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마른 비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너무 궁금했어. 마을 밖의 동물들이 어떨지. 이번엔 무조건 내가 잘못한 거야. 다신 안 그럴게.”
노을은 눈치가 빠르다.
그리고 또래에 비해 성숙했다.
잽싼 다리와 관련해서 마른 비가 받았을 충격과 상처를 헤아렸기에, 노을은 마른 비를 다독여주려 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눈물이 터져 나오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나간 건, 그녀 역시 아직은 감정을 다스리는 데 미숙한 아이라는 증거였다.
‘오히려 잘된 것 같아.’
괜히 어른 흉내를 내기보다 감정에 솔직했던 게 결과적으로 잘한 것 같다.
자신의 섭섭함을 뒤로 하고 비아만을 챙겼다면 알게 모르게 응어리가 남지 않았을까.
한바탕 울고 화내고 멍까지 남겼지만, 자신이 그만큼 걱정했다는 걸 비아는 알고 있다.
그리고 비아가 진심으로 미안해한다는 걸 자신도 안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비아의 어깨에 지금 당장 어쩔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얹혀 있다면 시간을 두고 덜어나가면 되는 거다.
쉽게 잊을 수 없는 일일 텐데도 밝은 걸 보면, 이미 현장에 있던 어른들에게 어느 정도는 도움을 받은 것 같았다.
“음. 그럼 이제 화 푸는 거다?”
아아, 나는 죽어라 고민하고 있는데 저 순백의 뇌에서는 이미 상황이 끝났나 보다.
잘못 생각했다.
주먹이 나간 이유를 알겠다.
그건 그냥 나갈 수밖에 없었던 거다.
저게 맞아도 싼 놈이기 때문에.
양쪽 눈탱이를 시퍼렇게 만들어놨어야 했는데.
“그래. 그러자.”
떠오르는 생각과 달리, 노을은 활짝 웃었다.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웃고 싶었다.
“북채 이리 줘. 교대해.”
* * *
두둥- 둥―
소년 소녀가 고생한 덕분에 북소리는 오전 내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응원에 힘입은 해님이 마침내 하늘 등반을 마쳤다.
정수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말끔하게 차려입은 부족원들이 삼삼오오 중앙 공터에 모였다.
“후우…….”
상기된 얼굴과 기대에 찬 눈빛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누군가는 손을 모으고, 누군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초조한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긴 정적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마을을 둘러싼 청죽림 이곳저곳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짐승의 원피를 가공하여 무두질한 가죽이다.
원모(原毛)를 그대로 살려놓은 털가죽도 보인다.
직접 사냥하고 손질해서 몸에 걸친 게 분명한 가죽들은 조악할 뿐만 아니라 닳고 닳아 해진 곳이 부지기수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상체가 훤히 드러난 자도 있었다.
대숲을 헤치며 나타난 자들의 몸에는 오랜 세월 야생에서 헤맨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남루한 행색이지만, 그들의 눈빛만큼은 예외 없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꾸어엉~!”
“푸르륵.”
“샤악!”
“크르르…….”
야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 뒤편으로 진짜 야수들이 따라붙었다.
산양, 물소, 토끼와 같은 초식동물부터 곰, 구렁이, 늑대, 표범 같은 맹수들까지.
사람과 함께할 리 없는 야생의 짐승들이 마을로 진입하는 자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할아범.”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그믐의 앞에 장대한 몸집의 남자가 섰다.
그믐도 작은 키가 아니건만 고개를 들어야 겨우 눈이 마주친다.
우둔한 땅보다는 작지만, 다른 어떤 부족원보다도 커다란 체구였다.
남자답게 굵직굵직한 이목구비를 말없이 올려다본 그믐이 후우 연기를 뿜더니 장죽을 들어 올렸다.
빡!
“목소리 깔지 마. 이눔 시키야.”
장죽에 머리통을 얻어맞았음에도 불쾌한 기색은 없다.
얼굴 가득 떠오른 건 반가움뿐이다.
이제는 청년이 되어버린 부족의 아이 ‘산’이 머리를 문지르며 웃었다.
“하핫! 여전하시네요, 할아범. 다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저희, 다녀왔습니다!”
산을 바라보는 그믐의 눈이 흐뭇한 곡선을 그렸다.
그 미소는 장성한 손주를 대견해 하는 조부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어느새 산의 뒤편에 모여든 청년들과 그들이 데려온 짐승들을 주욱 둘러본 그믐이 인자하게 말했다.
“고생들 많았다. 밥 먹자.”
공터 가득 음식이 쌓였다.
3년의 성년식.
어엿한 성인이 되어 부족의 미래를 이끌어 갈 아이들의 귀환이다.
험난한 야생과 싸우며 가족을 그리워했을 아이들과 성년식을 무사히 마친 자식들이 한없이 자랑스러운 부모들.
그들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서로를 얼싸안고 다독이기 바빴다.
정식 절차가 남았으나 그런 건 그저 요식 행위일 뿐이다.
중요한 건 아이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것.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차올랐다.
“우와~ 산이 형! 이놈 이거, 보산(保山)의 그 회색곰 아냐?”
입안에 채워 넣은 것만으론 모자랐는지, 양손 가득 죽순을 움켜쥔 마른 비가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청죽림에서 아이들을 관찰하던 그믐과 매서운 눈은 우둔한 땅 때문에 숨어 있던 걸 들켜버렸다.
그들이 하루 종일 청죽림을 누비며 정성스레 채집한 죽순은 싱싱하고 맛깔스러웠다.
“오오! 비아냐? 3년 사이 엄청 컸구나! 근데… 너 눈이 왜 그래?”
산은 체격만큼이나 목소리도 우렁찼다.
모든 게 커다란 그는 눈도 컸는데, 그 눈이 둥그레졌다.
“아, 내가 잘못해서 노을이한테 맞았어.”
“노을이한테 맞았다고? 노을이가 때릴 정도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무조건 네가 잘못한 거다.”
절대적인 신뢰다.
어릴 때부터 노을의 성품을 보아온 산은 확신을 담고 말했다.
그 말이 서운하게 들릴 법도 한데, 마른 비는 지체 없이 수긍했다.
“응. 형 말이 맞아. 내가 무지무지 잘못했어.”
둘은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래. 웃는 걸 보니 화해는 했나 보네. 너희는 어릴 때부터 참 질리지도 않고 티격태격한다. 아니, 네가 일방적으로 혼나는 쪽인가?”
“큭큭, 그치. 내가 항상 잘못해서 혼나.”
3년 만인데도 어제 본 것처럼 어색함이 없다.
이런 게 식구고, 친구며, 가족이 아닐까.
티는 내지 않지만, 홀로 야생을 헤맨 3년 동안 얼마나 외로웠던지.
이 정겨움이 너무나 그리웠다.
산은 가슴을 채우는 따스함에 푸근해졌다.
“아, 맞다. 이 녀석을 물었지? 비아, 네가 말한 그놈이 맞다. 보산 일대를 제 영역으로 굳혔던 놈이라구! ‘큰 발’이라고 이름 지었다. 길들이느라 한 오십 번은 죽다 살아났을걸? 으하핫!”
산이 침까지 튀겨가며 호탕하게 웃었다.
“응. 딱 봐도 엄청 세 보여. 이 녀석 정말 강하다고 들었는데. 대단해, 형.”
둘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산의 옆에 웅크린 회색곰은 미동도 없었다.
“안녕, 큰 발? 난 마른 비야. 잘 부탁해.”
호기심과 반가움에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힐끗 쳐다본 큰 발은 곧 냉랭한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어어? 까칠한데, 이 녀석?”
“놔둬라. 기분이 좋지 않을 거야.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온 거니까 말이다.”
“흐음.”
연을 맺었다지만, 그 시작은 힘겨루기일 수밖에 없다.
1년 내내 서로를 죽일 듯이 달려들며 싸운 끝에 큰 발은 산에게 굴복했다.
보산 일대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큰 발에게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반려관계를 맺은 후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지만, 아직은 갈 길이 먼 것이다.
그런데 운남 구석구석을 쏘다니더니 결국 도착한 곳이 인간의 마을.
큰 발은 심기가 영 불편했다.
“걸음이 형은 오후에 오지?”
“응. 그놈이 남은 인원들을 인솔해서 오기로 했으니까.”
“헤에, 얼른 보고 싶어. 걸음이 형도 엄청 강해졌겠지?”
“흥! 그놈이 세졌다고 해봐야 얍삽하게 치고 빠지는 기술이나 늘었겠지.”
산이 콧방귀를 뀌었다.
“큭큭. 여전하네, 형들은.”
산과 안개 걸음은 젊은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들이다.
최고는 한 명.
족장의 자리 또한 오직 하나.
어릴 적부터 제일 친한 친구지만, 동시에 서로가 경쟁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족장님은 어디 계시냐? 뵙지를 못했네.”
“아버지? 토벌에서 아직 안 돌아오셨어.”
“토벌이라고? 사냥이 아니라?”
“응. 원…… 뭐였지? 아, 벌써 까먹었네. 하얀 바위가 연못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10일 거리에 있는 원시림 지역인데.”
“하얀… 뭐? 방위를 말해. 방위를.”
“그건 몰라. 듣긴 들었는데 까먹었어.”
“……너 아직도 방위를 모르냐? 한 달 후면 성년식 아니야?”
“응. 차차 배우지 뭐. 원…… 아, 맞아! 원강!”
“원강? 원강에 문제가 될 만한 녀석이 있던가? 족장님이 직접 나가실 정도면 최소 각성을 이룬 놈일 텐데…….”
산이 멧돼지 고기를 뜯던 손을 뚝 멈췄다.
“설마… 괴후를 잡으러 가신 거냐?”
유쾌하게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청년들이 놀란 얼굴로 이쪽을 돌아봤다.
“어? 형이 어떻게 알아? 맞아, 괴후.”
“헛!”
여기저기서 짤막한 외마디소리가 터졌다.
지난 3년간 운남 각지를 돌며 반려수를 길들이고 몸을 단련해 온 청년들이다.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한 사냥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뿐이랴.
야생에서 지낸다는 건 습격해오는 수많은 맹수들과 싸워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청년들 대다수가 성년식 기간 중 한 번쯤은 만나봤고, 그래서 뼈저리게 안다.
수식어가 붙은 놈들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자신했던 힘은 놈들 앞에 서자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맞서 싸우기는커녕 도망조차 쉽지 않았다.
“두어 번 마주친 적이 있다. 그놈들.”
산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괴이한, 거대한, 사나운. 뭐 그런 거?”
“응. 고유의 이름으로 불리는 놈들보다는 못하다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했어. 큰 발과 함께 덤볐는데도 죽다 살아났다.”
“형. 근데 괴후는 이미….”
“게다가 괴후라면 특이하게도 지능이 발달한 놈이라고 들었어. 무척이나 영악하고 교활해. 무리도 이끌지. 식인을 즐긴다는 소문까지 있다.”
“어. 그건 맞아. 사람을… 먹더라.”
마른 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가만히 들어보면 마른 비가 괴후를 직접 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걸 알만한 데, 산은 눈치채지 못했다.
미간을 좁힌 그는 세상 모든 고민을 홀로 짊어진 얼굴이었다.
“위험해. 족장님과 어른들이 경험은 훨씬 많지만, 우리도 3년간 강해졌어. 직접 마주쳐봐서 아는데 그놈들은 정말 위험해. 당장 후발대를 꾸려서 지원을…!”
따악!
“아야!”
딱! 딱! 따악!
“아오, 아파요! 할아범! 왜 때립니까!”
산이 머릴 움켜쥐며 울컥했다.
그믐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고 있네, 놀고 있어. 세상 심각한 표정은 혼자 다 짓고 있길래 뭔 소릴 하나 했더니……. 지원? 누가 누굴 지원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들이 지원은 얼어 죽을!”
“할아범! 저희도 충분히 강해졌어요! 3년 전의 꼬마가 아니란 말입니다! 경험상 그놈들은…!”
“경허어엄? 이제 갓 성년식을 통과한 애송이들이 경험은 무슨. 백 년은 이르다. 이놈아!”
호통을 친 그믐이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주위를 둘러봤다.
‘얼씨구?’
저 표정들.
청년들은 당장 지원을 가야 한다는 산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진심으로 어른들을 걱정하는 것이다.
“쯧. 역량을 파악하란 이야기를 무수히 했거늘. 어설픈 힘과 경험에 도취되어 장님이 된 꼴이라니……. 좋은 기회구먼.”
“형, 누나들! 괴후는…!”
잽싼 다리를 떠올리고 우울해졌던 마른 비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가 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그믐이 입술을 달싹이며 가만히 있으란 눈치를 줬다.
‘응?’
“괴후가 뭐? 비아야?”
“아, 아냐. 형.”
“싱겁기는. 근데 할아범, 좋은 기회라니, 뭐가 좋은 기회라는 겁니까?”
“뭐긴. 핏덩이들의 눈을 뜨게 해줄 참교육 말이다.”
손에 든 장죽을 내려놓고 소매를 걷는다.
육십을 넘어 종심(從心)을 향해가는 그믐올빼미.
세월을 담은 그의 눈이 번쩍이며 빛났다.
“덤벼봐라. 꼬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