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화아악―
숲과 공지의 경계에 다다르니 급속도로 시야가 트인다.
숲의 끝자락? 아니다.
원시림 한복판에 둥그렇게 자리한 암석지대일 뿐이다.
드높은 절벽 아래로 갖가지 형태의 백색 바위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었다.
어느새 내려앉은 달빛이 암석지대에 하얗게 스몄다.
“이게 대체…….”
달빛을 흡수한 하얀 바위들보다 더욱 새하얗게 빛나는 것.
뼈다.
온갖 짐승의 뼈가 층층이 쌓여 순백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 잔인한……!”
바위 곰 전사 중 한 명이 뒷말을 흐렸다.
그의 침음은 둔덕을 이루며 쌓인 뼈 때문이 아니었다.
뼈로 쌓은 산 중앙에 꽂힌 부러진 나무들.
그리고 거기에 거꾸로 매달린 무언가.
잽싼 다리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풍경이다.
뜯다 만 인간의 시체가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알고 있겠지.”
발을 디딜 때마다 덜걱거리는 뼈의 언덕을 홀로 오른다.
달빛과 별빛을 위태하게 머금은 흰 산 위로 전사의 뒷모습이 도드라졌다.
“덤비는 놈들은.”
너른 하늘이 매달린 시체 앞에 당도하고,
“모조리 죽여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키아아아악!”
새카만 어둠이 쏟아져 내렸다.
지나온 숲의 고목들과 전면을 메운 까마득한 절벽.
아니, 시야에 걸리는 모든 지형에서.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그림자들이 파도처럼 밀어닥친다.
머나먼 땅의 끝, 소금물로 가득 찬 곳에 이는 해일이란 놈이 이러할까.
바다를 못 보고 죽으면 콱 뒈져 마땅한 인생일 뿐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그믐의 허풍이 전사들의 뇌리를 스쳤다.
“끼이익- 끽!”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낸 놈들이 주체할 수 없는 광기를 쏟아낸다.
저마다 울부짖는 놈들의 눈은 끔찍한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번엔 포위인가.”
마을에 남은 우둔한 땅을 대신해 바위 곰을 지휘하는 고위 전사, ‘거친 모래’가 중얼거렸다.
“싹 다 쓸어버려!”
숫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석림의 붉은 발톱이 이끄는 늑대무리라면 모를까.
제법 난폭하긴 하나 태생적으로 육체의 힘이 떨어지는 원숭이 따위는 아무리 몰려와도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와족의 전사들이 떨어져 내리는 적들을 마주해 땅을 박찼다.
슥-
전사들을, 형제들을 믿는다.
전투에 돌입한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너른 하늘이 매달린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음? 사람이… 아냐?’
콰아아앙!
너른 하늘이 멈칫한 순간, 좌측 발밑 뼈의 산을 뚫고 시커먼 그림자가 치솟았다.
사람 머리의 네 배는 될법한 거대한 대가리.
두부(頭部)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주둥이가 쩍 벌려졌다.
콰악!
십여 개의 뾰족한 이빨과 흉악하게 발달한 두 쌍의 송곳니가 너른 하늘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크흑, 크훕, 키힉!”
우는 것인가, 웃는 것인가.
아마도 후자이리라.
사람의 그것을 닮은 검은 눈동자가 요사한 광택을 흘리며 번들거렸다.
어깨를 문 주둥이에선 숨을 내쉴 때마다 참기 힘든 악취가 흘러나와 코끝을 찔렀다.
“네놈이군.”
흔들림 없는 눈빛이 어깨를 문 야수를 향했다.
“?!”
당황하지 않는다.
깨물린 어깨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와 상체를 적시고 있는데도.
여태껏 습격을 받은 인간들은 고통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며 이성을 잃었건만.
눈앞의 인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꺾어 자신을 마주 볼 뿐이었다.
“이렇게 잽싼 다리를 죽인 건가.”
원시림 일대의 폭군.
괴이한 행동과 식인을 일삼으며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야수.
원숭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발달한 체격과 인간에 필적하는 지능.
자연기의 활용을 깨달아 원숭이이되 원숭이가 아닌 무언가로 변해버린 괴후(怪猴)가 난생처음 느낀 생소한 감정에 당황했다.
콰악!
한 가지는 확실하다.
눈앞의 인간.
이 인간을 죽여 없애야 한다.
야생의 본능이 맹렬히 외친다.
이 인간만 없다면 알 수 없는 찝찝한 느낌이 사라질 것이라고.
괴후가 어깨를 깨문 턱에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흡!”
너른 하늘도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던 자연기를 어깨에 모으며 근육에 힘을 더했다.
“키익?!”
이빨이 밀려 나온다.
팽창하는 근육이 파고든 이빨을 강제로 밀어 올렸다.
“……!”
위험하다.
망막을 채운 이 인간은 진실로 위험하다.
괴후는 턱의 힘을 빼고 거리를 벌렸다.
아니, 벌리고자 했다.
콰악!
두툼한 손이 날아와 거리를 두려는 괴후의 대가리를 움켜쥐었다.
어지간한 야수의 앞발에 비견되는 굵은 팔뚝 위로 시푸른 핏줄이 꿈틀거린다.
자신의 체구보다 두 배는 큰 괴후의 몸을, 너른 하늘은 한 손으로 거뜬히 들어 올려 지탱하고 있었다.
“켁, 키익…! 캬악!”
인간치고는 큰 손이지만, 작은 바위만 한 괴후의 머리를 감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크기다.
악력.
머리통을 짓누르는 다섯 손가락에 경이적인 힘이 깃든다.
그믐이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했던 저 먼 바다 문어라는 생물의 빨판처럼.
너른 하늘의 강렬한 손아귀 힘이 괴후의 머리를 빨아들일 듯 움켜쥐고, 으깨듯이 조였다.
“캬아악!”
인간 따위가!
콰콱!
너른 하늘의 그것보다 훨씬 두꺼운 양팔 양손이 그의 머리를 마주 잡았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털이 수북한 야수가 자신의 덩치의 절반밖에 안 되는 인간의 손에 들려 허공에서 버둥거린다.
한 손으로 야수를 들어 올려 압박하는 인간과,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짓누르는 야수.
달빛이 스며든 백색의 암석지대, 뼈들로 쌓은 산 위에서 힘을 겨루는 인간과 야수는 고대 신화 속 한 장면을 현세에 옮겨놓은 것만 같았다.
현실과 비현실, 그 경계의 붕괴.
누구도 믿지 못하리라.
헛된 공상이라 치부하던 상상 속의 세계, 꿈에서나 그리던 경이로운 존재들이 지상을 거닐며 생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꾸우우욱-!
고통에 굴복해 먼저 힘을 푸는 쪽의 머리가 터져 나간다.
한 손과 양손의 힘 대결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캬아아악!”
놀랍게도 비명을 지르며 먼저 손을 뗀 건 괴후였다.
퍽! 퍼벅! 퍽!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른 하늘의 팔을 두들기는 녀석은 말 그대로 필사적이었다.
이대론 머리가 터져 죽고 만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괴후의 눈동자에 살벌한 핏빛 광기가 차올랐다.
버둥대던 두 다리가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는 대로 끌어모은 자연기가 혈맥을 타고 발끝으로 모여들었다.
“캬아악!”
힘껏 내뻗은 괴후의 양발이 너른 하늘의 탄탄한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퍼억!
고작 두 걸음.
아니, 세 걸음 정도 밀려난 것인가.
간지럽다는 듯 얻어맞은 부위를 툭툭 터는 너른 하늘이다.
믿기지 않는 일을 본 것처럼 괴후가 눈을 부릅떴다.
“벗어나다니……. 제법이야. 걱정 마라. 그렇게 쉽게 죽일 생각은 없으니.”
이미 주변의 싸움은 모두 멈춰 있었다.
암석지대에 발을 둔 생명체들은 직감했다.
오늘 여기서 어느 쪽이 살아 나갈지는 오로지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는 것을.
“후욱, 후욱―.”
치열한 전투 후에 격해진 호흡을 다스리던 은빛 여우가 말했다.
“징글징글하게 많네요.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수가 줄질 않아요. 여기서 저 털북숭이 놈까지 달려들면 힘들겠는데요.”
그는 마른 비를 업고 있어서 가장 안전한 중앙에 자리 잡았다.
자유로운 두 다리로 다가오는 놈들만을 내쳤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숫자 때문에 체력 소모가 상당했다.
매서운 눈의 부재로 나무표범의 지휘를 맡은 나이 지긋한 전사가 그를 힐끗 쳐다봤다.
“쟤? 쟤가 우리한테 왜 와?”
“그럴 리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족장님이…….”
“큭, 놀고 있네. 장난하냐?”
족히 십여 년은 됐음 직한 입가의 상처를 찌그러뜨리며 노년의 전사가 픽 웃었다.
“꼬마야. 너, 족장님이랑 함께 싸우는 거 처음이지?”
“이십 대 중반이니 꼬마는 아닙니다만……. 네, 뭐 그렇죠.”
“귓구멍 후비고 잘 들어라. 저 양반은 거죽만 우리랑 비슷하지, 이미 인간의 범주가 아니야. 석림의 붉은 발톱 정도 되는 녀석이 제 무리를 모조리 끌고 온다면 모를까……. 설령 그렇다 해도 지금 부락에서 대기 중인 푸른 눈이 합류하면 둘만으로도 다 때려눕힐 거다.”
“그게…….”
은빛 여우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족장님이 대단하다지만 붉은 발톱이 어떤 녀석인가.
전 운남이 두려워하고 경외하여 고유의 이름을 헌상한 영수(靈獸)들.
그들이 거하는 곳이 곧 그들의 영역이다.
이제 갓 수식어가 붙은 괴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진정한 운남의 제왕이 바로 그들이었다.
홀로 움직이는 걸 즐기는 대부분의 맹수들과 달리 붉은 발톱은 늑대라는 종의 특성상 독자적인 무리까지 거느리고 있다.
단일 개체로서 붉은 발톱보다 센 녀석은 있을지 몰라도 무리와 연계하여 달려드는 붉은 발톱을 제압할 수 있는 존재는 운남 전체를 뒤져도 손에 꼽힐 것이다.
‘성년식 시절, 대망에게 덤볐다가 놈의 점심거리가 될 뻔했지.’
거대한 뱀, 대망.
남방 밀림의 패자라지만 그래 봐야 겨우 수식어가 붙은 녀석일 뿐이다.
한데 그보다 까마득한 상위 포식자인 붉은 발톱을 혼자서 때려잡는다?
은빛 여우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 시키가? 눈 돌아가는 거 보소? 못 믿겠다는 표정인데? 그냥 믿어, 인마. 괜히 족장님을 부족 역사상 최고의 전사라고 하는 게 아니다. 눈깔 크게 뜨고 지켜봐라. 그게 더 빠르겠네.”
인간과 괴수.
양 집단의 기대와 염원을 어깨에 걸고.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던 둘이 대지를 박찼다.
* * *
시야가 뿌옇다.
무겁고 단단한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정수리 쪽에서 둔탁한 통증이 느껴진다.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눈을 떴다.
‘여기가…….’
하얀 별들이 흩뿌려진 밤하늘.
달빛을 머금은 지상의 암석들.
어딘가를 바라보는 익숙한 얼굴들.
‘어른… 들?’
잠결이었나 보다.
뭔가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 업혀 있는 건가?’
자신을 업은 사람이 궁금해서 고개를 돌리는데 허연 산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뼈?’
분명히 어디서 본 듯한 광경이다.
찌르르 울리는 두통을 억누르며 눈을 들었다.
‘……희한하게도 생겼네. 괴물? 원숭이?’
쩍 벌린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효.
그리고… 붉게 빛나는 눈동자!
‘아…!’
기억이 회복된다.
흐물흐물 흘러내린 장면들이 한순간에 끌어 당겨져 제자리를 찾았다.
단단하게 굳어지며 재구성되는 기억.
피로 얼룩진 처참한 광경 속에서 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아, 아저씨!”
소년은 번쩍 눈을 떴다.
“으억! 깜짝이야!”
눈살을 좁힌 채 정면을 주시하던 은빛 여우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어깨에 묵직한 체중이 실린다.
업혀 있던 소년이 양손으로 어깨를 짚고 상체를 세우는 게 느껴졌다.
은빛 여우가 고개를 돌리며 툴툴댔다.
“빌어먹을 꼬맹이. 잘 잤냐?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은빛 여우 형? 아저씨! 잽싼 다리 아저씨는요?”
청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님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네 잘못이 아냐.”
동굴에 홀로 남은 잽싼 다리와 느림보에게 운반되어온 마른 비.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잽싼 다리를 찾는 저 다급함.
대략적인 상황을 알 만하다.
은빛 여우는 소년이 받을 마음의 상처를 감안해서 한 말이었지만, 마른 비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네 잘못이 아냐.
그 한마디에 하늘이 핑 돈다.
마른 비는 은빛 여우의 어깨에 풀썩 무너져 내렸다.
“아저씨가… 주, 죽은 거예요?”
이제 열다섯 살이다.
식구의 죽음을 처음 겪는 건 아니지만, 짐승에게 목숨을 잃는 광경을 본 적이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마른 비는 어지간한 전사들조차 처음 본 참상의 한복판에 있었다.
은빛 여우는 어린 동생의 충격과 슬픔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아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다. 형님은 유인책에 걸린 거야. 누가 있었든 마찬가지였을 거다. 족장님이나 각 무력집단의 수장들 정도 되지 않는 한.”
등을 적시는 소리 없는 눈물이 뜨겁다.
그래서 청년도 소년만큼 아팠다.
“고개를 들어라, 비아야. 족장님께서 형님을 해친 녀석과 대치 중이다.”
“아버지가요?”
슬픔의 와류에 휩쓸려 있던 마른 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멀리 백색 뼈의 산에서 괴물 원숭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