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무엇이? 분명 혼돈지공이란 말이냐?”
“예. 분명 문주님이 보여 주셨던 그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안종익의 말을 들은 조당은 벌떡 일으켰던 몸을 다시 의자에 깊숙이 묻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내부 비밀은 물론이고 문주만 익히는 고유 무공까지 전부 알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고서야 어찌 혼돈지공을 알 수 있단 말인가?”
혼돈지공이 완성되던 날, 그것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죽였었다.
‘누구도 나가지 못했고, 누구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의 대소변을 내 손으로 치우기까지 하면서 철저히 비밀로 했거늘, 어찌 혼돈지공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자리를 비운 적도 없었다.
즉, 유성우나 그것을 파훼할 혼돈지공에 대해서 유출될 가능성은 없다는 말이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조차 불신이 생겼다.
‘나를 제외하고는 혼돈지공의 유출을 설명할 수 없다.’
조당의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나? 분명 잠을 푹 잔 것 같았는데도 머리가 무거웠어. 그리고 그때도. 술을 좀 과하게 마신 감이 있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사람이 들어왔었다는 느낌이 있었지.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사술을 시전한 것이 아닐까?’
의심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그때 내게 술을 권한 것이 누구였더라?’
먹기 싫다고 하는데도 굳이 권하며 분위기를 그쪽으로 몰아가는 바람에 수하들이 주는 잔을 계속 받았었다.
‘맞아. 군사였어.’
“문주님?”
혼자만의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핼쑥한 얼굴의 안종익이 부른 다음이었다.
“아, 수고했다. 냉 장로에게는 전갈을 보냈느냐?”
“예. 그리고 그쪽에서도 따로 전서를 띄웠다고 합니다.”
“알았다.”
자식이 죽은 것을 알게 된다면 냉획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 전서를 띄워라. 냉 장로에게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말이다.”
“예.”
안종익이 나간 이후에도 조당은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숨에 문을 정비하려고 나선 길에서 새로운 과제를 떠안은 셈이었다.
‘이미 모두 출발했거늘.’
지금 현재 조당이 머무는 곳은 무당이었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주위에서 몰려온 사파들과 하급무사들뿐이었다.
냉획을 비롯한 주요 전투 집단들은 이미 개별적으로 소림을 향해 출발한 상황이었다.
‘만일 소림을 무너뜨린다면 중원 정복의 오 할은 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걸 노리는 것인가?’
지금까지 조용한 것이 그때 뒤통수를 치려고 벼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냉가뿐인가?’
냉백이 정호기 손에 죽었다는 것으로 최소한 냉가는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만일 그것이 함정이라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 것이라면?’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온몸이 노곤한 것이 한바탕 악전고투라도 치룬 것 같았다.
조당과 같은 고수에게는 육탄전보다 이렇게 심력을 소모하는 것이 더욱 해로웠고, 자칫 하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었다.
생각을 멈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애써 한쪽으로 몰아 놓고 잊으려 했건만 다시 의심이 시작되니 터진 둑과도 같아 막을 수 없었다.
“으윽!”
머리를 부여잡은 조당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
“아니, 어째서 같이 가지 않겠단 말이냐?”
군데군데 연기가 피어오르는 파천궁의 연무장에서 정운성이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서의 제 일은 끝난 것 같습니다. 사실 문이 위험하다고 해서 도움을 드리려고 찾아온 것뿐입니다. 이제는 제 싸움을 하러 가려고 합니다.”
“네 싸움이 바로 우리 싸움이다.”
“아닙니다. 이것은 제 싸움입니다. 그리고 태력문은 앞으로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산서에서 벌어진 패권 다툼은 태력문의 승리로 돌아갔다.
물론 오도방과 싸움에 가담한 다른 문파들도 같이 싸웠기에 승리에 동참하긴 하겠지만, 주가 되는 것은 역시나 태력문이었다.
흑룡문과 전쟁을 시작한 것도 태력문이었고, 마무리를 지은 것도 태력문이었다.
그 와중에 오도방은 방주인 곽기태가 죽음을 맞았기에 외부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내부를 단속하느라 더 바쁠 것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태력문이 세력을 확장한다면 산서의 패자는 태력문이 될 것이었다.
“떠나는 마당에 감히 간언을 드리자면 문호를 넓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솔직히 태력문은 당가보다도 더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 산서를 장악하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
정호기의 말을 들은 정운성이 빙긋 웃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이미 손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그래. 생각보다 우리 문파는 그리 꽉 막힌 곳이 아니란다. 다만, 지금까지는 파천궁이나 흑룡문과 여타 다른 문파들의 눈치를 보느라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 그것에 관해서는 많은 방법을 강구하고 대비를 해 놓았단다. 그리고 오도방을 제외하고 이번 싸움을 같이 한 문파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포섭을 당한 곳이다.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생각보다 음흉한 구석이 있는 태력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만일 제가 흑룡문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항복하십시오. 또한 지금이라도 후일을 대비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음… 정녕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겠다는 말이냐?”
“힘을 더한다고 해도 흑룡문과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파가 모두 힘을 모은다면 모를까.”
“그런데도 너는 너 혼자 흑룡문과 맞서겠다고? 차라리 문에서 정파의 회합을 기다리는 것이 어떠냐? 분명 무당이 무너졌으니 그것으로 인해 여타 문파들이 힘을 모으려고 할 것이다.”
“아닙니다. 제 느낌입니다만 그러면 늦을 것 같습니다.”
“흑룡문이 아무리 힘이 강하다고 해도 중원의 정파 모두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동조하는 사파들이 늘어날 것이니 정사지간의 싸움이 되겠지만, 그렇게 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정사전쟁은 나는 정파 너는 사파, 그러니 죽여 버리겠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사태처럼 대부분 사파가 정파에 시비를 걸고 거기에 동조하는 자들이 각자 이해관계에 얽혀 지지하고자 하는 문파에 기대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정사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치고받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일이 벌어진 후에 모여든 문파들을 한 데 묶어서 각기 역할을 분담하게끔 편성해야 하고 물자와 사람을 나누어야 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정사전쟁으로 볼 때 그 기간은 빨라야 육 개월, 늦으면 일 년도 걸렸다.
물론 그 시간 동안 작은 분쟁은 있을지라도 대규모의 접전은 한 번도 없었다.
정운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번에도 분명 정파가 승리할 것이다.”
그 같은 결과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심리란 묘한 것이었다.
한 번, 두 번, 정파가 승리하자 정사전쟁에서 정파의 손을 들어주는 문파들이 더 많아졌다. 이기는 쪽에 붙어야 전쟁이 끝난 후에 떡고물이라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심리가 이번 전쟁에서도 작용을 한다면 많은 문파들이 정파에 힘을 실어 줄 것이고, 비록 무당을 무너뜨렸다고 해도 일시적인 것이라 치부할 확률이 높았다.
“저도 그리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 보아야 합니다. 저를 기다리는 의동생들도 있고 하니.”
정호기의 태도가 완강한 것을 깨달은 정운성이 결국 정호기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알았다. 대신 우리와 연락은 계속 주고받기로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파천궁을 벗어난 정호기는 왜 자꾸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혼돈지공을 펼치며 내 무공이 혈신이었을 당시와 같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불안하단 말인가?’
아무리 눈이 많아도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천추산에 가 봐야겠구나.’
다른 무엇보다 가족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
“어머니.”
빨래를 널고 있던 백난영은 갑자기 나타난 정호기를 보고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달려들어 그를 덥석 안았다.
“끄… 끄으…….”
분명 오열을 하는 것이었는데, 소리도 못 내고 끙끙 앓는 신음만 내면서 눈물을 흘리는 백난영의 모습에 정호기는 가족의 고통을 알 것만 같았다.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마음껏 울지도 못하시는구나.’
웃을 거리가 있겠냐마는,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마음껏 웃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심조심 또 조심했을 것이다.
우웅!
“어머니, 주변을 차단했으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호기야!”
넓은 영역을 감당하는 것은 아무리 정호기라고 해도 힘든 일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니,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설움과 반가움을 쏟아 낸 백난영이 진정을 한 것은 일 각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들어가자, 들어가.”
정호기를 기다린 것이 어찌 백난영뿐이겠는가.
정운룡을 비롯해 정호태와 백영호, 채진진, 그리고 권비연, 백수련은 반가움에 눈물을 흘렸고, 진청운의 아내인 독고화란과 진수수는 또 다른 의미의 반가움과 궁금함을 가지고 그를 반겼다.
언무학은 쭈뼛거리며 다가와 반가움을 표시했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그가 유일했다.
아무래도 진청운에게 무공을 배운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다.
‘아……. 어찌 전한단 말인가?’
아무리 힘들어도 진청운의 죽음을 알리긴 해야 했다.
“사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진청운의 소식을 들은 모두는 충격에 휩싸였고, 독고화란은 혼절을 했다.
그때까지도 정호기는 내공을 풀지 않았다.
한 시진, 두 시진.
드디어 한계가 찾아왔다.
절벽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운기를 하고 있던 정호기는 이곳에 온 동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뭘까?’
가족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알자 또다시 자신을 괴롭혔던 불안감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났다.
‘이곳에 도착하자 사라진 것을 보면 괜한 심려였던 모양이구나.’
“상공, 여기서 뭐하세요?”
백수련의 말에 정호기가 몸을 돌렸다.
“어찌 나오신 게요?”
만나지 못한 기간이 주는 어색함은 아니었다.
그동안 백수련의 애틋함은 더욱 커졌으니까.
“그냥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독고화란과 진수수의 슬픔에 잠긴 모습을 감당하기 힘들었기에 나왔을 것이다.
“가실 생각인가요?”
“돌아오기 위해 가는 거요.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겠소.”
소리도 마음껏 못 내고 끅끅 거리던 백난영의 모습이 떠오르자 잠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여긴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입구에 진을 만들어 두었기에 발각될 위험이 거의 없다고 하지만 이런 생활은 오래 한다면 좋을 것이 없었다.
“다녀오겠소.”
말을 마친 정호기가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