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화 (2/463)

2화

“어쭈? 이게 어딜!”

눈치를 채고 있던 걸까?

뱀 주제에 대나무 줄기를 박차다시피 달려든 놈을 보면서도 마른 비는 여유롭기만 했다.

덥석!

독니를 박아 넣으려던 푸른 뱀이 간단히 사로잡혔다.

상황 파악이 안 된 독사의 눈이 혼란에 물든 순간,

으드득―

마른 비가 살아서 펄떡이는 뱀의 머리를 통째로 물어뜯었다.

강하면 먹고, 약하면 먹힌다.

사냥감인 줄만 알았던 인간의 아이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청죽림의 최상위 포식자인 청죽사가 맛깔난 간식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어? 어어…? 비아야! 독주머니! 독주머니 제거 안 해?!”

“응? 괜찮아. 아버지가 그랬어. 약이든 독이든 전부 씹어 삼켜서 소화시키는 거라고. 그럼 다 몸에 도움이 된댔어. 그리고 이 쌉싸름한 맛에 먹는 건데 독주머닐 빼면 어떡해?”

마른 비는 벌써 몸통의 절반까지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독주머니까지 통째로 먹는 건 어른들이나 가능한 일인데……. 벌써 내독성(耐毒性)이 생긴 거야? 누가 족장님 아들 아니랄까 봐. 타고났구나, 그 무식한 몸뚱이는.”

노을은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성년식이 코앞이다.

부족의 아이들이 생존 기술을 하나라도 더 익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비아는 교육에 참여하지 않고 산과 들을 쏘다녔다.

흥미가 없는 건 돌아보지도 않는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비아를 온종일 놀기만 하는 철부지로 알고 있다.

노을이 땅에 널브러진 표범을 바라봤다.

‘저 덩치를 때려잡은 힘과 방금 전 청죽사를 낚아챈 반사 신경. 신체능력과 사냥술만 놓고 보면 또래의 누구보다도…….’

비아의 재능을 눈치챈 사람은 몇 없을 거다.

항상 밖으로 나돌기 때문에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

불을 피우기 위해 주섬주섬 움직이는 마른 비를 보며, 노을이 한숨을 쉬었다.

“교육에도 좀 참여하고 그래라. 이러니 맨날 ‘매서운 눈’ 아저씨한테 혼나지. 허구한 날 동물들이나 보러 다니고 먹는 거에만 정신이 팔려 있으니, 원.”

“어우, 왜 먹는 거 가지고 그러냐? 잘 먹어야 튼튼해진댔어. 내 덕분에 너도 맛난 거 잘만 먹으면서.”

“그건… 그러네? 아무튼 도울 테니까 조금 서두르자. 오늘 부족 회의가 있댔어.”

“또? 어른들 회의에 우리를 왜 부르는 거야, 귀찮게.”

얼굴만 봐도 알겠다.

가기 싫다는 속내가 물씬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부족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회의야. 어른들이 우리를 참석시키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보고 배우라는 거잖아. 우리도 곧 어른이 될 거니까.”

“아우, 귀찮아. 또 따분한 이야기나 할 게 뻔한데. 싫어. 난 안 갈 거야.”

노을의 설득에도 마른 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안 간단 말이지? 오늘 모임은 그믐 할아범이 여는 ‘수리의 눈’ 회의인데. 진짜 나 혼자 간다?”

“어어? 그믐 할아범? 할아범이 돌아왔어?”

휙 돌린 고개를 따라 동그래진 눈이 노을을 바라봤다.

“응, 그저께 아침에. 아마 너 사냥 나간 직후일걸?”

“왜 말 안 했어?!”

귀찮아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호기심과 설레는 마음에 두 눈이 반짝인다.

옆에 쪼그려 앉은 노을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벌떡 일어선 마른 비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뭐 해? 빨리 가자!”

“응? 지금? 야! 밥 먹고 가도 충분해!”

“회의는 일찍 가 있는 게 예의야. 늦으면 어떡해?”

“네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아이, 참. 고기 아까운데…….”

“나중에 멧돼지 잡아 줄게. 빨리 가자!”

잡아끌 듯 재촉하는 마른 비다.

못 말린다는 표정의 노을이 고개를 흔들며 따라나섰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 햇살이 번지는 숲의 정경은 평화롭기만 했다.

부족회의

삼년 차에 접어든 양질의 청죽만을 엄선해 촘촘히 둘러친 벽이다.

키 큰 어른 두 명에 달하는 높이가 시원시원하다.

천장 역시 대나무를 엮어 벽과 직각이 되게 얹고, 중앙에는 네모진 구멍을 널찍이 뚫어 놓았다.

마을을 둘러친 대나무 숲, 그 청량한 향을 머금은 바람이 머리 위의 창으로 들어와 회의실을 크게 휘돌았다.

“다 온 게야?”

그윽한 연륜이 배인 눈이다.

눈가에 패인 삶의 고랑은 험난한 세월을 견뎌낸 관록의 증거일지니.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해 노쇠해질 법도 하련만, 두 눈에 담긴 번쩍이는 정광이 여전히 한창때임을 알렸다.

“후우우―.”

화석(火石)을 부딪쳐 장죽에 불을 붙인 노인이 긴 연기를 흩뜨렸다.

운남 일대의 이변을 파악하고 금수들의 동정을 살피는 ‘수리의 눈’.

금일 회의의 주관자이자 당대 수리의 눈을 책임지는 ‘그믐올빼미’가 답변을 채근하듯 정면에 앉은 거한을 바라봤다.

“다아 왔소오, 할아버엄~. 시작하며언 되오오~.”

카랑카랑한 노인의 그것과 달리 느려 터지고 어눌한 음성이었다.

수리의 눈이 정보조직이라면, ‘바위 곰’은 부족의 전사들 중 힘세고 용맹한 자들만을 추린 돌격대.

그 수장인 ‘우둔한 땅’의 순한 얼굴이 노인을 향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사람 흉내를 내는 곰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 만큼 엄청난 덩치의 남자였다.

“2년 만인데도 여전히 느려 터졌구먼. 그 머리는 장식인 게야? 싸울 때만 두뇌가 핑핑 도나?”

“허~ 허어~ 허어어~.”

핀잔에도 좋다고 웃는다.

문제는 웃는 것조차 속이 터진다는 것.

미간을 찡그린 그믐이 다른 이를 찾았다.

“족장은 출타 중이고…… 저 미련한 놈밖에 없나? ‘눈깔’은 어디 갔어?”

“여기 있소, 할아범. 제대로 불러주면 내가 받지.”

회의실 중앙에 자리한 그믐의 시야 너머.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댄 사내가 대꾸했다.

민첩하고 영민한 부족 전사들을 모은 ‘나무표범’은 일종의 유격대와 같다.

그들을 이끄는 ‘매서운 눈’은 그 이름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특징인 사내였다.

“내가 받지이~? 눈깔이 너 이눔 시키, 갈수록 말이 짧아진다? 어린놈의 새끼가 머리 좀 컸다고!”

“나도 곧 마흔이오, 할아범. 나무표범의 수장이 된 지도 벌써 오 년째고. 제대로 부르기 싫으면 저놈과 대화하시던가.”

부족은 매사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장려하지만 전투와 사냥, 그리고 회의 시에는 엄격한 서열 구분을 짓는다.

마을 인원 대부분이 모여 있음에도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 건 각 집단의 수장들뿐이었다.

그믐이 아까의 모습 그대로 허허 웃고 있는 우둔한 땅을 힐끔거렸다.

‘저거랑 말하다간 제명에 못 죽지.’

눈썹을 확 찌푸린 그믐이 억지로 말을 이었다.

“그래, 매·서·운 눈. 우리 자랑스러운 나무표범 전사들의 수장이여. 그 나이면 대우를…… 받을 만도 하지. 옘병할 놈, 존칭도 붙여 주랴?”

“됐소. 이만 시작하시오.”

아니꼽지만 어쩔 수 없다.

못마땅한 심정을 연기 한 모금에 꾹꾹 눌러 담은 그믐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애뢰산(哀牢山)의 주인이 바뀌었다.”

“애뢰산? 애뢰산이면… ‘푸른 눈’의 새끼가 있는 곳 아니오?”

꽤나 놀란 모양이다.

말을 받는 매서운 눈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니까.

“그래. 족장의 반려수(伴侶獸) 푸른 눈. 그 새끼가 산군(山君)으로 있었지.”

“그럴 리가……. 그 녀석을 쓰러뜨린 맹수가 있다고?”

팔짱을 풀며 기댔던 등을 들어 올리는 사내의 얼굴엔 불신의 기색이 역력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리됐다. 그래서 모두 모이라고 한 게야.”

회의장을 슥 둘러본 그믐이 무언가를 깨닫고 멈칫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외곽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 꼬맹이들은 이해가 안 되겠구먼. 어디 보자…… 푸른 눈. 족히 이십여 년은 되었지, 아마?”

아스라이 떠오르는 기억.

그믐의 입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푸른 눈은 본디 애뢰산의 주인이었다. 족장은 성년식을 떠나기 전부터 녀석을 점찍었지. 그리고 마을을 나서자마자 곧장 애뢰산으로 달려갔어. 푸른 눈도 대단하지만, 그 시절의 족장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그 정도가 아니었소. 젊은 날의 족장님은. 지금이야 부드러워졌지만 그때는…….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단련한답시고 허구한 날 뚜드려 팼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오.”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떠올린 걸까?

매서운 눈이 한기를 느낀 듯 가볍게 몸을 떨었다.

“큭큭큭, 그래. 눈깔이 너나 저 우둔한 놈이나 끝까지 덤비다가 죽도록 맞았었지. 구경하는 게 꽤 즐거웠는데 말이야.”

피식 웃고 마는 매서운 눈이다.

감정 따윈 있을 리 없다.

그에게 있어 족장은 존경해 마지않는 지도자이자 듬직한 맏형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2년에 걸친 싸움 끝에 푸른 눈은 족장의 반려수가 되었단다. 녀석이 족장과 연을 맺고 떠나오자 그곳은 주인 없는 산이 되었지. 그런데…….”

푸른 눈에게 패하고 숨죽여 지내던 포식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놈들은 영험한 기운이 깃든 영산을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놈들의 푸른 눈에 대한 증오는 대단했단다. 먹이사슬 최상층에 군림하던 녀석들이 서로 싸우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뭐긴. 푸른 눈의 새끼들을 찾아 죽였지.”

“계속 반말할 거냐?! 너 이 새…!”

“우둔한 땅이랑 진행하시겠소?”

“……이런 우라질. 그래, 위대하신 매서운 눈 님의 말이 맞다. 놈들은 갓 젖을 떼거나 걸음마를 시작한 푸른 눈의 새끼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죽였지. 푸른 눈의 짝도 그때 새끼들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어. 미래의 강력한 경쟁자를 제거한 맹수들은 곧바로 살육전에 돌입했다.”

그믐이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아이들을 둘러봤다.

푸른 눈.

모두에게 익숙한 존재다.

역대 최강이라 칭송받는 현 족장의 반려수이자 운남 전역에서 손꼽히는 맹수 중의 맹수.

한없이 강해 보이기만 하던 녀석이 그런 가슴 아픈 일을 겪었을 줄이야.

감수성 풍부한 아이들의 얼굴은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 있는 핏덩이들도 애뢰산이 어떤 곳인지는 들어서 잘 알 거다.”

웅대한 산맥과 드높은 봉우리.

끝이 보이지 않는 골짜기와 몇 살인지 짐작조차 어려운 고목의 숲.

그 험난한 대자연에는 치명적인 독물들이 똬리 틀고, 사나운 맹수들이 먹잇감을 찾아 배회한다.

운남의 심장이란 비유가 아깝지 않은, 치열한 생존경쟁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전쟁터.

애뢰산은 그런 곳이다.

“실로 대단했다. 맹수들의 울부짖음이 애뢰산 전역을 울리고, 갈가리 찢긴 짐승의 사체가 하루를 멀다 하고 발견됐지. 당시 왕좌에 도전했던 맹수들은 애뢰산의 충만한 자연기를 듬뿍 머금어서 괴수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놈들이었어. 그럼에도 푸른 눈처럼 산 전체를 평정하고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녀석은 없었지. 그러던 어느 날…….”

후우우―

깊게 내뱉는 연기는 과거를 더듬는 늙은이의 짙은 회상이라.

“녀석이 나타났다.”

“푸른 눈의 새끼.”

그믐이 매서운 눈을 힐끗 보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야…….”

흉포한 맹수들이 날뛰는 험지에서 한 마리만은 살아남아 힘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성체가 되자마자 자신의 가족을 해쳤던 포식자들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녀석이 애뢰산 전역을 제패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년이었어. 과연 푸른 눈의 핏줄이라고 할까.”

“너희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다. 내가 성년식을 준비할 무렵이었으니.”

“그게 이십 몇 년이나 전의 일이에요?”

눈을 또랑또랑하게 빛내며 집중하던 아이가 물었다.

“가만있어 보자… 눈깔이 저눔 시키가 바지 자락 붙잡으며 재밌는 이야기 해달라고 찡찡댈 때였으니……. 그래, 24년 정도 된 게 맞을 게다.”

“찡찡……. 하기야 할아범이 기력을 잃고 밤일을 제대로 못 하기 시작할 때였으니 그쯤 되었겠군.”

“뭐, 뭐여? 이놈 새끼가?!”

공적인 자리지만, 또한 이토록 격의 없다.

투닥거리며 주고받는 농에 담긴 건 도타운 정이다.

나이도 잊은 채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아이들이 키득댔다.

“큭큭, 노인네. 흥분하니 진짜 같지 않소.”

“쯧. 밀림 한복판에서 얼어 뒈질 놈 같으니라고. 아무튼 군림한 기간만 따져도 20년 이상이다. 산군에 오르기 전까지 감안하면 푸른 눈의 새끼는 얼추 스물다섯이 넘지. 제아무리 강한 녀석도 그쯤 되면 슬슬 기력이 쇠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뒤편에서 손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할아범, 곧 사십 살이 되는 푸른 눈은 아직도 무시무시하잖아요.”

“그걸 질문이라고…! 야, 이 멍충아! 푸른 눈은 족장님의 반려수잖아! 부족 사람들과 반려관계를 맺은 짐승은 야생의 놈들보다 훨씬 강해지고 오래 사는 것도 몰라?!”

바로 옆에서 새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먹는 것과 싸돌아다니는 것에만 관심이 팔려 있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곧 성년식을 치러야 할 인간이 이런 상식조차 없다니…….

노을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질문을 한 소년을 쏘아봤다.

“또 너냐, 마른 비. 족장님의 아들이란 녀석이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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