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어… 어~ 비아야. 죽순 채집한다, 죽순! 곧 귀환할 아이들 먹일 죽순을 따오라고 해서…… 허허, 허허허.”
어른들이 자신을 관찰하고 평가한다는 인상을 주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믐의 양손에는 어느새 먹음직한 죽순이 잔뜩 들려 있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마른 비에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이빨에 낀 뱀 비늘을 뱉어내는 우둔한 땅을 째려봤다.
“……이름대로 논다, 이름대로 놀아. 이런 미련한 새끼. 쯧쯧, 이걸 어디에 쓸꼬.”
그믐이 혀를 차든 말든 허기가 가신 우둔한 땅은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 * *
“기분 나빠.”
쪼그려 앉은 노을은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한눈에 봐도 꽤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응? 뭐가?”
좌우로 몸을 풀던 마른 비가 그녀를 돌아봤다.
“어른들. 우릴 지켜보고 있었잖아.”
눈치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노을이다.
그믐올빼미, 매서운 눈, 우둔한 땅.
그녀는 어른들이 자신들을 관찰하기 위해 숨어 있던 걸 대번에 눈치챘다.
“응? 할아범은 죽순을 캐고 있다고 했는데?”
“후우……. 관두자, 관둬.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노을은 둔해 터진 마른 비와 달리 영리하고 사려가 깊다.
어른들이 청죽림에서 사냥하는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한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 특히나 그렇다.
엄밀히 말하면 그 자체가 기분 나쁠 만한 일은 아니다.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일인 걸 이해한다.
아이들의 적성을 파악하고, 성년식을 치를 준비가 됐는지 판단하는 것이니까.
‘비아와 같이 있는 걸 지켜보는 게 싫은 거지.’
그녀가 애꿎은 엄지손톱을 질근 깨물었다.
“좋았어! 가볼까!”
저 둔해 빠진 바보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였을 뿐인데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갑자기 쪼그려 앉은 이유는 빨개진 얼굴을 들키기 싫어서였다.
휙― 타다닥! 탓!
대나무 줄기를 밟고 오르는 소년의 몸이 금세 하늘에 가까워졌다.
푸드드득- 푸득―
청죽림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에는 철새들이 황급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다.
긴 여정에 지쳐 잠시 쉴 곳을 찾아 날아든 철새들.
청죽림의 고즈넉함에 이끌리듯 내려앉지만, 곧 화들짝 놀라 하늘로 되돌아간다.
대나무의 가지들이 독니를 드러내며 달려들기 때문이다.
의태한 채 숨죽이고 있던 청죽사들의 습격에 철새들 태반이 거꾸러졌다.
덕분에 철새가 많이 지나는 계절에는 바닥에 널린 새들을 줍기만 해도 끼니가 해결된다.
부족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에 지나지 않지만, 청죽사는 엄연히 자연계의 상위 포식자였다.
대나무 줄기를 밟아 오른 마른 비가 어느새 꼭대기에 이르렀다.
꾸구구국―
소년이 온몸의 체중을 대나무에 실었다.
청죽은 일반 대나무보다 월등히 단단하며, 그 탄력은 몇 배에 이른다.
살짝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터뜨려 버리는 우둔한 땅이 무식하게 센 거다.
마른 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대나무가 활처럼 휘어졌다.
파앗!
‘앞에서 세 번째!’
표적을 노리는 마른 비의 몸이 탄력을 받아 힘차게 쏘아졌다.
쐐애액!
대나무는 사냥감을 겨냥하는 활이며, 날아가 꽂히는 화살은 마른 비다.
특이점이 있다면 이 화살은 능동적으로 움직일 줄 안다는 것.
목표에 근접한 화살이 쏘아진 속도를 등에 업고 빙글빙글 회전했다.
“어?!”
주저앉아서 멀뚱히 지켜보던 노을이 벌떡 일어섰다.
저 움직임! 그거다!
나무표범 전사인 ‘잽싼 다리’ 아저씨의 기술.
하늘을 나는 새를 격추시켜서 아이들로 하여금 탄성을 내지르게 만들었던 그 발차기!
휘리릭―
연거푸 회전한 마른 비가 온몸의 무게를 오른발에 실었다.
쏘아진 속도에 회전까지 가미된 일격은 바위조차 깨부술지니.
머리 위로 내뻗은 발차기가 비행 중인 철새의 몸통을 꿰뚫었다.
빠아악!
견뎌낼 리 없다.
청죽사의 마수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녀석이 영문도 모른 채 땅으로 추락했다.
우수수― 콰악!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마른 비가 가까스로 대나무를 붙잡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소년은 곧 얼굴을 움찔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흉내라도 내는 걸까?
유쾌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때? 이게 바로 ‘날짐승 떨구기’라는 거다. 건방진 박새야!”
“기러기거든?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는 흉내는 참아줄래?”
대나무 아래, 허리에 손을 짚은 노을이 마른 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언제 배운 거야?”
“따라 한 건데?”
불에 구운 기러기를 정신없이 뜯던 노을은 마른 비의 답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보고 따라 한 거라고?”
“응.”
“……네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진짜라면 대단하네.”
“별거 아냐. 완전하지도 못했어. 머리를 노렸었거든.”
“타점이 흔들린 거야?”
“응. 공중이라 자세가 불안정해. 회전까지 해야 해서 정확히 맞추기가 어렵더라.”
맞춘 것 자체가 대단하다.
날짐승 떨구기는 발차기 중에서 상당한 고등기술에 속한다.
땅에서라면 모를까,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만큼 완벽하게 구사하는 자는 나무표범 전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른들이 봤으면 기겁을 했겠다. 직접 본 나도 믿기가 어려운데.”
“별거 아니래도 그러네.”
진실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건 마른 비 본인뿐일 거다.
‘비아는 관심만 가지면 뭘 하든 탁월해. 문제는 흥미를 보이는 분야가 극히 적다는 거지.’
그녀가 먹는 데에 정신이 팔린 마른 비를 빤히 바라봤다.
‘마음을 다잡고 성실히 노력하면…… 분명 산이 오빠와 걸음이 오빠도 뛰어넘을 거야.’
‘산’. 그리고 ‘안개 걸음’.
곧 성년식을 마치고 귀환할, 유력한 차기 족장 후보들이다.
산이 지닌 힘과 안개 걸음의 민첩성은 성년식을 떠나기 전부터 소년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출중했다.
야생을 헤맨 3년 동안 또 얼마나 성장했을까.
‘나도 질 수 없지.’
차기 족장 결정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과 비아가 성년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다음 해 정도가 될 것이다.
기껏해야 앞으로 3~4년.
그 안에 3년을 앞서간 산과 안개 걸음보다 강해져야만 한다.
‘부족 최초의 여 족장!’
경쟁 상대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태어났다면 족장이 되고도 남을 재목들이다.
유독 뛰어난 재능들이 한 세대에 몰렸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지.’
치열함을 즐기는 경쟁심.
불리함 따위 일절 개의치 않는 강인한 정신력.
저녁 노을의 원대한 포부가 빛나고 있었다.
“아아~ 맛있다.”
모처럼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비아의 나른한 표정을 보니 힘이 쭉 빠진다.
“새가 목적이면 나라면 돌을 던졌겠다. 왜 굳이 힘을 빼면서 뛰어오른 거야?”
마른 비의 눈이 번쩍였다.
“멋있잖아.”
힘이 빠지다 못해 땅으로 꺼질 것만 같다.
웬일로 부지런하게 움직이나 했더니 고작 그런 이유였던가.
“휴우……. 남자들이란.”
이마를 짚은 노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마을에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기러기를 뜯던 마른 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노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비아, 너…… 솔직히 말해. 평소에 그냥 아무 생각이 없지? 먹을 거랑 동물들만 아른거리고. 그치?”
“헤헤, 그렇긴 해. 근데 그게 왜?”
“사람이 없는 걸 이제 안 거야?! 족장님도 안 계시잖아!”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안 계시네? 어디 가셨어?”
노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토벌.”
“토벌?”
“응. 원강(元江) 일대에 문제가 생겼어. 포랑족(布郞族) 마을 세 개가 사라졌다더라. 지원에 나선 납서족(納西族)의 수색대도 소식이 끊겼고.
“뭐? 어떤 놈이 그런 짓을…!”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짐작 가는 놈이 있는 것 같아. 지원 요청이 와서 족장님이 바위 곰, 나무표범, 수리의 눈에서 차출한 전사들을 이끌고 직접 가셨어.”
“흐음……. 토벌이라. 근데 원강이 어디야?”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원시림 지역이잖아.”
“북동쪽이 어느 쪽이지?”
“부, 북동쪽은…! 야! 너 아직도 방향 구분하는 거 몰라? 그러게 교육을 들어오라니까! 성년식이 시작되면 어쩌려고…!”
또 시작이다.
마른 비는 줄줄이 터져 나오는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바로 한쪽 귀를 잡혔다.
“이게? 또 안 듣지, 너!”
“아! 아파! 노을아! 들었어, 듣고 있다구!”
마른 비의 귀를 붙잡고 씩씩대던 노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런 거에 통 관심이 없었으면서 원강이 어딘지는 왜 물어? 비아, 너… 설마?”
노을의 얼굴이 굳어지자 마른 비가 황급히 말했다.
“아냐, 아냐! 아버지가 직접 나가실 정도면 위험한 놈이라는 뜻이잖아. 토벌에 끼어들 정도로 무모하진 않아. 그냥 궁금해서.”
그제야 노을의 얼굴이 풀어졌다.
제가 말해놓고도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혹시라도 쓸데없는 생각 마. 어른들의 예상대로 흉수가 ‘그놈’이라면 분명 각성한 상태일 거야. 자연기를 다룰 줄 아는 놈이라구.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우리가 마주치면 도망도 못 칠 거야.”
“응, 응. 알아. 그래서 원강이 어느 방향이라고?”
“……집요하게 묻는 게 이상한데? 약속해, 너. 토벌에 끼지 않겠다고.”
“그렇게 무모하지 않다니까. 약속할게.”
그제야 노을이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안 가르쳐줄 거야. 네가 교육시간에 와서 직접 배워.”
추적
끼익- 끽, 끽, 꾹―
밀림 속으로 정체 모를 짐승들의 울음이 번진다.
어지럽게 얽힌 진녹색 밀림은 햇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짙게 드리운 음영 속에서 하얀 눈자위가 깜빡였다.
‘청죽림 외곽. 하얀 바위가 연못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직진.’
북동쪽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 알고 있었으니까.
한심하다는 눈초리쯤은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빠르게 이동했을 때 10일 정도.’
성인 전사들의 기준이다.
전속력으로 달려왔음에도 2주 넘는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멀었나, 싶을 때쯤 진녹색 자연의 방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야! 확실해!’
그렇다. 방벽이다.
까마득한 고목들과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숲은 자연이 낳은 하나의 방벽과 같았다.
“토벌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지, 구경에 대해서 말한 적은 없다, 노을아?”
대단한 계략이라도 성공시킨 것처럼 소년은 키득댔다.
“근데… 이제 어디로 가면 되지?”
마른 비가 숲을 올려다보며 중얼댔다.
* * *
“볼수록 기분 나쁜 곳이야.”
얽히고설킨 나무 덩굴이 몸을 가려주는 나무 위.
뒤엉킨 고목의 가지들 사이로 한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쓱
손으로 훔친 얼굴, 좌측 광대를 가로지른 상처가 사납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 줄로 그어진 흉터.
인간의 짓이 아니었다.
짐승.
야생 짐승의 앞발이 긁고 간 상처가 분명했다.
돋아난 새살이 상처의 패인 부분을 메우고 있었다.
아문 부위는 고르지 않고, 덮인 새살은 지저분했다.
상처를 제때 처치하지 않고 방치했는지, 덧난 부위가 못 견디게 간지러워 보였다.
“이거… 느낌이 더러운데.”
부족의 전사, ‘잽싼 다리’가 홀로 중얼거렸다.
꾸룩, 꾹, 꾹, 꾸―.
건너편 가지 위, 한참을 올라간 지점에서 검은머리딱새들이 쉴 새 없이 종알댄다.
느낌이야 어찌 됐건 나쁘지 않은 광경이다.
근처에 위협적인 존재가 있다면 지저귐을 그칠 테니까.
당장 눈에 띄는 위험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분명히 이쪽이었는데…….”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고대의 숲.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의 군집은 한 뼘의 햇빛도 허용치 않았다.
딱새들이 쉬고 있는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햇살을 만날 수 있으리라.
숲의 맑은 호흡과 꽉 들어찬 자연기.
풍성한 동식물들의 활력.
원시림이 토해내는 힘찬 생명력과 짙게 내리깔린 어둠은 도통 어울리지가 않아 기괴한 느낌을 줄 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종적이 묘연해서 내뱉은 말이지만, 그럴 리 없다.
부족의 엄선된 정예, 나무표범.
정신없이 내달리는 중이었지만, 짐승의 소리와 사람의 비명을 착각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사람, 그것도 놀란 여인의 외침이 분명했다.
“이거… 쉽게 찾긴 힘들겠는데.”
집결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활한 지역을 부족의 전사들만으로 샅샅이 훑다 보니 넓게 펼친 형태가 돼버렸다.
정해진 시간마다 약정된 장소에 모여 정보를 취합하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수색한 지역은 원시림 전체 면적의 2할에 불과했다.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돌아보겠지만…….”
사람이 우선이다.
집결시간을 맞추지 못할지라도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
문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은… 합류해야겠군.”
집결 장소로 간다.
그리고 토벌대와 합류해 이 부근을 집중적으로 수색한다.
드넓은 숲을 혼자 헤매는 것보다 그게 훨씬 빠를 터.
‘제발 그때까지 무사하길.’
잽싼 다리가 마음을 굳혔다.
‘위험지역이니 소리를 죽이고 이동을…….’
“꺄악!”
“?!”
홱 돌아간 고개가 정확한 방향을 잡았다.
‘이번엔 놓치지 않아. 반드시 구한다!’
위치가 발각되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 다급한 몸짓이 가지를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