이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 남은 시체는?”

유설연은 사내의 머리를 보며 물었다.

“ 이천여 구 정도 남았는데 오늘 밤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새벽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하는데, 되겠어?”

“ 끝낼 수 있습니다. 소제독”

“ 좋아, 출발해.”

“ 알겠습니다.”

동창 무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마차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잠시 후,

“ 출발하라!”

“ 출발하라!”

우렁찬 외침과 함께 시체를 실은 수백 대의 마차가 동쪽으로 향했다.

‘ 이제 북경은 내 거다.’

유설연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 하하하하! 호호호호호! 프! 하하하! 호호호호!”

약간 묵직하면서도 우렁찬 웃음과 여자처럼 간드러진 웃음이 뒤섞인 포효가 유설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유설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켜 웃음을 터뜨렸다.

휙!

웃음을 그친 그는 가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 가자, 밀사.”

“ 모시겠습니다. 제독.”

유덕은 우렁차게 말하며 몸을 날렸다.

유설연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특이한 웃음을 토해내는 그 시각, 비통한 얼굴로 고함을 내지른 자가 있었다. 앞에 서 있는 노인을 보며 고함을 내지른 이자는 구림세가의 가주 이연이었다.

“ 이게 증조부께서 제게 주신 선물입니까?”

이연은 자기 단전을 가리키며 고함을 내질렀다.

“ 내가 금산으로 들어간 이유를 아느냐?”

이세연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 구림세가의 수좌 가문인 은림세가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 아니다. 은림 세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하면 왜 들어가신 겁니까?”

“ 내가 금산으로 들어간 것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내 가족이 주원장에게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 저도 증조부님만큼이나 내 가족을 사랑합니다. 아니 증조부님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 그런 놈이 딸을 귀신에게 시집을 보냈단 말이더냐?”

“ 그건 묘아도 원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싫다고 했으면 설사 제 목이 달아난다고 해도 시집을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 닥치거라! 놈! 그 아이가 정녕 귀신에게 시집가는 걸 바랐던 말이더냐. 설사 그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아비라면 말렸어야지. 기다렸다는 듯 덜컥 시집을 보낸 놈이 정상적인 아비라고 하더냐. 네놈은 아비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인간도 아니다! 성질 같아서는 목을 부러뜨려 버리고 싶지만, 그 아이가 울까 봐서 그냥 가겠다. 다시는 권력에 눈독 들이지 마라. 지금 네놈 집안에는 무공을 익힌 놈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만일 또다시 무공을 익힌 자들을 집안으로 들이면 그땐 그 아이 눈에서 눈물을 보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의 목을 칠 것이야. 내 말 명심하거라!”

이세연은 이연을 차갑게 쏘아보딘 몸을 돌렸다.

“ 난 최선을 다했습니다. 구림세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단 말입니다.”

“ 아니다. 넌 구림세가가 아니라 널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널 위해 파혼을 하지 않았고, 널 위해 딸을 귀신에게 시집보냈을 뿐이다. 그 모든 일은 전부 널 위해서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내실에서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자승이었다.

이자승 옆에는 이지약이 서 있었다.

“ 아, 아버지.”

하지만 이자승은 이연을 보지 않았다. 그는 문 앞에 있는 이세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처음 뵙겠습니다.”

시선이 부딪치자 이자승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그만두거라. 내가 무슨 면목으로 네 절을 받겠느냐. 오히려 절은 내가 올려야지. 훌륭하게 자라줘서 정말 고맙구나!”

“ 그럼 뭐하겠습니까, 자식을 저 모양으로 키웠는데요.”

“ 원래 사내자시들은 죽기 직전에 철이 든다고 하지 않더냐. 난 그만 가보련다.”

“ 여기가 할아버지 집입니다.”

“ 여긴 너의 집이다. 자승아.”

휙!

바끙로 나간 이세연은 어둠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조부님!”

이자승은 밖으로 뛰어나가며 이세연을 불렀다.

“ 금산으로 가시는 거예요.”

뒤따라 나온 이지약이 나직하게 말했다.

“ 우강이 그 녀석이 금산으로 보낸 게냐?”

“ 네.”

“ 매정한 녀석.”

“ 목숨을 살려준 것만 해도 고맙게 여겨야지요. 고조부님과 함께 나왔던 다른 분들은 전부 죽었으니까요. 그리고 자주 찾아뵈면 되잖아요.”

“ 아무래도 그래야겠구나. 들어가자.”

“ 전 가야 해요.”

“ 어디로 갈 참이냐?”

“ 발길이 닿는 대로요.”

“ 돌아올 생각은 없느냐?”

“ 여긴 제 집이 아니잖아요.”

“ 묘아야!”

“ 여기보단 밖이 더 좋아요. 할아버지. 밖에는......”

이지약 또한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 자유가 있으니까요.’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녀는 허공답보 신법을 펼쳐 빠르게 날아갔다. 곧 그녀의 신형이 모습을 감췄다.

“ 휴~우!”

이자승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어둠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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