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느림보, 좌측으로 붙어라. 내가 우측으로 간다.’
19년을 함께한 사이다.
의사소통은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거야 원. 새카맣군.’
빽빽한 수림이 태양의 빛을 차단한 숲.
동굴 밖으로 나가도 어두운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동굴의 안쪽은 훨씬 더 심했다.
눈앞으로 들어 올린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깥의 어둠이 그리워질 줄이야.’
잽싼 다리가 진입 전에 보아둔 동굴의 크기를 가늠하며 오른손으로 벽을 더듬었다.
이윽고 손이 닿자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야생의 짐승들은 밤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미약한 빛을 동공에 끌어모아 어둠을 밝히는 ‘밤눈’은 살아남기 위한 필수 능력이었다.
눈을 뜨자 어둠에 적응한 눈동자가 서서히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했다.
‘비아가 따라올 수 있을까.’
싸움은 서툴러도 사냥에는 익숙한 마른 비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등 뒤의 소년을 확인한 후, 잽싼 다리는 고개를 꺾었다.
왼편의 동굴 벽.
그의 지시를 기다리는 느림보의 형체가 보였다.
‘느림보. 우리가 먼저 간다.’
마른 비에게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남긴다.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짐승이 발을 맞춘 듯 하나가 되어 나아갔다.
‘낙엽 가누기.’
몸이 긴장하면 필연적으로 힘이 들어가고, 힘이 들어가면 내딛는 발걸음이 소리를 흘린다.
부족의 선조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창안해 낸 신체 이완의 기술이 잽싼 다리의 몸에서 불필요한 긴장과 힘을 덜어냈다.
슥, 스윽-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은 느림보의 그것을 닮았다.
사냥태세에 돌입한 느림보의 고요한 움직임을 모방한 ‘오소리 딛기’다.
작은 소음도 흘리지 않는 한 쌍의 그림자가 동굴을 깊게, 깊게 파고들었다.
‘소리가…!’
뒤따르던 마른 비의 눈이 커졌다.
무수한 사냥을 거치며 나름대로 소리를 죽이는 법을 터득했지만, 미세한 소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잽싼 다리의 발걸음에선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마른 비가 교육에만 참여했다면.
숙련은 먼 일 일지라도 기술의 원리만큼은 이해했을 거다.
어쩌면 그의 재능으로 보아 꽤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지도.
하지만 마른 비는 날짐승 떨구기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부족의 기예를 본 적이 없었다.
‘멈춰.’
마른 비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앞서가던 잽싼 다리가 살며시 손을 들어 올렸다.
‘……피 냄새!’
한순간 짙은 혈향이 코끝을 찔렀다.
사달이 난 게 틀림없었다.
‘서둘지 마라.’
잽싼 다리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전사다.
마음은 이미 동굴 안쪽으로 치달았지만, 드러나는 행동은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천천히.’
슬며시 불어오는 동굴 특유의 눅눅한 바람이 피 냄새를 실어 나른다.
망막에 맺히는 흐릿한 상(像).
눈앞에는 꽤 커다란 공간이 있는 듯했다.
간신히 형체를 구분하는 정도로는 행동을 취하기 어렵다.
왼손과 오른손에 하나씩.
발끝으로 땅을 더듬은 잽싼 다리가 작은 돌멩이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벽에 부딪혀 불꽃이 이는 순간에…!’
비아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다.
느림보는 알아서 따라올 거다.
잽싼 다리의 양손 손목이 짧게 꺾이며 시간차를 두고 돌멩이를 쏘아 냈다.
쉬- 쉭!
왼쪽과 오른쪽.
전면 왼편으로 던진 첫 번째 돌멩이가 벽에 부딪힐 때, 그는 이미 네 발짝을 내디딘 후였다.
‘보이는 모든 걸 눈에 담고 기억해라!’
적들의 배치, 지형, 기절했거나 혹은… 죽어 있을 피랍자(被拉者)의 상태.
앞으로 움직일 동선까지도.
찰나에 번뜩이는 두 번의 미약한 빛에 기대어 활로를 연다.
잽싼 다리가 자연기를 두 눈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내디딘 네 걸음 이후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딱!
첫 번째 불빛.
산처럼 쌓인 하이얀 물체는…… 인골이었다.
딱!
두 번째 불빛.
둥그런 동굴 중앙에 거꾸로 매달린 물체들.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사람의 시신을 타고 선혈이 점점이 흘러내린다.
망자를 농락하듯 온몸의 살점이 엉망으로 뜯겨 있었다.
마치 나중에 먹을 식량을 저장해놓은 듯이…….
먹다 남긴 사람의 몸이 괴기스런 분위기를 토해냈다.
“헉…!”
마른 비가 신음하듯 숨을 삼켰다.
어두워서 잘못 본 걸까?
아니다.
방금 그건 착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난생처음 보는 끔찍한 광경에 소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미친……!”
입을 뚫고 나오는 소리를 억누를 수 없다.
여인의 비명을 듣고 잠입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었다.
경악, 비통, 허탈, 분노…….
역전의 용사인 잽싼 다리조차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에 잠시 평정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였어야 했다.
그것이 어디든지 간에.
“캬악!”
잠시 정신을 놓았던 그가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운 느림보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잽싼 다리가 앞쪽으로 몸을 빼냈지만…… 너무 늦었다.
덥석!
거대한 손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반사적으로 자연기를 끌어올려 온몸에 둘러쳤지만, 왼쪽 어깨를 파고드는 육중한 무언가를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콰악!
“크아아아악!”
십여 개에 달하는 날카로운 이빨이 잽싼 다리의 어깨를 짓이겼다.
물어뜯긴 어깨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러운 숨결에 숨이 막힌다.
빠지직! 콰득!
살점과 근육이 갈가리 찢기고, 어깨뼈가 통째로 부서졌다.
맨정신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누르는 건 불가능했다.
“아아아악!”
퍽! 퍽! 퍼퍽!
자유로운 오른손.
자연기를 집중한 주먹으로 어깨를 물어뜯은 무언가를 가격해 보지만, 덧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자세가 뒷받침되지 않고 체중이 실리지 않은 주먹은 그저 허망한 발버둥일 뿐.
콰드득, 콰득!
“끄아아아!”
잽싼 다리의 고통에 찬 비명을 즐기듯 어깨를 문 입의 끝자락이 말려 올라갔다.
‘이, 이게 뭐야…!’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모두가 얼어붙은 찰나의 틈.
홀연히 나타난 무언가가 잽싼 다리 아저씨를 물어뜯었다.
크다.
저 앞에 있던 아저씨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질 만큼.
시커먼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캬아악!”
상상도 못 했던 상황에 굳어버린 마른 비보다, 운남의 야생에 익숙한 느림보가 정신을 차리는 게 빨랐다.
이대로 두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이빨을 드러낸 느림보의 주둥이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야생의 본능.
대적 불가능한 맹수를 마주쳤을 때 도망을 권고하는 몸의 신호.
생존을 위한 본능적 지침을 무시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혼으로 이어진 벗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캬악!”
퍽!
시커먼 무언가에 부딪힌 느림보가 속절없이 나뒹굴었다.
“캬악! 캭!”
퍽! 빠악!
구할 수 없다.
벗의 어깨를 산산조각 내고 있는 정체불명의 그림자는 이빨을 들이댈 수 없을 정도로 강고한 벽이었다.
느림보의 눈가에 절망이 피어올랐다.
‘우,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야!’
투기라고 했던가.
아저씨가 내뿜은 기세에 수십 마리의 원숭이들이 옴짝달싹 못 하는 걸 봤다.
어렴풋이 느꼈던 무형의 압박.
그때와 같다?
아니다.
한층 더 농밀할 뿐만 아니라 전신을 후벼 파듯 날카롭다.
등골을 훑는 끔찍한 전율.
투기에 더해진 야생의 살기(殺氣)가 마른 비의 육신을 속박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본능적으로 터져 나온 기합이다.
아니, 기합보다는 필사적인 절규에 가깝다.
목에 핏줄이 서도록 소리 지른 후에야 마른 비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아저씨에게서 떨어져어어!”
“?!”
마른 비가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는 그림자.
새카만 어둠 속에서 시뻘건 빛 두 개가 번쩍였다.
“이야아아압!”
쩌렁 울리는 고함은 가슴을 짓누르는 두려움의 방증이다.
하지만 굴하지 않는다.
층층이 겹쳐진 압력을 밀어내며, 소년은 전진했다.
부우우웅―
가까워지니 보인다.
느림보를 날려 보냈던 건, 쇠 방망이 같은 앞발이었다.
횡으로 덮쳐오는 살의의 파도.
황급히 몸을 낮추자 허벅지보다도 두툼한 앞발이 공기를 긁고 지나갔다.
“타아앗!”
소년이 습득한 단 하나의 기술.
초저공에서 뻗어 나간 날짐승 떨구기가 시커먼 어둠을 강타한다.
그런 줄만 알았다.
뻐어어억!
‘아…!’
동굴의 천장이 뒤집힌다.
아니, 어디가 천장인지도 모르겠다.
시야에 들어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가 왈칵 떨어져 내렸다.
풀썩.
어둠이 내려앉았다.
“비, 비아야!”
정통으로 맞았다.
힘없이 나가떨어진 모습으로 보아 십중팔구 정신을 잃었을 거다.
이대로는… 다 죽는다.
잽싼 다리의 판단은 빨랐다.
콰드득!
“크으으…악! 느림…보! 뛰어!”
어깨뼈가 완전히 박살나는 고통 속에서, 전사가 울부짖었다.
“?!”
그게 무슨 말이냐.
너를 두고 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두고 가면 벗은 무조건 죽는다.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그럴 순 없다.
느림보의 조그만 얼굴에 떠오른 건 최초의 항명(抗命)이었다.
“가…! 가란 말이다! 저 어린 녀석을 죽게 할 셈이냐! 비아를 물고 뛰어라! 가서 전사들에게 알려! 이, 이대론… 크악! 셋 다 죽는다!”
찰나의, 하지만 영겁과도 같은 망설임.
주마등처럼 스치는 벗과의 추억이 발목을 잡지만, 고민은 짧았다.
지난 19년간 잽싼 다리가 느림보를 보며 배웠듯 느림보 또한 그를 보며 성장했다.
위험했던 순간순간마다 벗이 일깨워준 건 신속한 결단의 중요성이었다.
“캬… 악!”
피를 토하듯 끊어지는 대답이 동굴을 울리고, 느림보는 자기보다 덩치가 큰 소년의 목덜미를 물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벗을 돌아본 짐승의 눈에 뿌연 물기가 차올랐다.
“그르릉…….”
그 순간.
잽싼 다리의 어깨를 짓씹던 그림자가 느림보를 향해 돌아섰다.
‘알아들었어!’
둘의 대화를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도주하려는 느림보를 잡으려 한다.
끔찍한 고통의 와중에도 잽싼 다리는 적의 의도를 파악했다.
“차앗!”
뿌지지직!
물린 어깨를 강제로 잡아당긴다.
왼편 상반신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깜짝 놀란 적이 정신을 수습하기 전에.
두 다리를 적의 머리로 짐작되는 부분에 교차하여 걸었다.
“하아앗!”
으드드득!
어차피 살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푸릇한 생명을 살릴 시간을 이 목숨으로 벌 뿐.
생의 끝을 맞이하여 결단을 내린 전사의 투혼이 칠흑 같은 어둠을 불태웠다.
* * *
뚝, 뚝…….
“허억, 컥! 허억….”
오른 다리마저 잃은 잽싼 다리가 동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여기까진가…….’
명백한 힘의 열세.
스스로 생각해도 장할 정도로 오래 버텼다.
‘이 정도면 충분해…….’
성년식 기간 중 수십 차례 속도와 민첩함을 겨뤘다.
종국에는 뒤처진 녀석에게 느림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당시에는 반 장난으로 지었지만, 19년을 불러온 벗의 소중한 이름이다.
그 이름과 달리 느림보는 재빠르고 날쌔다.
비아를 물고 있지만, 지금쯤이면 토벌대와 합류했을 터.
‘사람 일이란… 정말 모르는 거군.’
이런 음침한 곳에서 홀로 죽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을, 또는 운남의 어디가 되었든지 간에 느림보와 부족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히 눈 감을 줄만 알았다.
‘뭐, 괜찮은 인생이었다.’
후회는 없다.
다만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과 염려가 발목을 잡을 뿐.
“쿨럭! 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맞은편에 앉아 그의 오른 다리를 으적으적 씹던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인. 네가 납치한 여인은 어디에 있지? 죽은 건가?”
그림자가 상반신을 곧게 세웠다.
어두컴컴한 형체.
얼굴로 짐작되는 부분에 말려 올라간 건 입꼬리가 맞는가.
“꺄아아악!”
그림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이 동굴을 울렸다.
“이런, 빌어먹을…!”
잽싼 다리.
영광된 부족의 전사.
수십 년간 운남을 누벼온 자유로운 영혼이 낭패 어린 표정으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