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저 사람이에요?”
“네.”
“영 소협은 그렇다지만, 설마 나 소협을 수하로 거둘 생각인가요?”
“사부님이 추천해 주신 분입니다.”
“물론 무공이 높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곧고 바른 사람입니다.”
“강철이라는 것이 문제지요. 결코 휘지 않아요.”
이 층에 자리한 객점 창문을 통해 나상진을 바라보면서 유옥접과 정호기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언무학은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사부님…….”
“알아서 시켜 먹어라.”
벌써 세 그릇 째였건만 언무학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요~”
점소이를 부르는 언무학의 음성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는데, 그런 그의 머리를 유옥접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쓰다듬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많이 먹어 두렴.”
“예?”
“아니다. 그래, 뭐가 먹고 싶다고?”
“오리고기요.”
“여기 구운 오리고기 좀 주세요.”
음식을 시키는 유옥접은 이 여행이 끝나고 장으로 돌아갔을 때, 언무학이 처하게 될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동정심이 생긴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학대라고 할 정도로 몰아붙이는 사람이 제자에게라고 별다르게 할까?’
사람이란 기준이 분명하고 그것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네가 정 소협의 방식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녀의 뇌리에 지난날 그녀의 동생이 했던 절규가 떠올랐다.
[언니는 이해 못해! 날 내버려 두란 말이야!]
겨우 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알아 버리고, 절망의 나락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동생의…….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네?”
“나 소협을 만나는 것은 나 혼자 하겠다는 말입니다.”
“알겠어요.”
멀어져 가는 정호기의 등을 바라보는 유옥접에게 언무학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유 사고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응?”
“사부님을 좋아하시죠? 동팔이 아저씨가 그러는데, 돌아서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는 여자는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거랬어요.”
‘동팔이란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언제 한번 보고 싶군.’
사미였던 언무학이었으니,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했다.
“어? 아저씨!”
순간 언무학이 누군가를 발견했는지 반갑게 소리를 질렀다.
***
“청수 나상진 소협이십니까?”
“맞습니다.”
“전 열호아 정호기라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들어 본 적이 없군요.”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나 소협을 찾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제 이름을 듣는 순간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대놓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말하는 정호기의 얼굴을 나상진이 빤히 바라보았다.
“명성이란 좇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입니다.”
[위선자? 나가 놈이?]
[예, 겉으로는 온갖 깔끔한 척 바른 척하던 놈이지만 놀라운 비밀을 안고 있더군요. 바로 그놈의 부인이 그놈의 친동생이란 사실입니다.]
나상진의 부인이었던 권비연을 사로잡은 후에 알아낸 사실이었고, 그것으로 나상진을 완전히 정파에서 고립시킬 수 있었다.
원래부터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었던 데다 경원시 당하던 나상진이었기에 정파에서의 입지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쉽게 유인해서 죽일 수 있었지.’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벌이는 위험한 임무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것은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권비연을 잃었다 생각한 그가 무모하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파는 답이 없어. 그렇게 싸우는 와중에도 파벌을 벌이다니.’
그 사이를 파고들어 이간질시키는 것도 정호기의 몫이었다.
당시 정파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소림, 종남, 화산이 있는 곳을 중점적으로 파괴하고 다녔던 것이다.
결국 그 세 문파의 독선적인 결정이 많아졌고, 나머지 문파와의 갈등은 점점 커졌다.
“…바르게 살고 그대 스스로를 돌보면 명성은 그대를 찾아 올 것이오.”
뭐라고 한참을 주절거렸는지 모르겠지만, 정호기는 자신만의 생각을 하느라 듣지 못했다.
“혼자만 바르다면 무엇이 소용이겠습니까? 세상에 악이 넘치는데 말입니다. 전 그 악을 무찌르고자 합니다.”
“선과 악은 양면이지만, 선이 없는 곳에 악이 없고 악이 없는 곳에 선이 없는 법입니다.”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수를 줄일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악의 길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듣던 대로 이기적인 분이었군요. 어찌 자신만 생각하십니까? 고통 받는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정 소협이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
‘젠장, 역시 말만으로는 힘들군.’
시간을 들여서라도 포섭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쉽게 가기로 했다.
-권 부인과 많이 닮으셨더군요. 부부는 닮기 마련이라지만, 남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습니다.
이 전음을 들은 나상진의 몸이 움찔했는데, 사실 나상진과 권비연은 닮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마를 앓았었는지 권비연의 얼굴엔 곰보 자국이 선명했고, 하반신도 마비되어 방에서만 생활했다.
산속에서 아버지인 나정호와 함께 생활하던 와중에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버린 두 남매는 덩그러니 세상에 던져졌다.
동생을 너무도 아끼던 나상진이었기에 그녀를 버리지 못하고 지금껏 돌보고 있었는데, 동생과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는 것이 죄라는 의식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더욱 바르고 곧은 행동에 집착하게 된 것이었다.
-무, 무슨 말씀이오?
떨리는 전음에서 나상진이 당황했다는 것을 안 정호기가 사태를 누그러뜨렸다.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나저나 융중산의 산세가 그리 아름답다고 하던데, 혹시 아십니까?”
호북의 융중산이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나상진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또 다른 협박이었다.
그들 남매가 살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웃! 뭐, 뭐야?”
순간적으로 공기를 출렁이게 만들 정도의 살기가 주위를 휘감자 소면을 먹던 이들과 걸어가던 이들이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혼자 알고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 저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저와 비무를 하시지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제가 이긴다면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진다면 없었던 일로 하지요.
하지만 만일 정호기가 진다면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었다.
-따라오시오.
***
“조용하군.”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햇빛은 간간이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것이 전부였다.
“얼마나 알고 계시오?”
“전부.”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대를 얻는 것.”
숲 속에 들어오자 정호기의 기세는 영초린을 대하던 것처럼 바뀌었다.
스릉.
나상진이 검을 빼 들고 정호기를 가리켰다.
“쉽지 않을 것이오.”
“기회를 주는 거야. 나를 죽이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살 수도 있는 기회를. 하지만 만일 네가 진다면 나를 따르겠다는 약조를 먼저 해 줘야겠어.”
정호기의 말에 나상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오.”
“웃기지 마. 청수! 이 별호를 얻게 된 것이 네 행동 때문이었나, 아니면 네 무공 때문이었나? 무공이 별 볼 일 없었다면 진즉에 사라졌을 목숨이고 별호 따윈 있지도 않았겠지. 조용히 살고 싶었다? 한 번 자문해 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정호기가 도를 뽑아 들며 몸을 날렸다.
훙~
공기를 가르며 도가 빠른 속도로 나상진을 공격했지만, 이미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옆구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쨍!
도를 거둔 정호기가 도면으로 검을 막았다 싶은 순간 이미 검봉은 어느새 그의 미간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귀령검의 무서움은 검법보다 그것을 펼치는 보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놈들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당하겠지만, 난 아니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렸지만, 밑으로 숙인 얼굴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덥석 나상진의 옷깃을 붙잡은 정호기가 냅다 던져 버리고는 공중에 있는 그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챙! 챙! 챙!
처음의 부딪침으로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은 나상진이 두 번째 부딪침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마지막 세 번째에는 몸을 아래로 이끌었다.
“웃!”
땅을 박차고 달려든 나상진의 검이 심장 어림을 노리고 쏘아졌지만, 정호기의 도가 더 빨랐다.
어른 손 두 개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넓은 도면이 검을 막았던 것이다.
쨍!
“술래잡기는… 끝이야!”
또다시 자리를 옮기려는 나상진의 눈앞으로 거대한 도가 빠르게 다가왔다.
“헉!”
놀란 나상진이 허리를 숙일 때 지나칠 것 같던 도가 그대로 멈추더니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빡!
도면에 등을 강타당한 나상진이 인상을 쓰며 다리에 힘을 주려고 하는 순간, 무식하게 큰 주먹이 그의 턱을 후려쳤다.
그렇게 나상진의 눈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으음…….”
신음과 함께 눈을 뜬 나상진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늘 무너질 걱정 없으니까 앉아.”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정호기가 하늘을 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제수씨께는 일행을 보내 보살피라 했으니 안심하고.”
걷지도 못하는 권비연이었기에 누군가의 손길은 항상 필요했고, 그것은 나상진의 몫이었다.
“인질이오?”
“인질은 무슨. 일행 중에 여자가 있고, 제수씨는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보낸 것뿐이야.”
가만히 정호기를 바라보던 나상진이 그가 마시던 술병을 빼앗아 입에 물었다.
“크으…….”
벌컥벌컥 몇 모금을 들이켠 후에야 입을 뗀 나상진이 다시 술병을 건네주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세 병의 술을 비운 후에 나상진이 입을 열었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도움이 필요했소. 난 그것을 힘들어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하지만 답답함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오. 내가 무공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 답답함이 더욱 커졌고. 그래서 되도 않는 사소한 시비에 검을 뽑아 들게 되었소. 그들을 이길 때마다 희열을 느끼기도 하였소.”
“이제 그만 탈을 벗어 버려. 자리는 내가 마련해 줄 테니까. 그리고 제수씨는 언제까지 가둬 둘 작정이야? 그게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해?”
나상진은 권비연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그것을 원해서 그런 것이라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방 안에 갇혀서 사는 것을 좋아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나와 함께 가자.”
“나를 경멸하지 않으시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과 그것에 깃든 사연까지도. 분명 비난받아 마땅한 관계이지만, 겉모습만으로 그것을 평가하기엔 사랑이란 단어는 너무도 복잡하지. 내겐 그저 제수씨일 뿐이야.”
다시 입을 다문 나상진은 날이 밝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정호기도 묵묵히 그 옆에서 함께 술을 마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