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29화 (229/232)

제 6장 완전한 몰락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충우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자들의 몸에서도 살을 엘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장충우를 비롯한 구룡천문 무인 이십여 명이 모여 있는 곳은 구룡각과 구룡루 구룡거 사이 지하에 마련된 지하 연무장이었다.

그들 중앙에는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게 살해된 자는 점창파의 전대 장로 해서검 나풍산이었다. 네 번째 살인이 일어나고 사흘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맨 처음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보름 전이었다.

공동파의 전대 장로가 살해를 당했는데 시체를 발견한 곳은 그의 방이었다. 외상도 엇ㅂ고 독에 당한 흔적도 없어 돌연사로 결론지었다. 그런데 그의 시체를 처리하고 이틀 후에 또다시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번에는 두 건이었다.

그때부터 경계를 강화했다.

하지만 사흘 전 일어난 살인 사건도 막지 못했는데 오늘 또다시 나풍산이 살해당한 것이다.

“ 놈들입니다.”

점창파의 증조인 비룡검객 방일성이 분개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가 놈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최근에 들어온 모용세가 무인들이었다.

방일성이 그들을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모용세가 무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단 한번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온 후부터 구룡천군 무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으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맞습니다. 당장 놈들에게 가야 합니다.”

종남파의 증조 선검 마일수가 맞장구를 쳤다.

“ 가서 어쩔 건가?”

장충우는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 책임을 물어야지요.”

마일수는 소리쳤다.

“ 그들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있는가?”

“ 정황상....”

“ 정황만 가지고 그들을 살인자로 몰자는 말인가?”

“ 어르신!”

마일수는 장충우를 노려보았다.

“ 나풍산은 내가 아들처럼 대했던 아이네. 자네보다 내가 더 가슴이 찢어지고 아프네. 하지만 놈들이 풍산을 없앴다는 증거는 손톱만큼도 없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처소로 몰려가 보게.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우린 공연한 자들을 의심해 분열을 초래하는, 구룡천무에 해가 되는 자들이 되고 만단 말이네.”

“ 그럼 군주님께 보고라도...”

“ 지금 군주님이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하는 소린가?”

장충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시비들 사이에 돌고 있는 몹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사흘 전 주진무의 처소를 방문했다. 구룡천군 무인이 살해당하는 사건도 함께 보고할 참이었다.

시비가 지금은 안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 앞으로 갔다가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 그건 놀랍게도 남녀가 방사를 가질 때 내는 신음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된 남자는 얼마든지 여자를 안을 수 있다. 설사 한낮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 여자가 그의 며느리인 소명공주 이지약이란 사실이었다.

죽은 아들의 부인을 범한 그런 자를 주군으로 모실 수가 없었다.

“ 그럼 그분을 배제하잔 말입니까?”

마일수는 버럭 소리쳤다.

“ 우리 구룡천문은 정의를 표방하는 정파네. 그런 문파의 수장이란 자가 죽은 자식의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면 누가 우릴 정파라고 하겠는가. 짐승보다 못한 것들이라며 욕을 할 거란 말이네.”

“ 하지만 그분이 없으면 황실의 협조를 얻어낼 수 없고, 구룡천문의 힘은 절반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 그래서 참고 있는 거네. 그분이 이지약을 정리하고 새롭게 태어난다면 다시 주군으로 모시고, 그렇지 않으면 내 머릿속에서 지우겠네.”

“ 이미 드러내놓고 관계를 갖고 있다면 스스로 정리하실 단계는 지났습니다.”

마일수는 고개를 저었다.

“ 그래서 충격 요법을 사용할 참이네.”

“ 어떤 충격 요법을 사용한단 말입니까?”

“ 아직 구상 중이네. 정리가 되는 대로 알려주도록 하겠네.”

“ 접니다. 어르신.”

그때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는 출입구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방주 이막수가 죽은 후 개방을 이끌고 있는 진법장로 왕개 상보였다.

“ 들어오게.”

장충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상보가 안으로 들어왔다.

“ 무슨 일이 있는가?”

“ 대응각 근처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장충우의 물음에 상보는 천조각을 내밀었다.

“ 이건?”

장충우는 나풍산의 소매를 보았다. 길게 찢겨 나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상보로부터 받은 천을 대보았다. 천은 맞춘 듯 딱 맞았다.

“ 그 천이 증겁니다. 이제 증거를 잡았습니다.”

비룡검객 방일성은 흥분하여 소리쳤다.

대응각은 모용세가 무인들이 기거하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 대응각 안이 아니라 근처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 그것도 증거가 안 된다는 말입니까?”

“ 아니라고 발뺌을 하면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조만간 알게 될 테니까 기다리거라.”

장충우는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밖으로 나갔다.

동료의 죽음 때문에 살기를 흘리고 있는 자들은 비단 구룡천군 무이들만이 아니었다.

구룡각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대응각에서도 진득한 살기를 흘리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모용세가 가주 모용유와 가솔들이었다.

“ 벌써 여섯 명이 당했습니다. 가주.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자가 모용유를 보며 소리쳤다. 그는 모용세가 총관인 불유 모용창이었다.

“ 사부 생각은 어떻소?”

모용유는 신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 문제는 증겁니다. 구룡천군이 했다는 증거를 얻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가 당하기 쉽습니다.”

“ 우리가 그들을 모함한다는 말을 들을 거란 말이오?”

“ 그렇습니다.”

“ 그럼 계속 당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오?”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모용창이었다.

“ 우리가 지금 이곳에 들어온 것은 구룡천문을 얻기 위해섭니다. 지금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총관.”

“ 일단 군사가 남경왕을 만나보고 오시오.”

“ 알겠습니다. 가주.”

신유는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 저자를 믿을 수 있습니까?”

“ 나웅 때문에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내 사붑니다. 숙부.”

“ 가주의 사부는 저자가 아니라 비급입니다. 그리고 인정에 얽매이면 큰일을 하지 못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 난 모용세가 가주 모용유에요.”

으드득!

밖으로 나가던 신유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대응각을 노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길을 따라 걷자 백여 장 건너편에 소응천거가 보였다.

‘ 무슨 짓이오, 왕야.’

소응천거가 보이자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유는 구룡천문 무인 다섯 명이 살해 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연찮게 개방 무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꼽은 범인은 모용세가였다.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모용세가에서는 구룡천문 무인을 살해하지 않았다. 아니 살해할 이유가 없다.

물론 구룡천문을 접수하기 위해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

그런데 구룡천문 무인들이 연속적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용세가인들이 안으로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시작됐으니까 범인으로 누구를 지목할지는 뻔하다.

문제는 구룡천문과 모용세가를 조율해야 할 남경왕이 계집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며느리에게.

‘ 평생을 권력의 심층부에 있었고, 도덕적으로 흠이 생기면 어떻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며느리와 자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모순이었다.

사실 한순간에 홱 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남경왕 또한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아니 그동안 부인 없이 혼자 살았기에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다. 게다가 이곳은 도덕적인 규제가 훨씬 약한 강호 무림이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너무 공교롭다는 데에 있었다.

모용세가인이 구룡천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구룡천문 무인들이 죽어나가고, 남경왕이 인면수심의 인간이 됐다. 분명 뭔가 있기는 있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대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문을 밀었다.

남경왕부의 대문은 닫혀 있긴 하지만 잠겨 있진 않다.

“ 오늘은 다른 길.....”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던 신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길이라는 말을 하다가 문득 ‘길’ 대신 ‘사람’이란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다른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이라면 지금 구룡천문에서 벌어진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가 있다.

“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이란 증거도 없다.

왜냐면 남경왕과 이지약 사이가 불륜이어야, 이지약이 남편도 없는 남경왕부로 시집을 간 상황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지약은 남경왕과의 불륜을 위해 죽은 남편을 이용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륜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만일 그가 왕야가 아니라면, 이지약과 잠을 잘 정도로 친한 사내라야 하고, 구룡천문에 원한을 가져야 하고, 아니 남경왕에게 원한을 가져야 하고, 모용세가와도 사이가 좋지 않은 ...제길!”

신유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런 조건을 갖춘 자가 딱 한 사람 있었다.

신유는 전면을 보았다.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밖으로 나가 모용유에게 그에 대해 말할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 다시 승천비고에 묻혀 살게 해주겠소.]

갈등하고 있는데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였다.

‘ 귀신같은 녀석.’

신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연우강을 만난 것은 일 층 집무실이었다.

집무실에는 연우강과 이지약이 앉아 있었다.

“ 긴한 이야기를 할 참이다.”

연우강은 밖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 알겠습니다.”

나직한 대답과 함께 주변을 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묘아!”

연우강은 이지약을 돌아보았다.

“ 알았어요!”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공을 끌어올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강기막을 쳤다.

“ 이미 날 넘어섰구먼.”

신유는 놀란 눈으로 이지약을 보았다.

보통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치는 강기막은 주변만 친다. 그 정도가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지약은 주진무의 집무실뿐만 아니라 침실까지 전부 강기로 채워버린 것이다. 이 정도 강기막이라면 천리지청술을 아무리 끌어올려도 염탐이 불가능하다.

“ 원래는 영감을 죽여 입을 막았어야 했는데..”

“ 왜 살려준 게냐?”

“ 나 대신 모용세가 무인을 없애고 있는데 영감을 죽일 이유가 없잖소.”

“ 알고 있었느냐?”

“ 그걸 바라고 나웅의 생사를 알려준 거니까.”

“ 무섭구나.”

“ 난 건들지 않으면 순한 양처럼 살아가는 사람이오. 영감. 아침에 일어나면 오래오래 살기 위한 운동을 하고 때맞춰서 식사를 하고, 밤에는 최고급 술집으로 출근해 술친구들과 술을 하고, 술자리가 끝나면 마음에 드는 기녀를 마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는, 난 이 년 동안 그런 일상을 살았고, 그렇게 사는 꿈이었소. 아니 지금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소.. 그런데 당신들이.....”

“ 널 세상으로 끌어들였단 말이냐?”

“ 그렇소.”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어떻게 할 참이냐?”

“ 묘아, 차!”

“ 알았어요.”

이지약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했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찻잔이 놓였다.

“ 난 구룡천문과 모용세가를 완벽하고 깔끔하게 정리할 참이오.”

“ 물론 나 혼자라면 쉽지가 않소. 하지만 영감이 도와주면 아주 쉽게 처리할 수 있소.”

“ 그들이 싸울 정소를 어디로 할 생각이냐?”

“ 구룡각 지하에 보면 지름이 이십 장 가량인 연무장이 있는데, 입구는 구룡각과, 구룡루, 구룡거에 하나씩 만들어져 있소.”

“ 양측을 그곳으로 몰아넣는단 말이냐?”

“ 가능하겠소?”

“ 모용세가에서 보유한 혈후를 막지 못하면 몰아넣는다고 해도 양패구상을 시킬 수 없다.”

“ 그녀는 혈후가 아니고 천마 제석강의 연인이었던 잠마 희수연이오.”

“ 저, 정말 그녀가 잠마 희수연이란 말이냐?”

“ 그리고 내 사부의 연인이기도 했소.”

“ 네 사부?”

“ 묵사 가립하 말이오.”

“ 그, 그러니까 연우강 네가 흑천의 천주란 말이냐?”

“ 그렇소. 그리고 잠마 희수연을 깨운 사람은 다름 아닌 천마 제석강이오.”

“ 맙소사....”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충격적인 말에 신유는 할 말을 잃었다.

“ 잠마 희수연 그분도 머잖아 정신을 차릴 거라고 하면 뒤집어지겠군요.”

“ 저, 정신을 차릴 거라고?”

“ 백강 형님이 정신을 차렸으니까 그 분도 조만간 정신을 차릴 거요.”

“ 백강 그분은 처음엔 천년마인 상태였던 거냐?”

“ 그렇소. 아무튼 잠마 그분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 너 정말 무서운 놈이구나.”

신유는 얼이 빠졌다.

오가피주를 가지고 와서 뇌물 어쩌고 할 때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혼자서 대야벌을 박살내고 밀천을 부수더니 이젠 구룡천문과 모용세가를 박살내려고 하고 있다 게다가 조금 전에는 무불 백강을 형님이라고 칭했다.

“ 금의위와 오군도독부까지 없애고 왔는데, 그 정도로 뭘 놀라고 그러쇼.”

“ 도, 도대체 넌....”

“ 아무튼 놈들은 구룡각 지하 공간으로 유인하기 전에 신호라도 해주시오.”

“ 아, 알았다.”

신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이 자리에 있으면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 모용유 그놈이 물으면 남경왕 주진무는 매장당하기 직전이라고 말하면 되오. 그럼 모용유는 나를 꼭두각시로 세우기 위해서는 구룡천군을 없애야 한다고 할 거요. 그리고 모용유가 가진 무음마소는 가급적이면 찾아 없애 버리도록 하시오.]

신유의 걸음이 빨라졌다

승천비고에만 틀어박혀 살았지만, 그곳에서도 수많은 사람을 보았다. 하지만 연우강 같은녀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녀석은 적으로 만나서는 절대 안 될 사람이었다.

“ 이상한 곳에서 일이 풀리네요.”

이지약은 흡족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며 말했다.

양측을 싸움 붙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암담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신유라는 방수가 나타난 것이다.

“ 그래서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복을 받는 겁니다.”

“ 착한 일?”

“ 네.”

“ 구체적으로 어떤 착한 일을 한거죠?”

“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만 가장 큰 선행은 청상과부를 구제해 주는 일입니다.”

연우강은 마라쳔력으로 이지약의 옷을 벗겨냄과 동시에 끌어당겼다. 물론 자신도 마라천력을 펼쳐 옷을 벗은 상태였다.

“ 하지만 구제해 준 청상과부를 짐승보다 못한 년으로 타락시키고 말았죠.”

이지약은 팔꿈치를 연우강의 어깨에 받친 채 그의 얼굴을 감싸 끌어당겼다. 그러자 연우강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에 파묻혔다.

연우강의 손이 엉덩이 아래로 스며 들어가자 그녀의 눈동자엔 색향이 어렸다.

“ 하지만 곧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거예요. 아무런 꼬리표도 달지 않은 아주 멋진 여자로요. 물론 그 전에 대들보에 목을 매야겠지만.”

“ 자살을 하라는 거예요?”

눈을 지그시 감은 이지약은 연우강의 손길을 음미하며 물었다.

“ 남경왕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 거예요.”

“ 철저하시네요.”

“ 전쟁터에서는 철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요.”

“ 요새도 기상나팔 소리 들려요?”

이지약의 손이 아래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 이삼 일에 한 번 정도는......”

“ 오래 가네요.”

“ 제가 지고 다니는 사망궤처럼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짐인 가 봐요.”

“ 스스로를 자학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에요. 연 공자.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져 보세요.”

“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런데.....”

“ 마음대로 안 된다고요?”

“ 네.”

“ 그래서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 그래서 좋아해요?”

“ 겉으로 보면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완벽한 사람인데, 내면을 보듬어 주지 않으면 바로 깨져 버리고 말 것 같은 유리 같거든요. 그래서 보듬어 주다 보면 어느새 당신은 늪으로 변해서 날 빨이들이고 있어요.”

“ 아직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 거예요?”

“ 그거 아세요?”

“ 뭘요?”

“ 난 당신이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자물쇠를 잠갔어요. 그러고는 열쇠를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어요.”

“ 창문 밖으로 나가면 되잖아요.”

“: 창문은 너무 작고 또 쇠창살이 끼워져 있어서 나갈 수가 없어요.”

“ 그럼 나갈 방법이 없는 거네요?”

“ 맞아요. 나갈 방법이 없어요. 전 당신일안 방 안에 영원히 갇혔어요.”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후회할 수가 없다.

그는 영혼을 저당 잡혀서라도 얻어야 할 사람이니까.

입맞춤을 하는 그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

“ 무슨 소리요?”

모용유는 굳은 얼굴로 모용창을 보았다.

“ 우리가 모르는 비밀 통로가 있었습니다. 가주.”

“ 비밀통로라고?”

모용유는 급하게 그의 방으로 내달렸다.

그의 처소는 대응각 지하였다. 그가 지하에 처소를 정한 것은 다름 아닌 잠마 희수연 때문이었다. 천오백 년 동안 땅속에 누워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침대 같은 곳에서 자는 걸 못 견뎌했다. 그녀가 편하게 쉬는 유일한 곳이 바로 땅바닥이었다. 때문에 별수 없이 지하에 방을 잡고 바닥을 파 땅을 드러내 그녀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콰앙!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검은 천으로 가려 놓은 안쪽이었다. 천을 젖히자 잠을 자고 있는 희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모용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방에서 훔쳐갈 거라고는 잠마 희수연밖에 없는데 그녀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없어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했다.

“ 공연히.......”

한편 의자에 앉으려고 하던 그가 급하게 희수연 곁으로 다가갔다. 이곳에서 훔쳐갈 것은 잠마 희수연 말고도 또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 헉!”

잠마 희수연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던 모용유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잠마 희수연의 가슴골은 그가 무음마소를 보관하는 비밀 장소였다. 그런데 그 무음마소가 없었다.

그는 잠마 희수연의 옷을 벗겼다. 혹시 뒤척이다가 다른 곳으로 빠졌나 하는 생각으로.

하지만 그녀의 옷을 전부 벗겼는데도 무음마소가 나오지 않았다.

“ 개자식들!”

그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갔다.

“ 가주님!”

모용창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 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소?”

“ 지하에서 회의를 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 전부 그곳에 모여 있단 말이오?”

“ 그렇습니다.”

“ 전부 집합시키도록 하시오.”

“ 안 되네, 가주.”

창노한 목소리가 모용창을 가로막았다. 그는 모용세가 최고 어른인 대태상 모용환승이었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들과 전쟁을 벌이면 우니는 여기서 쫓겨나게 되네. 그럼 애써 이곳까지 온 의미가 없네, 가주.”

“ 남경왕이 우릴 쫓아낼 거라고 보십니까?”

“ 그렇네.”

“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절대 쫓아낼 수 없습니다.”

“ 근거가 있는가?”

“ 남경왕은 이지약과 저지른 불륜으로 인해 외톨이가 된 상황입니다. 심지어 요즘은 보고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룡 천군을 없애주면 그는 오히려 고맙게 여길 겁니다.”

“ 그를 꼭두각시로 부릴 수 있다는 겐가?”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신유, 자네 생각은 어떤가?”

모용환승은 신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 저도 가주의 생각과 같습니다. 대태상!”

“ 구룡천문을 정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란 말인가?”

“ 문제가 아주 없진 않겠지만 구룡천문을 정리하고 난 다음에 남경왕 저하로부터 이지약을 떼어내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 떼어낸다는 것은?”

“ 없애는 겁니다.”

“ 그럼 구파일방 장문인들이 인정할 거라고 보는가?”

“ 남경왕은 북경의 이인자입니다. 그가 없이는 황실의 협조를 얻어낼 수 없고, 황실의 협조가 없이는 구룡천문을 제대로 세울 수 없을뿐더러 대야벌과 싸움도 불가능합니다.”

“ 다른 자들은 없어도 상관없지만 남경왕만큼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구먼.”

“ 그렇습니다. 대태상.”

신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네.”

모용환승은 고개를 돌려 모용유를 보았다.

“ 후환을 뽑을 때는 뿌리채 뽑아야 하느니라.”

“ 혈후를 부릴 수 없으니까 대태상께서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 알았다. 전부 나오라고 해라.”

“ 알겠습니다.”

모용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시진 후, 삼백서른 두 명의 모용세가 무인들이 세 패로 나뉘어 지하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간 직후,

연우강과 이지약은 구룡각과 구룡거로부터 지하 연무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봉쇄했다.

밖으로 나오자 신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또한 구룡루까지만 따라가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듯했다.

“ 이야합!”

“ 차앗!”

“ 타앗!”

차앙! 창창창! 창창!

“ 크악!”

“ 으악!”

“ 아악!”

지하로부터 기합과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우르릉!

그리고 지반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 영감, 따라오시오.”

연우강은 세 건물이 형성하고 있는 공터 중심으로 걸어갔다. 공터는 대나무를 비롯한 뿌리가 낮은 나무들로 채워져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연우강은 커다란 바위 옆에서 멈췄다. 그러고는 등에 지고 있던 자루를 내려놓았다.

“ 이걸 이 안으로 집어넣으시오.”

연우강은 바위 옆에 있는 둥근 통을 가리켰다.

“ 혹시..... 이게.....”

“ 지하 연무장으로 연결돼 있소.”

연우강은 통 위를 막고 있던 마개를 빼냈다.

“그럼 이건 뭔가?”

“ 영감!”

연우강은 신유를 빤히 보았다.

“ 말하거라.”

“ 난 제석강 그분하고 형님 동생하는 사이요.”

“ 혀, 형님 동생하는 사이라고?”

“ 그리고 전에 승천비고에서도 말했지만 군에 있을 땐 정 5품 정천호였고.”

“ 그, 그래서.”

“ 나이를 먹을수록 눈치가 빨라야 배를 곯지 않는 거야. 영감. 그래 가지고 밥이나 얻어먹고 살겠어?”

“ 그, 그러니까 말을 올리란......”

“ 강요하는 건 아냐. 난 다만 영감이 내게 반말을 찍찍하고 있으면 석강 형님이나 백강 형님이 거북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 완전 공대를 하란 말인가?”

신유는 반공대를 했다.

“ 말을 올린다는 게 칼로 자르듯 쉽게 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건 차차 고치기로 하자고. 우선은 반공대부터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아, 알았네.”

“ 가급적이면 연 공자란 말도 꼭 붙이고.”

“ 아, 알았네. 연 공자.”

“ 이제야 좀 그림이 되는구먼. 뭐 하고 있어, 어서 넣어.”

“ 아, 알았네. 그런데 이건 뭔가?”

신유는 자루 안에 있는 걸 통 안으로 흘려 넣으며 물었다.

“ 네 가지를 넣었어.”

“ 네 가지나 된단 말인가?”

“ 갈 영감의 독인 지옥청화독하고 무흔독 그리고 산공독과 흥분제야.”

“ 흥분제?”

“ 내가 한때 장복했던 앵속이야.”

“ 그, 그러니까 이 가루 속에 앵속이 들어 있단 말인가?”

“ 그래야 피 터지게 열심히 싸울 거 아냐.”

“ 독한 놈!”

신유는 혀를 내둘렀다.

지옥청화독이나 무흔독만 해도 치명적이다.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천장에서 뿌려지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아니 설사 알아차린다고 해도 몇 명을 제외하면 독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하여 산공독과 앵속까지 뿌린단다.

모르긴 몰라도 지하에서 살아 올라올 자들은 한 명도 없을 듯했다.

“ 원래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거야. 다 넣고 나면 가서 술이나 챙겨와, 가급적이면 오가피주로 했으면 좋겠어.”

“ 나쁜 새끼!”

신유는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오가피주는 연우강이 처음 승천비고로 들어왔을 때 뇌물이라고 가져온 술이었다.

“ 영감도 한 잔하고 싶으면서 뭘 그래?”

“ 알았어. 자식아!”

신유는 버럭 소리쳤다.

사실 연우강의 말처럼 술이 마시고 싶긴 했다. 단순한 술이 아닌 아주 독한 술이.

자루 안에 있는 독을 탈탈 넣은 다음 그는 처소로 몸을 날려 가서는 술과 음식을 챙겨왔다. 그러고는 연우강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비웠다.

술자리는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해서 이어졌고, 비명 또한 그때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에서야 더 이상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 오늘부터 영감은 지하에 물을 채워.”

“ 무, 물을 채우라고?”

“ 시체 밑으로 기어 들어가 숨어 있는 놈이 있을 수도 있잖아.”

“ 지독한 자식!”

신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물을 채울 준비를 했다. 물은 구룡천문 안으로 끌어들인 냇물을 이용했다.

인공호수를 만들기 위해 끌어들인 냇물의 수로를 통이 있는 곳으로 변경하고 각 건물에 나 있는 통로를 확실하게 틀어막은 다음 물을 채웠다.

물을 채우는 작업은 하루 이상 꼬박 소모됐다.

그때까지도 연우강은 공터를 떠나지 않았다.

“ 그런데......”

신유는 연우강을 보았다.

“ 왜?”

“ 무음마소는 자네가 가져간 건가?”

“ 아니?”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럼?”

“ 이 소저가 가져갔을 거야.”

“ 소명공주께서 가져갔다고?”

“ 그녀에겐 천마 제석강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엄청난 은신술이 있거든.”

“ 맞는가?”

신유는 고개를 돌려 이지약을 보았다.

“ 이거요?”

이지약은 품속에서 퉁소를 꺼내 보였다.

“ 어떻게 그게 자네의 손에 들어간 건가?”

“ 원래는 희수연의 동체를 옮기려고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그 치사한 자식이 그녀의 가슴에 이걸 숨겨두었지 뭐에요.”

그녀는 그것만 가지고 나온 게 아니었다. 전에 모용유가 남궁운화 일행에게서 빼앗아갔던 묵사마저도 찾아서 가져왔다.

“ 놈이 제발등을 찍었구먼.”

신유는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도 몇 번에 걸쳐 무음마소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무음마소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 장소를 옮겨야겠어.”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파일방 무인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빠르게 자리를 떴다.

구파일방 무인들을 데리고 온 자들은 개방의 진법장로 왕개 상보였다. 상보는 예리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 아무래도 지하 연무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외다.”

그는 일행을 보며 말했다.

“ 가봅시다.”

어느 화산파 무인의 말에 일행은 우르르 구룡각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구령각 지하에서 연무ㅤㅇㅏㅈ응로 이어지는 통로는 막혀 있었다.

“ 물기가 새어나오고 있습니다.”

통로를 살피던 개방 무인이 말했다.

“ 물이 채워진 모양이군. 대응각은 확인해 보았느냐?”

상보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 아무도 없습니다.”

“ 구룡각, 구룡거, 구룡루도 텅 비었습니다.”

“ 무너진 통로를 파보아라!”

상보는 방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구룡각, 구룡거, 구룡루 세 건물의 지하에서 연무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흙을 파내는 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작업은 금세 중단됐다. 지하 연무장 위쪽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 시쳅니다. 시체가 떠다니고 있습니다.”

“ 맙소사!”

위로 올라갔던 상보 일행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하 연무장은 거대한 연못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들은 대응각에 기거하던 모용세가 무인들과 구룡천군들이었다.

“ 양패구상입니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습니다.”

“ 아냐, 살아 있는 자가 있어.”

상보는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의 시선은 소응천거로 향해 있었다.

“ 그자와 계집을 끌어내라!”

상보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그 짐승들을 끌어내라! 끌어내라!”

구파일방과 무인들은 성난 파도처럼 소웅천거를 향해 내달렸다.

소응천거는 진식이 발진되지 않은 채 활짝 개방돼 있었다.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어간 무인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정원의 커다란 나무에서 목을 멘 여인을 발견한 탓이었다.

그 여자는 바로 짐승 같은 것들이라며 없애려고 했던 이지약이었다.

목을 멘 그녀 아래쪽에서는 유서로 보이는 종이가 놓여 있었다.

상보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 그가 부모님의 목숨으로 협박을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늘 앵속과 최음제를 복용해야 하는 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하직을 고합니다. 그동안 저의 짐승같은 행태를 보며 기분 상하셨던 모든 분들게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하늘이여,

다음 생에는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하게 태어나게 해주세요. 그게 아니면 짐승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간절히 바랍니다.  소명공주 이지약.>

“ 죽일 놈!”

상보의 전신에서 차가운 기운이 넘실댔다. 그는 유서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소응천거 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응천거에는 아무도 없었다.

“ 이 개자식이 벌써 도망친 모양이오.”

“ 얼마 가지 못했을 거요. 지금 가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거요.”

“ 죽입시다. 놈을 죽입시다! 놈을 죽입시다!”

구파일방 무인들은 분노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들은 이지약의 시체를 내려놓고 주진무를 찾아나섰다.

“ 어때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은 자가 있었다.

정원 구석에 숨어 구파일방 무인들을 지켜보고 있는 세 사람은 연우강, 이지약, 신유였다.

“ 그는 설사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갈 곳이 없겠군요.”

이지약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 그럴 거예요.”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자살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구먼.”

신유는 혀를 찼다.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완벽한 몰락. 남경왕 주진무가 현재 처한 상황이었다.

“ 남진무사 이대진은 어떻게 할 거죠?”

이지약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나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 있잖아요.”

“ 유설연?”

“ 내가 나서면 이대진만 없애고 끝내지만, 설연 그 녀석이 손을 쓰면 최소한 삼족을 멸하거든요. 녀석에게 맡기는 게 훨씬 나아요.”

“ 독한 놈!”

신유는 연우강을 바라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있잖아요. 적당한 선에서 끝내야 한다고. 그랬더라면 그분은 친구 아버지로 남았을 테고, 어쩌다 한 번이겠지만, 길을 가다가 생각나면 보약을 지어서 인사를 하러 갈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선을 넘었어요. 내 가족은 절대 건들지 말았어야 했어요. 절대로......”

연우강은 옆에 두었던 사망궤를 걸머졌다.

“ 나는 내 가족에 관한 일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아요. 설사 그가 황제라고 해도.”

연우강은 차갑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

주진무는 할말을 잃었다.

그는 소응천거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야음을 틈타 이곳을 나가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황제를 만나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받았다. 어명이 담긴 명령서와 어릉검까지 받았다.  화선이 타들어갔다.

이곳을 떠날 땐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어야 할 구룡천문 무인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저들만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한 나무 저들이 왜 소응천거를 포위하고 있는지, 왜 살기를 흘리고 있는지 주진무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짐승은 나와서 내 검을 받아라!”

“ 내 검을 받아라!”

우렁찬 외침에 소응천거가 부르르 떨었다.

“ 무슨 일들이냐?”

참다못한 주진무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짐승 같은 저놈을 태워 죽여라! 태워 죽여라!”

휙! 휙휙! 휙!

사방에서 불타는 횃불이 날아왔다. 곧 소응천거는 불길에 휩싸였다.

“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주진무는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 아미타불!”

우렁찬 불호와 함께 백팔 명의 승려가 주진무를 막아섰다. 그들은 소림의 백팔나한이었다.

백팔나한은 포위하듯 주진무 주변으로 늘어섰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림사가 자랑하는 백팔나한진이었다.

“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휙!

고함을 내지르자 구파일방 무인들 사이에서 종이 하나가 날아왔다.

주진무는 종이를 잡아챘다.

< 그가 부모님의 목숨으로 협박을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늘 앵속과 최음제를 복용해야 하는 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하직을 고합니다. 그동안 저의 짐승같은 행태를 보며 기분 상하셨던 모든 분들게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하늘이여,

다음 생에는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하게 태어나게 해주세요. 그게 아니면 짐승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간절히 바랍니다.  소명공주 이지약.>

“ 맙소사! ...... 이건 모함이다. 난 지금껏 북경에 있다가 지금 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지약과 관련이 됐고,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아미타불! 늦었소. 내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만큼은 반드시 지옥으로 인도하겠소! 백팔나한은 진식을 발동하라!”

“ 아미타불!”

우렁찬 외침과 함께 소림사의 자랑인 백팔나한진이 발동됐다.

“ 난 아니다. 난 북경에 갔다가 이제 왔단 말이다. 구룡천군을 불러다오! 모용세가를 불러다오!”

“ 그들은 양패구상해 모두 죽었다. 음적.”

“ 허!”

주진무는 멍한 얼굴로 백팔나한진을 구축한 승려들을 보았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그들이 도는 건지 세상이 도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양패구상.

서로 상잔했다는 말이었다.

금의위에 이어 구룡천군과 모용세가 무인들까지 전멸했단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 너였더냐?”

주진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우강.

그가 아니면 이 모든 일을 해낼 자가 없을 터였다.

“ 허허허! 하하하! 프! 하하하!”

주진무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림 승려들의 곤이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계속 웃음만 토해냈다.

“ 으! 하하하!”

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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