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마른 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헉…….”
너무 넓다.
원시림이라고 해서 넓을 것은 예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처음 제대로 발 디딘 운남의 야생은 규모와 깊이가 마을 주변의 숲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슬슬 지치는데…….’
2주에 걸친 이동.
정신없이 밀림을 헤맨 이틀.
맹수를 피하기 위해 매사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체력이 고갈되는 속도는 더욱 빨랐다.
‘잠깐……. 뭔가 이상해. 아무리 조심했어도 지금쯤이면 한두 마리는 만났어야 하는데…….’
원강까지 올 때는 맹수의 서식지로 짐작되는 곳을 피해 다녔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긴 원시림 한복판이다.
숲에 진입하고도 이틀 동안 위험한 짐승을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맹수들이 씨가 마른 듯한…….’
으지직, 으적. 콰득!
‘응?’
익숙한 기척이다.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짐승이 무언가를 포식하는 소리.
바짝 긴장한 마른 비가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피…!’
수풀을 한 자락 걷어내니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피투성이가 된 무언가가 발밑에서 꿈틀댔다.
‘원숭이?’
동공이 풀린 채 경련하는 건 원숭이였다.
마을 주변에 사는 놈들보다 한 뼘가량이 커서 놀라긴 했지만.
‘한두 마리가 아니야!’
고개를 들자 공터 곳곳에 혀를 빼문 원숭이 사체가 널려 있었다.
족히 백 마리는 될 듯하다.
사나운 맹수가 원숭이 무리를 습격한 게 틀림없…….
‘어?!’
아니다.
공터 중앙에는 엄청난 덩치의 곰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개미 떼가 먹이를 뜯듯 곰을 밟고 올라 포식하는 짐승들.
시커멓게 달려든 원숭이 떼가 곰의 살점을 게걸스레 뜯어먹고 있었다.
‘원숭이가… 곰을 사냥했다고?!’
원숭이 중에서도 대형 종들은 사냥을 통해 고기를 먹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놈들도 최상위 포식자에 속하는 곰을 사냥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더군다나 기이하게 덩치가 크긴 해도 저기 있는 놈들은 분명 소형 종이다.
과일을 좋아하고, 기껏해야 곤충이나 벌레를 잡아먹는 녀석들이 곰을?
백 마리 가까운 동족들이 죽거나 죽어가고 있는 현장에서, 사냥에 성공한 녀석들은 만찬을 즐기듯 곰 고기를 포식하고 있었다.
‘빠져야 돼!’
곤두선 감각이 경종을 울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당장 놈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마른 비는 본능적으로 발을 물렸다.
빠직!
‘아…!’
항상 이렇다.
주의를 빼앗긴 순간, 치명적인 실수가 터진다.
부러진 나뭇조각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자, 수십 쌍의 눈이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하, 하하……. 안녕? 방해해서 미안해. 계속 먹어.”
“키이…….”
제길.
뭘 하려는지 알 것 같다.
식사 중에 그렇게 환영해줄 필요까진 없는데.
“키야아아아악!”
“으와아아아!”
마른 비는 파도처럼 달려드는 짐승들을 뒤로 하며 달렸다.
* * *
쒜에엑!
사내의 육신이 바람을 가른다.
번갈아 교차하는 두 다리는 눈으로 온전한 형체를 잡아내기 힘들 정도다.
잽싼 다리.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쾌속한 질주였다.
‘이쪽!’
어지럽게 얽힌 나무들을 어렵지 않게 밟아 오른다.
휘리릭!
앞을 가로막은 수풀마저 유려한 공중제비로 뛰어넘고,
처척.
조그만 공터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그가 사방을 훑었다.
‘없어?’
비명의 진원지가 이곳인 건 확실하다.
한데 아무것도 없다?
잽싼 다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끼기끼…… 끼익!”
후두둑―
흔적을 살피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검은 그림자 십여 개가 한꺼번에 떨어지며 사내를 덮쳤다.
“이게 웬…? 차핫!”
정체? 중요치 않다.
동요할 이유도 없다.
명백한 기습.
그렇다면 적이고, 마주 쳐낼 뿐이다.
사내의 왼발이 단단한 지면을 디뎠다.
호선을 그리며 하늘로 올라간 오른발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습격자들에게 쏘아졌다.
대지를 딛고 몸을 고정시킨 왼발.
숲을 주파할 때보다도 빠르게 뻗어 나간 오른발.
발 하나면 족하다.
십여 개에 이르는 그림자가 떨어져 내린 속도만큼이나 거세게 튕겨 나가 지면을 나뒹굴었다.
“끼, 끼이… 키긱…!”
“원숭이?”
잽싼 다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역시 네놈들이구나! 여자는 어디 있나!”
마치 짐승들이 말을 알아들을 거라는 듯 추궁하는 말투였다.
“끼익, 끽!”
고통에 찬 몸짓으로 바닥을 구르던 원숭이 한 마리.
간신히 머리를 들어 올린 녀석이 허공을 쳐다보며 울음을 토했다.
“캭…!”
나무 꼭대기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놈이 가지를 박찼다.
“한 놈이 더 있었나!”
지면을 디딘 전사의 다리가 깊게 구부러졌다.
말아 쥔 주먹과 굽힌 양팔은 머리 위에 머물렀다.
“후우웁―.”
한껏 들이마신 숨이 허파를 채우는 동안, 눈동자는 놈이 나아갈 궤적을 가늠했다.
“타앗!”
들어찬 숨을 토해내며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찬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니, 그의 몸은 까마득한 공중을 유영하고 있었다.
‘짧다…!’
방향은 제대로 잡았으나 비거리가 부족하다.
애초에 놈이 있던 위치가 지나치게 높았다.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스쳐 지나는 짐승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웃어? 망할 원숭이 새끼가…!’
“카압!”
허공에 뜬 몸이 급격히 기운다.
모자란 거리?
까짓것, 회전을 통한 원심력으로 메우면 그만이다.
솟아오른 추진력이 급작스런 회전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휘리릭!
곧게 내뻗는 오른발은 하늘의 비조를 격추할 대지의 창이라.
땅을 거니는 피조물이 날짐승을 사냥하기 위해 고안한 비격(飛擊)이 허공을 갈랐다.
빠아악!
섬전 같은 발차기가 머리 위를 가로지르던 짐승의 척추를 끊었다.
뿌드드득!
척추뿐이랴.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숲의 적막을 흔든다.
도망치던 마지막 한 놈이 입에서 피를 뿜으며 추락했다.
왼팔로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잽싼 다리가 추락하는 원숭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날짐승 떨구기라는 거다. 건방진 원숭아.”
그의 입이 통쾌한 미소를 그렸으나 그것도 잠시뿐.
“꺄아악!”
또다시 들려온 여인의 비명에 잽싼 다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사사삭- 샤샥―
등 뒤.
왼쪽과 오른쪽.
머리 위의 나뭇가지들을 타고.
시커먼 짐승들이 지칠 줄 모르고 쫓아온다.
“저리 가!”
빠악!
“캭…!”
벌써 몇 마리째인가.
이 정도 당했으면 물러설 만도 하련만.
놈들은 한이라도 맺힌 듯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이놈들, 원숭이가 맞는 거야?’
쉴 새 없이 발을 놀리며, 마른 비가 얼굴을 찌푸렸다.
원숭이는 본디 겁이 많은 동물이다.
식구가 맹수에게 잡혀가도 주위를 맴돌며 꺅꺅댈 뿐 달려들지 못하는 녀석들이다.
한데 이런 공격성과 난폭함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눈…!’
자세히 보니 놈들의 흰자위가 충혈된 것처럼 빨갛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무언가에 씐 듯 달려드는 이유가 저것 때문인 것 같았다.
‘이놈들… 포기할 것 같지 않아. 이대로 달리면 끝이 안 나는데……. 그냥 싸워? 이길 수 있을까?’
마을 주변의 원숭이들이라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도 않았을 거다.
아니, 애초에 원숭이가 겁 없이 달려들 리도 없다.
하지만 이놈들은 공격적인 건 둘째치고 하나하나가 크고 무거웠다.
이빨과 발톱은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다.
‘이래서 할아범이…!’
그믐이 성년식 전까지 마을 주변을 벗어나지 말라고 한 이유를 마른 비는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사사사삭―
잠시 머리를 굴리는 사이, 지형을 무시하고 나무 위를 가로지른 놈들이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과 좌우에서 달리는 녀석들이 교묘하게 진로를 조정하고 있다.
장애물이 많아서 빠르게 달리기 힘든 쪽으로.
‘그냥 느낌인가?’
아니다.
좌측에 따라붙은 놈의 말려 올라간 입꼬리.
네가 달려봐야 얼마나 가겠냐는 듯 비웃는 것만 같았다.
“이게?”
마른 비의 눈썹이 꿈틀댔다.
니들이 지금 날 몰아넣었다 이거냐?
좋다.
어차피 따라잡힌 거, 제대로 한 번 붙어보자.
아직 어리지만 마른 비도 남자다.
맹수도 아니고 원숭이 따위에게 몰리고 있다는 자각이 들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우씨! 나 산 너머의 표범도 잡은 남자야!”
반전하여 달려들려는 순간, 그의 결심을 바꿀 비명이 울렸다.
“꺄아아악!”
“어?!”
마른 비가 달리던 자세 그대로 덜컥 멈췄다.
‘비명? 여자?’
홱 돌아간 고개가 방향을 잡았고, 머리는 빠르게 상황을 되짚었다.
‘토벌! 어른들은 토벌을 나왔다고 했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한 놈들이기 때문에! 그럼?’
아버지는 말했다.
사람은 돕고 지키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고.
우리가 운남의 부족들 중 가장 강한 힘을 지녔기 때문에 힘없는 이들을 도와야만 한다고.
그래서 성인 전사들이 토벌을 나온 거다.
그리고 지금, 위험에 처한 누군가가 있다.
그러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무조건 구해야 한다!
비명을 듣자마자 마른 비는 반응했고, 진로를 틀었다.
그러나 그 잠깐의 머뭇거림을 놈들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캬아아악!”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놈들이다.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가야 돼! 비켜! 이것들아!”
치솟는 신형.
눈부시게 뻗어 나가는 팔다리!
포위망을 뚫기로 결심한 소년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 * *
“후욱, 후욱……. 끝이 없군.”
또다시 여인의 비명이 저 멀리서 잦아들었다.
계속해서 위치가 이동한다.
원숭이 무리에 납치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게 확실했다.
“망할 놈들.”
잽싼 다리의 주변에는 십여 마리에 이르는 원숭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벌써 세 번째 습격이다.
그가 가까이 있는 놈을 홧김에 툭 걷어찼다.
‘이 정도 놈들은 얼마가 덤비든 문제가 안 돼.’
납서, 포랑 등 다른 소수부족의 전사였다면 손도 못 쓰고 쓰러졌을 거다.
날카로운 손톱과 뾰족한 송곳니.
힘이 부치자 매복을 준비하는 영리함.
행동불능이 될 때까지 집요하게 달려드는 독기에는 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런 놈들이 아닌데…….’
원강 일대의 원시림에서 오래도록 터 잡고 살아온 원숭이 무리는 본디 순한 놈들이다.
먼저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이들에게도 관대한 편이었다.
그런 놈들이 지금은 무언가에 쫓기듯 악에 받쳐 있었다.
달려드는 녀석들의 눈동자를 메운 단 하나의 감정.
그건 분명 감당할 수 없는 공포였다.
“역시… 그놈 때문인가.”
부족의 토벌대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원흉이자, 광활한 원시림을 며칠째 헤매고 있는 이유.
놈을 생각하니 절로 이가 갈렸다.
“찾기만 해봐라. 포를 떠서…!”
적개심을 불태우는 잽싼 다리.
그를 움직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꺄아악!”
‘이번엔 반드시 따라잡는다.’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전사의 뒤로 원시림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 *
마른 비의 눈이 주위를 훑었다.
‘없어!’
숲 한복판에 있는 공터.
어렵사리 추격을 뿌리치며 비명이 울린 곳까지 달려왔건만.
아무것도 없다.
여인은커녕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아니, 있다.
공터에 들어서자마자 스멀스멀 피어나는 기척.
십여 마리의 원숭이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키이익- 끽!”
포위망을 뚫으며 쓰러뜨린 놈들만 스물이 넘는다.
하지만 뒤를 쫓아오는 놈들은 아직도 수십에 이르렀다.
“이런…….”
사방이 막힌 마른 비가 탄식을 흘렸다.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아직 접하지 못한 풍경과 보지 못한 동물들이 수두룩하다.
무엇보다 그믐 할아범의 이야기 속에 나온 북쪽의 땅.
한족이란 부족의 영토에 가보고 싶다.
그곳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넓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데요?’
그 질문에, 그믐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비아 너, 숫자 어디까지 셀 수 있냐? 아마 네가 알고 있는 숫자로는 셀 수도 없을걸?’
‘우와아아! 정말요?’
할아범은 아이들이 커다란 반응을 보이면 즐거워한다.
그가 기뻐하길 바라서 크게 놀란 척했지만, 자신은 벌써 열다섯 살이다.
이제는 어릴 때처럼 할아범의 허풍에 마냥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 오천 명쯤 되려나?’
셀 수도 없기는 무슨!
인간이 개미 떼인가? 그렇게 많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고 과장을 한 거겠지.
실감이 안 나는 숫자지만, 얼마 전에 만(萬)이라는 숫자까지 배웠다.
만의 절반, 오천.
그것만 해도 엄청난 대부족이다.
부족 식구 전체를 합쳐도 오백 명을 겨우 넘는데, 그 열 배에 달하는 숫자가 아닌가.
굉장히 많다고 했으니 아마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운남도 돌아봐야 하고, 나중에는 한족의 땅에도 갈 거야!’
무엇보다 아까 들었던 여인의 비명.
위험에 처했을 그녀를 구해야만 한다.
절대 여기서 쓰러질 순 없었다.
“거기서 비켜. 분명히 말하는데, 덤비면 다칠 거야.”
마른 비가 주먹을 움켜쥐고,
“끼이익- 캭!”
웃기지 말라는 듯 짐승들이 소년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