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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8화 (8/463)

8화

토벌

화르륵!

말린 나무 속살을 두르고 진액을 듬뿍 먹인 횃불이 타올랐다.

짙게 밴 어둠이 황급히 눈을 가리며 물러난다.

오랜 세월 적막한 어둠만이 부유하던 동굴에 빛과 온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뚜벅, 뚜벅.

토벌대 본대보다 한발 앞서 동굴을 탐색한 수리의 눈.

보고를 위해 대기 중이던 검은 수리 전사 ‘은빛 여우’가 동굴에 갓 진입한 장대한 체구의 남자를 맞이했다.

“족장님.”

묵수(墨水)가 스민 듯 검은색 선 굵은 눈썹이 강렬하다.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

야생 짐승의 갈기와도 같이 풀어헤친 머리칼.

날 것 그대로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화룡점정은 어둠을 뚫고 빛나는 한 쌍의 눈이었다.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족장이라 불린 자.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통로에 버려진 한 구의 시신 앞에 몸을 숙였다.

“……잽싼 다리. 내 형제여…….”

몸 곳곳의 살점이 뜯긴 채 온전한 부분이라곤 머리뿐인 시신이었다.

왼편 상반신과 오른 다리는 뜯겨 나가 형체도 보존할 수 없었다.

담이 약한 자라면 몇 번이고 구토할 모습의 시체를, 남자는 힘주어 끌어안았다.

“네가 먼저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떠나다니…….”

꾹 눌러 감은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것은 혈육과도 같은 친인을 잃은 자의 가슴이 토해내는 울음이자, 산산이 부서진 심장이 내뱉는 애달픔의 편린이라.

남자는 진한 슬픔으로 먼저 간 형제의 넋을 위로했다.

슥-

볼까지 맞댄 채 주검을 소중히 끌어안았던 남자가 시신을 조심스레 눕혔다.

상반신이 온통 피로 얼룩졌지만 개의치 않는다.

눈감은 형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남자가 물었다.

“……어찌 된 건가.”

감정을 수습한 절제된 말투.

하지만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억지로 눌러 담은 비통함이 살갗을 파고들어 혈관까지 스몄음을.

흙으로 덮인 표면 아래 고요히 들끓는 용암과 같이 남자는 소리 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은빛 여우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나무에… 그어진 표식이 갑작스레 방향을 틀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집결지로 오는 도중에 무언가를 만난 듯합니다.”

“홀로 추적해왔단 말이군.”

“네. 앞서 살해당한 두 명의 경우와 같습니다.”

이쯤 되면 명백하다.

유인.

어떤 방법인지는 몰라도 놈은 부족의 전사들을 하나씩 유인하여 처리하고 있었다.

“천만다행인 건 비아는 무사합니다. 추적 중이던 형님을 만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위험한 순간이 닥치자 느림보에게 비아를 맡긴 거겠죠. 비아는… 아마도 몰래 마을을 떠나온 게 아닐지…….”

잽싼 다리의 시신 근처에는 마른 비가 누워 있었다.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고른 숨소리로 보아 위독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후우… 보나마나 그렇겠지. 이 말썽꾸러기 녀석. 비아의 걸음으로 여기까지 오려면 빨라야 2주. 마을이 난리가 났겠군.”

남자가 마른 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도의 한숨과 부드러운 손길.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한 부정(父情)이었다.

“비아가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놈을 마주친 것 같다.’, ‘의식을 잃은 채 실려 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땐 정말이지……. 후우… 이런 건 나를 안 닮아도 되는데. 아버지가 날 키울 때 이런 심정이었겠군.”

은빛 여우가 남자를 흘깃거렸다.

“……족장님께선 훨씬 더 하셨다고…….”

남자는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대량의 인골은 포랑과 납서겠지?”

“크흠. 네, 복식과 착용한 장신구로 보아 그들이 맞습니다.”

부족의 토벌대에 앞서 포랑족과 납서족의 수색대가 원시림을 수색했다.

그들은 사라진 포랑족 세 개 마을 생존자를 찾기 위해 원시림에 들어왔으나,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소식이 끊긴 그들을 찾아달라는 납서족의 요청에 의해 부족의 토벌대가 파견된 것이다.

원숭이 무리와의 첫 격돌.

부족의 사상자는 전무했고, 원숭이 무리는 전멸했다.

하지만 포랑과 납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의 무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습격을 받았다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터.

족장이 우려했던 바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이놈들……. 첫 싸움 이후로는 우릴 피해 다녔어.”

“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이제는 확실합니다. 그저 도망치는 거라고만 여겼는데, 철저히 계획된 회피였어요.”

잽싼 다리의 시신은 엉망으로 훼손되어 있었다.

이 어두운 동굴에서 산채로 뜯어 먹힌 채 홀로 죽어가며,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부족의 족장 ‘너른 하늘’이 범의 그것을 닮은 호안을 들었다.

“숲에 숨어들어서 우리가 흩어지길 기다린 거다. 이 넓은 원시림을 뒤지려면 우리로선 인원을 분산할 수밖에 없지.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 유인해서 잘라 먹은 거야. 하나씩, 하나씩.”

“정황상 그렇기는 한데… 여전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래 봤자 짐승일 뿐인데…….”

은빛 여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잊었나? 이미 수식어가 붙은 놈이다. 각성한 놈들이 어떤지는 너도 잘 알잖아.”

“물론이죠. 성년식 때 대망(大蟒)에게 멋모르고 덤볐다가 죽을 뻔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경우는 힘이나 민첩성 같은 물리력이 발현된 경우가 아니라서……. 그믐 할아범에게 듣기만 했지, 지능을 극한까지 발달시킨 놈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너른 하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도 십여 년만이군. 아니, 그때보다 더해. 조직적인 습격과 잠적, 그리고 유인……. 전략에 입각한 지휘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차가운 분노를 담은 눈동자가 짙은 열기를 머금었다.

“전사들을 몇 명 남겨서 유해를 수습해라. 뼈들을 추려서 각 부족으로 돌려 보내줘. 나머지는…… 나와 함께 간다.”

“네? 어디로…? 이미 잠적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너른 하늘은 은빛 여우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말없이 몸을 움직여 구석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느림보에게 다가갈 뿐이었다.

짐승에게 초췌하다는 말이 어울릴까?

하지만 그것 말고는 급격한 탈진 상태를 보이는 느림보를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많이 힘들겠구나.”

바닥에 엎드린 느림보가 다가온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19년을 함께한 벗의 비참한 죽음.

찢어지는 가슴을 끌어안고 긴 거리를 왕복한 녀석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달해 있었다.

“자연기가… 흩어질 거다.”

“끼잉…….”

“스스로도 잘 알겠지. 느림보, 넌 이미 자연이 정해준 수명을 한참이나 넘겼어. 잽싼 다리가 가버렸으니…… 급격히 쇠약해질 거다.”

반려 관계를 맺은 후 익힌 자연기의 운용.

그로 인해 얻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하늘이 정한 수명을 연장했다.

하지만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 이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빌려온 힘일 뿐이다.

벗이 유명을 달리한 지금, 그의 조율을 통해 몸을 오가던 자연기가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복수하고 싶으냐?”

“……!”

죽음의 문턱을 서성이는 듯 느림보의 눈가는 퀭하게 패어 있었다.

하지만 너른 하늘의 말을 듣는 순간, 녀석의 눈동자가 번쩍이며 생기를 되찾았다.

‘그것이 가능한가!’

생의 끝에 다다라 마지막 소망을 품게 된 느림보의 눈은 분명 그렇게 묻고 있었다.

“와족(佤族) 22대 족장, 너른 하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강렬히 뿜어져 나오는 안광은 적의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불태울 야생의 화염이라.

“너는 눈 감기 전, 사지가 뽑힌 녀석이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절망에 찬 녀석의 비명이 온 숲을 울리리라. 그것이 나의 형제, 너의 벗을 건드린 대가이며, 앞으로 인간을 해칠 짐승들을 향한 나의 경고가 될 것이다.”

천 년에 가까운 부족의 역사.

그 기나긴 시간을 통틀어 명실상부한 최강이라 불리는 남자.

22대 족장 너른 하늘의 입에서 멸살의 언약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남은 너의 목숨, 내게 다오.”

느림보는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있었다.

비장한 결의를 가슴에 새긴 인간처럼 녀석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캬앙!”

잿빛을 띤 백색의 물체가 눈부신 속도로 숲을 가로질렀다.

언제 죽어가고 있었냐는 듯 느림보의 몸에선 푸르른 녹음도 무색케 할 생생한 생명력이 흘러넘쳤다.

파파팟―

그 뒤를 탄탄한 체구의 전사 수십이 바짝 뒤따랐다.

‘냄새!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은빛 여우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진형의 정중앙.

마른 비를 업은 채 달리면서, 그는 방금 전 동굴에서 보았던 놀라운 광경을 되새기고 있었다.

* * *

“후우웁―.”

크게 들이켠 숨을 따라 대기에 가득 찬 자연의 숨결이 흘러들어와 체내에 깃든다.

전신세맥(全身細脈)에 잠들어 있던 힘의 파편들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며 기지개를 켰다.

우우웅―

수십 개의 횃불을 부끄럽게 만들 짙푸른 자연의 빛.

어둠 따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찬연한 빛무리가 점점 그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흠!”

짧은 기합에 반응하듯 너른 하늘을 중심으로 넘실대던 빛들이 잦아들었다.

응집이다.

내뻗은 오른손에 빛의 조각들이 모여 단단히 집약되더니 푸른빛 영롱한 광구(光球)를 형성했다.

“받거라.”

손에 쥐듯 이끌린 빛의 집약체가 느림보의 육신에 스며들었다.

“잠시뿐이다.”

지극한 연민을 담은 눈으로, 목숨을 달라 했던 너른 하늘은 그리 말했다.

“느림보. 너와 나는 반려 관계가 아니다. 지금 강제로 주입한 자연기는 너의 체질과 맞지 않아. 너의 몸을 더욱 빠르게 망가뜨릴 거다.”

너른 하늘을 또렷이 바라보는 느림보의 눈은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 말하고 있었다.

“우리 중에 놈의 냄새를 아는 건 너뿐이다. 네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전에, 우리를 놈에게 인도해다오.”

“컁!”

인간과 짐승.

종을 뛰어넘은 의사의 소통이, 같은 목적만을 바라보는 의지의 공유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너의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우리가 치울 것이다. 오직. 오직 놈만 생각하며 달려라.”

생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피워낼, 먼저 간 형제의 하나뿐인 벗을 쓰다듬으며 너른 하늘이 말했다.

“가라.”

* * *

“끼긱, 끽!”

매복해 있던 원숭이 무리가 토벌대를 덮쳤다.

파파팟!

달리는 느림보와 그 뒤를 바짝 따르는 너른 하늘.

막으라는 말 따윈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모두가 족장의 말을 들었고, 그의 의지를 안다.

뒤따르던 전사들이 둘을 앞질러 전면으로 튀어 나갔다.

퍼퍽, 빠바바박!

느림보가 나아갈 길에 어떤 거리낌도 없도록.

사방을 물샐 틈 없이 둘러싼 부족 전사들이 달려드는 짐승들을 깨부수며 길을 열었다.

“꺄악!”

우측 저 멀리서 찢어지는 여인의 비명이 들리자, 달리던 전사들이 주춤했다.

“무시해라.”

너른 하늘은 단호했다.

느림보는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었다.

파파팟!

속도를 늦췄던 전사들이 다시 따라붙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입에서 슬슬 단내가 올라오기 시작할 즈음.

“꺄아악!”

또다시 비명이 울렸다.

이번엔 좌측이었다.

“무시해라.”

너른 하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옆에서 달리던 전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족장님. 사람의 비명입니다. 전사를 몇 명 보내는 것이…….”

“느림보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있다. 우리의 인원을 쪼개려는 분산책이든, 함정으로 이끄는 유인책이든. 놈은 저기 없다. 무시해라.”

여기서 잡지 못하면 피해는 더욱 커진다.

이 모든 일의 원흉.

그 한 놈만 잡으면 모든 게 끝난다.

놈을 잡기 전까진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겠다.

납치됐을 사람들의 희생까지 감수하는 냉정한 판단.

하지만 지극히 이치에 맞는 결단이었다.

쒜에엑―!

얼마나 달려온 걸까.

해가 하늘을 가로질러 서산머리에 걸릴 때쯤.

네 번의 습격을 더 물리치고 나서야.

절벽을 바라보는 탁 트인 공지(空地)가 토벌대 앞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땅으로 향하는 숲의 끝자락에서 느림보가 우뚝 멈춰 섰다.

“시익, 시익…!”

“다 온 거냐.”

느림보의 눈은 감길 듯 감기지 않으며 숲의 너머를 노려보고 있었다.

“캬아아악!”

이 날 선 반응.

확실하다.

느림보는 제 역할을 훌륭히 해줬다.

“고맙다, 느림보.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맡겨라. 오래 걸리지 않아.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눈 감지 마라.”

그 말이면 충분하다.

믿고 기다리겠다.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추켜올린 느림보가 너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벅, 저벅.

숲을 벗어나 눈앞에 펼쳐진 개활지로 족장과 전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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