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그들은 숨을 죽였다.
담대만승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얼마나 강한지 대기가 픽픽 터져나가고, 가재도구들이 가루로 흩어져 풀썩풀썩 쓰러져 내렸다.
담대만승은 핏발 선 눈으로 담대무궁을 보았다. 전날 저녁을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야기 중에는 연우강이 이끄는 야궐과 팔황새에 강호의 절반을 넘겨주는 협상에 대한 것도 있었다.
물론 천오백 년 동안 강호 무림의 종주였던 대야벌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협상안이었다.
하지만 멸망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물론 그 협상안을 연우강이 받아들이느냐 하는 건 별개 문제다. 그러나 강호 각처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두 세력의 전쟁을 구경하기 위해 수만 명의 무인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하였고,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협상안을 발표하면 연우강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여겼다.
아들인 담대무궁 또한 나쁘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간단하게 술을 한잔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녀석은 싸늘한 시체로 변한 것이다.
큰아들은 가문에서 죽고 둘째는 금릉 연씨 세가에서 죽고 셋째인 담대무궁은 이곳에서 죽었다. 이제 자신은 가족이 한 명도 남지 않은 혈혈단신이 됐다.
" 범인은 밝혀냈는가?"
담대만승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 옆에는 대내총관인 만우량이 서 있었다.
" 이렇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공자의 처소까지 들어올 수 있는 무공은 동영의 만화은신사영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공자 옆에 이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만우량은 시체 옆에서 주운 첩지를 내밀었다.
담대만승은 첩지를 펼쳤다.
어.”
< 저번엔 팔을 가져갔지만 이번엔 목을 가져간다. 담대만승. 그래도 협상을 하자고 하면 넌 부모 자격도 없는 놈이다.>
와락!
담대만승은 첩지를 움켜쥐었다.
굳이 누가 보낸 거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첩지를 남긴 자는 연우강이었다. 놈이 만화은신사영을 익혔는지, 아니면 동영 계집을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무궁을 없앤 자가 분명했다.
" 회의시롤 부르게."
한동안 담대무궁을 내려다보던 담대만승이 몸을 돌렸다.
대기하고 있었던 듯 세 맹의 맹주들과 범일승은 호출을 하자마자 곧바로 달려왔다.
각자 앞에 차가 놓였지만 찻잔에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 또한 담대무궁의 사망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어제까지만 해도 난 그들과 협상을 염두에 두었네. 그들의 원하는 대로 할 참이었지. 그런데 그들은 내 아들을 살해했네. 그리고 이걸 남겼네."
담대만승은 첩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일행은 첩지를 보았다.
서명조차 없었지만 보낸 사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군요."
철사자왕 악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 그렇네. 싸우지 않으면 자네들의 가족들마저 전부 놈에게 잃게 될 거네.”
“ 난 처음부터 협상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벌주님.”
사도맹의 맹주 광해용왕 해천일이 말했다.
“ 나도 마찬가집니다. 굴욕적인 협상을 하느니 자살해 죽겠습니다.”
만박귀자 범일승이 맞장구를 쳤다.
“ 무인의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아직 이만 명이 넘게 남았습니다. 벌주. 결코 그들에 비해 밀리는 전력이 아닙니다.”
천기만리 혁세군이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 대뇌총관,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담대만승은 만우량에게 물었다.
만우량은 담대만승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혁세군의 말처럼 아군의 병력 수는 이만 명가량으로 적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는다. 아니 적은 동정호에서 밀천과 전투를 치르면서 병력이 줄었기 때문에 아군보다 열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력이 압도적인 우세에 있지 않는 이상 승패를 결정짓는 건 사기다.
그건 조금 전 아군의 인원이 이만 명이 넘는다고 소리쳤던 혁세군도 알고 있고, 협상을 하느니 자살하고 말겠다고 하였던 범일승도 알고, 방금 질문을 한 담대만승도 알고 있다. 저들은 스스로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다.
저들은 이미 금의위와 오군도독부가 어떻게 멸문했는지 들었고, 남경왕 주진무와 구룡천문의 최후가 어떠했다는 것도 들었다. 아울러 연우강은 신분에 상관없이 철저하게 응징하였고, 자신들 또한 그렇게 당하라리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협상이 아닌 전쟁을 택한 것이다. 아니 지금은 전쟁을 하면 승산이 있다는 말을 요구하고 있다.
“ 우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만우량은 일행이 원하는 대답을 했다.
“ 작전은 세웠는가?”
담대만승은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흡족한 얼굴로 물었다.
“ 다들 아시겠지만, 그들은 남쪽, 동쪽, 서쪽의 세 곳을 이용해서 쳐들어올 겁니다.”
“ 남쪽으로 가장 많은 인원이 몰려오겠지?”
“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균등하게 분배할 거란 말인가?”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그렇다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 남쪽은 혁 맹주와 대외총관이 맡아주게.”
“ 알겠습니다. 벌주님.”
혁세군과 범일승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 그리고 동쪽은 해 맹주가 맡아주고 서쪽은 악 맹주가 맡아주게.”
“ 그렇게 하겠습니다. 벌주님.”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 접니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이냐?”
만우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과거 황궐 산하에 있던 무인들과, 잠룡대로 파견 보냈다가 돌아온 무인들이 한꺼번에 갔단 말이냐?”
“ 가족들 마저 데리고 갔단 말이냐?”
“ 살림은 두고 몸만 빠져나갔답니다.”
“ 알았다. 돌아가 있거라.”
고개를 끄덕인 그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왔다.
“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새로울 것도 없네. 오히려 배신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것보다 낫네.”
사실 담대만승은 그들에 대한 처리로 고민을 많이 했다. 배신할지도 모르는 자들을 대야벌 안에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야벌 무인들이 보는 데서 명분도 없이 내쫓을 수도 없었다. 그랬던 자들이 제발로 걸어나간 것이다. 물론 적의 전력이 늘어나긴 했지만, 배신을 걱정하는 것보다 훨신 나았다.
“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만우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 이제 투자(주사위)는 던져졌네. 우리가 승리한다면 다시 이곳에서 만찬을 들게 될 테고, 패한다면 저승에서 만나게 될 거네. 행운을 빌겠네.”
담대만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행운을 빕니다. 벌주님.”
“ 행운을 빕니다.”
일행은 담대만승에게 포권을 취햇다. 그러고는 한 명씩 밖으로 나갔다.
네 사람이 나가고 실내에는 담대만승과 만우량만 남았다.
“ 후회하지 않는가?”
“ 자넨 무극하후세가의 가주 아닌가?”
“ 바로 지금이 제가 바랐던 상황이라면 믿겠습니까?”
만우량은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담대만승은 의아한 얼굴로 만우량을 보았다.
그는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열과 성을 다해 대야벌을 위해 일했다. 그런데 마치 지금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처럼 말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자넨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 하지만 대야벌의 몰락, 아니 범천담대세가가 몰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냥 내버려두는 게 우리 범천담대세가를 몰락시키는 수였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제가 연우강이 장차 벌주님의 마지막 상대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그 친구가 금릉 연씨 세가를 화약을 날려 버렸을 때부터였습니다.”
“ 금릉 연씨 세가를 날려 버린 장본인이 연우강이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그래 놓고는 교묘하게 우리 대야벌에 책임을 전가시켰죠. 그 바람에 벌주님은 만마림을 버려야 했고요. 하지만 단순히 만마림만 잃은 게 아니라 대야벌 무인들의 신뢰를 잃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 재미있구먼. 내게 말하지 않은 게 또 있는가?”
“ 연우강이 범천담대세가를 날려버렸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고 첫째 공자인 담대천명을 죽인 자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내 가문을 공격한 자를 알아냈단 말인가?”
“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연우강이란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때 벌주께 연우강 짓이라는 걸 말했다면 벌주는 만사를 제쳐두고 연우강을 없애 버렸을 겁니다. 그럼 지금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겠지요.”
“ .....!”
담대만승은 만우량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만우량은 태연했다. 그는 식은 찻잔을 데워가면서 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 그 사건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대야벌의 가장 큰 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연우강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녀석은 가만히 있기만 하는데도 주변으로 인재가 모여든다는 거였습니다. 고난을 겪으면 겪을수록 더욱 단단해졌고요. 난 아무것도 할 게 없었습니다. 녀석에게 적당한 자극만 주면 됐죠. 녀석은 점점 성장해 갔고, 드디어는 범천담대세가의 맥마저 끊어냈습니다. 참! 며칠 전에 벌주의 친동생인 담대천호를 만났습니다.”
“ 처, 천호를 만났다고?”
“ 두 팔과 두 다리를 잘린 상태였습니다. 여태 묵사 주선엽을 기억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담대천호는 묵사 주선엽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 묵사 주선엽과도 관계가 있는가?”
담대만승은 묵사 주선엽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전대 벌주였던 낙일마검 장만보보다 더 신경을 썼던 자였기에 정확하게 기억한다.
무영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그를 암습했다. 물론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진 않았지만 자신이 끼어들자 주선엽은 궁지에 몰렸고, 두 팔과 다리를 잃었다.
“ 사실 나도 그런 상황인 줄은 몰랐습니다. 담대천호가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린 상태로 이곳까지 와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알게 된 거죠.”
“ 뭘 알게 됐단 말인가?”
“ 묵사 주선엽이 바로 연우강의 친부라는 사실 말입니다.”
“ 무, 묵사 주선엽이 연우강의 친부라고?”
담대만승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무영 서열 백 위였던 야효의 죽음이었다. 그 후로 철검광자 추소백이 죽었고, 사건은 점점 커져갔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의 시작이 연우강에게서 비롯됐던 것이다.
“ 지금 묵사 주선엽의 아들이 벌주의 목을 자르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최고의 복수 아닙니까?”
만우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대만승을 보며 섰다.
“ 그럼 그놈이 천호의 팔다리를 자른 건 지 아비의 복수를 한 셈이구먼.”
“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참으로 지독한게 그 지경이 돼서도 북망산에서 이곳 대야벌까지 왔다는 겁니다. 그가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온 이유를 아십니까?”
“ 왜 온 건가?”
“ 연우강이 그랬답니다. 그가 대야벌로 오기 전에 가족을 피신시키라고 말입니다.”
“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그 몸을 하고도 이곳까지 달려왔단 말인가?”
“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리고 나니까 그제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피신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죽음을 앞당겼지요.”
“ 죽음을 앞당겼다는 건?”
“ 조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범천담대세가에서 남은 사람은 벌주가 유일하다고요.”
“ 다..... 죽였단 말인가?”
“ 이제 벌주와 나는 동등한 상태가 됐습니다. 재산을 물려줄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는 완벽한 혼자 말입니다.”
“ 아니네, 난 자네와 다르네.”
“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 그건 바로.....”
담대만승은 만우량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오른손을 꼿꼿이 세웠다.
푸욱!
그의 손은 만우량의 심장으로 파고들어갔다.
“ 우리 가문의 무적뇌화결이 자네 가문의 무극천라검해와 다른 점은 더 강하다는 거네. 과거에도 그랬지만 승자는 범천담대세가라는 게 다르단 말이네.”
“ 내가 무극천라검해를 익혔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심장이 찔렸음에도 불구하고 만우량의 얼굴에는 미소가 맺혔다.
“ 익히지 않았단 말인가?”
“ 당신네 범천담대세가에서 쳐들어왔을 때 우린 무극천라검해를 태워 버렸고, 난 무극천라검해를 익힌 적도 없습니다.”
“ 그럼 더욱 잘됐구먼. 이젠 하후세가의 맥마저 끊어냈으니까 말이네.”
담대만승은 찔러 넣었던 오른손을 뽑아 냈다.
츄악!
만우량의 심장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 나왔다.
“ 하지만 당신도 곧 날 따라올 거니까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벌주의 가문인 범천담대세가의 몰락을 지켜본 지난 육 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벌주.”
풀썩!
만우량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담대만승은 숨이 끊어진 만우량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통이 심했을 텐데 만우량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무런 후회나 미련이 없다는 뜻일 터였다.
비록 하후세가는 맥이 끊겼지만 승자는 그였다.
“ 쿡쿡쿡! 하하하! 하하하!”
담대만승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토해냈다. 웃고 또 웃고, 눈물이 날 때까지 그는 웃었다.
뚝!
그리고 어느 순간 언제 웃었냐는 듯 얼굴이 얼음처럼 냉랭해졌다.
“ 범천담대세가에는 나 담대만승이 남아 있다. 만우량. 내가 죽어야 범천담대세가는 끝난단 말이다.”
그는 차갑게 말하며 회의실을 나섰다.
둥! 둥! 둥! 둥! 둥! 둥!
일 층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북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남천문 부근이었다.
“ 빠르군.”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대야벌에서 북을 칠 리가 없을 테니까, 적이라는 의미다. 적어도 삼사 일은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을 뒤엎고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 전쟁을 아는 놈인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담대만승은 피식 웃었다.
과거 황궐 소속이었던 무인과 잠룡대로 파견했던 자들이 대야벌을 탈출한 사건은, 나아 있는 무인들에게 치명타가 됐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연우강은 곧바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 넘어서지 못하면 죽는 곳이 강호니까.”
그는 차갑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접니다. 벌주님.”
“ 보고하라!”
“ 천하평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 접니다. 벌주님.”
“ 보고하라!”
“ 서천문 밖에 적입니다.”
“ 접니다. 벌주님!”
“ 보고하라!”
“ 동천문 밖에 적입니다.”
“ 적의 수는 파악되지 않은 게냐?”
“ 선두만 나와 있어서 정확한 수는 알 수가 없습니다.”
“ 각 맹 상황은 어떠냐?”
“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각 맹주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한다고 전하라.”
“ 알겠습니다. 벌주님.”
전령들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남천문이 있는 남쪽을 맡고 있는 자는 비호각 곽후라는 자였다. 곽후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남천문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천상천에서 남천문까지의 거리는 멀었다.
간-다! 가-라!
새카만 이리가 사막을 달린다!
부순다! 부숴라!
우리를 막는 적군을 부순다!
남긴다! 남겨라!
흑랑이 나가면 시체만 남긴다!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절반가량 달렸을 때 천하명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 저 소린?”
곽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과거에도 저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후렴처럼 반복되는 ‘에이, 씨부랄!’ 이라는 특이한 어구 때문에 아직 기억하고 있는 저 노래는 연우강이 대야벌로 들어올 때 불렀던 그 노래였다.
“ 벌써 시작한 건가?”
곽후가 나아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 노랫가락을 듣고 얼굴이 일그러진 자는 또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천기만리통 혁세군이었다.
“ 진군가...”
혁세군은 신음을 내뱉었다.
육 년 전, 연우강이 대야벌로 들어올 때 불렀던 노래였다. 그때도 진군가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군에 다녀온 자들이 흔히 그렇듯 군 생각이 나 술에 취해 주정 부리는 것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결과를 놓고 보면 녀석은 그때부터 대야벌을 정벌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달린다! 달려라!
미-친 이리가 적진을 달린다.
죽인다! 죽여라!
한놈도 남김없이 씨-를 말려라!
마셔라! 마셔라!
적군의 피-로 갈증을 식혀라!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 이백 배로 늘었군.”
전방으로 나온 자는 이백여 명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검은 철립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궤짝을 둘러멘 연우강이 서 있었다.
육 년 전에는, 막장이 부축해 오기는 했지만 연우강 혼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백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진군가를 부르고 있다.
죽여! 죽여!
에이! 씨부랄!
죽여! 죽여!
에이! 씨부랄!
“ 우-하!”
쿵! 쿵!
“ 우--!”
쿵! 쿵!
“ 하!”
쿵! 쿵!
“ 웅검대는 듣거라!”
혁세군은 아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 하명하십시오. 맹주님.”
그러자 남천문 안쪽에 모여 있던 오백여 명의 무인들이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 제군들의 목을 따겠다고 함성을 지르며 진군해 오는 저들은 불과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던 잠룡들이다. 저들이 겁나서 숨겠는가?”
“ 아닙니다. 맹주님!”
“ 햇병아리들에게 진정한 무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줘라! 놈들을 전멸시켜 저 밖에 있는 자들에게 왜 대야벌을 강호라 부르는지 똑똑히 보여줘라!”
“ 알겠습니다.”
“ 출정하라!”
“ 출정하라!”
혁세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웅검대 대원 오백 명은 남천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 너무 많지 않은가?”
범일승은 벌떼처럼 달려나가는 웅검대 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하평 주변에는 적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남쪽 숲에는 연우강을 비롯한 적들이 숨어 있지만 좌우측에는 천하 각처에서 모여든 군웅들이 숨어 양측의 싸움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적이 투입한 인원은 이백 명에 불과한데 대야벌에서는 두 배 반이 많은 오백 명을 투입한 것이다. 실력이 아닌 인원수로 밀어붙인다는 느낌을 줄 것 같아 공연히 찜찜했다.
“ 저놈들은 연우강이 가진 전력의 핵심이네. 저들을 없애지 못하면 우린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네.”
혁세군이 그가 거느린 전력 중 가장 강한 웅검대를 내보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가장 중요한 일전이란 말인가?”
“ 그렇네. 그리고 지금은 강호인들의 눈을 신경 쓸 때가 아니네. 강호 무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과정은 신경 쓰지 않네. 그들은 살아남는 자를 승자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네. 그게 바로 군중들이네. 웅도대는 듣거라!”
혁세군은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 하명하십시오. 맹주님!”
그러자 남천문 왼편에 도열해 있던 자들이 크게 소리치며 고개를 숙였다.
“ 웅도대의 임무는 도망치는 자의 주살이다. 당장 출병하라!”
“ 알겠습니다 웅동대는 출병하라!”
우렁찬 외침과 함께 웅도대 대원 오백 명이 남천문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 웅창대는 듣거라!”
그는 오른편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 하명하십시오.”
“ 웅창대 대원의 임무 또한 웅도대와 같다. 당장 출병하라!”
“ 알겠습니다. 맹주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웅창대 대원 오백 명이 웅도대 대원을 따라 남천문을 나섰다.
“ 아예 승부를 볼 참이군.”
범일승은 긴장한 얼굴로 천하평을 주시했다.
적 또한 아군의 수에 맞춰 무인을 증원할 테고, 첫 번째 싸움이 곧 승부의 분수령이 될 게 분명했다.
“ 저놈들을 없애고 난 후 그 여세를 몰아 숲속에 숨어 있는 놈들을 쓸어버릴 참이네.”
혁세군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그를 비롯한 정도맹 수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먼저 출병했던 웅검대 대원들과 연우강의 잠룡대 대원들 사이가 백여 장으로 좁혀졌다.
“ 응?”
범일승은 의아했다.
아군은 일천 오백 명이고 적은 이백 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추가 병력이 나오지 않았다.
“ 만일.....”
범일승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만일 저 상태에서 아군이 패한다면.....
그 다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 아닐 거야. 놈이 그런 생각을 할 기가 없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일 조와 이 조, 삼 조, 사 조는 중앙을 맡고, 오 조와 육 조, 칠 조는 우측을 팔 조와 구 조, 십 조는 왼쪽을 맡아라!”
대주 천검수사 초광생은 몸을 날려가며 고함을 내질렀다
간-다! 가-라!
새카만 이리가 사막을 달린다!
“ 우-하! 우-하!”
쿵쿵! 쿵쿵!
연우강이 선창을 하자 잠룡대 대원들은 특유의 외침을 토해냈다.
부순다! 부숴라!
우리를 막-는 적군을 부순다!
“ 우-하! 우-하!”
쿵쿵쿵! 쿵쿵쿵!
남긴다! 남겨라!
흑랑이 나가면 시체만 남긴다!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 천하평을 울렸다.
“ 적은 천오백 명이오, 대장!”
윤허는 전방을 바라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 광랑수호단은 전방으로 나서라!”
대답은 수여설의 외침이 대신했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광랑수호단 대원 오십 명이 연우강 뒤편으로 바짝 붙었다.
“ 광랑수호단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은 도망치는 자들을 처리한다!”
“ 미친!”
연우강의 외침에 윤허는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켰다.
도망치는 자들을 처리하는 말은 광랑수호단만으로 천오백 명의 적을 상대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승리하면 전쟁은 여기서 끝납니다. 형님.”
옆에 있던 거철산이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말했다.
“ 끝난다고?”
“ 단 오십 명으로 천오백 명을 몰살시켜 버리는데 어떤 놈이 달려들겠습니까?”
“ 그러니까 저 빌어먹을 인간은.....”
윤허는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와아아!”
“ 와아아!”
어느새 거리가 오십여 장으로 좁혀진 듯, 웅검대 대원들은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광랑수호단을 비롯한 윤허 일행의 귓전으로 나직한 노랫가락이 흘러들었다.
그 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또렷이 들려왔다.
폭풍은 날아오르고, 폭풍비.
달빛은 잔인하기 그지 없다. 월광잔.
미친 늑대는 바람처럼 내달리고, 광랑풍.
검은 해골은 해맑게 웃는다, 일지소.
난무하는 허상은 실체를 알 수 없는데, 환환난.
지옥의 입구는 활짝 문을 열었다. 지옥탄.
죽음의 꽃은 쉬지 않고 피어나고, 사우화.
열여덟 유령은 미친 듯이 춤을 추네. 혼령무.
번쩍!
한줄기 뇌전이 허공을 가르니, 뇌력섬.
잘려나간 혼은 그저 망연할 뿐이네, 절혼망.
아! 빌어먹을 사망비비여,
“ 나는 너를 저주 하노라!”
바로 뒤에서 연우강을 따르던 광랑수호단 대원들 광랑수호단 뒤에 있던 잠룡대 대원들, 천하평 벌판 너머 숲에 숨어 있던 무인들, 남천문 위쪽에서 천하평을 바라보던 자들, 그리고 천하평 동쪽과 서족에서 두 세력의 싸움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아니 천하는 숨을 죽였다.
연우강의 몸에서 검은 암기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담벼락 무너지듯 대야벌 무인들이 죽어나갔다.
대응이란 말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검은 광채가 허공을 검게 수놓으면 수십 명이 짚단처럼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광경에 아군도 적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연우강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