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1화 (11/463)

11화

“뭔가 사연이 있군. 각성한 건 그 때문인가?”

강렬한 염원.

야생의 짐승들이 자연기를 깨우치고 도약하기 위한 핵심 요건이다.

힘에 대한 갈구와 타고난 잠재력도 중요하지만, 자아를 갖추고 각성한 녀석들은 하나같이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너른 하늘도 괴후처럼 있는 대로 뒤틀린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인간과 가장 흡사한 종이라서?’

생존이 위협받는 것도 아니면서 동족을 살해하는 건 오직 인간뿐이다.

어떤 생물보다 잔혹해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동족 살해에 이은 동족 포식.

거기까지 갔다면 식인을 즐기게 된 것도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원숭이와 유사하면서 훨씬 야들야들한 게 인간일 테니까.

‘끔찍하군.’

사연이야 어찌 됐든 용납할 수 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너른 하늘은 괴후를 본보기로 삼을 마음을 굳혔다.

“영역에 침입한 인간을 공격하는 것까지 문제 삼을 순 없겠지. 하지만 영역을 넘어 인간의 마을을 습격한다면.”

반석 같은 결의를 담은 눈이 명징한 경고를 밤하늘에 흩뿌린다.

암석지대를 둘러싼 숲.

너른 하늘이 숨어 있는 존재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특정 야수들의 눈과 귀나 다름없는 짐승들.

자신이 받드는 영역의 패자를 위해 운남 곳곳에 퍼져 있는 밀정들이다.

“그곳이 어디든. 내 직접 찾아가리라.”

들어 올린 주먹이 긴 싸움의 끝을 고한다.

원독에 찬 눈, 운명을 저주하는 광기 어린 미소로 괴후가 놀리듯 울부짖었다.

“꺄아아아악!”

날카롭게 울려 퍼진 여인의 비명에 너른 하늘이 얼굴을 찌푸렸다.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놈이군.”

콰앙!

괴후의 의식이 끊어짐과 동시에 암석지대에 포진한 원숭이들의 눈이 서서히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의식을 잠식했던 광기가 사라지고, 심혼에 각인된 공포가 걷힌다.

원강 일대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괴후 토벌전의 끝이었다.

저벅, 저벅.

경외, 두려움, 또는 구명(求命)에 대한 감사.

백색 뼈의 산을 밟아 내려오는 위대한 전사에게 모든 생명체가 고개를 숙인다.

너른 하늘이 걷는 앞길이 활짝 열렸다.

“오래 기다렸다.”

감기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느림보가 너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컁…!”

“그래. 약속은 지켰다. 잽싼 다리가 기다리고 있겠지. 편히 가거라.”

느림보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한을 남기지 않은 편안한 마지막이었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너른 하늘이 눈 감은 오소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떠난 느림보를 조심스레 안아 올린 그가 자신을 둘러싼 전사들을 돌아봤다.

“고생들 많았다. 아이들이 복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시간을 못 맞추면 할아범이 두고두고 괴롭힐 거다.”

꼬장꼬장한 영감의 얼굴을 떠올린 이들이 피식 웃었다.

“아, 그리고 꼬맹이! 너, 인마! 못 들었을 것 같아? 내가 만에 하나, 뭐라고?”

은빛 여우가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 그게… 혹시 족장님이 다치시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시끄럽고. 가서 괴후 놈 송곳니나 하나 뽑아 와라. 깜빡했지 뭐냐.”

“아! 장신구에 쓰시려고요?”

“그래. 저 정도 놈이면 추가해도 되겠지. 그리고 비아를 데리고 먼저 마을로 향해라. 우린 포랑족과 납서족의 시신을 수습하고 뒤따르마.”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해하던 은빛 여우가 쾌활하게 답했다.

“네! 제일 굵직한 놈으로 뽑아 놓겠습니다!”

피식 웃은 너른 하늘이 하나뿐인 아들에게 다가갔다.

“아버…!”

꽈앙!

“아악!”

감격적인 상봉을 기대했건만.

말보다 먼저 나오는 주먹이다.

머리통을 얻어맞은 마른 비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이 녀석이! 누가 멋대로 마을 멀리까지 나오라더냐! 더군다나 토벌 지역에 발을 들이다니! 목숨이 서너 개쯤 되는 줄 알아!”

엄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모를 리 없다.

마른 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그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다시는 그러지 마라. 어차피 한 달만 지나면 운남의 어디든 갈 수 있다. 힘을 키우고, 성년식을 준비하는 거다.”

“힘…….”

강하다 강하다 말로만 들었지, 아버지의 힘을 실제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힘을 키우라고 했지만, 그런 게 왜 필요한지 실감하지 못했었다.

‘누가 있었든 구하지 못했을 거다. 족장님이나 각 무력집단의 수장들 정도 되지 않는 한.’

이젠 다르다.

자신에게 힘이 있었다면 잽싼 다리 아저씨가 목숨을 잃지 않았을 거다.

괴후를 물리치고, 아저씨를 구할 수 있었을 테니까.

소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심정을 짐작한 아비는 아들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네 잘못이 아니다, 비아야.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한다. 야생에서 살아남고, 사람들을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품 안에서 끄덕이는 아들이다.

너른 하늘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꼭 닮은 아들을 다시 한번 꽉 안아주었다.

“후우… 누굴 닮아서 이렇게 천방지축인 건지. 그리고 왜 이렇게 허약한 거냐. 애비가 네 나이 때는 말이다…….”

“아, 거 족장님 적당히 하쇼! 족장님 어린 시절 확 다 까발리기 전에!”

비아의 마음을 편히 해주려는 농담인 모양인데, 하나도 재미없다.

아니, 어쩌면 농이 아닐지도.

은빛 여우를 타박했던 나이 지긋한 전사가 길어지기 전에 앞으로 나섰다.

툭툭 내뱉는 말투와 달리 입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크흠. 알겠습니다. 비아야, 먼저 마을에 가 있어라. 금방 뒤따르마.”

“네, 아버지. 빨리 오셔야 해요.”

부드럽게 웃어준 너른 하늘이 부족의 전사들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추모는 마을에 가서 한다. 채비를 갖춰라. 빠르게 수습하고 돌아간다!”

“네! 족장님!”

복귀를 준비하는 전사들의 몸놀림이 분주해졌다.

밤하늘에 스민 달빛이 지친 생명들을 위로하듯 머리 위로 은은히 내려앉았다.

* * *

“아이들이 출발했습니다.”

높낮이 없이 일정한 어조.

감정의 흔적을 찾기 힘든 사내였다.

갖춰 입은 검은색 무복(武服)은 옷감의 재질이나 박음질 된 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실력 있는 침선장이 공들여 제작한 옷이 분명했다.

허나 일반적인 무복과는 다르다.

몸에 딱 달라붙는 품과 펄럭임을 방지하기 위해 소매와 바짓단을 고정시킨 도구들.

소리를 죽이기 위한 조치였다.

철저하게 기능성을 추구한 옷만큼이나 사내의 어조는 절제돼 있었다.

“위치는? 특정할 수 있던가?”

극히 대비되는 복장이다.

보고를 받는 중년 사내의 옷은 하얀색이었다.

단순히 말끔해 보이는 것만으론 부족했는지 어깨선과 소매를 따라 화려한 무늬들이 춤췄다.

기능보다는 과시와 차별화에 중점을 둔 옷이었다.

“여러 소수부족의 이야기를 종합하였습니다. 운남의 남서쪽. 한눈에 띌 만큼 희귀한 빛깔의 푸른 대나무 숲이 있다더군요. 그 숲의 중심에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검은 옷의 사내가 공손히 답했다.

흰옷의 사내는 뒷짐을 진 자세로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남서쪽. 푸른 대나무 숲. 운남의 땅덩이가 보통 넓은 게 아닌데 그걸로 되겠나?”

“가능합니다. 일행에 백족(白族) 출신의 아이를 포함 시켰습니다. 운남의 고약한 지형들을 읽는 데는 어지간한 대원들보다 나을 겁니다. 지도를 펴더니 예상 지점 몇 군데를 짚어내더군요. 응목대(鷹目隊)도 은밀히 따라붙었으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흰옷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들을 때려잡을 때만 튀어나오는 놈들이야. 평소에는 외부와 교류도 없이 살아가지. 마을 위치를 아는 자들을 찾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했군.”

“아닙니다. 막상 착수하니 아는 놈들이 꽤 되더군요. 직접 가본 자가 드물 뿐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있는 자는 많았습니다.”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흰옷의 사내가 말했다.

“10년…… 자그마치 10년이었네, 지 대주.”

“네, 장문인.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장문인이라 불린 자.

흰옷의 사내가 슬쩍 고개를 꺾어 검은 옷의 사내를 돌아봤다.

“이번엔 30년 전과는 다를 것이야. 시작하지.”

귀환

날이 밝는다.

동트는 새벽의 미소가 푸른빛 대나무 마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짹, 짹-

먹이를 찾아 분주히 허공을 오가는 새들의 날갯짓에 햇살이 부서져 흩날린다.

가라앉는 빛살의 파편이 막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소년에게 쏟아져 내렸다.

“읏차차! 오늘이구나!”

눈이 부신 듯 한쪽 눈을 찡그린 마른 비가 해맑게 웃었다.

둥! 둥! 두웅!

집을 이룬 모든 재료가 푸른빛 대나무 일색인 마을이다.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땅으로부터 한참을 올라간 지점에 사람이 살 주거 공간을 마련했다.

맹수와 독충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다.

대나무로 짠 벽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미며 상쾌한 새벽의 공기를 실어 날랐다.

습기와 비가 많고 무더운 이 지역에서 통풍과 채광을 용이하게 하는 간란식(干欄式) 주거는 여러모로 용이했다.

둥! 둥! 두웅!

마을 중앙 공터에는 커다란 북이 놓여 있었다.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든 소년이 북을 힘껏 두드리며 외쳤다.

“다들 일어나요! 오늘이에요, 오늘! 슬슬 도착할 거예요!”

덜컹, 덜컹-

둥그렇게 배치되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들에서 대나무로 짠 창문이 하나둘 열렸다.

“아오! 비아야, 인마! 왜 이리 서두르는 거냐! 잠 좀 자자! 잠 좀!”

“해가 하늘 꼭대기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이란 말이다…!”

강제로 잠이 깬 사람들이 볼멘소리를 토했다.

“히히! 일어나요! 일어나! 맞이할 준비를 해야죠!”

부족원들의 불평 어린 고함에도 마른 비는 마냥 신이 나기만 했다.

* * *

둥! 둥! 두둥!

“……안 힘들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소녀가 물었다.

힘들지 않냐고 묻는 것치고는 영 표정이 좋지 않다.

고개도 반대편을 향해 있었다.

북을 치던 마른 비가 히죽 웃었다.

“응. 괜찮아. 형, 누나들이 돌아올 걸 생각하니 신나는걸. 근데… 아직 화 안 풀렸어?”

화가 안 풀렸냐는 말에 다시 화가 난다.

고개를 홱 돌린 노을이 으르렁댔다.

“이걸 그냥…! 그래, 안 풀렸다! 내친김에 멍 하나 더 만들어줄까?!”

“아, 미안. 그건 좀…….”

마른 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노을아. 그렇게 위험할 줄 몰랐어. 알았으면 절대 안 갔을 거야. 앞으론 진짜 조심할게. 이제 화 풀어.”

마을로 복귀한 날.

마을 입구에는 초췌한 얼굴의 노을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은 확 커졌다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노려보기만 했다.

마른 비가 며칠째 보이지 않자 마을은 난리가 났고, 추적에 능한 수리의 눈 전사들이 부랴부랴 흔적을 뒤쫓았다.

원강에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토벌대와 헤어져 복귀하는 은빛 여우와 마른 비를 만날 수 있었다.

괴후를 성공적으로 토벌했다는 소식과 마른 비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수리의 눈 전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을로 먼저 돌아간 그들이 마른 비를 한 대씩 쥐어박았음은 물론이다.

마른 비가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을은 기겁했고, 무사하다는 말에도 노심초사하며 그를 기다린 것이다.

자신이 또 노을을 걱정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은 마른 비는 미안한 얼굴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그리고 사과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

툭.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괴후와 마주친 순간을 제외하면, 마른 비는 태어나서 그토록 당황한 적이 없었다.

허둥지둥 다가간 그에게 기가 막히게 깔끔한 한 방이 꽂혔다.

퍽!

눈을 감싸 쥐고 주저앉은 마른 비를 내버려 두고, 노을은 마을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로 며칠간 졸졸 따라다니며 사과한 결과가 지금 이 거리였다.

“하아… 내가 미쳤지…….”

여자 마음도 모르는 이런 머저리를 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오십 대의 부인이 남편에게 할 법한 한탄이 열다섯 소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물론 ‘미쳤지’의 뒷부분을 내뱉는 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약속도 안 지키고.”

아무리 마른 비가 둔하다지만, ‘토벌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지, 구경에 대해서 말한 적은 없어.’ 따위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불타는 야생의 직감이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으리란 걸 경고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로 죽을지도.

‘끄응…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노을이의 화를 풀 수 있을까?

마른 비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에 직면한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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