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28화 (228/232)

제 5장 배신의 씨앗

일파만파.

아니 그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북경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사건은 북경 전역은 물론이고 전국의 모든 관리들의 얼굴을 창백하게 질리게 만들었다. 금의위 영반 공오인을 비롯한 삼사 사주와 사주 휘하 위사 오천 명. 오군도독부 다섯 도독을 비롯한 오군도독부 휘하 무장들의 시체가 북경 전역에서 발견된 사건은 수십 만 명의 달탄군이 장성을 넘었다는 소식보다 더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소식을 접한 모든 관리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일손을 놓았다.

오군도독부 다섯 도독과 금의위 영반은 북경의 삼대 핵심 권력 기관 중 두 기관의 장이었다.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닌 자라고 해도 그들을 전부 없앤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그들 중 한 곳을 뿌리 뽑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두 곳이 뿌리까지 뽑힌 채 북경 전역에 흩어졌다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수천 구가 넘는 그들의 시체를 치울 인력이 없어 며칠 동안 방치됐다는 사실이다.

설사 제국이 멸망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북경에서 수천 명이 죽어갔는데도 손을 쓰지 못한 상황이라면 지방은 말할 나위가 없다고 생각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방 관리들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충격은 이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바로 개봉에서 구룡천문 개파를 준비 중이던 남경왕 주진무였다.

콰앙!

“ 도대체 말이 되는가?”

주진무는 탁자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앞에는 개방의 전대 방주인 몽취개 우중선과 전전대 방주인 취선개 목충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묘봉산에 대한 정보 부족 때문이었다.

구파일방 중 최고 정보력을 가졌다는 그들이지만 북경에 대한 정보는 거의 얻지를 못했다. 잘 들어오던 정보가 어느 순간, 흐르던 강물이 막힌 것처럼 뚝 끊겨 버린 것이었다.

“ 북경에서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던 측은 금의위 금밀사였습니다.”

우중선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전국에서 개방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유일한 곳이 북경이다. 물론 북경에도 거지는 많다. 하지만 북경 거지들은 단체에 가입하는 걸 싫어했고, 강제적으로 가입을 시키려고 해도 관부와 선이 닿아 있는 자들이 많아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한다. 당연 분타를 내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따라서 정보 또한 다른 단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단체가 바로 금의위 금밀사였다.

그런데 그 금밀사가 전멸을 당해 버린 것이다.

정보가 들어올 리가 만무한 상황이었다.

“ 그럼 소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 소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우중선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가 전혀 알 수 없다고 했던 묘봉산으로 간 요료대사 일행의 생사지 북경 상황은 아니었다.

“ 사실이라면?”

“ 북경에 있던 금의위와 오군도독부는 전멸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금의위에 정보를 제공했던 자들이 색출 당해 죽임을 당하고 있답니다.”

북경에서 탈출한 자들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탈출한 자들은 금의위 소속도 아니었다. 금밀사 소속 위사들에게 작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푼돈을 얻어 쓰던 그런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하찮은 자들까지 전부 죽임을 당하는 곳이 현 북경 상황이었다.

“ 동찬 짓인가?”

“ 그렇습니다. 동창의 모든 조직원이 나서서 북경 전역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 황실 상황은 어떻다고 하던가?”

“ 그들 또한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 지켜보고만 있단 말인가?”

“ 몸을 사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 빌어먹을! 그럼 북경에 남은 곳은 구림세가밖에 없다는 결론인데..... 그들과 연락은 해봤는가?”

“ 구림세가도 이상합니다.”

“ 이상하다니 그건 무슨 소린가?”

“ 다른 때 같았으면 연락이 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습니다.”

“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닌가?”

“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중선은 말끝을 흐렸다.

“ 이건 답답해서 원.”

주진무는 옆에 놓인 찻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구룡천문이 가진 힘의 원천은 구파일방의 무력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북경의 권력이다.

그런데 그 권력이 하루아침에 깡그리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니 사라졌는지, 아직 남아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 아무래도 내가 직접 북경에 다녀와야겠네.”

“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군주.”

우중선은 남경왕의 북경행을 반대했다.

“ 난 남경왕이네. 내게 검을 들이댈 배짱이 있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네.”

“ 우리 구룡천문의 기둥은 군주이ㅤㅅㅣㅄ니다. 군주가 없는 구룡천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디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 황제를 만나서 어명을 받아 와야만 구룡천문 개파대전을 치를 수 있네. 지금 상태론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네. 몽취개,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녀올 생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 그럼 저희 개방에서....”

“ 소문을 내고 싶은 겐가?”

“ 혼자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그건 절대 안 됩니다.”

“ 아니네, 난 가지 않을 거네. 온신!”

주진무는 안쪽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주진무와 비슷한 체격의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사내는 복면을 눌러쓰고 있었다.

“ 복면을 벗어라.”

“ 알겠습니다.”

사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복면을 벗었다.

“ 억?”

“ 허!”

우중선과 목충은 깜짝 놀랐다. 복면을 벗자 주진무와 똑같은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 과거에도 간혹 내 대역을 했던 친구네.”

“ 그럼 저 분을 이곳에 두고?”

“ 난 이곳에 계속 있으면서 북경에 가서 일을 보고 올 생각이네. 그래도 안 되겠는가?”

“ 그렇게 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중선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지금부터는 온신이 남경왕 주진무네. 잘 모시도록 하게.”

주진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온신이 나왔던 곳으로 들어갔다.

“ 그럼 저희들도 물러가 보겠습니다.”

“ 그렇게 하게.”

온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전 주진무가 앉아 있던 자리로 가 앉았다.

온신을 바라보던 우중선의 얼굴에 빙글레 미소가 맺혔다. 온신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가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목충과 우중선은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온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내실에서는 주진무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별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게야.”

“ 두 분께 알렸으니까 별다른 문제가 없을 줄 압니다.”

“ 그래야지. 가지고 따라오너라.”

주진무는 탁자 위에 둔 방갓을 가리키며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침대는 출입문에서 보면 왼편으로 치우쳐 있었는데, 바닥에 작은 줄이 늘어져 있었다.

주진무는 그 줄을 가볍게 당겼다.

덜컹!

나직한 소리와 함께 침대 오른편 바닥이 푹 꺼지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곳은 외부로 빠져나가는 비밀통로의 입구였다.

비밀 통로가 이어진 곳은 총단 근처에 있는 관제묘였다. 일 장에 달하는 관우운장 장이 세워진 관제묘는 낮이면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지만 밤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비밀통로로 쓰기엔 제격이었다.

계ㅤㄷㅑㄴ을 내려가는 두 사람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통로의 거리는 이백 장 가량이었다.

어둠을 뚫고 걸어간 주진무는 마침내 출구에 당도했다. 그는 그곳에서 천라지청술을 펼쳐 외부를 살폈다. 관제묘에서 밤을 새는 자들이 간혹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밤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당겼다.

두 사람은 비밀통로를 나와 관제묘로 들어갔다.

“ 다오.”

주진무는 손을 내밀었다.

온신은 들고 왔던 방갓을 내밀었다.

“ 문은 잠그지 말거라.”

“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관제묘 입구까지 따라나온 온신은 빠르게 몸을 날려 가는 주진무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주진무의 모습이 사라지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않아 그 자리에 멈췄다.

그의 의지가 아니라 미지의 힘이 그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 헉!’

온신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발이 움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입조차 벌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마혈을 점혈당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눈동자가 유일했다.

그는 눈동자를 좌우로 돌렸다.

[ 오랫동안 북경 생활을 한 자들의 특징이 뭔지 알아?]

느닷없이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목소리로 짐작컨대 상당히 젊은 자였다.

[ 절대 침실을 높은 곳에 만들지 않는다는 거야. 왜냐면 이 층이나 삼 층에 꾸미게 되면 비밀 통로를 만들 수 없거든.]

온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경왕이 일 층에 침실을 만들 때도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 그걸 역으로 생각하면, 북경에서 오래 생활했고, 일 층에 침실을 꾸미는 자들은 반드시 비밀 통로를 만든다는 거지. 그래서 구룡천문 총단 근처를 세세히 살폈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비밀리에 오갈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어디 있을까 하고 조사를 해봤더니 딱 여기였단 말이지. 그런데 주진무가 비밀 통로를 통해 나올 걸 어떻게 알고 기다렸냐고?]

온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남경왕의 수족이었던 금의위가 전멸하고, 요료대사를 비롯한 구룡천군에게서는 연락도 없고, 사돈 집안인 구림세가에서마저도 연락이 없으면, 직접 가는 수밖에 없거든. 하지만 공개적으로 북경으로 갈 수는 없어. 만일 금의위가 몰락했다는 소식에 허둥지둥 북경으로 가면 구룡천무에 가입하려고 했던 자들은 관망세로 돌아설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구룡천문의 창설은 꿈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으니까. 아무튼 그는 비밀리에 북경으로 가야 하고 이곳에는 대역을 남겨둘 수밖에 없지. 바로 온신 너 같은 사람 말이야.]

휙!

바람 소리와 더불어 검은 옷을 걸친 자가 온신 앞으로 날아 내렸다.

‘ 연우강.’

온신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검은 철립, 검은 장포, 검은 궤짝을 걸머진 자.

그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연우강이었다.

“ 일단 들어가자고.”

연우강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온신 또한 둥실 떠올라 연우강을 따랐다.

안으로 들어간 연우강은 문을 닫고 온신을 내려놓았다.

“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을까?”

우르릉!

지반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관제묘로 나가는 출구가 허물어졌다.

온신은 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그가 걷는 뒤쪽 통로는 계속해서 무너졌다.

“ 개방의 몽취개 우중선과 취선개 목충은 제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 그거면 됐어.”

슉!

연우강의 허리춤에서 푸른 광채가 쏘아졌다. 그 광채는 곧바로 온신의 단전으로 파고들어 갔다.

“ 커억!”

푸스스!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온신은 가루가 돼 흩어졌다. 뇌섬에 실은 혈잔수의 기운이 온신의 몸을 훑고 지나간 것이었다.

우르릉!

또다시 동굴을 무너뜨려 가루로 변한 온신을 묻어 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계단 앞에 도착한 그는 사망궤를 내려놓고 철립을 넣었다. 그런 다음 환영축골공으로 얼굴과 체형을 바꿨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주진무의 키가 작은 바람에 장포가 바닥에 끌릴 정도가 돼버린 것이었다. 그는 사망월반을 풀고 사망묵의의 허리춤을 접어 올렸다. 그리고 사망월반을 둘러 고정했다.

“ 적당하게 불은 허리 살로 보이겠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옷장을 뒤져 짙은 보라색 옷을 걸쳤다.

그의 말대로 접어 오릴ㄴ 다음 사망월반을 채운 허리는 노인의 나잇살처럼 보였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그는 곧 집무실로 나갔다.

우선은 주진무의 근무 공간을 파악해 놓을 참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살핀 것은 구룡천문의 설계도였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듯 집무실 한편에는 수십 장의 설계도가 쌓여 있었다.

설계도를 살피던 연우강은 세 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주 제자리로 가져다 두었다. 그가 남긴 것들은 구룡천군 무인들이 기거하는 구룡가, 구룡루, 구룡거, 세 건물의 설계도들이었다.

“ 재미있네.”

설계도를 바라보는 연우강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구룡천군 무인들이 기거하는 구룡각, 구룡루, 구룡거는 삼각형을 이루며 서 있는데, 세 건물의 지하에는 커다란 연무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연무장은 직경 이십 장가량의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고 출구는 세 건물 지하에 있었다. 아마도 황실에서 만든 무기들을 보관할 장도로 만든 곳인 듯했다.

“ 그것들을 이용하면 그림이 나올 듯 한데......”

“ 차 가져왔어요.”

설계도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오른편 옆으로 찻잔이 놓였다.

“ 고마.....”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연우강의 고개가 오른편으로 돌아갔다. 문득 목소리가 귀에 익었던 것이다.

“ .......!”

그는 멍한 눈으로 차를 내려놓은 사람을 보았다. 놀랍게도 빙그레 웃고 있는 사람은 이지약이었다.

“ 오랜만에 봬요. 아버님.”

이지약은 연우강을 빤히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 그,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네가 어쩐 일이냐?”

연우강은 모른 척했다.

“ 묘봉산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실 것 같아서 들렸어요.”

“ 네가 그곳 소식을 안단 말이냐?”

“ 네 아버님! 그런데 여긴 욕실 없어요?”

“ 욕실은 저기 어디......”

여눙강이 욕실이 어디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 욕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나 보죠. 여기서 수기가 느껴지네요.”

이지약은 장식장 옆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녀의 말처럼 그곳은 욕실이었다.

“ 전 목욕을 하고 싶어요. 아버님.”

“ 마, 마음대로 하려무나.”

연우강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 며느리가 시아버지 앞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하인들이 보면 큰일나겠죠?”

“ 그럴 게다.”

“ 그럴 땐 보통 하인을 불러서 ‘지금부터 취침할 것이니라.’하고 이르지요. 그럼 일어날 때까지 아무도 접근하지 않아요.”

이지약은 욕조 안에 손을 집어넣고 삼매진화로 물을 데우며 말했다.

“ 여봐라!”

연우강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 부르셨습니까?”

“ 지금부터 취침할 것이니라!”

“ 알겠사옵니다. 저하.”

“ 그래 묘봉산 일은 어떻게 됐느냐?”

“ 전부 죽었어요. 요료대사, 창천진인, 자하검신을 비롯한 소림사, 무당파, 화산파 전대 무인들은 연 공자의 일초를 받아내지 못했어요. 하긴 그들 실력으로 주화입마에 들어 이십 갑자 이상의 공력을 쏟아내는 연 공자의 무공을 받아낸다는 건 무리죠.”

이지약은 문을 열어둔 채로 옷을 벗었다. 불빛 아래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 저, 전부 죽었단 말이냐?”

“ 그래요. 그런데 주화입마에 든 연 공자는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 어, 어떻게 됐느냐?”

“ 동창의 자밀원 원주에게 운우지정공을 전수해 주고는 음양교합을 통해 몸을 치료했어요. 그런데 자밀원 원주가 운우지정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완벽하게 치료를 하지 못했대요.”

“ 훔쳐 보는 건 좋지 않은 취미에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른 여자는 연 공자에게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어요.”

이지약은 몸을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은 숨이 턱 막혔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의 알몸은 볼 때마다 숨이 막히게 한다.

충격을 받자 내공 흐름이 깨지면서 환영축골공이 저절로 풀렸다.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얼굴과 체형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 제가 벗겨 드릴게요.”

이지약은 연우강 앞으로 다가가서는 그의 옷을 벗겼다.

그녀를 바라보는 연우강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러고는 마침내 이지약이 속옷까지 벗겨내자 참지 못하고 그녀를 안았다.

이지약 또한 다르지 않았다. 연우강이 끌어당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안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쓰다듬었다.

사막에서 천지를 찾아 헤매는 목마른 여행자처럼 그녀는 연우강을 탐했다. 그녀의 입술은 연우강의 온몸을 탐험하듯 훑고 다녔다. 때로는 당과를 먹듯, 때로 과일을 먹듯, 때로는 시원한 물을 들이켜듯 그렇게 연우강을 들이마셨다.

목마른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연우강 또한 이지약의 몸 곳곳에 화인을 남겼다. 그의 입술이 불꽃을 피워 올릴 때마다 이지약은 뜨겁게 반응하며 신음과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다. 그런 다음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 제몸 치료해 주기로 했던 것 아니에요?”

연우강은 이지약의 등을 밀어주며 물었다.

이지약의 말처럼 연우강의 몸은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봉연이 운우지정공으로 치료를 했다고 하지만 그녀의 내공으로는 완벽한 치료를 할 수가 없었다. 단기간에 치료가 가능한 사람은 함께 운우지정공을 익혔던 남궁운화와 양극불사신공을 익히고 있는 이지약 두 사람뿐이다. 하지만 수여설 때문에 남궁운화에게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 것이기에 그냥 이곳으로 왔는데 이지약이 알아차린 것이었다.

“ 깜빡 했어요.”

이지약은 배시시 웃었다.

“ 어떻게 하나같이 자기네들 욕심만 채우고.”

연우강은 이지약을 흘겨보았다

“ 원래 내 배가 불러야 남을 돌아보게 되는 거라고요.”

“ 이 소저 배를 부르게 해주는 사람이 바로 납니다. 나라고요.”

“ 오늘 밤도 있고, 내일 밤도 있고, 모레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세요.”

“ 그러다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요?”

“ 그럼 제가 귀신에게 시집간 이유가 밝혀지는 거죠.”

“ 이 소저가 남경왕부의 며느리가 된 건 시아버지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난다는 거예요?”

“ 만일 누군가가 어젯밤 우리가 지른 괴성을 들었다면 조만간 남경왕은 며느리를 범한 파렴치한이 되겠죠.”

“ 들었을까요?”

연우강은 정색하며 물었다.

“ 걱정돼요?”

“ 이 소저가 걱정돼서 그렇죠.”

“ 전 상관없어요.”

“ 많은 사람들이 이 소저를 향해 손가락질할 거예요.”

“ 연 공자는 어때요?”

“ 저야 손가락질 할 이유가 없잖아요.”

“ 부모님은 어떻게 하고요.”

“ 정상적인 경로로는 집으로 갈 수 없게 됐으니까 오히려 잘된 거죠.”

“ 독립하겠다는 뜻인가요?”

“ 연 공자 말처럼 전국의 명산으로 돌을 보러 다닐 참이에요.”

“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 이곳에 남경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있어요?”

“ 두 명이 있는데 그들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 게요.”

“ 지금 업무 시간이에요?”

“ 아직 시간이 좀 있을 거예요.”

“ 다행이네요.”

활짝 웃은 이지약은 몸을 일으켜 연우강 허벅지 위로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 빌어먹을 놈!”

우중선은 얼굴을 찌푸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남경왕 주진무가 자리를 비웠는데 남진무사 이대진이 중요한 일이라며 찾아온 것이었다. 구룡천문 일을 총괄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무슨 일인지 말을 하면 보고를 해주겠다고 했지만 이대진은 남경왕을 직접 만나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위직급 같으면 호통을 쳤겠지만, 이대진은 남진무사.

공오인이 죽은 지금 금의위 최고 직급이라 할 수 있다.

금의위가 와해된 곳은 북경에 불과할 뿐이고 지방에는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공오인을 비록한 삼사 사주가 죽었다고 하여 무시할 수는 없었다.

“ 참아라! 직접 만나야 할 일이라는 데 어떻게 하겠느냐?”

옆에서 걷던 목충이 우중선을 달랬다.

두 사람은 곧 남경왕 주진무의 거처인 소응천거에 도착했다.

소웅천거는 이 층으로 지어진 아담한 건물이다.

근무 인원은 십여 명에 불과하고 지키는 자들 또한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건물 주변에는 십방무영쇄옥진이 펼쳐져 있어, 허락을 받지 않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 들어갈 수 없다. 구룡천문에서 가장 무서운 장소가 바로 소응천거인것이다.

“ 응?”

우중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는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데 오늘은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이다.

‘ 이 친구가 아직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군.’

우중선은 내심 중얼거리며 대문을 밀어보았다.

대문은 쉽게 열렸다.

“ 여기도?”

그는 의아한 얼굴로 목충을 돌아보았다.

대문에서 길이 직선으로 나 있었는데, 좌우측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십방무영쇄옥진이 발진 중이라는 의미였다.

“ 조심하느라 그런 모양이다.”

“ 그렇다고 해도 너무 티가 납니다.”

우중선은 얼굴을 찌푸렸다.

“ 의심할 사람도 없는데 좀 심하긴 하구나. 일단 들어가자꾸나.”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십방무영쇄옥진이 발동하면 길이 나 있는 곳으로만 가야지 다른 곳으로 가면 무조건 진식에 빠지게 된다.

두 사람은 길을 따라 걸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발을 멈춘 곳은 소응천거 지하실이었다. 지하실에는 제법 큰 탁자가 있었는데, 그 안쪽에 온신이 앉아 있었다.

“ 뭐 하는 건가?”

우중선은 온신 건너편으로 앉으며 물었다.

“ 다른 아이들 눈이 있어서 말입니다. 두 분을 만날 때만 이곳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연우강은 두 사람 앞에 놓인 찻잔에 물을 채웠다.

“ 더 의심받지 않겠는가?”

우중선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 두 분이 들어온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어쩐 일이십니까?”

연우강은 목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중선에 이어 그도 찻잔을 비우는 중이었다.

“ 이대진이라고 아는가?”

우중선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 더 드릴까요?”

연우강은 찻잔을 가리켰다.

우중선의 찻잔이 비어 있었다.

“ 그렇게 해주게. 그런데 뭘 넣은 건가?”

“ 맛이 이상합니까?”

“ 아니 달짝지근한 게 참 괜찮아서 말이네.”

“ 꿀을 약간 넣었습니다.”

“ 아, 꿀 향기였구먼.”

우중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대진이라면 남진무사를 말하는 거 아닙니까?”

“ 그렇네. 그 자가 왔네.”

“ 그가 왔다는 건 남경왕 저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뜻이군요.”

“ 불사선곡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고 하더구먼.”

“ 불사선곡이라고요?”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불사선곡은 전에 허일구로부터 들었던 명칭이다. 좀 더 깊이 조사를 해보겠다고 했는데 이대진이 그들과 접촉한 모양이었다.

“ 자세한 내용은 직접 말하겠다고 하더구먼.”

“ 불사선곡에 대한 내용이 분명한데 어떤 내용인지는 모른단 말이군요.”

“ 그렇네.”

“ 어디 있습니까?”

“ 영빈관에 있네.”

“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 소식이라니 무슨 소린가?”

“ 그 차 말입니다. 독을 집어넣었으니까 지금쯤 소식이 올 때가 된 것 같아서요.”

“ 도, 독을 집어넣었.... 커억!”

우중선과 목충은 목을 틀어쥐었다. 갑자기 목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던 것이다.

“ 지옥청화독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무흔독도 섞었소.”

“ 지옥청화독이면, 묘, 묘강독존 갈인효의.......”

“ 맞소. 갈 영감이 내게 준 독이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영축골공을 풀었다. 그러자 연우강의 얼굴이 나타났다.

“ 어떻게?”

우중선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남경왕으로부터 온신을 소개받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온신이 연우강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 나중에 오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될거야.”

연우강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며 마라천력을 발휘했다.

“ 커억!”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오른 순간 두 사람의 몸은 독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몸이 녹아내리면서 생겨나는 검은 액체마저도 허공에 잡아두었다. 그러고는 완전하게 독물로 녹아 내리자 한편 구석에 구덩이를 피고 그 속으로 넣고 흙을 덮었다.

“ 지금 뭐하는 거예요?”

허공에서 이지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만화은신사영을 펼치며 허공에 숨어 있었다.

“ 냄새를 지우는 거예요.”

“ 앞으로도 이곳을 계속 이용할 거예요?”

“ 그래야 할 것 같아요.”

“ 이곳을 무너뜨릴 방법이 생각난 모양이죠?”

“ 방금 떠올랐어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 그거 아세요?”

이지약은 연우강을 따르며 물었다.

“ 어떤 거요?”

“ 연 공자 부모님을 납치한 자가 이대진이란 사실 말이에요.”

“ 절대 잊을 수 없는 놈이죠.”

연우강의 몸에서 스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저녁 무렵 연우강은 영빈관으로 직접 찾아가 이대진을 만났다.

연우강 앞에 앉은 이대진은 안절부절 못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연우강은 불사선곡의 주인인 모용유를 만나 그와 일종의 밀약을 체결한 상태다.

원래는 공오인에게 먼저 보고를 하고, 그를 통해 주진무에게 전해져야 하는데 공오인이 죽는 바람에 직접 보고를 올리게 된 것이었다. 당연 처음 보는 주진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무슨 일인데 직접 보자고 했느냐?”

연우강은 이대진을 빤히 보며 물었다.

“ 호, 혹시 불사선곡이라고 아십니까?”

“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충 들었다. 전에 북망산에 나타났던 자들이라고 들었는데 맞느냐?”

“ 그렇습니다.”

“ 그들이 어쨌단 말이냐?”

“ 불사선곡의 주인은 모용유가 밀천과 대야벌을 없앨 때까지만 힘을 합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 그자가 제안을 해온 게 아니라 네가 제안한 건 아니냐?”

“ 아, 아닙니다. 저하. 모용 천주께서 직접 제안을 하셨습니다. 전 그분의 제안을 전달하는 입장일 뿐입니다.”

“ 그래, 어떤 조건이라고 하더냐?”

“ 특별한 조건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밀천과 대야벌이 없어질 때까지만 힘을 합치고 그 다음엔 각자 알아서 하자고 하였습니다.”

“ 그들의 숙소는 내가 제공해야겠구나.”

“ 그렇습니다.”

“ 전부 몇 명이나 된다고 하더냐?”

“ 삼백서른 두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 알았다. 그 제안을 수락한다고 전해라.”

“ 저, 정말 수락하시는 겁니까?”

이대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 물론이다. 가서 의사결정권이 있는 자를 데려오도록 해라.”

“ 아, 알겠습니다. 저하.”

이대진은 벌떡 일어났다.

“ 언제 볼 수 있느냐?”

“ 오늘 저녁이면 볼 수 있습니다.”

“ 이곳과 가까운 곳에 있나 보구나.”

“ 그렇습니다.”

“ 다녀오너라.”

“ 그럼!”

이대진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너무 쉽게 수락한 거 아니에요?]

허공에 숨어 있던 이지약이 전음으로 물었다.

[ 구룡천문은 지금 궁지에 몰린 상태잖아요. 쉽게 수락한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보다 대진 그놈 좀 이상하지 않아요?]

[ 어떻게 이상하다는 거죠?]

[ ‘모용 천주께서 직접 제안을 하셨습니다.’라고 말했잖아요.]

[ 모용세가인이 쓸 법한 말투를 당신 앞에서 사용했다는 건가요?]

[ 그건 곧 포섭됐다는 걸 뜻하는 거예요.]

[ 그럼 모용유에게 포섭된 자가 이곳으로 왔다는 건 뭘 뜻하는 거죠?]

[ 구룡천문을 삼킬 준비를 하고 왔다는 걸 뜻하겠죠.]

[ 배포가 장난 아니네요.]

[ 그래서 난 모용유 그놈이 좋아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영빈관을 나선 그가 향한 곳은 구룡각이었다.

구룡각으로 들어서자 차를 마시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 할 말이 있어서 왔네.”

“ 모두에게 전할 말씀이십니까?”

점창파의 고조 사일마검 장충우가 물었다.

소림의 요료대사를 비롯한 무당의 창천진인, 화산파의 자하검신 그리고 개방의 용왕개가 없는 지금 구룡천군 중 가장 연장자가 그였던 것이다.

“ 그렇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 문파의 수장들이 모인 것은 일다경 후였다. 연우강은 그들을 가만히 보았다. 소림, 화산, 무당, 개방은 지휘관을 잃은 상태고 다른 문파 또한 한두 명씩 잃었다.

게다가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구룡천군 무인들만 왔다는 것은 구파일방은 아직 진로를 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무너뜨리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 구파일방 장문인들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게요?”

연우강은 사일마검 장충우를 보며 물었다.

“ 그게.......”

장충우는 말끝을 흐렸다.

구룡천문에 소속돼 대야벌과 싸운다는 큰 틀은 합의가 된 상태다. 하지만 세세한 사항은 여전히 협의 중이었다.

“ 아무튼 그놈의 탁상공론은........”

연우강은 기분이 상한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심으론 웃고 있었다.

사실 구파일방 문주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야벌이 사라지고 나면 구룡천문에서의 위치가 곧 강호 서열이 될 것이다. 자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 덕분에 나는 편하게 됐지.’

“ 조만간 결정이 날 거로 보입니다. 저하.”

“ 그래서 그들의 결정을 앞당길 비책을 준비했소.”

“ 비책이라면.......”

“ 불사선곡이라고 들어봤소?”

“ 전에 북망산에 나타났던 자들이 불사선곡에서 나왔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 그들이 구룡천문에 합류하기로 했소.”

“ 합류라 하심은......”

장충우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불사선곡 무인들의 무공은 전에 보았다. 그들은 구룡천군 무인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런 자들이 들어온다면 구룡천문에 많은 변화가 생겨날 것이다.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경왕은 전대 장문인과 장로들로 구성된 구룡천군을 믿고 구파일방을 구룡천문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했는데, 아직 지지부진하고 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장충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럼 취선개와 몽취개는 그들을 만나러 간 겁니까?”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아 묻는 말이었다.

“ 아니오, 그들은 다른 일 때문에 북경에 갔소. 그리고 오늘부터 구룡천문의 수장은 마검이 맡도록 하시오.”

“ 알겠습니다. 군주님.”

장충우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그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어야겠소.”

“ 몇 명이나 됩니까?”

“ 총 삼백서른 두명이라고 하오.”

“ 생각보다 많지 않군요.”

생각보다 적은 인원수에 장충우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슬쩍 미소가 어렸다.

“ 그렇소. 마검. 우리에게 필요한 자들은 무공은 강하지만 큰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그런 자들이오. 그런 면에서 보면 불사선곡의 무인들은 최고의 조건을 갖춘 자들이오.”

“ 하지만 만일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저하.”

“ 그럴 줄 알고 이미 그들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마쳤소.”

“ 사전조사를 마쳤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 숭산 불노곡을 아시오?”

“ 듣기는 했지만 가본 적은 없습니다.”

“ 그 불노곡이 그들이 근거지요. 쉽게 말하면 가족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뜻이오.”

“ 그들이 우리를 배신하는 불상사가 생기면 그곳을 들어 협박하면 되겠군요.”

“ 숭산 불노곡은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만 알고 있어야 하오. 만일 우리가 그들의 근거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새 나가면 그들은 근거지를 옮겨 버릴지도 모르오.”

“ 알겠습니다.”

일행은 고개를 숙였다.

“ 마검은 그들의 숙소를 마련해 놓도록 하시오.”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군주님.”

장충우는 따라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 수고들 하게.”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왔다.

[ 일사천리로 진행되네요.]

이지약은 감탄했다.

이대진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연우강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이대진이 불사선곡 무인들에 대한 정보를 가져오자마자 임기응변처럼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런데 추진하는 일에 허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이런 일은 놈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면 안 되거든요. 놈들의 생각이 깊어지면 날 의심하게 될 테고, 그럼 힘들어져요.]

[ 생각을 못하도록 정신없이 몰아붙여야 한다는 건가요?]

[ 맞아요.]

[ 거기에다 우리 둘이 자는 모습을 은근슬쩍 보여주면 혼이 빠져 버리겠군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앞으로 가서는 입을 맞췄다.

하지만 만화은신사영을 펼치고 있어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은근슬쩍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해요.]

입술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연우강은 혜광심어로 말했다.

[ 적나라하게?]

이지약 또한 혜광심어를 사용했다.

[ 도덕적으로 매장을 시켜 버리는 거죠. 그리고 묘아도 새 출발을 하는 거예요. 구림세가의 딸이나 남경왕부의 며느리가 아닌 자연인 이지약으로요.]

[ 자연인?]

[ 다 컸잖아요.]

[ 부모보다 사내가 더 좋다는 건 다 컸다는 건가요?]

[ 그렇죠.]

[ 그런데 가능해요?]

[ 저만 믿으세요.]

[알았어요. 그런데 도덕적으로 매장을 시킨다는 건 무슨 말이죠?]

[ 실력이 없는 지휘관은 용서가 되지만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지휘관은 용서가 안 되는 법이거든요.]

[ 그러니까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남경왕은 지휘관 자격이 없다는 말인가요?]

[ 네.]

[ 그럼 구룡천문 무인들은 남경왕을 배척하겠네요?]

[ 처음부터 대놓고 배척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의사결정을 할 때 보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자주 생길 거예요.]

[ 이를 테면?]

[ 모용세가 무인을 공격할 때 주진무에게는 보고를 하지 않는다는 거죠]

연우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일리가 있네요. 그런데 누가 올 거라고 보세요?]

[ 모용유는 움직이지 않을 테고, 요괴가 올 거예요.]

[ 요괴?]

[ 신유 말이에요.]

[ 만기 팔유의 수장이었던 그 신유를 말하는 거예요?]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도 모용세가인이었던 거예요?]

[ 아니에요. 그는 제천강과 함께 천마 제석강의 재림을 기다렸던 자들 중 한 명이에요. 천마 형님이 재림하면 손자인 나웅을 패천림의 림주로 만들 참이었죠.]

[ 그런데 제석강 그분이 모용유를 선택해 버린 거군요.]

[ 맞아요. 문제는 나웅의 시체가 모용세가 지하에서 발견됐다는 거예요.]

[ 누가 죽인 거죠?]

[ 신유 영감의 제자가 죽였지 누가 죽였겠어요.]

[ 모용유라는 말이군요.]

[ 맞아요.]

[ 어쩌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군요.]

[ 당연히 일어나야죠.]

연우강은 서늘한 미소를 배어 물었다.

연우강의 예상대로였다. 구룡천문을 나갔던 이대진이 데리고 온 사람은 만기팔유의 대형인 신유였다.

연우강이 신유를 맞이한 곳은 지하실ㄹ이었다.

“ 어서 오시오. 신유. 어려운 걸음을 하셨소이다.”

연우강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

“ 날 아십니까?”

“ 무림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의도와는 다르게 많은 이들의 초상화를 보게 되더이다. 만기팔유의 신유 대협이 아니라면 내가 큰 결례를 범한 셈이 되겠소이다그려. 난 사과할 준비가 돼 있소이다.”

“ 과거엔 만기팔유의 신유였고, 지금은 모용세가의 군사인 신유입니다. 왕야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유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 반갑소. 신유. 자넨 그만 나가보게.”

연우강은 한편에 서 있는 이대진을 보며 말했다.  오고, 입을 쩍 벌린 혈룡이 무서운 속도 “ 알겠습니다. 저하.”

이대진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대진이 나가자 연우강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건넸다.

“ 먼저 원하는 걸 말해 보시오.”

“ 우리 모용세가는 강호 무림의 절반을 원합니다.”

“ 무인의 수가 삼백서른 두 명으로 알고 있소. 신유.”

“ 삼백여 명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일당백입니다. 그리고 저하께서 원하시면 대야벌에서 가지고 나온 무공비급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 입맛 당기는 제안이구려. 그런데 강호 무림의 절반을 얻으면 누구에게 물려줄 생각이시오?”

“ 물려주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 종남산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고 해서 그곳에 금의위를 보냈는데 지하에서 시체 한 구를 발견했기에 하는 말이오.”

“ 어, 어떤 시체였습니까?”

“ 냉골에 방치돼서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는 멀쩡했는데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대야벌의 잠룡이었던 혼무영 나웅이라고 하더이다.”

툭!

신유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졌다.

그가 지금껏 모용유를 따랐던 것은 모용유가 제자인 탓도 있지만 손자인 나웅 때문이기도 했다. 모처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모용유의 말에 지금껏 말없이 협조를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남경왕이 웅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남경왕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냉골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냉골은 음양뇌에서 음한지기가 흘러나온 곳을 일컫는 말이었다.

“ 나웅이 손자 맞소?”

연우강은 신유를 빤히 보며 물었다.

“ 아, 아니오.”

“ 그래서 강호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하나 보오. 난 나웅이 귀하의 손자인 줄 알았지 뭐요.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만 신유는 연우강의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키워준 은혜를 배신으로 돌려준 모용유에 대해 치를 떨었다.

“ 대협!”

내공이 약간 가미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신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지금 난 귀하가 모시는 모용세가 가주가 날 배신하면 그땐 어떻게 할 건지 그걸 물었소.”

“ 그,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저하.”

신유는 정신을 차렸다.

문득 이곳에도 구룡천군이라는 절세 고수들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들을 잘만 이용하면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해서 연우강의 말을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복수에 대한 윤곽이 조금씩 그려졌다.

“ 알겠습니다. 저하.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신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언제 올 수 있소?”

연우강은 일어나는 신유를 보며 물었다.

“ 삼백여 명이고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오 일이면 올 수 있을 겁니다.”

“ 숙소는 준비됐으니까 언제든지 오면 되오.”

“ 알겠습니다.”

신유는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 층 침실로 들어갔다.

“ 무슨 일이냐?”

시비가 문 앞에 서 있자 연우강은 물었다.

“ 공주님께서 차 한잔을 가져다 달라고 하셔서요.”

시비는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소명공주는 남경왕의 며느리다. 그런데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시아버지 방으로 들어가서는 차를 가져오라고 시킨 것이었다.

“ 그랬구나. 들어가거라.”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시비는 차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 억!”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이지약이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천으로 아래만 살짝 가리고 상체는 그대로 드러낸 채 젖은 머리를 닦고 있었던 것이다.

시비는 질겁하여 고개를 돌렸다.

남경왕 주진무 또한 깜짝 놀란 듯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 어머!”

이지약은 깜짝 놀란 시늉을 하며 천으로 가슴을 가렸다.

“ 험!”

연우강은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 죄, 죄송해요, 아버님.”

이지약은 얼른 몸을 돌려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 그만 나가보거라.”

“ 아, 알겠습니다.”

시비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문을 닫고 걸음을 옮기는 시비의 심장은 북을 치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봐서는 안 될 비밀을 목격한 것 같았다. 그런 광경은 봐도 못 본 척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둘이 정말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녀는 급하게 밖으로 나와 건물 뒤편으로 내달렸다. 건물 뒤편에 숨겨진 공간이 하나 있는데 벽 하나를 두고 남경왕 침실과 이어져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던 것이다.

그녀는 그곳을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 우리 둘이 자고 있을 때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느냐, 큰일날 뻔했구나.”

“ 아이! 뭐 어때요, 북경도 아닌데.”

“ 둘만 있을 때는 무랑이라 불러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 호호호! 깜빡 했어요. 어서 이쪽으로 와요, 저 급해요. 무랑.”

“ 삼 개월 만이구나.”

“ 너무 했어요. 저를 이렇게 찾아오게 만들고.”

‘ 세상에...’

시비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남경왕과 그 며느리 소명공주 사이가 저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소명공주가 죽은 귀신에게 시집을 간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시비는 계속 귀를 기울였다.

‘ 맙소사!’

시비는 제 입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처음 본 소명공주는 지금껏 본 어떤 여자보다 고귀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저런 신음이 흘러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신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음탕한 탕녀처럼 남경왕응ㄹ 다루고 있었다.

‘ 이, 이건 아냐. 이건 절대 아니라고.’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부인하듯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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