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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0화 (10/463)

10화

“일대일? 아버지 혼자 싸우시는 거예요? 왜 다른 어른들은…?!”

“……솔직히 나도 걱정이 된다만.”

둘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은빛 여우를 타박했던 노년의 전사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 핏덩이들을 어이할꼬. 그냥 조용히 지켜봐라, 꼬맹이들. 시작한다.”

철의 제련법을 알아내기 전.

구리, 주석, 청동 따위의 금속이 사용되기 훨씬 이전에.

뾰족한 나무와 둔중한 돌을 집어 들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인간은 주먹을 쥐었다.

육신에 지니고 태어난 태초의 무기.

하지만 생존을 위협하는 강대한 야생의 적들에게 주먹은 통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인간은 주먹을 버렸다.

남자는 모두가 버렸던 주먹을 쥐었다.

검, 도, 창, 활.

사냥과 살육을 용이하게 하는 무기들.

그런 것들은 약하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주먹으로 때려눕힐 힘이 없는 약자이기에 무기를 쥔다.

하지만 그는 힘껏 쥔 주먹 하나면 충분했다.

성큼성큼 다가간 남자의 주먹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부우웅- 쾅!

“키악!”

붕, 부웅- 콰쾅!

“캬아악!”

좌우로 날아드는 주먹이 야수의 얼굴을 뭉갠다.

코가 내려앉고, 이마에 금이 간다.

턱뼈가 돌아가고, 광대뼈가 부서져 함몰됐다.

괴후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뾰족한 이빨도, 날카로운 발톱도 없는 인간이다.

그저 불끈 쥔 주먹 두 개를 휘두를 뿐인데.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묵직한 통증에 전신이 비명을 질렀다.

정직하게 쏟아지는 좌우 연타가 괴후의 육체를 착실히 파괴해 나갔다.

“키아아아악!”

괴후의 선택은 발버둥에 가까운 발악이었다.

순식간에 몸 여기저기가 부서진 괴후가 너른 하늘의 머리를 물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안 되지. 그런 건.”

꽈앙!

정신이 다 아찔해진다.

턱을 올려친 주먹에 이빨들이 부러지며 화려하게 비산했다.

파르르…….

처음 마주쳤을 때 느꼈던 생소한 감정.

이 인간을 반드시 죽여 없애야만 한다는 본능의 외침.

그것은 정점에 위치한 포식자에서 피식자(被食者)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근원적 불안감이었다.

공포.

생애 처음 두려움을 알게 된 괴후의 몸이 잘게 떨려 왔다.

‘슬슬 꺼낼 때가 됐는데…… 건드려 볼까.’

너른 하늘은 그런 괴후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냉철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너.”

움찔.

“내가 무섭냐?”

누가 봐도 도발적인, 비릿한 미소였다.

괴후의 떨림이 눈에 띄게 커지기 시작했다.

“키… 키이이익…….”

같은 떨림이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모멸.

상대는 자신을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다.

자연기의 운용을 깨닫고 급격한 성장을 이루기 전, 마음 한구석에 눌러둔 새끼 때의 정신적 상처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캬아아아아악!”

동족 모두가 자신을 멸시했다.

심지어 어미조차 기형적으로 큰 머리와 가냘픈 팔다리를 지닌 자신을 혐오했다.

지나치게 무거운 두부와 현저히 낮은 근력.

나무를 타지 못하는 원숭이는 결국 무리에서 버려졌다.

고목 아래의 깊숙한 구멍에 몸을 숨긴 채, 오가는 벌레들을 잡아먹고 비루한 목숨을 이어가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부실한 몸뚱이를 움직일 힘이 필요했다.

가끔 눈앞을 지나는 활력 넘치는 야수들에게 감지되는 무형의 기운.

생존을 향한 강렬한 본능과 동족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염원, 그리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능이 맞물려 기적을 일궜다.

콰앙!

오랜 시간이 흐르고, 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야수가 이제는 비좁아진 고목의 구멍을 부수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키야아아아악!”

용서할 수 없다.

적에게 받은 모멸감은 눌러놓은 상처를 헤집고 괴후에게 걷잡을 수 없는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

원시림 일대의 제왕이라는 자긍심.

자아를 확립한 이후 단 한 번도 위협받지 않았던 긍지가 지금 훼손되었다.

상처 입은 야수의 자존심은 적에 대한 공포를 타오르는 분노로 바꿔 놓았다.

반드시 찢어 죽인다.

짙붉은 광기를 줄기줄기 흘리며 괴후가 자세를 낮췄다.

“크르르르…….”

맹수를 닮은 울음소리다.

땅에 바짝 밀착시킨 두 손과 두 발.

깊이 낮춘 자세는 사냥태세에 돌입한 육식동물을 떠올리게 했다.

‘이거다. 이제야 내보이는군.’

공기가 바뀐다.

필살의 의지를 품은 투기에 호응하듯 대기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수식어를 획득할 정도의 야수.

비록 지능에 특화된 녀석이라지만,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 대비한, 강적들을 거꾸러뜨린 비장의 무언가.

“덤벼라.”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괴후가 땅을 박찼다.

쾅!

“……?!”

폭음과 함께 허연 뼛가루가 흩날린다.

너른 하늘은 순간 괴후의 움직임을 놓쳤다.

꽈앙!

우측 얼굴을 후려갈긴 강렬한 충격에 너른 하늘의 몸이 왼편으로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꽈아앙!

쓰러지는 건 허락지 않는다.

밀려나던 몸이 재차 가해진 충격에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내몰렸다.

꽝! 꽈앙! 꽈아앙!

흘리고 간 잔상만이 허공에 남을 뿐이다.

눈으로도 쫓기 힘든 속도로 움직이며 후려치는 괴후의 타격에 너른 하늘의 몸이 사방으로 쉴 새 없이 뒤흔들렸다.

콰아앙!

격타당한 인간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곤 믿기 힘든 굉음이 공간을 울렸다.

가속도를 등에 업고 온몸으로 내지른 몸통박치기에 너른 하늘의 몸이 통째로 들려 뼈의 산에 처박혔다.

쿠웅!

잦아드는 굉음, 흩날리는 뼛가루.

깊게 박혀 보이지 않는 너른 하늘과 침 넘기는 소리조차 사라진 적막한 고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 족장님!”

“아버지…!”

청년과 소년이 내지른 날카로운 비명이 가라앉은 정적을 깨뜨렸다.

“허…! 꽁꽁 숨겨둔 게 고속이동이었나. 생각보다 센데, 저 녀석?”

은빛 여우를 타박했던 노년의 전사는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태평한 어조에 은빛 여우가 발끈했다.

“지켜보긴 무슨! 이제 어떡할 겁니까! 족장님이 크게 다치셨…!”

“아우, 시끄러. 하여튼 애새끼들 진짜……. 눈깔 크게 뜨고 지켜보라고 했냐, 안 했냐? 저거 봐라.”

쭉 내민 턱이 가리키는 곳.

우수수 무너지는 뼈의 산을 헤치며, 너른 하늘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둑, 우두둑.

좌우로 꺾는 고개가 뼈와 뼈 사이의 마찰음을 울리고,

우두두둑.

휘돌리는 양어깨에서 나는 소리가 적에게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심는다.

그의 진정한 힘을 모르는 ‘두 핏덩이’의 눈이 커졌다.

“이거였군. 숨겨 둔 게. 제법 짜릿했어.”

너른 하늘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주먹으로 슥 훔쳤다.

“이게 다지?”

느낌이 왔다.

두들겨 맞으며 관찰한 녀석의 표정이 확신을 주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생물의 초조함.

이게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

광기를 머금은 눈동자 아래 감춰진 두려움을 보았다.

더 이상 숨겨둔 패는 없다.

“그럼 이제 뒈질 시간이다.”

오래도 참았다.

잽싼 다리의 비참한 시신을 끌어안은 그 순간부터.

반나절이 넘는 추적과 전투의 시간 내내.

폭발하려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냉정을 유지한 이유.

숨기고 있을 게 분명한 비장의 수 때문이었다.

참길 잘했다.

화를 폭발시켜 밀어붙였다면 공포에 잠식당한 녀석이 도주를 시도했을 터.

체력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고속이동을 시전하고, 나무를 타며 내뺀다면 쫓기 힘들다.

느림보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고, 원숭이 떼의 마을 습격에 대비해 모든 반려수들을 주변 부락에 분산 배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놓치면 쫓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긴 인내의 시간을 건너, 드디어 징벌의 때가 왔다.

“캬아오오오오!”

괴후는 분노했다.

강적들을 쓰러뜨린 기술이 통하지 않는다?

통할 때까지 두드리면 된다.

뇌리를 잠식한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열 받았다, 이거냐?”

쿠구구국.

움켜쥔 주먹에 웅혼한 힘이 깃든다.

끌어올린 자연기가 육체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고, 팽팽히 조여든 근육은 터져나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흙으로 덮어둔 지저의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지표면을 녹여냈다.

너른 하늘의 눈에 꾹꾹 눌러둔 분노가 차올랐다.

“네놈이 감히… 잽싼 다리를 그리 죽여 놓고도… 되려 화를 내?”

드디어.

해방의 시간이다.

“캬아아아악!”

콰쾅!

시야에서 사라진 괴후가 너른 하늘의 뒤를 밟았다.

후려치는 오른팔, 날카롭게 세운 발톱이 너른 하늘의 상반신을 긁었다.

촤아아악!

선혈이 흩뿌려지고, 몸이 밀려난다.

슈아악―

다음 공격을 위해 괴후가 선회하는 순간.

덥석!

“키익?!”

놈이 움직이는 동안은 붙잡기 힘들다.

선회를 위한 숨 고르기를 할 때.

몸이 휘도는 찰나의 틈을 노린다.

단련한 육체로 공격을 받아내고, 방향을 가늠했다.

얻어맞은 반대쪽으로 지체 없이 따라붙은 너른 하늘이 몸을 돌리는 괴후를 정확하게 낚아챘다.

“오오오오오!”

강인한 악력이 인간의 멱살에 해당하는 부위를 와락 틀어쥐었다.

찌이익―!

피가 점점이 맺히고, 비틀린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후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그대로 들어 올려 내리꽂는다.

꽈아아앙!

괴후는 머리부터 처박혔고, 녀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동물의 뼈들이 비명을 지르며 터져나갔다.

“세 개 부락. 이백여 명.”

우악스런 주먹이 하늘로부터 내리꽂혔다.

쾅! 쾅! 꽈광!

“캬아악!”

괴후의 가슴뼈가 함몰되고, 갈비뼈가 산산조각 나 내장을 찔렀다.

고통에 찬 짐승의 눈에 여전히 자신의 멱살을 틀어쥔 손이 보였다.

쩍 벌린 아가리가 너른 하늘의 팔뚝을 거세게 물어뜯었다.

“아퍼. 이 새끼야.”

쾅! 쾅!

육중한 둔기나 다름없는 주먹이 팔을 문 주둥이를 내리쳤다.

“끼… 끄익!”

단 두 방.

괴후의 아래턱이 가루가 되어 흐물흐물 늘어졌다.

처억.

너른 하늘이 멱살을 쥔 손을 풀고 오른발을 괴후의 가슴 위에 올렸다.

두 손으로 붙잡은 건 녀석의 양팔이다.

턱이 박살 난 채 그를 올려다보는 괴후의 눈이 터질 듯 확장됐다.

“키, 키이익!”

“깊은 목소리, 하얀 돌. 네놈이 잽싼 다리 이전에 유인해 죽인 젊은 전사들이다.”

뿌드드득!

“캬아악!”

양팔 관절이 생으로 뽑힌 괴후가 비참하게 울부짖었다.

“양다리는 잽싼 다리와 느림보의 몫이다.”

빠드득, 뿌득!

더 이상 소리 지를 힘도 없다.

입을 쩍 벌린 괴후는 지저분한 눈물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 따름이었다.

“아, 잊을 뻔했군. 너, 내 아들 때렸다며?”

빠악!

투박한 발길질에 괴후의 턱이 하늘로 치솟았다.

기절로 그쳐서일까?

전보다는 한참이나 가벼운 한 방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아비의 무력에 넋을 놓았던 마른 비의 표정이 묘해졌다.

“끄… 끼익…….”

동공이 풀린 괴후의 눈앞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다가왔다.

“하나 묻지.”

괴후는 두려웠다.

힘의 크기를 떠나 눈앞에 있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두려웠다.

자존심을 건드린 비웃음과 도주의 여지를 없애버린 도발.

돌이켜보면 모두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 분명하다.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고 자신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다.

냉철하게 할 일을 마치고서야 억누른 분노를 폭발시켰다.

치 떨리는 괴력과 두 눈에 깃든 은은한 광기.

괴후는 눈앞의 인간이 진정으로 무서웠다.

“정신 차려, 인마.”

짜악!

두터운 손바닥이 괴후의 뺨을 후려갈겼다.

“저기 매달린 시체들. 가죽을 벗긴 원숭이들이었어.”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 달빛 아래 매달린 시체들은 끔찍했다.

“너. 동족도 죽인 거냐.”

꿈틀.

공포에 떨던 괴후의 눈빛이 달라졌다.

동족.

그것들을 동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약했던 자신을 매몰차게 내버렸다.

강해져 돌아왔지만, 이번엔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어쩌란 말이냐.

홧김에 휘두른 손짓에 어린 시절 그토록 강해 보였던 우두머리가 맥없이 쓰러졌다.

원숭이 무리의 눈빛이 변했다.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희열.

바로 이것이다.

압도적인 힘!

오금을 저리게 만들 공포!

“킥, 킥, 키익.”

나를 버린 것들.

너희를 동족이라 생각지 않겠다.

그저 지배하며, 군림하리라.

반항하는 녀석들을 죽이고, 찢었으며, 매달았다.

절대적인 공포를 각인시키기 위해 고민하던 어느 날.

번뜩이는 발상이 스쳤다.

매달은 녀석을 포식했다.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모두 앞에서 보란 듯 살점을 뜯었다.

반항하면 이렇게 되리라.

너희는 나의 먹이일 뿐.

지켜보던 녀석들이 파르르 떨다 넘어갔다.

미약한 힘으로 끝까지 대들던 녀석들이 고개를 떨궜다.

원시림이 완벽하게 평정된 순간이었다.

“맞네.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어쩌다 이런 놈이…….”

너른 하늘이 미간을 찌푸렸다.

“캭, 캬갹, 캭! 카아아아악!”

괴후의 눈빛이 변했다.

싯누런 눈동자에 떠오른 건 순수한 광기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존재의 원한에 찬 광소(狂笑)가 백색의 대지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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