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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73화 (74/137)

73화

멀리서 들리는 유옥접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정호기가 고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듣는군.’

혈신이던 시절, 유옥접은 자신에게 불만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저렇듯 낮술을 마신 뒤에 전각이 부서져라 소리를 지르곤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시치미를 뗐었다.

부끄러움에 벌게진 얼굴을 하고 눈도 못 마주치면서 말이다.

‘몇 명이나 살아남을까? 아니, 몇 명이나 죽을까?’

만일 흑룡문이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마라문이란 이름으로 공격할 수 있으니까.

정호기가 가정호를 대상으로 꾸민 계략은 마라문을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영웅회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특히 사준우를 노리고.

그가 쓸데없이 영웅심이 강하고 현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사가장, 만금장, 그리고 종남과 화산, 거기에 개방까지. 당가는 아직 기대할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지.’

피의 축제가 시작될 것이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진 않겠지. 흑룡문 소속이란 것이 드러나지 않는 놈들을 보내고 싶을 거야. 하지만 홍여립 그놈은? 과연 그놈도 참을 수 있을까?’

***

“으음…….”

무흔의 보고를 들으며 홍여립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전각이 무너질 정도의 공방을 벌였는데, 놈은 상처 하나 없고 무영은 도망칠 기회도 찾지 못했다?”

“예.”

“정호기란 놈이 그렇게 뛰어난 놈이었던가?”

“…….”

무흔은 제법 떨어진 곳에서 관찰하고 있었기에 정호기가 내뿜은 기의 파동을 느끼지 못했었다.

“놈에 대해서 모조리 알아 와라. 천 배, 만 배로 갚아줄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무흔이 밖으로 나가자 홍여립이 무심을 바라보았다.

한쪽에 서있는 무심은 마치 잘 갈아놓은 검과 같았는데, 지금 그의 몸에서는 걸쭉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참아라. 내가 곧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니.”

무영과 무심은 형제지간이었다.

동생의 죽음에 무심은 별호를 무색하게 할 만큼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에서도 살기가 묻어나왔다.

똑똑.

“누구냐?”

“황충복입니다. 문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다.”

* * *

“안녕하셨습니까, 홍 당주님.”

홍여립이 조당을 찾아갔을 때, 조당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만악복 공손우였다.

검은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문사풍의 중년인으로 한옥(寒玉)으로 만든 부채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인자하게 생긴 여느 서당의 훈장을 보는 것 같았다.

“군사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일 년에 두어 번 보기도 힘든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에 홍여립으로서는 뜻밖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마 그놈의 처리를 군사에게 맡길 생각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정호기는 자신이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문주님!”

“아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일단 이것을 보게.”

조당이 손짓을 하자 공손우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건네주었다.

“이건 무영의 검집이 아닙니까?”

어떻게 몰라볼 수 있겠는가?

그것을 선물한 이가 바로 홍여립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이걸 어떻게?”

무영의 죽음을 목격한 무흔마저 아무런 유품을 챙겨오지 못했는데,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궁금했다.

“정호기란 놈. 생각했던 것보다 거물인 모양이더군요.”

공손우가 부채를 살랑이며 입을 열었다.

“예? 그놈이 이것을 보내온 것입니까? 어떻게? 무영은 절대 흔적을 남길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문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당시 무영이 죽지 않고 사로잡혔을 것을 염려한 발언이었다.

“홍당주님,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저나 문주님도 무영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건 무영과 관계가 없습니다. 오로지 정호기 그놈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요.”

검집이 무영의 것이건만, 어째서 무영과 관계가 없다는 것인지 홍여립으로서는 의아스러운 말이었다.

“우리 문에서 비밀리에 중원에 깔아 놓은 비밀 지부가 몇 된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예.”

홍여립 자신이 하던 일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던가?

냉백이 정파 계열의 소문파를 상대했다면, 자신은 흑도의 소문파들을 대상으로 비밀 지부를 만드는 일이었으니.

“좀 오래전에 침투를 하여 자리를 잡은 곳 중에서 인화산장이란 곳이 있습니다.”

“네? 그 인화산장 말입니까?”

무당의 턱밑에 자리한 곳이었고, 무당의 속가가 운영하는 장원이었다.

“예, 맞습니다. 홍 당주님도 모를 정도로 비밀에 가려진 곳이었지요. 그런데 그곳의 장주와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 검집이 놓여 있었습니다.”

“예?”

흑룡문으로 보낸 것보다 더 황당한 일이었다.

흑룡문의 요직이랄 수 있는 홍여립 자신도 모르는 곳을 알고 있다니?

“그놈이 어찌 알고 그들을 죽이고 검집을 놔두었단 말입니까?”

“이제 알아봐야지요.”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배후를 캐려면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와야 했다.

설마하니 정호기 혼자서 그곳을 알아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이번 일은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공손우의 말에 홍여립이 조당을 바라보았다.

“군사의 말을 따르겠다면 같이 하게 해 주겠네. 하지만 군사의 계획에 반하는 일을 하거나, 그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할 것이네. 그리고 한동안 수련동은 냉 당주에게 맡겨야 하네. 어떤가?”

조당의 말에 홍여립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영의 복수를 해 주고 싶지만, 만일 지금 내가 자리를 비운다면 수련동의 일은 모두 냉백이 책임지게 된다.’

그것이 문제였다.

미래의 흑룡문을 이끌어 갈 이가 나올 수 있는 마중마 연성 계획을 냉백에게 맡겨 두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그럴 순 없지.’

“무흔과 무심만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홍여립이 나간 후, 조당이 공손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련동을 얼씬거린다는 개방도들은 어떻게 했나?”

“일단 모른 체하고 있습니다만, 점점 깊숙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것도 의심이 가는데…….”

“개방도들의 뒤에 정호기가 있을 것 같습니까?”

공손우의 말에 조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일 놈들의 뒤에 정호기가 있는 것이라면 생각보다 일이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개방에 있는 휘에게 왜 그곳에서 개방도들이 얼쩡거리는 지 확실하게 알아보도록 지시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주님.”

“왜 그러나?”

“정말 죽여도 되겠습니까?”

“살려서 데리고 오기가 여의치 않으면 그 수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그는 어쩌면 황궁에 속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황궁이 지금 등장하는가?

“흥!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놈들이 먼저 우리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 봐줄 필요 없네.”

“정파는 아니겠지요?”

“아닐 것이네. 그놈들이 알았다면 지금까지 내버려 두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어차피 정파든 아니든 상관없지 않나? 놈은 싸움을 걸고 있고, 우리의 비밀을 줄줄 꿰고 있네. 악가장, 인화산장은 물론이고 귀접과 천예성의 일까지.”

“그렇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황궁에서 보내는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계획을 철회하라는.”

“그렇다면 우리도 경고를 해 줄 필요가 있지. 함부로 까불지 말라고 말이야!”

“그들이 정파를 자극해 먼저 쳐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다고 해도 놈들을 막아 낼 정도는 되지 않나? 정파놈들을 자극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쥐새끼가 누군지 색출하는 것과 정호기란 놈을 상대하는 것만 신경 쓰도록 하게.”

조당의 말에 공손우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흑룡문의 문주는 그가 아니었기에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황궁도 정파를 이용하거나 황궁에 소속된 고수를 보내 힘을 보태는 정도밖에 없을 것이네. 황궁이라고 무림을 핍박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겠나? 황궁도 어수선한데 말이네.”

조당의 말처럼 현 황제인 정통제는 환관 왕진의 농간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고 있었기에, 그런 판국에 무림과 척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경고를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으니 소란 피우지 말라고 말입니다.”

“자네의 우려는 잘 알겠지만, 황궁은 지금 무림에까지 손을 뻗칠 여력이 없네. 그러니 아무 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나.”

“알겠습니다.”

돌아서는 공손우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지만, 조당은 아무렇지 않았다.

‘흥! 감히 이따위로 나를 시험하다니.’

지금의 황궁은 무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조당이었는데, 실상도 그의 생각과 같았다.

황궁은 지금 무림에 관해선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으니까.

* * *

“시끄러운 놈들이 모두 가고 나니 어쩐지 허전하구먼.”

가정호와 화세걸이 데려온 무리들이 모두 떠나고 나니, 영웅회의 본거지는 다시금 침묵에 휩싸였다.

사비연의 말에 정호기가 담담히 대꾸했다.

“어차피 이곳에 머무는 날은 거의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놈들하고 싸우게 된다면 이곳은 의미가 없지. 하인들은 어찌할 텐가?”

“모두 내보내야겠지요. 어찌 되었든 이곳은 우리가 본거지로 사용하던 곳이니 만큼, 놈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버틸 수 있겠나?”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정호기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았기에 바로 대답을 하였다.

“작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들었네. 하지만 하귀, 동귀는 나 혼자로는 벅찬 놈들이라서.”

“제가 그들을 상대하겠습니다.”

그 말에 사비연이 놀란 표정으로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정말인가?”

“예.”

“흐음… 그럼 가볍게 나랑 한번 손이나 섞어 보세.”

말을 마친 사비연이 연무장으로 걸어가자 정호기가 하인들을 모두 연무장에서 내보낸 뒤에 그를 따랐다.

“조금 거칠지도 모릅니다.”

도를 뽑아 들며 말하는 정호기를 향해 사비연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나를 걱정하는 겐가?”

“건방지다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아니네. 자, 그럼 오게나.”

검을 뽑은 사비연이 허공에 검을 한 번 긋더니 정호기를 향해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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