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사냥의 기본은 은밀함과 기습이다.
최적의 위치, 적절한 시점을 택해 급습을 감행한다.
무언가가 자신을 노린다는 걸 사냥감이 깨달아도, 그때는 늦는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사냥꾼이 내지른 비수가 숨통을 끊기 때문이다.
‘……너무 많아!’
하지만 이건 사냥이 아니다.
일 대 다의 사투일 뿐.
마른 비는 뛰어난 사냥꾼이지만, 싸움의 경험은 없었다.
아, 산 너머의 표범을 잡을 때는 공격을 주고받았었지.
허나 그게 전부다.
그 외의 사냥감들은 그의 급습에 반응하지 못했고, 일격에 거꾸러졌었다.
‘윽…! 이놈들, 이상해. 왜 도망치지 않지?’
장기전.
다수의 적.
부족한 싸움 경험.
힘겨운 요소는 많지만, 마른 비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건 물러설 줄 모르는 원숭이들의 태도였다.
“끼익, 캭!”
생존 본능에 충실한 짐승들은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덤비지 않는다.
사냥을 위해 달려들었다가도 동료들이 죽어 나가면 꼬리를 말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그런 게 없었다.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달려든다.
생존이 최우선의 가치인 야생의 세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뭐야, 너희! 왜 이러는 건데?!”
내지른 주먹이 두개골을 부수고, 올려 찬 다리가 갈비뼈를 분쇄한다.
팔꿈치를 수평으로 긁으니 원숭이 세 마리가 한꺼번에 튕겨 나갔다.
싸움 경험이 없다지만, 그믐이 찬탄을 아끼지 않았던 재능이다.
크고 사납다 해도 원숭이 따위에게 밀릴 마른 비가 아니었다.
“윽…!”
하지만 너무 많다.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놈들 때문에 상처가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집요하게 눈을 노리는 통에 공격도 주춤해졌다.
압도적인 힘을 지닌 곰이 사냥당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만히 서 있다간 당하고 말 거야. 위치를 이동하며 싸워야 해!’
하나하나는 별것 아니다.
사방을 에워싸고 달려드는 공격이 무서울 뿐.
해법을 찾아낸 마른 비가 포위를 뚫으려는 순간,
“꺄아악!”
‘비명?!’
꽤 거리가 있지만, 처음에 들었던 여인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다행히도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쉴 새 없이 손발을 쏟아내면서도 마른 비는 정확한 방향을 잡았다.
“꺄악!”
‘뭐야? 가까워졌어?!’
원숭이들의 손에 잡힌 게 아니었나?
아니면 잡힌 채 이리로 끌려오는 건가?
상황을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목소리다.
여인은 분명 이리로 오고 있었다.
‘일단 뚫어야 해. 그리고 비명이 들린 쪽으로 뛰는 거야!’
마른 비가 날아오르려는 찰나,
“키이아아악!”
가뜩이나 난폭하던 원숭이들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눈이…!’
원숭이들의 눈은 처음 봤을 때부터 충혈된 것처럼 빨갰다.
그 눈이 더욱 시뻘겋게 물들었다.
마치 눈자위가 피를 빨아들인 것처럼.
원숭이들은 괴성을 지르며 광기에 가까운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갑자기 왜?’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드는 짐승들.
마른 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위험해!’
위기를 감지한 마른 비가 이를 악물었을 때.
쉬아악―!
공기를 헤치는 한 줄기 파공음이 흘렀다.
빠바바바박!
현란하게 터져 나오는 주먹과 발.
뒤를 잡힌 원숭이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여긴 뭐가 이렇게 많아?”
무력의 수준이 다르다.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할 정도로 강하거나 각성을 이룩한 놈들이라면 모를까.
부족의 일선에서 뛰는 전사의 힘은 원숭이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괜찮소? 위험했….”
여인의 비명을 따라잡던 중, 공격받는 인간의 기척을 느끼고 황급히 달려온 참이다.
포위망을 헤집은 잽싼 다리가 눈을 끔뻑였다.
“……내가 헛것을 보나? 이게 웬……. 비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아저씨! 그게…….”
“이놈의 자슥이!”
꽈앙!
“악!”
휘둥그레졌던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은 건 한순간이다.
성큼성큼 걸어온 잽싼 다리가 마른 비의 머리통을 호되게 후려쳤다.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꼬맹이가 여기가 어디라고! 마을 멀리 나가지 말라는 말 못 들었나! 죽고 싶어?!”
버럭 화를 내는 잽싼 다리의 호통에 마른 비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해요, 아저씨. 너무 궁금해서 그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위험할 줄은 몰랐다.
마을 주변의 맹수들을 펑펑 눕히고, 산 너머의 표범까지 잡은 후엔 자신감도 붙었다.
고작 원숭이 떼에게 쫓길 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고개를 푹 숙인 마른 비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잽싼 다리는 그런 마른 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궁금할 만하지.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고, 힘이 붙으며 자신감도 생겼을 테니. 사실, 내가 뭐라 할 처지는 못되는군.’
자신도 그랬다.
열여섯이었나?
날짐승 떨구기를 처음 성공시켰던 날.
마을 주변에 있는 흑곰을 발차기 한 방에 눕히고, 더 이상 못 잡을 짐승은 없으리라 확신했다.
자신뿐이겠는가.
지금 내로라하는 전사들은 어린 시절, 어른들의 눈을 피해 한 번씩은 마을 멀리 나가본 적이 있다.
대부분이 규격 외의 맹수들을 맞닥뜨리고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돌아왔지만.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에 자유로이 운남을 누빈 건 족장과 각 집단의 수장들 정도다.
그들도 나중에는 어른들에게 걸려서 호되게 혼이 났지만.
그런 그들이 어른이 되자 자신은 안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엄한 얼굴로 주의를 주니, 실상을 아는 노인들은 뒤에서 킥킥대기 바빴다.
“사실… 얼마 전에 산 너머에 사는 표범을 잡았거든요. 대호를 가뿐히 물어 죽이던 녀석인데…….”
마른 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흐렸다.
그리고 잽싼 다리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산 너머? 대호를 가뿐히 물어 죽이는 표범? 설마 삼정산의 주인을 말하는 건가?’
마른 비의 말을 듣고 떠올린 건, 몇 년 전 삼정산 일대를 제패한 표범이었다.
놈은 고유의 이름이나 수식어가 붙을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맹수다.
한데 그 녀석을 쓰러뜨렸다고?
어림없는 소리!
놈은 자신이 상대하더라도 꽤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강하다.
단련을 게을리하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열다섯 꼬맹이가 사냥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어디서 조금 강한 녀석을 만났나 보군.’
가만. 그럼 밖으로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인데…….
잽싼 다리는 한마디 더 하려다가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앞으론 절대 이러지 말거라. 나랑 만났으니 망정이지, 네가 잘못됐으면 족장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느냐.”
마른 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가 주위를 둘러봤다.
기묘한 일이었다.
붉은 눈을 번뜩이며 마른 비에게 달려들던 원숭이들이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기라도 하듯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언가에 위축된 듯 연신 몸을 움찔거리면서.
그제야 마른 비도 이상함을 느끼고 짐승들을 살폈다.
“어? 아까는 죽기 살기로 덤비던 녀석들이…….”
“아직은 느끼기 힘들겠지.”
아이의 의문을 풀어주는 건 어른의 몫이었다.
“잘 봐라, 비아야. 이것이 투기(鬪氣)다.”
광기 어린 흉포함을 드러내던 짐승들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잽싼 다리와 눈이 마주친 놈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발작이라도 하듯 부들부들 떨었다.
압도적인 기세로 적들을 찍어 누르는 것.
잽싼 다리는 부족 정예 전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느껴져. 마치 보이지 않는 기운이 공기를 짓누르는 듯한……. 이런 게 가능하다니…!’
마른 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잽싼 다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이놈들은 정상이 아니야. 맹수라도 이 정도 힘의 차이를 보이면 도망치기 마련인데. 역시 ‘그놈’ 때문에…….”
그 순간, 대치상태를 깨는 신호탄이 울렸다.
“꺄아악!”
‘비명! 근데… 다시 멀어졌어? 점점 다가오고 있었는데?’
마른 비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끼, 키익…… 캬악!”
무언가에 떠밀리듯 격렬하게 발버둥을 치던 짐승들은 마침내 몸을 구속한 사슬을 풀어헤쳤다.
자유로워진 원숭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런…!”
눈살을 찌푸린 잽싼 다리가 빠르게 말했다.
“내가 맡는다! 싸움에 가담하지 말고 덤비는 놈들만 쓰러뜨려라, 비아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네다섯 마리의 원숭이들을 날려 보냈다.
“키이이익!”
놈들은 광기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정면으로는 힘들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한꺼번에 뛰어오른 원숭이들이 하늘을 덮고 쏟아져 내렸다.
“잘못 판단했군.”
허나 안타깝게도 공중전은 잽싼 다리가 가장 선호하는 전투의 형태다.
그가 씨익 웃으며 땅을 박찰 때, 그림자 하나가 따라붙었다.
“음?!”
“어떻게 가만있어요? 그럴 순 없죠!”
소년은 외쳤고,
“빌어먹을 꼬맹이가 말은 오지게도 안 듣는구나!”
어른은 인상을 찡그렸다.
“타핫!”
어쩔 수 없다.
뛰어든 이상 함께 간다.
머리를 아래로 뒤집은 전사가 쾌속한 발차기를 쏟아냈다.
“얍!”
다부진 기합성은 황홀한 비상의 전주다.
놀랍게도 마른 비는 잽싼 다리의 동작을 그대로 구현했고, 눈부시게 뻗어 나간 대지의 창이 하늘을 덮은 짐승들을 격추했다.
“키악!”
“칵…!”
‘이럴 수가! 날짐승 떨구기?!’
우수수 추락하는 원숭이들 사이로 전사의 눈이 커졌다.
착지까지 안정적으로 마친 마른 비가 그를 돌아봤다.
“어때요, 아저씨? 제법이죠?”
“너… 언제 그걸? 제법인 정도가 아니라…!”
깜짝 놀란 잽싼 다리가 입을 열었지만, 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꺄아악!”
아까보다 더 먼 곳에서 비명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런…! 너도 저걸 따라온 거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비아야. 우선은 따라잡는다!”
“네, 아저씨!”
정황상 원숭이들이 여인을 강제로 끌고 다니는 건 확실해 보인다.
간간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그렇고, 뛰어난 전사가 아닌 이상 놈들에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럼 아까는 원숭이들이 이리로 접근하다가 아저씨를 보고 도망간 걸까?
모르겠다.
상황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일단은 따라잡아야 한다.
두 사람이 황급히 숲으로 뛰어들었다.
* * *
“후욱, 훅…….”
커다란 동굴이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숲속.
을씨년스런 고목들로 둘러싸인 동혈이 시커멓게 입을 벌린 채 마른 비와 잽싼 다리를 맞이했다.
‘저기다!’
느낌이 온다.
저 안이다.
여인을 납치한 놈들은 저기로 기어 들어간 게 분명했다.
‘그냥 진입하는 건 위험해.’
매복까지 하던 놈들이 손 놓고 자신들을 맞이할 리 없다.
분명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지이익-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잽싼 다리가 옆에 있는 나무에 무언가를 새겨 넣었다.
“비아야, 잠깐 여기서 대기한다. 집결지가 멀지 않아. 내가 합류하지 않았으니 전사들이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을 거다. 중간중간 표식을 남겨놨으니 토벌대 인원들이 오면 그때…….”
“꺄아아악!”
“빌어먹을!”
상황이 숨 가쁘게 돌아간다.
놈들이 저 안에서 여인에게 해코지를 하는 게 분명했다.
토벌대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느림보!”
“캬아앙!”
나무 위, 여태껏 나서지 않은 채 조용히 잽싼 다리의 뒤를 따르던 생명체가 떨어져 내렸다.
잿빛을 띤 백색의 털.
눈가를 가로지르는 검은색 털이 이채롭다.
물기를 머금은 까만 눈은 사슴의 그것처럼 순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설치류는 물론이고 뱀까지도 포식하는 육식동물이다.
잽싼 다리의 반려수 ‘느림보’가 오소리답지 않게 큼직한 몸뚱이를 가누며 벗의 옆에 섰다.
“오랜만이야, 느림보!”
마른 비가 인사를 건넸으나 잽싼 다리는 둘을 재촉했다.
“느림보, 상황은 알지? 우리끼리 먼저 가야 해! 준비됐냐?”
“컁!”
“비아, 너는…….”
여기 두고 간다?
안 된다.
언제 짐승들이 또 나타날지 모르지 않나.
따로 두어도 괜찮을 상황이라면 진작 마을로 돌려보냈을 거다.
‘안에 뭐가 있을지는 몰라도…….’
뭐가 있든 느림보까지 함께하는 이상,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아 하나 정돈 빼낼 수 있을 거다.
“……함께 들어간다. 단, 뒤에서 우릴 따라와라.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 지시를 따라야 해. 약속할 수 있겠니?”
“네, 아저씨.”
마른 비가 굳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두 명과 한 마리.
한 치 앞도 구분키 힘든 어둠 속으로 세 개의 그림자가 빨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