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후둑, 후두둑.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더니 기어코 쏟아 붓기 시작했다.
메마른 분지를 적시는 비 냄새가 전장에 번진 혈향과 섞여 악취를 피워 올렸다.
“후욱… 훅…….”
거친 숨을 따라 들썩이는 어깨.
남자의 몸에 부딪힌 빗방울이 튕겨 올랐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한 쌍의 안광이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흡사 야수가 아닌가…!’
사내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잘게 떨려왔다.
사람? 아니다.
이건 차라리 한 마리 맹수에 가깝다.
수백 명의 정예 검사들을 일직선으로 꿰뚫고, 노인 앞에 우뚝 선 남자는 그와 같았다.
꿀꺽.
누군가를 마주하고 긴장한 게 얼마 만인지.
의지를 배신하고 목줄기에 솟아오른 땀이 비에 섞여 흘러내린다.
오늘 처음 본 원시 부족의 족장은 날 것 그대로의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구려.”
숨 막힐 듯한 침묵을 흔들며, 노인이 말했다.
“침공을 시작한 이유. 그리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말이오.”
노인이 질문을 건넸지만, 사내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순백색의 옷만큼이나 새하얗게 질린 자.
노인의 옆에 선 중년 사내를 흉흉하게 노려볼 뿐이다.
“……이유도 모른 채 전장에 나왔단 말인가.”
폭우 속에서 눈을 번뜩이던 사내가 한참 만에 입술을 열었다.
“그것은… 정체불명의 병력이 갑자기 북진하여 살육을…….”
“양보할 만큼 양보했고, 분노를 눌러 참으며 관용을 베풀었다. 하지만 저자는 또다시 무고한 자들을 해쳤어. 궁금한 부분이 있다면 직접 알아보라.”
그제야 사내가 노인에게 눈을 돌렸다.
‘저 눈···!’
활화산 같은 분노가 이글거리지만, 그 감정을 결코 남발하지 않는다.
이 와중에도 분노의 대상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노인의 얼굴에 짙은 감탄이 스쳤다.
“한족(漢族)의 노인이여.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다. 저자의 목숨. 난 그걸 요구할 자격이 충분하다.”
장담할 수 있다.
감정과는 별개로, 저자는 길을 막아서는 자를 용납하지 않으리라.
머나먼 북방 초원, 하늘을 뒤덮는 몽골군의 화살처럼 줄줄이 퍼붓는 폭우 속에서도 노인은 침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안 될 말이오. 이미 많은 생명이 스러졌지 않소이까. 허나 전후 사정을 말해준다면…….”
“말하면?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저자를 내줄 텐가?”
“그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떤 말을 들어도 저자를 내주지 않겠지. 그래서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사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구멍이 난 듯 비를 쏟아 붓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아야…….’
활활 타오르던 눈동자에 아련함이 스쳤다.
마지막으로 본 게 수년 전이니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으리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똑 닮은 그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하지만 삶은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결국 가야만 한다.
그리움을 갈무리한 사내의 눈에 결심이 차올랐다.
“무의미한 대화는 이쯤하지. 준비하라. 들어갈 테니.”
외모만큼이나 거침없는 남자다.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가?
구파일방(九派一幇) 세 명의 장문인과 당가(唐家)의 가주를 상대로?
‘아니겠지. 물러설 생각이 없는 거야. 방법이 없구나.’
노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급박하게 치달은 상황 끝에 적으로 마주쳤지만, 노인은 눈앞의 사내가 진실로 아까웠다.
“준비해라. 푸른 눈.”
“크르르…….”
맹수의 기운을 풍기는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그의 곁을 지키던 진짜 맹수가 위엄 어린 이빨을 드러냈다.
“……안타깝구려. 그대를 홀로 당해낼 자신이 없음을 인정하오. 손을 합치는 걸 이해해 주기 바라겠소.”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검을 뽑아 들고, 한 사내는 무복의 소매를 추슬렀다.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거한도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투지에 호응하듯 집채만 한 맹수가 한껏 자세를 낮추며 적들을 노려봤다.
“가자! 푸른 눈!”
남만(南蠻) 야수족(野獸族)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된 사천 적색분지의 대회전.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비의 장막을 뚫고, 한 남자와 한 마리 맹수가 날아올랐다.
* * *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세계의 중심이자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아로새긴 중원의 제국, 그를 둘러싼 동서남북 사방의 이민족.
천하를 논함에 있어 중원을 품어 안은 제국의 향방을 가늠하는 건 필연이라 할 수 있다.
허나 제국의 백성들은 물론이요,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를 다툰다는 모사들조차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았음을…….
천하 안에 갇혀있기에 진정한 천하를 보지 못한다.
그들이 논하던 천하는 그저 그들이 발 딛은 세상일 따름이었다.
‘하늘 아래 온 세상’은 비단 중원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적(夷狄)의 영토는 물론이거니와 서장(西藏), 천축(天竺)을 넘어 대진(大秦)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시야 너머에서는 광대한 세계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야만이라 업신여겨 온 남만의 땅.
변방에서 불어온 폭풍을 가볍게 여긴 불찰은 이 같은 협소한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혼세록(混世錄) 남천제 편
수왕기(獸王記) 발췌
삭월(朔月) 월주(月主) 백강 저(著)
1화
사냥
찌륵, 찌르륵―! 찌르…….
힘차게 울어 젖히던 풀벌레 소리가 일제히 잦아든다.
미물들의 생존 본능을 건드리는 흉포한 기운.
짐승들이 다니는 길 저편, 가까워지는 무언가가 원시림의 활기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투벅, 투벅.
그늘이 짙게 드리워서 아직은 식별이 되지 않는다.
묵직한 발소리로 미루어 덩치가 커다랗겠거니 짐작할 뿐.
침묵이 강제된 가운데, 불길한 발걸음 소리가 숲의 적막을 저몄다.
쓰스슥- 쓰슥―
뒤따르는 건 육중한 물체가 땅에 끌리는 소리다.
소리의 진원지가 동일한 걸로 보아 다가오는 존재가 무언가를 끌고 있는 듯했다.
‘……호랑이?’
수림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들썩이는 물체를 비춘다.
황색의 털을 가로지르는 검은 줄무늬.
거리가 가까워지며 윤곽이 드러난다.
저 형상, 대호가 확실하….
우두둑!
‘아냐, 놈이다!’
범이 맞긴 맞다.
산중 제왕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도 혀를 빼물고 죽어 있을 뿐.
피투성이가 된 대호의 목을 물고 있는 건 소년이 애타게 기다리던 놈이었다.
“크르릉…….”
우드드득!
무겁다고 짜증이라도 내는 걸까?
숨이 끊어진 대호의 목뼈를 화풀이하듯 짓씹는다.
숲이 드리운 음영 사이로 샛노란 안광이 섬뜩하게 번졌다.
‘크다···!’
나뭇잎 사이를 유영한 햇살이 야수의 몸뚱이를 스친다.
노란 털빛 위로 점점이 박힌 흑색 동그란 무늬들······.
표범이다.
하지만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동체는 어지간한 범 이상으로 장대했다.
하늘이 정해준 먹이사슬의 고하를 역전시킨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후우우…….’
자리는 좋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받는 위치.
맹수 특유의 누린내가 피 냄새와 섞여 훅 끼쳐 온다.
반면 이쪽의 냄새는 전해지지 않는다.
수풀 속에 몸을 숨겼고, 호흡까지 멈췄다.
어지간한 야수라면 이걸로도 충분하겠지만······.
‘부족해. 한 가지 더.’
이름을 알 수 없는 잡목 속, 소년의 눈이 소리 없이 감겼다.
‘숲의 호흡.’
모든 생명체는 고유의 기운을 지닌다.
느끼기가 어렵다뿐이지 그건 바위와 같은 무생물도 마찬가지다.
숨을 쉬고, 어우러지며, 존재한다.
소년은 자연이 내뿜는 숨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무수한 사냥을 거치며 본능적으로 몸에 붙인 기술.
눈을 반개한 소년이 주변 지형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르르…….”
‘좋아. 눈치채지 못했어!’
지척에 있음에도 저 예민한 녀석의 감각에 걸려들지 않는다.
자연의 기운에 스스로를 동화시키는 것.
단련을 거듭한 보람이 있었다.
‘얼른 먹어. 마지막 식사가 될 테니까.’
엉클어진 수풀 속.
열다섯 살 부족의 아이, ‘마른 비’가 서서히 전신의 근육을 조였다.
툭. 우지직, 으적.
‘아직··· 아직이야.’
대호를 포식하면서도 간간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다.
경계심이 누그러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좀 더 식사에 집중할 때.
식욕이 경계심을 풀어헤치는 순간에!
팽팽해진 근육이 아우성을 칠 무렵, 마침내 표범이 고개를 깊숙이 파묻었다.
‘지금!’
파사삭! 쐐애애액―!
화살처럼 쏘아진 신형이 바람을 가른다.
수풀을 뚫고 뛰쳐나간 소년의 눈에 시시각각 확대되는 표범의 모습이 담겼다.
“크아아앙!”
소년의 몸이 수풀에 스치는 순간, 표범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새하얀 발톱이 날을 세우고, 야생의 감각이 방향을 포착한다.
급선회한 야수가 앞발을 휘둘렀다.
‘반응할 줄 알았어!’
부아악―!
발톱이 공기를 찢는 소리는 섬뜩했다.
앞발을 흘리고 표범의 품으로 파고든 마른 비가 왼 주먹을 올려쳤다.
빠가각!
하늘로 덜컥 들리는 턱.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야수의 눈은 습격자를 놓치지 않았다.
“크아앙!”
쩍 벌린 아가리가 소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위로!’
회피 기동 후 체중을 제대로 싣지 못한 주먹이 먹힐 리 없다.
주먹은 치명적인 한 방을 꽂아 넣기 위한 견제타일 뿐.
공격에 성공한 즉시 소년은 하늘로 치솟았고, 표범의 이빨을 어렵지 않게 피해 냈다.
“하압!”
거꾸로 휘돈 마른 비가 오른발 뒤꿈치에 모든 힘을 때려 부었다.
뻐엉!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숲을 흔든다.
땅으로 내리꽂힌 표범의 머리가 대호의 사체에 구겨지듯 처박혔다.
‘느낌이 왔어!’
끝이다.
그저 그런 야수들은 말할 것도 없다.
멧돼지, 호랑이, 갈색 곰까지도.
마을 주변의 내로라하는 맹수들 중 이걸 맞고 버틴 놈은 없었다.
보나 마나 즉사했을 게 뻔하…!
“크… 르르…!”
‘그걸 견뎠다고?!’
큰 충격을 받은 듯 휘청이면서도 고개를 똑바로 들어 올린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저 눈빛!
살아 있는 게 문제가 아니다.
상처 입은 야수는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운남(雲南)의 짐승들은 유독 크고 강하다. 태고의 원시, 만개한 자연의 숨결을 받아들인 야수들은 북쪽 한족의 땅에 사는 놈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하지. 어지간한 힘으로는 제압하기 어려울 게다. 육체가 좀 더 성장하기 전까지는 맹수들에게 함부로 덤비지 말거라.’
할아범이 부족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신신당부한 말이 뇌리를 스쳤다.
‘성년식 전까지는 멀리 나가지 마라. 마을 주변의 짐승들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 돼. 그 너머에 있는 놈들은 아예 다른 존재들이다. 명심해라.’
어떡하나.
이미 나와 버렸는데.
심지어 거하게 한 방을 먹인 후인데.
표범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그건 달려들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도망은 불가능해.’
본능이 외친다.
아직 여물지 않은 다리로는 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들어간다!’
생각보다 몸이 빨랐다.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소년의 몸은 전진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앙!”
야수의 포효에 대기가 요동친다.
기습으로도 모자라 감히 도망치지 않고 덤벼드는 인간의 아이에게 분노를 느낀 게 틀림없었다.
네 다리가 땅을 박차고, 묵직한 돌풍이 소년을 덮쳤다.
‘정면은 이빨! 좌우는 발톱!’
간격이 순식간에 지워진다.
날카로운 이빨이 목을 물어뜯으려는 찰나, 소년이 몸을 거꾸로 뒤집었다.
부아아악―!
무지막지한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하늘을 향해 몸을 누인 소년이 야수의 배 밑으로 파고들었다.
“하아압!”
교차하는 순간, 힘껏 차올린 다리가 표범의 턱을 후려갈겼다.
“커헝…!”
또다시 턱이다.
두텁게 발달한 경추 때문에 뇌까지 흔들진 못했지만, 충격을 주기엔 모자람이 없다.
땅에 엎어진 표범이 머리를 흔들고 일어나 반전했을 때, 구릿빛 단단한 육체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바위 부수기.’
말아 쥔 주먹에 대자연의 힘이 깃든다.
비틀어 내치는 허리가 속도를 더하고, 허리춤부터 뻗어 나간 정권이 표범의 미간을 정확하게 때렸다.
뻐어엉!
부서졌다?
아니, 터져 나갔다.
미간이 함몰되고 안구가 으깨진 표범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후욱, 훅…….”
동그래진 눈동자.
소년은 자신이 해낸 걸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숨소리가 잦아들고, 곧 희열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겼어! 잡았다아아아!”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 마른 비의 환호에 울음을 멎었던 풀벌레들이 화답한다.
고요했던 숲에 활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 * *
“또 혼자 어딜 갔다 와!”
뾰족한 목소리에 푸른 대나무 숲이 흔들렸다.
허리를 짚은 두 손과 하늘로 치솟은 눈썹.
단단히 심통이 난 게 틀림없다.
집채만 한 표범을 지고 청죽림(靑竹林)에 들어선 마른 비의 앞을 날씬한 소녀가 막아섰다.
“응? 사냥.”
허탈할 만큼 간단한 대답에 소녀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왜 같이 가잔 말을 안 했냐고 따지는 거지.
그 또래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여아의 섬세한 마음을 헤아리기에 마른 비는 마냥 둔하기만 했다.
“노을아, 밥 먹었어? 이거 같이 구워 먹자.”
뚱하던 소녀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걸핏하면 혼자 밖으로 쏘다니는 마른 비에게 섭섭하지만, 그가 원래 그렇다는 걸 모를 리 없다.
서운한 마음에 투정을 부려 봤을 뿐.
마른 비의 살가운 말에 소녀가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방긋 웃었다.
“흥! 그럴까? 맛있게 구워봐, 그럼.”
풋풋한 미소 아래 하이얀 치아가 눈길을 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서 통통 튀는 활력이 묻어나고, 까만 눈동자는 총기를 띠고 반짝였다.
올해로 열다섯이 된 ‘저녁노을’은 푸른 숲처럼 싱그럽기만 했다.
“어? 비아야, 잠깐만. 이거… 표범 맞아? 왜 이렇게 크지?”
무늬로 보아 표범이 맞다.
한데 어지간한 범을 능가하는 이 덩치.
마을 주변에는 이런 녀석이 없다.
설마…….
“비아, 너! 또 마을 멀리까지 나갔구나!”
노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추궁이 담긴 눈빛에, 마른 비가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어어… 뭐… 산책 삼아 그냥…….”
“할아범이 한 말 못 들었어? 야생에는 위험한 짐승들이 득시글거린 댔잖아! 마을 주변의 놈들과는 다르다고! 성년식 전까지는 멀리 나가지 말랬잖아! 표범의 덩치가 이 정도면 엄청…!”
허리춤에 손을 짚고 줄줄이 잔소리를 읊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항상 이렇다.
노을이는 자신이 사고를 치거나 돌발 행동을 할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서 일장 훈계를 늘어놓는다.
‘끄응, 벌써 이러는데 나중에는…….’
누가 될지는 몰라도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고단하겠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어? 이게? 너 안 듣고 있지! 죽을래?!”
“아, 아냐. 노을아. 들었어. 괜찮을 것 같아서 나간 거고, 잡을 만하니까 달려든 거야.”
모를 리 없다.
노을이가 항상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걸.
잔소리를 늘어놓는 대상이 마른 비뿐이라는 점과, 왜 그녀가 염려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마음에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소년이 해맑게 웃었다.
“조심할게, 노을아. 고마워.”
그 티 없는 미소에 노을의 얼굴이 벌게졌다.
황급히 고개를 숙인 소녀가 말을 더듬었다.
“시, 시끄러. 알면 좀……. 됐어! 빨리 불이나 피워.”
“응. 이 녀석, 튼실한 게 씹는 맛이 쏠쏠할 거야.”
어찌 됐든 비아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게다가 맛있는 식사를 함께할 생각에 기분이 좋다.
“그래. 다음에는 그러지…… 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던 노을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비아야! 왼쪽!”
대화를 나누느라 잠시 잊었다.
마을을 둘러싼 푸른 대나무 숲의 터줏대감을.
놈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또한 놈들이 발을 멈춘 사냥감을 두고 볼 리 없었다.
“샤아아악!”
어둑한 댓잎 사이로 시퍼런 눈동자가 빛나고, 쫙 벌린 아가리 속에서 맹독을 머금은 독니가 새하얗게 번뜩였다.
대나무 가지인 척 의태한 채 먹이를 기다리던 놈들.
운남의 지독한 독사 중에서도 흑살사(黑殺蛇) 다음가는 맹독을 자랑하는 청죽사(靑竹蛇)가 방심한 인간의 아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