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32화 (232/232)

제 9장 내 삶의 짐.

“ 우--!”

“ 하-아!”

천하평의 정적을 깨트린 자들은 광랑수호단이었다. 그들은 연우강의 무공 정도를 알고 있어 다른 이들에 비해 충격이 적었다.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그들만의 특유한 함성을 내지르며 대야벌을 향해 진격해 갔다.

“ 잠룡대는 진격하라!”

이어 명령을 내린 자는 잠룡대 대주 막장이었다.

“ 흑랑군은 진격하라!”

세 번째로 공격 명령을 내린 자는 흑랑군 군장 군무옥이었다. 그는 육참낭아곤을 든 채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 흑호군은 진격하라!”

“ 백발랑군도 가, 가시지요.”

조영마검 단고웅과 두보관의 입에서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 야궐 무인들은 진격하라!”

“ 팔황천 무인들은 진격하라!”

“ 진격하라!”

“ 와아아!”

“ 우와와아!”

총 이만 오천 명에 달하는 엄청난 무인이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서 쏟아져 나와 천하평을 가로질러 남천문을 향해 달렸다.

“ 맙소사!”

혁세군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지금껏 보고 받은 것에 의하면 적은 남쪽, 동쪽, 서쪽, 삼대로 나뉜 상태라고 하였다. 그런데 남쪽에서 전 전력 전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건 곧 동쪽과 서쪽은 속임수에 불과하며 남쪽에 집중됐다는 말이 된다.

이미 정도맹 무인들은 연우강의 무공을 목격하고 싸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만에 달하는 적이 밀고 들어온다면 상황은 불 보듯 뻔하다.

남은 것은 패배밖에 없다.

“ 나, 난 싸울 수 없소!”

겁에 질린 무인이 무기를 내던지며 고함을 내질렀다.

“ 항복하겠소.”

“ 항복이오!”

기다렸다는 듯 무인들이 무기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무기를 버린 자는 목을 치겠다. 당장 무기를 들어라.”

혁세군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무인들은 무기를 들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않았다. 아니 더 많은 자들이 무기를 버리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무기를 들지 않는 자는 목을 쳐라!”

결국 혁세군은 참수 명령을 내렸다.

“ 크악!”

“ 으악!”

“ 아악!”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각 지휘관들은 몸을 날려 다니며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은 자들의 목을 쳤다. 전 무인의 수에 비하면 항복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탓에 진정됐다.

그런 그들을 보며 혁세군은 고함을 내질렀다.

“ 우린 살아도 대야벌 무인이고, 죽어도 대야벌 무인.... 커억!”

혁세군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 하나가 등 쪽에서 심장으로 파고들어간 것이었다.

“ 여, 연우강이다.”

정도맹 대원들은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연우강은 무기를 겨누고 싸울 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껏 명령을 내리던 혁세군마저 죽임을 당한 상태.

자리를 지킬 배짱을 지닌 자는 아무도 없었다.

“ 와와아!”

“ 우와아!”

바로 그때 우렁찬 외침과 함께 먼저 온 자들이 남천문을 부수고, 성벽을 넘어 대야벌 무인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 죽여라!”

“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전부 죽여라!”

“ 죽여라!”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정도맹 무인들은 상대가 아니었다. 등을 보이고 도망치다가 목이 잘려 죽고, 등을 찔려 죽임을 당했다.

“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혁세군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 그러게 말이야. 늘 그렇듯 욕심은 화를 부르는 모양이야, 너희들은 대야벌로 만족해야 했어.”

“ 허허허! 만일 성공했더라면 역사는 강호 무림과 상권을 동시에 장악한 일등 공신으로 우릴 기억했으 게다.”

“ 죽어도 잘못했다는 말은 안 하네.”

“ 잘못한 게 없으니까.”

“ 고마워, 혁세군. 네 가족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을 많이 하던 참이었는데, 해결책읕 줘서.”

“ 내, 내 가족을 없애겠단 말이냐?”

“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뒤끝이 남는 걸 좋아하지 않아.”

“ 연우강!”

“ 우리 솔직해지자, 혁세군. 만일 네가 승자가 되면 내 가족을 전부 없앨 거잖아. 아니 넌 날 죽이기도 전에 내 가족부터 없애려고 했잖아.”

“ 살려다오!”

“ 용서를 빌 시기는 지났어. 저승에 가서 네 가족이 오는 걸 기다려.”

철컥! 철컥! 철컥!

연우강은 사망낭조 날을 세움과 동시에 손가락을 구부려 뽑아냈다.

“ 커억!”

혁세군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신형은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연우강은 아래를 보았다.

야궐과 팔황천 무인들은 이미 대야벌 깊숙이 들어간 후였다. 그들이 몰려간 곳은 서쪽이었다.

“ 우-하!”

“ 우-하!”

멀리서 광랑수호단 대원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겼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가던 그가 우뚝 멈췄다.

“ 나와!”

오른편 어둠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 숨어 있는 거 아니까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연우강은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 개자식.’

오른편에 숨어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범일승이었다.

혁세군이 연우강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아래로 뛰어내려 부하들과 함께 도망을 쳤다.

그러다가 문득 부하들과 함께 도망치면 계속 적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당한 장소가 나오자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도망치느라 여념이 없던 부하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풀숲으로 들어가자마자 땅을 파고 몸을 숨겼다. 그런 다음 부하들과 적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도망치는 부하들은 물론이고 쫓는 적도 숲을 빠르게 지나쳐 갔을 때 수색하러 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한 명.

혁세군을 없앤 연우강이 지나가면 끝이었다.

그가 가고나면 곧바로 남천문 밖으로 몸을 날려 대야벌을 떠날 참이었다. 영원히 강호에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기도 끌어올리지 않고 숨까지 멈춘 채 기다렸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 안 나오면 내가 가지 뭐.”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범일승은 그의 무기인 마판을 불끈 틀어쥐었다. 마판에 붙은 주판알은 전부 칠십개, 쉽진 않겠지만 기습을 하고도망치면 놈을 따돌릴 수 있을 터였다.

‘ 하나 둘.....’

“ 아이! 씨팔! 꼭 그렇게 해야겠소?”

막 마판을 떨쳐내려고 하는데 왼쪽 뒤에서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남녀로 보이는 자들 두명이 벌떡 일어났다.

범일승은 황당했다.

두 명이 일어난 장소는 그가 있는 곳에서 반장 거리에 불과했다. 바로 뒤에 두 명이 숨어 있는데 전방에만 신경을 쓰느라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둘이서 뭐 하는 건데?”

두 사람은 군무옥과 백자홍이었다.

“ 오랜만ㅁ에 만났잖소.”

군무옥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 조금 전에 흑랑군에게 진격 명령으 내린 놈이 너 아니었냐?”

“ 그랬소.”

군무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 부하들에게는 진격 명령을 내려놓고 넌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 전쟁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잖소.”

“ 우리가 이겼다고?”

“ 당연히 이겼지. 전투보다는 오히려 전투가 끝난 다음에 할 일이 더 많잖소.”

“ 그래서 그때는 못할까 봐 지금 하는 거야?”

“ 그때도 시간 내서 하겠지만....”

“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 대장도 시간 날 때마다 해대지 않았소.”

“ .... 한시가 급하다면서 왜 아직 가만있었냐?”

“ 대장 같으면 구경꾼이 있는 데 하겠소?”

“ 헉!”

범일승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지금껏 그는 연우강 뿐 아니라 뒤편에 있는 군무옥도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줄 알았따. 그런데 군무옥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휙!”

범일승은 벌떡 일어나 마판을 들어올렸다.

푸욱!

바로 그 순간, 군무옥의 육참낭아곤이 범일승의 심장으로 파고들어갔다.

육참낭아곤을 범일승의 심장에 박아 넣은 사람은 백자홍이었다.

“ 한 건 했죠?”

육참낭아곤을 박아 넣은 범일승을 연우강 앞으로 밀며 백자홍은 배시시 웃었다.

“ 잘하셨습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범일승을 보았다.

찔러넣은 육참낭아곤을 뽑지 않은 상태라 범일승은 살아 있었다.

“ 그날 널 죽여 버렸어야 했어!”

범일승은 연우강을 노려보며 말했다.

“ 혹시 네가 말한 그날이 우리가 금릉 연씨 세가에서 처음 만난 날을 말하는 거야?”

“ 그렇다.” “ 아무튼 너 같은 놈이 조양궁 궁주를 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야. 넌 말이야. 그날도 내 상대가 아니었어.”

연우강은 범일승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질질 끌고 갔다.

“ 대장!”

군무옥은 연우강을 불렀다.

쑥!

그러자 범일승 심장으로 파고들어 갔던 육참낭아곤이 빠져나오더니 군무옥 앞으로 떨어졌다.

“ 가는 거요?”

“ 시체가 있는 곳에서 그짓을 할 거야?”

“ 해도 되는 거요?”

“ 난 일 끝나면 바로 집에 갈 거니까 넌 이곳에 남아서 정리 좀 해.”

“ 언제 나올 거요?”

“ 나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돌아올게.”

“ 그건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오. 대장. 나팔 소린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오.”

“ 아냐, 언젠가는 없어질 거야.”

“아무튼 너무 오래 머물진 마시오.”

“ 알았어.”

연우강은 범일승의 목을 그러쥔 채로 걸음을 옮겼다.

“ 나팔 소린 무슨 말이죠?”

백자홍이 물었다.

“ 군에서는 아침마다 기상나팔을 불거든요. 처음엔 나팔 소리가 들려야 잠에서 깨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일어날 시간이 되면 나팔을 부는 것과 상관없이 소리가 들려와요.”

“ 나팔 소리가 머릿속에 박혀 버렸군요.”

“ 문제는 그 나팔 소리가 사막 폭풍 작전에서 죽은 흑랑기 천이백 명이 울부짖는 소리 같다는 거예요.”

“ 당신도 그래요?”

“ 우린 대장보다는 나아요.”

“ 독한 사람 같더니 아닌가 보네요.”

“ 그거 알아요?”

“ 뭘요?”

“ 심하게 짖는 개일수록 겁이 많다는 사실요.”

“ 그런 거예요?”

“ 겁이 나기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고 사납게 짖는 거래요.”

“ 대장도 그렇다는 거예요?”

“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여려요. 자기 가진 모든 것을 걸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죠.”

“ 그래서 전 재산을 건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거군요.”

“ 맞아요.”

“ 그럼 대장이 벌려 놓은 일 처리하려면 앞으로 바쁘겠네요?”

“ 그럴 거예요.”

“ 그럼 이럴 시간 없잖아요.”

“ 가자고요?”

“ 가긴 어딜 가요?”

“ 그럼?”

“ 앞으로 못할 거까지 전부 계산해서 몽땅 하자는 거예요.”

“ 나도 찬성입니다.”

군무옥은 백자홍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

한편.

범일승의 목을 틀어쥐고 자리를 뜬 연우강은 천천히 천상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범일승은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하지만 그는 범일승의 시체를 버리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던 그가 담대만승을 만난 곳은 천우산과 천좌산 사이의 승천곡이었다.

담대만승은 술상을 앞에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 범일승이냐?”

담대만승은 연우강의 손에 들린 시체를 보며 물었다.

“ 우리 집에 잠룡쟁패를 놓고 갔던 놈이었거든.”

연우강은 범일승의 시체를 담대만승 앞으로 휙 던졌다.

“ 그래서 복수를 한 게냐?”

“ 난 뒤끝이 아주 많은 놈이라서 그래.”

“ 그랬구나. 주선엽의 아들이라고 들었다.”

“ 그가 아주 중요한 정본데 누가 말해 준거지?”

“ 만우량이 말해 주더구나.”

“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않았겠지?”

“ 만우량은 내손에 죽었으니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 그럼 당신만 죽이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거네?”

“ 만일 네가 주선엽의 아들이란 사실을 밝히고 황실에 도움을 청했더라면 좀 더 편하게 복수를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은 게냐?”

“ 그것도 물론 생가개 봤어.”

“ 그런데?”

“ 주씨를 얻게 되면 연 씨를 잃어야 하는데, 그럼 부모님을 잃게 되잖아. 난 부모님을 두 번식이나 잃고 싶지 않았어.”

“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아무ㅤㄴㅡㅌ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다. 세 아들과 가족까지 전부.”

“ 남을 파멸시키려고 할 때는 항상 내가 파멸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거잖아.”

“ 맞다. 연우강. 그걸 생각했어야 했다. 나는 물론이고 너도.....”

슈캉!

술상 위에 올려져 있던 무적뇌화검이 허공을 단축하여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것은 무적뇌화결의 모든 초식을 하나로 합쳐, 더 이상은 결점이 없다고 하여 무결이라 이름지은 마지막 초식이었다.

콰앙!

무적뇌화검이 가슴 앞으로 날아오는 순간 연우강의 오른발이 지면 깊숙이 박혀들었다.

퓨아악!

먼저 그의 가슴에서 백여덟 개의 사망정주가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사망마립, 사망월반, 사망마비, 뇌섬이 연속적으로 쏘아져 나갔다.

까앙!

무적뇌화검은 막아서는 사망정주를 잘라내며 연우강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무적뇌화검을 막아선 사망정주의 수는 백여덟 개. 열 개를 채 잘라내기도 전에 사망마립이 담대만승의 가슴으로 박혀들어 갔다.

“ 커억!”

담대만승의 신형이 앉은 채 뒤로 물러났다.

퍽퍽퍽!

두 번째로 사망월반이 그의 전신으로 박혀들었다. 그리고 사망사화와 사망마비, 뇌섬이 연속적으로 담대만승의 몸을 뚫었다. 담대만승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 싱겁네.”

“ 싱거운 게 아니라 네가 괴물이 된 거야, 자식아.”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걸어나왔다. 붉은 옷을 걸친 미녀와 함께 걸어오는 그는 천마 제석강이었다.

“ 저분은 정신을 차린 겁니까?”

연우강은 희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 가립하는 멋진 후손을 두었군요.”

대답을 한 사랄은 희수연이었다. 희수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처음뵙습니다. 연우강입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 반가워요. 희수연이에요.”

“ 축하드립니다. 형수님. 이거 받으십시오.”

연우강은 대뜸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 뭐죠?”

희수연은 의아한 얼굴로 주머니를 보았다.

“ 세상은 무공만 가지곤 못 살거든요.”

“ 그게 무슨 소리죠?”

“ 신혼살림 치라려면 집도 사야하고 가재도구도 사야 하니까 돈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 돈이란 말이네요?”

“ 행복하게 사십시오.”

연우강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곧비로 남쪽으로 날아갔다.

“ 어디 가는 게냐?”

제석강이 물었다.

“ 엄마가 해준 소고기 볶음이 먹고 싶어서요.”

대답은 멀리서 들려왔다.

“ 여긴 어떻게 하려고.”

“ 알아서들 하겠죠, 뭐.”

“ 대야벌은 네 거야, 녀석아.”

“ 끔찍한 소리 마세요. 지금까지 싸운 것만 해도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인데 이번엔 부하들과 싸우라고요. 아까우면 형님 가지세요.”

“ 우강아!”

제석강은 재차 연우강을 불렀다. 하지만 연우강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 이십칠, 이십 팔, 이십구.....”

“ 지금 뭐 하는 거요?”

손가락에 침을 발라 가면서 전표를 세는 희수연을 보며 제석강이 물었다.

“ 보면 모르세요? 돈 세잖아요. 그런데......”

“ 말하시오.”

“ 삼백만 냥이면 얼마나 많은 돈이죠?”

“ 잘못 센 것 아니오?”

“ 한 장에 십만 냥이라고 적힌 게 서른 장이니까 삼백 만냥 맞잖아요.”

“ 정말 삼백만 냥이란 말이오?”

“ 큰돈인가요?”

“ 평민들 중 좀 산다고 하는 자들이 일년에 백 냥가량 쓴다고 하오.”

“ 그럼 좀 산다는 평민처럼 살면 삼만 년을 쓸 수 있는 돈이란 거네요?”

“ 그렇소.”

“ 호호호! 제 사부와는 달리 아주 통이 크네요. 사내가 이 정도는 돼야 하는데.”

“ 가립하는 쫀쫀했나 보구먼.”

“ 음식은 배만 부르면 되지 맛이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 전형적인 쫌팽이과였어요.”

“ 좀팽이?”

“ 한 냥을 쓰는데 최소 세 번 이상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말 다했잖아요.”

“ 허허허! 그 자식 정말 좀팽이었구먼.”

“ 가요, 우선은 집부터 사기로 해요.”

“ 어디에 살고 싶소?”

“ 아는 사람이 있는데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 그럼 금릉 연씨 세가가 금릉이니까 금릉으로 가아겠구려.”

“ 그렇게 해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싱긋 웃고는 몸을 날렸다.

*********

“ 나가!”

이숙경은 연우강을 쏘아보며 말했다.

“ 엄마!”

딱정벌레처럼 침대에 붙어 있던 연우강은 이불을 둘둘 말며 싫은 기색을 했다.

“ 도대체 언제까지 방구석만 파고 있을 거야?”

이숙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 녀석이 돌아왔을 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중간에 여러 차례 만났고 한 집에서 잠도 자고 식사를 한 적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육 년 만에 돌아온 셈이었다.

당연 녀석이 좋아하는 걸 다 해주었다.

매 끼니마다 소고기 볶음을 상에 올렸고, 몸에 좋다는 보약도 해 먹였다.

그런데 딱 열흘이었다.

열흘이 지나자 슬슬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바람이라도 쐬러 나갔으면 좋겠는데 침대에 당과라도 묻어둔 듯 허구헌 날 침대만 붙들고 싸우고 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스무 살이 넘은 어른이 그러니까 더욱 봐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산책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좀 나가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녀석은 제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꼼짝도 하지 않는 건 좋다. 적어도 속옷은 제때 제때 내놔야 할 것 아닌가. 속옷 갈아입으라고 하지 않으면 며칠이고 그대로 입고 세안은 물론이고 목욕도 하지 않는다.

옷을 ㅤㅉㅣㅅ듯 벗겨내고 욕실로 내쫓아야 비로소 고양이 세안만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온다.

“ 그동안 힘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

“ 그 소리도 이젠 지긋지긋해 녀석아. 잔말 말고 이제 네 집으로 돌아가!”

“ 제집이 여긴데 어딜 가라고 그러세요.”

“ 항주에 네 집 있잖아. 화야장으로 돌아가라고.”

“ 거긴 이제 알려저서 못 가요.”

“ 그럼 계속 이렇게 살거야?”

“ 여긴 진식이 펼쳐져 있어서 아무도 못 오잖아요.”

“ 아무도 못 온 게 아니라 떼거지로 몰려왔다.”

문 밖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가 왔는데요?”

연우강은 이불 밖으로 슬쩍 얼굴을 내비쳤다.

“ 명치홍건군 일만 명이 철포를 앞세우고 우리 집을 포위했다.”

“ 우리가 토번족인가요? 명치홍건군이 왜 와요?”

“ 연금석의 아들 연우강은 황제의 명을 받들라!”

“ 엥?”

연우강은 황당한 얼굴로 아버지를 보았다.

“ 그러게, 이놈아. 제발 집구석에서 나가라고 했잖아.”

연금석은 버럭 소리쳤다.

“ 제가 뭔 죄를 졌다고...”

“ 아무튼 나가봐!”

“ 알았어요.”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이숙경과 연금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욕실로 들어갔던 연우강이 일 층으로 내려온 건 반 시진 후였다.

그런데 그의 복장이 달라져 있었다. 검은 철립을 쓰고, 검은 장포를 걸치고, 사망궤를 걸머지고 있었다.

황실에서 나온 사자는 정원에 우뚝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 연금석의 아들 연우강은.......”

“ 한 마디만 더 하면 주둥일 찢어버릴 거야.”

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연우강이 차갑게 말하자 사자는 얼른 입을 닫았다.

“ 요점만 말해!”

“ 자금성으로 오라는 어명이시오.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연씨 세가에 이만 발의 화탄을 쏟아 부으라고 하셨소.”

“ 정마롤 그렇게 할거야?”

“ 난 명령을 받았소.”

“ 할 거냐고 묻잖아, 자식아.”

“ 하, 할 수밖에 없소.”

“ 내가 대야벌의 주인인데?”

“ 그, 그래도 어쩔 수 없소.”

“ 이름이 뭐지?”

“ 목승기요.”

“ 직책은?”

“ 병, 병부상서를 모시고 있소이다.”

“ 알았어, 가봐.”

연우강은 손을 휘저었다.

“ 다, 당장 출발하라는.......”

“ 밥은 먹고 가야 할 거 아냐, 새꺄!”

“ 기, 기다리겠소.”

“ 알아서 해.”

연우강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 또 가는 게냐?”

한편에 앉아 차를 마시던 연우강의 할아버지 연운상이 서운한 듯 입을 열었다.

“ 우리 집에 포탄을 쏟아붓겠다는 데 별수 없잖아요.”

“ 언제 올 거냐?”

“ 모르겠어요.”

“ 이번엔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노력해 볼게요. 절 받으세요.”

연우강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 그래.”

“ 밥 먹어라!”

그때 이숙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주방으로 갔다. 이제 막 볶은 소고기 볶음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 지긋지긋한 아들놈이 떠나서 속 시원하시겠네요.”

“ 그래,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시원하다, 이 녀석아.”

이숙경은 소고기 볶음을 연우강 앞으로 밀었다.

“ 이걸 다 먹으라는 거예요?”

“ 먹고 죽으라고 얼려 놨던 거 전부 볶았다. 그리고 저건 넣어 가지고 가.”

이숙경은 한편에 수북히 쌓아 놓은 궤짝을 가리켰다.

“ 엄마.”

“ 빨리 먹고 가, 인석아!”

이숙경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얼른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전 태어날 때도 그랬고, 자랄 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연우강이에요, 엄마, 다른 이름은 없어요.”

“ 나도 알아! 그러니까 많이 먹어. 그리고 술 많이 먹지 말고,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고.”

“ 다른 건 몰라도 밥 먹는 건 절대 빠트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은 참 빨리도 흘렀다.

젓가락질을 천천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릇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연우강은 아버지와 어머니께 절을 올리고 연우진과 작별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정원에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 몸조심 해!”

“ 알았어요. 엄마.”

연우강은 손을 흔들었다.

“ 이럇!”

마부의 채찍이 허공을 가르고 마차는 천천히 금릉 연씨 세가를 빠져나갔다.

연우강을 태운 마차가 북경에 도착한 것은 한 달 후였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자금성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봉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설연이 마련해 준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연우강의 식사를 책임진 사람은 두심향과 봉연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낸 후 비로소 자금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금성으로 들어간 지 사흘째 되던 날 그는 커다란 꾸러미 하나를 들고 북문을 이용해서 나왔다.

“ 연 공자!”

기다리고 있던 봉연이 연우강을 향해 달려갔다.

“ 마침 잘 왔어. 이거 받아.”

연우강은 들고 온 꾸러미를 봉연에게 건넸다.

“ 뭔데요?”

“ 몰라, 황제가 주기에 받아 왔어. 두 루주랑 나눠 가져.”

“ 가져도 돼요?”

“ 선물이라고 생각해.”

“ 고마워요.”

봉연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왔냐?”

그때 봉연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유설연이 둘 앞으로 다가왔다.

“ 무림은 어때?”

“ 넌 대야벌의 벌주가 됐다!”

“ 지들 맘대로 벌주를 시켜도 되는 거래?”

“ 원래 본인이 거절하면 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나 봐. 그런데 만장일치로 추대를 했는데도 거절하지 않았대.”  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 거기에 내가 없었으니 당연히 거절을 못하지.”

“ 아무튼 네가 벌주가 됐고, 네가 없는 동안 막장이, 아니 막 대협이 벌주 대행을 맡기로 했대.”

“ 참! 그 녀석 괜찮아졌냐?”

“ 응!”

“ 어떻게 치료를 했는데?”

“ 두연화 소저의 머리카락을 남자처럼 자르고 남자 옷을 입혔다.”

“ 나, 남자를 좋아하는 변태였냐?”

“ 아니 남자를 좋아하는 변태가 아니라 여자를 무서워하는 쪽에 더 가깝다고 보면 돼.”

“ 남장을 하는 걸로 치료가 돼?”

“ 그런 모양이야.”  보세요?]

“ 다행이네.”

“ 이제 어디로 갈 거지?”

유설연은 연우강이 지고 있는 사망궤를 보며 물었다.

“ 일단 북경에서 벗어나야지.”

“ 황제는 뭐래?”

“ 자주 연락하래.”

“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 난 동창 제독 유설연하고 아주 친하니까 내 소식을 알고 싶으면 유설연에게 물으라고 했지.”

“ 날 제독이라고 했어?”

“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잖아.”

“ 그러니까 황제가 뭐래?”

“ 아무 소리 없던데?”

“ 그럼 난 동창 제독이 된 거야?”

“ 조만간 칙령이 내려올 거야.”

“ 동창 제독이면서 무림의 주인과 친구가 됐으니까 황제로부터 버림당할 일은 없겠네?”

“ 아직 안 팼냐?”

“ 며칠 전부터 시작했어.”

“ 뭐래?”

“ 엄청 아프데.”

“ 진짜?”

“ 그런데 좋아 죽겠데.”

“ 잘됐네. 뭐.”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이제 유설연도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 뭐가?”

“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 내가 집착하는 게 있어?”

“ 네 등에 있는 궤짝 말이야.”

유설연은 연우강의 등에 있는 사망궤로 시선을 주었다.

진작부터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동안 연우강을 수없이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궤짝을 지고 있었다. 물론 궤짝이 만년오금철로 돼 있어 엄청난 가격이 나간다고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사망궤 안에는 내가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약이 있잖아.”

“ 그게 전부야?”

“ 그건 아냐.”

“ 그럼?”

“ 설연 네게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는 그런게 들어있어.”

“ 그게 뭔데?”

“ 짐이야.”

“ 나는 짐 같은 건 들고 다니지 않아.”

“ 아냐, 너도 들고 다녀.”

“ 내가 무슨 짐을 들고 다닌다는 거지?”

“ 개작두를 버리지 못하잖아.”

“ 그럼 그 사망궤가 내가 가지고 다니는 개작두와 같다는 거야?”

“ 맞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이나 삶의 짐이지. 아버지는 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짐을 지고 살고, 남편은 아내를 부양해야 하면, 부인은 남편을, 자식은 부모를...... 각자 의미는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짐을 지고 살아. 그 짐이라는 게 참으로 묘해서 다른 사람은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 하지만 본인이 지면 약간 무겁다는 느낌만 들 뿐, 들지 못할 정도는 아냐.”

“ 그 사망궤가 그렇다는 말이구나.”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년오금철로 만들어진 사망궤는 다른 사람은 허리가 휘청할 정도로 무겁다. 하지만 연우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닌다.

“ 나는 이 사망궤 안에 주선엽과 유은설 두 분의 마음을 넣었고, 연운상, 연금석, 이숙경, 연우진, 소여진, 연화 다섯 사람의 사랑을 넣었어. 그들의 마음과 사랑을 지고 다니는 거야. 그분들이 이 연우강이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살면서 안고 가야 할 짐이기도 해. 그래서 지고 다니는 거야. 난 내 삶이 끝날 때까지 나는 이 사망궤를 내려놓지 않을 거야.”

“ 그렇구나. 북경을 벗어나면 어디 갈데라도 있어?”

“ 글쎄, 일단은 발길이 닿는대로 가볼 참이야. 그리고 그거......”

연우강은 유설연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턱으로 가리켰다.

“ 황제 폐하께서 주더라.”

유설연은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안쪽에 있는 건 이미 확인했다. 연우강을 천세군왕에 책봉한다는 책서와 금인이 들어있다. 연우강이 받겠다고 하면 그는 지금 당장 주우강이 되고, 부르는 호칭 또한 저하로 바꿔야 한다.

“ 난 연우강이잖아. 없애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 왜 극구 받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 내가 말하지 않았어?”

“ 무슨 말?”

“ 그걸 받는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게 된다는 말. 아니 그분들뿐만 아니라 진짜 오랜만에 사귄 친구도 잃게 된다는 말 말이야.”

“ 처음 듣는데?”

“ 아무튼 그래서 못 받은 거야. 난 부모님과 친구를 잃고 싶지 않거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마음에 들어!”

유설연은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며 소리쳤다.

“ 뭐가?”

“ 오랜만에 사귄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주씨를 거절한다는 말 말이야.”

“ 그건 너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야. 인마. 진짜로 받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어.”

“ 뭔데?”

“ 너 같으면 개뿔 남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고 의무만 잔뜩 있는 그런 거지 같은 걸 받겠냐?”

“ 절대 안 받을 거야.”

“ 나도 그래서 안 받은 거야.”

“ 잘 가!”

유설연은 아쉬운 얼굴로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았다. 한참 동안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열었다.

“ 킥!”

유설연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신분을 증명하는 천세군왕에 책봉한다는 책서와 금인이 가루로 변해 있었다.

언제 가루로 만들었는지.

“ 삶의 짐이라...좋은 말이네.”

유설연은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대미

그리 멀지 않은 훗날.

그분이 흑랑촌의 훈장이 되겠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기대가 컸다. 검은 장포에 책이 잔뜩 들어 있을 것 같은 궤짝을 지고 나타난 그분은 척 보기에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실 흑랑촌의 사람들은 출신이 천하고 배운 게 없지만 돈은 아주 많다. 배움에 대한 한이 많았던 부모들은 자식들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켜보겠다며, 마을 한 가운데 학당을 짓고 훈장을 초빙했다.

하지만 초빙한 훈장들은 몇 달을 지내지 못하고 보따리를 싸서 떠나곤 했다. 흑랑촌 사람들이 대부분 범죄자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뭐 그들이 떠나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다만 범죄자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도망치듯 떠나는 훈장들이 서운했다.

그럴 즈음 바로 그분, 훈장님이 오셨다.

그분은 다짜고짜 훈장질을 하러 왔다고 하셨다. 마을 어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맡겼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훈장님은 글을 모르셨다.

읽을 줄은 아는데 쓸 줄을 몰랐던 것이다. 대신 장작은 기가 막히게 잘 패셨다.

그런데 그분이 웃긴 제안을 하셨다.

“ 너희들이 내게 글을 가르쳐 주면 난 너희들에게 장작 패는 법을 가르쳐 주마.”

우습게도 훈장님이 우리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도 제안을 수락했던 건 그분의 장작 패는 기술이 너무 탐났기 때문이다.

결국 그 황당한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동네 어른들께는 비밀로 하고 말이다.

그런데 글을 가르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날 집에서 밤을 세워가면서 공부를 해야, 훈자님께 한 시진 가량 가르칠 수 있었다. 전에 훈장들에게 배울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당연 엄마 마버지는 좋아하셨고, 훈장님은 극진한 대우를 받으셨다

“ 유랑아!”

유랑이라 불린 소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네, 훈장님.”

“ 이건 어떻게 된 거냐?”

“ 그건 이렇게 쓰는 겁니다. 훈장님.”

유랑은 연우강 앞으로 가서는 글을 써주었다.

“ 글을 쓰는 것도 도끼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자를 쓰더라도 목숨을 건다는 생각으로 쓰면 글에 의지가 실리게 된다. 의지를 싣는다는 건 곧 정과 기를 하나로 합친다는 것을 말하고, 거기에 몸이 함께하면 정기신이 일통을 이루었다고 하는 거다.”

“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무슨 일을 하든 목숨을 걸 듯 하란 말이죠?”

“ 목숨을 걸 듯 하라는 게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 알았어요, 사부님!”

“ 사부?”

“ 아침에 운동하는 법 가르쳐 주고, 장작 패는 법도 가르쳐 주셨잖아요. 요새는 글을 쓰는 법도 가르쳐 주고요. 그러니까 사부님이죠.”

“ 예끼, 녀석아. 사부는 무슨 사부. 그냥 약간 편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 뿐이야.”

“ 모든 일에 목숨을 걸라면서 편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건 모순이에요. 사부.”

“ 편하게 살라는 것은 목숨을 걸고 노력을 한 후에는 그 일에 대한 것은 잊고 푹 쉬라는 의미니까 모순이 아냐, 욘석아.”

“ 쉴 때도 목숨 걸고 쉬란 말이네요.”

“ 그래, 녀석아. 쉴 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는 거야.”

“ 알았어요.”

“ 내일은 뭘 가르쳐 줄 거냐?”

“ 전에 사부님이 말씀하신 책은 끝났어요.”

“ 그래? 그럼 난 더 이상 배울 게 없네?”

“ 떠나실 거예요?”

“ 더 이상 배울 게 없는데 하산해야지.”

“ 전 배울 게 아주 많은데.”

“ 지금까지 배운 것도 평생 동안 익히지 못할 수도 있는데??”

“ 정말요?”

“ 네가 천재고 운이 좋다면 서른 살 이전에 익힐 수 있을 테고, 그렇지 못하면 평생 걸릴 거야.”

“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것들이 그렇게 어려운 거였어요?”

“ 그건 두고 보면 안다. 그럼 잘들 있거라!”

연우강은 안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사망궤가 둥실 날아와 그의 등에 딱 붙었다.

“ 어마!”

유랑을 비롯한 학당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처음으로 연우강이 펼치는 무공을 본 탓이다. 더구나 유랑은 사망궤를 들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기에 얼마나 무거운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거운 걸 연우강은 손 하나 대지 않고 들어올린 것이었다.

“ 열심히 하거라.”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마을 밖으로 향했다.

흑랑촌 어귀에는 외팔이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귀노 염자생이었다.

“ 안녕히 가세요!”

“ 사부님! 안녕히 가세요.”

유랑과 학당 아이들은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오며 소리쳤다.

“ 그래!”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재미 있으셨습니까?”

염자생이 다가왔다.

“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집은 구해 놨어?”

“ 항주는 이미 이름이 너무 팔린 것 같아서 소주에 구해 놨습니다. 장원의 이름은 흰 백자에 손 수자를 써서 백수장이라고 지었습니다.”

“ 백수장.... 나쁘지 않네. 좋아 그곳으로 가자고.”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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