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30화 (230/232)

제 7장 함께한 육 년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게 되면 내릴 수가 없다. 호랑이가 달린다는 것은 먹이를 쫓고 있다는 뜻이고 먹이를 쫓는다는 것은 배가 고프다는 의미다.

배고픈 호랑이 등에서 뛰어내리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그래서 호랑이 등에 올라탄 자는 절대 멈출 수가 없다.

" 아냐, 처음부터 멈출 생각이 없었어."

나천후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야벌을 짓밟고 우뚝 서는 것.

그것은 나씨 가문의 칠백 년 숙원 사업이었다. 대를 이어 준비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결국 결과물을 토해냈다.

처음엔 완벽한 듯 보였다.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처럼 보였던 대야벌에 균열이 생겼고, 결국엔 한쪽이 허물어졌다. 그곳을 통해 많은 문파들이 뛰쳐나왔다. 강호인들 또한 대야벌의 치세에 환멸을 느낀 듯 밀천에 동조했다.

달리는 호랑이에 더욱 채찍을 가해 속도를 높였다. 친정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조부를 전쟁터로 내몰고, 사돈이자 유일한 친구였던 사유성에게 병력을 줘 강호상에 있는 대야벌 지부를 없애게 했다.

그런데 한번 나갔던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종남산으로 간 조부도 돌아오지 않았고, 강호로 나갔던 사유성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규동도 연락이 끊겼다.

모두들 전멸한 것이다.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나천후를 없애야만 한다. 아니 설사 날 죽인다고 해도 제이의, 제 삼의 나천후는 또 나올 것이고 그들은 강호를 향해 검을 뽑을 것이다."

나천후는 왼손에 쥔 백령을 불끈 틀어쥐었다.

" 접니다. 천주님!"

바로 그때 죽혼검 성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말하라."

" 섬 남쪽에 적이 상륙해 이편으로 오고 있습니다."

" 연우강이더냐?"

" 아닙니다."

" 하면?"

" 변황 무리들입니다."

" 팔황새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 접니다. 천주님!"

이번에는 북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보고하라!"

" 일단의 무리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 누구더냐?"

" 그들의 선두에는 야궐의 궐주 야제 혁련무극이 있습니다."

" 대단한 놈!"

이제는 연우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할 거라는 말만 오갔을 뿐이었다.

야제 혁련무극이 야궐 무인들을 이끌고 대야벌을 나선 목적은 연우강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연우강과 한편이 돼 나타난 것이다.

야제 혁련무극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자는 다름아닌 연우강일 것이다. 적마저도 같은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보유한 자, 그가 바로 연우강이었다.

" 접니다!"

이번에 부하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동쪽이었다.

" 연우강이더냐?"

" 그렇습니다. 과거 밀천 유적지가 있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 배를 타고 있더냐?"

" 그렇습니다. 천주."

" 성군."

나천후는 성군을 보았다.

" 말씀하십시오, 천주님!"

" 가족들은 전부 피신시켰느냐?"

" 그렇습니다."

"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보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실패했지만 우린 최선을 다했고, 밀천을 강호 무림에 알렸다. 이번엔 칠백 년이 걸렸지만 다음 대는 그 시간을 더욱 줄일 것이다. 그동안, 수고했다."

나천후는 성군을 가만히 보다가 몸을 돌렸다.

" 천주님도 수고하셨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천주님!"

" 수고하셨습니다."

성군 일행은 나천후의 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적이 쳐들어 온다!"

" 진식을 발동하라!"

"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

사방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고 밀천 총단 전역에 삼엄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 열심히 했으니까 된거야."

나천후는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육지가 끝나고 호수가 나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물 위를 천천히 걸었다.

일다경쯤 걸어가자 멀리 배가 보였다.

전함을 개조하여 만든 유람선으로 만든 그 배는 황룡호였다.

" 정말로 와요, 연 공자."

선수에서 군산을 바라보던 남궁운화가 말했다.

연우강이 그녀를 황룡호에 태워 온 것은 파릉전어석을 사주기로 하였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연우강이 이곳에서 나천후를 기다린다고 했을 때 나천후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 온다고 말했잖아요."

" 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 만일 남궁 소저가 나천후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 저요?"

" 남궁세가 가주 입장에서요."

남궁운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 남궁운화 개인이 아니라 남궁세가 가주라면 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네요."

" 저 녀석도 그래요."

연우강은 선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철립과 사망궤를 걸머지고는 선수로 나왔다.

" 사망궤는 좀 내려놓지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늘 사망궤를 지고 나오는 연우강이 못마땅한 듯 남궁운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 이건 내려놓거나 남에게 맡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건 남궁 소저도 알잖아요."

" 그래도 무겁잖아요."

"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지면 무거울 거예요. 하지만 전 무겁지 않아요. 기꺼운 마음으로 지고 다니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조심하세요."

" 네."

연우강은 훌쩍 몸을 날렸다.

사뿐히 물 위로 내려선 그는 나천후를 향해 걸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산책을 하듯 느릿하게 걷던 두 사람은 삼십 장 거리를 두고 멈췄다.

" 그거 아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천후였다.

" 말해."

" 나는 이 자리에 나오면서까지 연우강 자네가 내 앞을 막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네. 아니 나뿐만이 아닐 거네. 그동안 자네에게 당했고 앞으로도 당할 이들도 나처럼 생각했을 거네."

연우강이 가진 거라고는 금릉 연씨 세가의 업둥이, 단지 그거 하나뿐이었다.

친자가 아니기 때문에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상속자가 되지도 못했고, 뒤를 받쳐줄 세력도 없었다. 처음엔 그가 무공을 익힌 사실도 몰랐으니까. 그가 가진 거라고는 속된 말로 불알 두쪽이 전부였다.

그랬던 그가 강호 무림의 주인이 돼 가고 있다.

그는 밀천을 끝장내고 곧바로 대야벌로 갈 테니까 주인이 됐다고 봐야 했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천후. 내가 화야장에서 유유자적 세월을 낚을 때는 강호 무림으로 나올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어. 아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무림인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어쩌다 익힌 무공마저도 잠능폐혈대법으로 철저하게 숨겼어. 외부인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아버지까지도 내가 무공을 익힌 사실을 몰랐어. 대야벌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어. 난 삼 년 동안 죽은 듯이 지내다가 돌아갈 생각이었고, 무공을 드러내지 않았어."

" 그럼 야장으로 갔던 것도?"

" 맞아. 같은 맥락이야.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난 무림엔 관심없어.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오직 한 가지. 가족이야. 어쩌면 내가 이러는 건 관심이 아니라 집착일 수도 있어. 아니 집착이 분명할 거야. 하지만 그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왜냐면 난 업둥이이니까. 아무리 그분들이 잘해 준다고 해도 업둥이는 업둥이 일 뿐이고, 늘 빚을 진 기분으로 살 수밖에 없어. 물론 어떨 땐 내가 업둥이란 사실을 잊을 때도 있어. 동생을 밀어내고 재산을 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고, 아니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 그래서 이놈을 지기 시작한 거야. 이걸 지고 있으면 내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게 되거든."

" 그러니까 연우강이란 엄청난 괴물을 만들어낸 사람은 우리란 말이구나."

" 그런 셈이야."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나는 네가 부럽다. 연우강."

스르릉!

나천후는 백령을 뽑았다. 그러고는 검집을 던져 버렸다.

연우강이 부럽다는 건 솔직한 말이다.

누구는 간절히 바라고 모든 것을 투자해도 최고가 되지 못하는데, 연우강은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데도 결국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그를 보고 있으면 문득 운명이나 팔자라는 게 정해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목숨 걸어본 적 있어?"

연우강은 나천후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 난 늘 목숨을 건다."

" 입으로만 거는 그런 목숨 말고, 진짜로 거는 목숨 말이야. 목숨을 끊을 각오가 아니라, 정말로 끊어버리는 거 말이야."

" 넌 그렇게 했단 말이냐?"

" 이번 일이 끝나면 앞으로는 그렇게 사는 경우는 없을 거야."

" 그 차이였구나. 하지만......"

나천후는 검을 던져 올렸다. 그의 손을 떠난 백령은 어둠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 으아악!"

" 아악!"

" 크아악!"

" 변황의 전사들이여! 우리 팔황천의 전대 총천주인 연우강이 저들의 전멸을 원했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용납하지 말라고 했다. 공격하라!"

" 와아!"

" 우와아!"

" 야궐 무인들은 듣거라!"

" 하명하십시오. 궐주님!"

" 이 혁련무극의 영원한 친구인 연우강의 부탁이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전부 없애라! 풀 포기 하나 남기지 마라!"

" 와아아!"

" 와아아!"

" 잠룡대는 듣거라!"

" 하명하십시오."

" 총대주의 명령이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용납지 않는다. 전부 죽여라!"

" 우-하!"

" 우-하!"

멀리 군산에서 살기 가득한 함성이 들려왔다.

" 네가 이겼다. 연우강. 하지만 우린 끝나지 않았다. 내 후대 중 누군가는 또다시 강호 정벌에 나설 테고, 그들 중 누군가는 무림의 주인이 되고 말 거다. 반드시!"

나천후는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백령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날아 올라가면서 그는 단전을 활짝 열고 모든 공력을 끌어올렸다.

파앗!

허공에 머물고 있던 백령이 백색 광채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검 앞으로 간 나천후의 양손이 활짝 펴졌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백색 광채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것은 백무탈혼유마검법의 백혼이었다.

"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다니 대단하구나."

연우강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나천후가 가장 자신있게 펼칠 수 있는 무공은 백무탈혼유마검이 아니고 우주일만검결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검법을 아껴두고 백무탈혼유마검법을 펼친 것이다. 그건 곧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우주일만검결을 펼쳐 승부를 보겠다는 뜻이다.

이 지경이 돼도 포기하지 않은 그를 보니 문득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하지만......."

연우강은 오른발을 힘차게 굴렀다.

츄악!

발 아래쪽에 있떤 물이 벌떡 일어나더니 반구 형태를 이루며 둘러쌌다.

퍼억!

바로 그 순간 유백색 광채가 반구를 후려쳤다. 하지만 백색 광채는 반구를 뚫지 못했다. 다만 반구와 연우강을 물속 오 장 깊이까지 밀어 넣었을 뿐이다.

물속으로 파고들어 갔던 반구는 공기를 머금은 것처럼 튀어나왔다.

물로 이루어진 반구가 수면 위로 나오는 순간 나천후의 입에서 통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 우주일만검결!"

그것은 단순히 무공 명칭을 토해내는 외침이 아니었다. 대야벌을 넘고자 하였던 밀천의 염원이, 은밀막부를 넘고자 하였던 나씨 세가의 염원이 담긴 외침이었다.

그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령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광채를 쏟아냈다. 그 광채는 하나하나 군마가 돼 연우강을 향해 달려나갔다.

콰앙!

연우강은 다시 힘껏 발을 굴렀다. 그의 발이 강하게 수면을 치고, 두 곳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한 곳은 나천후 아래쪽이고, 다른 한 곳은 바로 연우강 주변이었다.

나천후 아래쪽에서 솟구친 물줄기는 살아 있는 것처럼 곧바로 나천후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것은 마라천류 사식인 지천류 지뢰의 변형이었다.

" 헉!"

우주일만검결을 펼치던 나천후는 질겁했다.

그는 급하게 자리를 이동했다. 그 바람에 일천 마리에 달했던 군마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연우강의 공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츄악! 츄악! 츄악!

연우강은 바로 옆에서 솟구친 물줄기를 후려쳤다.

번갈아 가며 물줄기를 후려칠 때마다 작은 물방울들이 나천후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것은 일식인 수천류의 어뢰였다.

작은 물방울에 불과한 어뢰는 정확하게 군마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 갔고, 연우강을 향해 달려가던 군마는 차례로 스러졌다.

" 이야합!"

나천후는 이를 악물었다.

더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은 강호의 불문율. 군마가 물방울을 삼키고 나아가지 못하면 남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백령에 내공을 밀어넣었다.

하지만 군마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줄어드는 군마의 수보다 더 큰일이 일어났다.

쩌엉!

느닷없이 백령이 울음을 토해 낸 것이다. 아니 울음이 아니라 균열을 일으킬 때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 이건......"

나천후는 당황했다.

지금은 우주일만검결을 펼치는 와중이고, 백령은 쏘아져 나간 군마에게 힘을 불어넣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백령이 깨질 위험에 처한 것이다. 백령이 깨지면 우주일만검결이 곧바로 스러지고 말 것이다.

" 설마?"

그는 시선을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백령을 준 사람이 그였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었다.

" 우리 아버지가 늘 그랬어.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절대 없다고 말이야."

" 검을 망가뜨려서 줬단 말이냐?"

파앗!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령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흩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푸아악! 파악! 휘이익! 쇄액!

연우강의 상체에서 검은 물체들이 폭풍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지옥탄의 사망정주와 사우화의 사망사화, 혼려무의 사망마비와 뇌령섬의 뇌섬이었다.

퍽퍽퍽! 퍽퍽! 퍽퍽!

퍽!

한순간이었다. 백팔 개의 사망정주와 아홉 개의 꽃잎을 가진 사망사화, 열여덟 개의 비수인 사망마비와 무림사 이래 최강의 암기라는 뇌섬이 나천후의 몸을 관통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듯 나천후는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연우강이었다. 그는 써먹게 될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백령을 망가뜨려 넘겨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백령이 망가질 때를 기다리더니 그 순간을 이용하여 최강의 초식을 펼쳤다.

작은 허점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자.

그자가 바로 연우강이었다.

" 넌......."

" 다음엔 조금 더 편한 사이가 돼서 만났으면 좋겠어."

연우강은 몸을 돌렸다.

" 그건 나도......"

푸스스!

나천후의 동체가 머리부터 시작해서 가루로 흩어져 내렸다.

황룡호 선수에는 남궁운화가 두 손을 맞잡은 채 서 있었다.

연우강이 배에 오르자 그녀는 가만히 안겼다.

" 육대!"

" 말씀하십시오."

" 동정호에서 파릉전어석을 가장 잘하는 곳으로 가!"

" 알겠습니다."

육대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황룡호는 선수를 돌려 동쪽으로 향했다. 배가 항해를 시작하자 연우강은 선실로 들어갔다.

" 그냥 가도 돼요?"

선실로 따라 들어온 남궁운화는 선실 창 너머 군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 사은도, 혁련무극도, 수 소저도 대단한 사람들이잖아요. 굳이 내가 없어도 돼요."

" 그래도......"

남궁운화는 여전히 못마땅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밀천은 강호무림 이대 세력 중 한 곳이고, 그런 곳을 멸문시킨 자리에는 실질적인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연우강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연우강이 승리의 현장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니 약간은 답답했다.

" 혹시 승리의 깃발을 꼽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연우강은 사망묵의를 벗으며 물었다.

"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연 공자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 파릉전어석이 먹고 싶지 않아요?"

" 먹고는 싶죠. 하지만 파릉전어석은 나중에라도 먹을 수 있잖아요."

" 그럼 나랑 단 둘이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 그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전 다만........"

남궁운화는 울 듯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마음을 몰라주는 그가 너무 야속했다.

" 이리 와요."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가슴 안으로 끌어들였다.

" 제가 바보 같은 말을 한 건가요?"

" 당연히 그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아니 승리를 선언하는 광경은 가슴 벅차고 정말 멋질 거예요."

" 그런데 왜?"

" 밀천 총단에서 승리를 선언하는 것보다는 남궁 소저와 단둘이 여행을 하고, 파릉전어석을 먹는 게 내게는 훨씬 중요한 일이에요."

" 정말 그래요?"

남궁운화는 감격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그렇다니까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다시는 오지 않아요. 늘 마지막 순간이죠. 그래서 매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즐겨야 하는 거예요. 나중에 이 시간을 되돌아 볼 때 웃을 수 있도록, 무슨 말인지 알겠죠?"

" 네,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사망궤를 열고 상자를 꺼내 남궁운화에게 내밀었다.

" 이건 뭐죠?"

" 전에 북망산 무덤에 간 적이 있잖아요."

" 이지약 소저랑 함께 들어갔죠, 아마?"

남궁운화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며 말했다.

" 아무튼 그곳에서 영약을 몇 개 주웠어요."

" 영약!"

" 그 안에 있는 건 풍천영수와 만년지극화령실이에요."

" 풍천영수와 만년지극화령실이면?"

" 남궁소저 할아버지의 얼굴을 고칠 수 있다는 뜻이죠."

" 정말이에요?"

" 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당신은 정말...."

남궁운화는 목에 메었다.

승리를 선언하는 것보다 둘만 있는 게 훨씬 좋다고 말하고, 할아버지를 위해 영약을 구해 주고, 그는 죽어서도 갚지 못할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다. 끝없이 그에게 받고 있는데.

" 뭐 해요?"

" 네?"

너무 고마워 속으로 울고 있었는데 불쑥 연우강이 말을 붙여오자 일순 당황했다.

" 지금 내게 감격했죠?"

" 네."

" 그럼 표현을 해야 하잖아요."

" 표현이라고요?"

" 여기에 표현을 하면 돼요."

연우강은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가리켰다.

" 풋!"

그녀는 발끝으로 섰다. 하지만 발끝으로 섰음에도 불구하고 키 차이가 많이 났다.

그녀는 연우강의 어깨를 잡고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두 다리로 연우강의 허리를 감싸고는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런 다음 얼굴을 가까이 댔다.

" 연 공자가 승리선언을 하는 것보다 제 곁에 있는 게 훨씬 좋아요."

그녀는 속삭이며 입을 맞췄다.

남궁운화는 용기를 내어 깊은 입맞춤을 했다.

' 헉!'

남궁운화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장난치는 듯한 짧은 입맞춤에도, 스치듯 지나쳐 간 그의 손길 하나에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연우강에게 모든 걸 맡겼다.

어깨가 약간 열린다 싶더니 상의가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뜨거운 손이 가슴으로 파고들어 왔다.

남궁운화는 온몸을 줄달음치는 희열을 어쩌지 못하고 거칠게 연우강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옷을 벗겼다. 상체가 드러나자 연우강이 그런 것처럼 가슴을 쓰다듬었다.

풀썩!

균형을 잃고 연우강이 침대로 넘어졌다.

남궁운화는 감았던 다리를 풀고 무릎을 꿇었다. 그런 다음 연우강의 남은 옷을 한 번에 벗겨냈다. 그녀가 연우강의 옷을 벗기는 사이에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그녀의 남은 옷을 몽땅 벗겨냈다.

남궁운화의 눈에 열기가 어렸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연우강 위로 올라갔다.

**********

" 구룡천문이 와해됐다!"

" 소명공주 이지약은 시아버지였던 남경왕 주진무에게 능욕당하는 걸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결을 했다."

" 며느리를 협박해 욕심을 채웠던 짐승 주진무는 구파일방 무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구파일방 무인들은 구룡천문과의 결별을 선언하였고, 구룡천문 개파는 없었던 일이 됐다."

" 그 모든 일이 사초 연우강이 했다."

" 황실에서는 주진무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개봉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소문이 돼 중원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구룡천문에 가입을 고려했던 자들은 안도의 얼굴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러고는 동정호로 시선을 돌렸다.

대야벌이 아니라면 선택할 곳은 밀천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밀천 또한 제이 총단인 규동총단이 궤멸돼 힘이 많이 약화됐다고 하지만, 인물도 없는 그 상황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자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원이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밀천이 있는 동정호로도 갈 수가 없었다.

" 밀천이 멸문했다!"

" 팔황새와 야궐의 공격으로 밀천 총단이 잿더미로 변했다."

" 밀천의 천주인 나천후는 연우강의 손에 죽었다!"

가고자 하였던 밀천마저도 멸문했다는 소식이 터져 나온 탓이었다.

무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구룡천문 멸문과 관련이 있고, 밀천의 멸문에도 관련이 있는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연우강이었던 것이다.

" 연우강은 팔황천의 전대 총천주다!"

" 팔황새의 이만 무인은 대야벌로 향하고 있다!"

" 야궐 무인 이천여 명이 대야벌로 향하고 있다!"

" 대야벌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다."

밀천으로 가려고 하였던 무인들은 일제히 대야벌로 길을 잡았다.

" 헐!"

두작군은 어이없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이렇듯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린 것은 살아생전에 대야벌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다. 아니, 연우강이 대야벌을 무너뜨리겠다고 선언하고,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도 믿지 않았다. 대야벌은 무너질 수 없는 철옹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야벌을 무너뜨리겠다는 연우강이 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니라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에 와 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 믿어지십니까?"

두작군은 기운상을 보며 물었다.

" 흑천의 천주님이신데 그 정도야 우습지 험!"

기운상은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활짝 폈다. 그러고는 팔자걸음으로 거만하게 걸었다.

" 풋!"

그런 그를 보며 몽요는 피식 웃었다.

기운상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녀 일행을 빼내 준 이지약이 서 있었다.

" 상관없어요?"

그곳을 나와서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구룡천문에 대한 것이었다. 졸지에 그녀는 시아버지와 통정한 화냥년이 되고 말았다. 물론 주진무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계집이 얼마나 꼬리를 쳤으면 시아버지가 그런 마음을 먹었겠냐며 욕하기 일쑤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돼 동정표를 얻긴 했지만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지약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 원래 자유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잖아요."

이지약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 딱히 갈곳이 없으면 나와 함께 다닐래요?"

" 그래도 될까요?"

이지약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 엄밀하게 따지만 우린 동문이잖아요."

" 만화은신사영 때문에?"

" 그렇죠."

몽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만화은신환환신공도 익혔어요?"

" 그 무공 때문에 머리를 밀었는걸요."

" 어땠어요?"

" 무공은 완벽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말은 이지약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 그랬어요?"

이지약은 빙그레 웃었다.

" 색달라서 좋대요."

"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

" 해보려고요?"

"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죠."

" 그렇게 한다는 쪽에 제 전 재산을 걸겠어요."

" 호호호! 언니도 짖궂은 데가 있어요."

" 지금 언니라고 한 거예요?"

" 저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그리고 성도 이씨로 쓰면 안 되니까 몽 씨로 할까 싶어요."

" 몽지약?"

" 어때요?"

" 이지약보다는 훨씬 정감 있어요. 이지약은 왠지 차갑다는 느낌이 나는 이름이었거든요."

" 언니로 부르기로 했으니까 이젠 말도 놓으세요."

" 그럴까?"

" 전 외동달이라 언니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 그럼 그렇게 하지 뭐."

" 그나저나 이제 마지막 지점에 도착했네요."

이지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육 년이었다. 아니 지금까지 살아온 생에서 가장 긴 세월이었고 가장 역동적인 시간이었다. 아마 앞으로는 그런 세월을 살지 못하리라.

" 그러게 말이야. 아마 죽고 나서도 이번 육 년을 잊지 못할 거야."

" 이번 육 변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한 육 년이겠죠."

" 맞아 그와 함게 한 육 년이지. 아무튼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몽요와 이지약은 서로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담대만승이 협상을 하자고 하면 그땐 어떻게 할 건지 복안이 있느냐?"

흐뭇한 얼구롤 두 여자의 말을 듣고 있던 두작군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 담대만승은 절대 협상 같은 거 하지 않을 거예요."

"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 협상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을 거니까요."

몽요는 빙그레 웃으며 이지약을 보았다.

" 어째 한 건 하자는 눈이네요?"

"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게 필요해."

" 은신술?"

" 그동안 갇혀 있으면서 만화은신환환신공을 펼친 상태로 무공을 펼치는 방법을 연구했거든."

" 성공했어요?"

" 손이나 다리로는 불가능하지만 단 한 곳으로는 가능했어."

" 입을 말하는 거예요?"

" 응! 우모침 같은 걸 혀 위에 올려놓고 있다가 쏘게 되면 거의 표시가 나지 않더라."

" 그걸 시험해 보겠다는 거예요?"

" 응!"

" 우리 둘이 힘을 합쳐야 할 상대는 누구죠?"

" 담대만승이 가장 아끼는 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치를 묻는다는 것은 그곳으로 가도  " 그래서 동정호 지하에서 담대무궁을 살려준 거군요."

" 그랬던 거야?"

" 없앨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팔만 자르더라고요."

" 그랬구나. 아무튼 그놈을 없애면 담대만승은 재산을 물려줄 유일한 자식을 잃게 되는 셈이야."

" 그야말로 미친 듯이 싸우겠군요."

두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허!"

두작군은 멍한 얼굴로 몽요와 이지약을 보았다.

담대만승에게서 협상의 여지를 빼앗아버리는 계책, 그것은 다름아닌 담대무궁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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