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결렬
고개를 든다.
환한 태양 아래 구름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이내 산 아래로 자욱이 모여 호숫가를 형성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천산의 절경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면모가 있었다.
종종 답답할 때면 오르던 아미산이 떠오를 정도로.
창문틀에 팔꿈치를 대고 그 위에 턱을 얹어,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음존의 얼굴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작게 투덜댔다.
"……대체 흑살마신 이 새끼는 어디 간 거냐고오."
이전에도 제멋대로인 건 알았지만, 이건 뭐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나?
그냥 확 천산을 뒤집어버려?
- 미안. 넌 내가 좋아하는 상은 아니라서.
순간 옛 기억이 떠오른 그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에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으려는 그때, 저 멀리 중원 방향으로 무언가가 포착됐다.
점점 눈이 크게 뜨이는 천수향.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내밀자, 곧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녀의 팔에 안착했다.
"오랜만이네, 호영.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매가 고개를 갸웃갸웃 흔든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은 그녀는 시선을 그 다리로 옮겼다.
서신 하나가 매여 있었다.
'연락이 올 데가 없는데?'
그것을 재빨리 풀어 확인하는 여인. 얼마 지나지 않아 천수향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
보고 또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그것을 불에 태워버렸다.
매를 돌려보내는 천수향의 표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런가. 결국 아버지가……."
***
바닥에 드러누웠다.
지금까지 이해한 다른 생물의 숫자는 13개체. 앞으로 87마리 남았다.
지금 속도로만 간다면 무난히 10년 안에 생사경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천강이었다.
'좀 더 빨리 될 수 있으면 좋았는데 말이야.'
그럼 이리 힘들게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고, 속 시원히 주먹으로 다 해결할 거 아냐.
'세상사…… 알면 알수록 더 어렵구만.'
산다는 게 참 쉽지 않다.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슥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귀였다.
"주군."
"어, 조사 좀 해 봤어?"
"예."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로 하자, 일귀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천강의 고갯짓에 일귀가 보고를 올렸다.
"현재 여울나무에서 투파창귀와 적삼혈마를 제외하면 사실상 청청이 실세입니다. 다른 이들 또한 그녀를 집중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분위기고요."
이전부터 그녀를 밀어주는 느낌은 있었다.
전생의 경험이 있는 천강과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는 성장 속도.
물론 그 아이에게도 소질은 있겠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
앞에서 이끌어줄 기연이 있어야 하고, 성장할 수 있는 물질이 꾸준히 뒷받침되어야 한다.
"투파창귀가 깨달음을 전수해주고, 여울나무의 예산 대부분이 그 아이 하나에게 집중되는 중이라는 게 진짜인 듯합니다."
매해 만년설삼 급 영약 두세 개씩만 먹어도 웬만한 마두는 쉬이 넘어설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깨달음이 현경에까지 도달한다면, 마교 내 서열 경쟁에서 능히 일필일사를 꺾고 2위의 자리를 쟁취할 수 있으리라.
일귀가 약간은 굳은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이대로 간다면…… 그녀와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전면전. 전면전이라……."
땅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긴 천강의 고개가 슥 들렸다.
"일귀. 청청과의 자리를 만들어라."
"예."
그렇게 만나게 된 두 사람.
청청이 놀랍다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에서 보자고 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도 그럴 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여울나무 숲 훈련장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라도 이 안까지 들어오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이왕이면 네 방 안에서 이야기하는 게 더 좋긴 한데, 저번에 투파창귀의 촉이 꽤 좋더라고."
"그렇죠. 아마 그리했다면 제가 먼저 나가자 했을 거예요."
역시. 저번에 그건 단순히 우연이 아니었나.
천강이 바닥에 삐딱하게 드러누웠다. 그들 주위로는 검은 장막이 펼쳐져 주위로 기척이 퍼져 나가는 것을 차단했다.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소녀에게 천강이 물었다.
"너 저번에 골목에서 나 봤지?"
끄덕.
"나인 거 어떻게 알아본 거냐?"
"음. 그냥 직감이라고 할까요. 악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요. 마치 냄새를 맡듯이요."
청청의 말에 따르면 이러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향긋한 향이 느껴지고, 죽음의 기운 같은 건 악취가 난다고.
그날은 마치 여울나무 곳곳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났는데, 유독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여 더욱 심했다고 했다.
"아마 스승님도 그걸 느끼고 되돌아오신 걸 거예요."
타고난 혈통의 능력이라는 건가.
"그런데 절 왜 보자고 하신 건가요?"
청청의 질문에 천강이 이를 환히 드러내며 웃었다.
"바로 본론이라니, 역시 무진이라도 데려왔어야 했나 보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좋을 때구만.
실력은 현경을 바라보나 아직은 풋풋한 소녀라.
세상사에 대해 찌든 자신과는 다른 모습에 살짝은 부럽다는 마음도 잠시, 천강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고는 진지한 얼굴로 이곳에 온 용건을 꺼내 들었다.
"투항해라. 그 말을 하려고 왔다."
"아……."
"싸움이 커져 전면전에 들어가게 되면, 넌 원하든 원치 않든 은원관계를 쌓게 될 거고. 싸움이 다 끝난 이후엔 그 업보 때문에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나라도 이 아일 도와줄 수가 없다.
"그러니 투항해라. 무진이를 위해서라도."
청청의 입이 다물어졌다.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전……."
"그렇다고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다. 대신 빨리 결정을 내려주면 좋겠네. 미리 말하지만, 외부에서 누가 오던 이 싸움은 내 승리야."
"후훗.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사실이니까."
천강의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작게 웃은 청청이 이내 장고에 들어갔다.
대략 이각(二刻)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굳게 닫혔던 그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스승님을 죽이지 않겠다면 응할게요."
"스승이면 투파창귀?"
"네."
"투파창귀를 살려두면 계속해서 사고를 칠 거다."
"단전을 폐하면 되지 않나요?"
두 눈에 내기를 실어 청청을 훑었다. 심안(心眼)을 통해 본 그녀의 속마음은 복수라기보다는 연민에 가까웠다.
"너 말이야……. 단전을 폐하는 건 무림인에게는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거든?"
"그럼……."
청청이 뭔가 말하려는 걸 천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네가 아직 뭘 모르나 본데, 지금 투파창귀는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샀다."
당장 가까이로는 교주인 천마부터 해서 암룡, 저 멀리는 흑도마황의 수족들인 무견과 그 일행들까지.
"힘을 잃는 순간 죽을 거다. 죽지 않아도 하루에도 수차례 암살 위협을 받겠지. 그 부분은 포기해라."
"아뇨. 포기 못 해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의견을 절대 꺾지 않을 것임을 천강은 직감할 수 있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이로군. 하아. 무진이에게 뭐라 말한다."
"무진이도 절 이해해 줄 거예요."
무진이의 스승인 흑철마괴도 투파창귀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 말이 목 밑까지 차올랐으나, 천강은 그걸 도로 삼켰다.
청청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내 의견은 그렇다. 그러니 생각을 좀 해봐라."
"……예."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자 신병이기들이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 전쟁터에서 만나느니 그냥 지금 처리하는 게 낫지 않느냐?
- 만약 현경에 올라버린다면, 제2의 투파창귀. 무저갱 때와 같은 분신을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느니라.
'뭐 그러면 궁둥이를 흠씬 두들겨 줘야지.'
전쟁터에서 만났으니 합법적으로 매를 들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몇 대 맞으면 아마 정신이 번쩍 들 거다.
- 의형제 때문에 고생이 정말 많군요, 소년. 솔직히 감동입니다.
'감동하지 마. 난 지금 굉장히 곤란하고 귀찮아 죽겠으니까.'
낮게 투덜거린 천강은 검은 옷자락을 두르고 단숨에 여울나무를 빠져나갔다.
세상사……. 참 알면 알수록 살기 힘든 것 같다.
***
붉은 비단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바닥 곳곳 또한 비단으로 내리 깔린 어느 거대한 공간.
한 사내가 땅에 이마를 조아린 채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폐하. 제발 목숨만은…… 하다못해 식솔들만이라도……!"
그러나 옥좌에 앉아 있던 노인은 말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휘적휘적 움직였다.
그 신호에 엎드린 남자의 양팔을 붙드는 병사들.
"폐, 폐하!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남자는 끌려가지 않고자 발악했다. 운 좋게 그에 성공한 그는 다시 바닥에 납작 엎드려 목소리를 드높였다.
"폐하!"
그러나 병사들에 의해 다시 끌려가고, 울부짖는 소리는 메아리마냥 점차 작아지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황제로부터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가 다가와 보고했다.
"이로써 저번에 문제를 일으켰던 관료들은 모두 처리하였습니다."
"수고 많았군. 자네도, 그리고 동창(東廠)도."
"아닙니다. 저희는 폐하의 수족.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래. 자네가 그토록 고대하던 무림 쪽 일은 잘되어 가고 있나?"
태감(太監)이 고개를 숙였다.
"예, 곧 그 끝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는 것인가?"
황제의 질문에 태감이 말을 아꼈다.
관무불가침.
관은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무림의 일은 무림인들이 알아서 하도록 둔다.
황제의 생각도 같았다.
자연의 생태는 각기 다른 법이다. 음지의 생태는 음지에서 알아서 하도록 두고, 저잣거리의 일은 저잣거리에 맡기는 게 제일 좋은 일이었다.
"무림인들은 오만합니다. 힘이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죠. 모든 게 용서가 된다 생각합니다. 당장 저잣거리만 나가봐도 약자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태감의 두 눈이 착 가라앉았다.
"언젠가는 황제의 자리 또한 그 힘으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손을 봐야 합니다. 허튼 생각 못하게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지."
황제가 고개를 들어 우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후다닥 움직여 문들을 활짝 열어젖혔다.
푸른 하늘. 그리고 그 위를 떠다니는 각기 다른 모양의 구름들.
문밖의 풍경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종손(從孫)은 찾았나?"
"찾고 있는 중입니다.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쪽 뿌리도 빨리 뽑아버렸으면 좋겠군."
업무를 마친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예를 갖추고는 그 뒤를 따라가려던 태감에게 환관 하나가 급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태감."
"무슨 일이냐?"
"흑살마신이 나타났답니다. 마교 쪽에서 급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준비해라. 이번에야말로 흑살마신을 처리하고 신교를 장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