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3화 (13/463)

13화

생각지도 못한 그믐의 말에 산의 눈이 동그래졌다.

“덤비라고요? 대련을 말씀하시는…? 에이, 할아범. 그간 저 엄청 강해졌어요. 연세도 있으신데…….”

“곧 정식으로 전사가 될 녀석이 왜 이리 혓바닥이 긴 게야. 상대가 싸움을 걸어왔으면 팔부터 걷어붙여야지. 설마 이 늙은이가 무섭기라도 한 거냐?

명백한 도발.

아무리 부족의 큰 어른이라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전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좋습니다. 부족의 어른께 주먹을 들이대긴 싫지만… 어쩔 수 없네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아직 멀었군.’

팔짱을 낀 채 외곽에서 지켜보던 매서운 눈이 고개를 저었다.

‘상대의 역량을 가늠할 줄 몰라. 맨손으로 맹수들을 픽픽 쓰러뜨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힘에 취했다.’

자신도 그랬다.

이십여 년 전 성년식을 끝마치고 돌아왔을 때.

힘이 솟구쳤고, 자신감이 넘쳤다.

누구든 이길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황을 살피지 않고, 상대를 관찰하지 않으며, 행동이 앞선다.

치기와 자존심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가벼운 도발에도 쉽게 넘어간다.

가장 위험한 시기다.

“몇 수?”

“흠. 산이 저놈 저거 워낙에 맷집이 좋아서……. 13수 어때?”

“에헤이~ 그믐 할아범 상대로 13수를 어떻게 버티나? 저 꼬맹이가.”

“좋아. 10수!”

“좋았어!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매 성년식마다 있는 통과의례다.

아이들이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콧대를 꺾어 놓는 것.

몸에 직접 새기는 훈계이자 교육이었다.

“뭐로 할래?”

“교자설산(轿子雪山) 흰 수리알! 고게 고렇게 맛나다고 하더라.”

“어쭈? 자신 있나 봐?”

“왜? 쫄려? 쫄리면 뒈지시던가.”

“하! 쫄리긴! 다녀오는 데 한 달은 걸릴 거다. 피똥 쌀 준비나 해라.”

“부화하기 전에 들고 와야 한다? 죽지 않게 네 몸으로 품어서?”

“큭큭, 잘 알고 있네. 그렇게 들고 오면 돼. 깨지지 않게 조심하고.”

하지만 지켜보는 어른들은 즐겁다.

3년에 한 번 벌어지는 내기에 걸리는 먹거리들은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별미였다.

“후우웁―.”

들이마시는 숨에 농도 짙은 자연기가 담겼다.

전신에 활력이 깃들며 몸 곳곳에 잠들어 있던 기운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산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호오. 제법…….’

“갑니다. 할아범.”

힘차게 전진하는 신체를 따라 산의 왼발이 눌러 찍듯 대지에 내리박혔다.

쾅!

왼발을 축 삼은 오른 주먹이 사납게 날아든다.

탄탄한 허리가 중심을 잡고, 회전하는 몸체가 체중을 주먹에 실어 보냈다.

회색곰 큰 발을 무릎 꿇린 강권(强拳), ‘바위 부수기’가 그믐을 덮쳤다.

빠아악!

“엇?!”

기세는 좋지만 허점투성이다.

후려치는 오른발 하단 차기에 산의 왼발 축이 단박에 무너졌다.

“내가 곰이냐? 그걸 기다리고 있게?”

말아 쥔 주먹의 손등.

안에서 밖으로 휘두른 그믐의 오른손이 산의 턱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뻐어억!

“큭!”

타격을 허용한 산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

얻어맞은 아픔보다 허무하게 쓰러졌다는 놀라움이 훨씬 더 크다.

산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믐을 올려다봤다.

“쯧쯧. 형편없구먼.”

“이익!”

빠악!

일어나려는 산의 턱에 깔끔한 앞차기 일격이 틀어박혔다.

“3수.”

내기를 하는 어른들은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미련한 놈. 사람을 상대하는데 그런 큰 동작이 가당키나 하단 말이냐. 전력을 다해 휘두르는 건 덩치 크고 굼뜬 야수들에게나 먹히는 거지.”

와족의 아이들은 강하다.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운남의 강대한 야수들을 맨손으로 때려잡으며 단련했으니 강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는 전부 짐승이었다.

“짧고 간결하게. 예리하고 정확하게. 사람은 짐승만큼 튼튼하지 않다. 굳이 힘을 있는 대로 때려 박을 필요가 없는 게야.”

사람과 싸울 줄 모르는 전사.

치명적인 한계다.

아직 전사라는 호칭을 짊어지기에 청년들은 너무나 미숙했다.

이제는 대인 전투를 배워야 할 때이며, 그들을 단련시키는 건 전적으로 성인 전사들의 몫이었다.

“……과한 힘을 덜어내란 뜻이겠죠. 상대의 동작을 읽고 날카롭게 허점을 파고든다. 이해했습니다. 할아범.”

산의 자세가 변했다.

전력으로 휘두르기 위해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양팔을 겨드랑이에 밀착시킨다.

넓게 벌렸던 두 발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돌진의 축이 될 왼발은 일 보 앞으로.

힘에만 치중했던 방만한 자세가 정교한 타격을 위해 팽팽하게 조여졌다.

작고 단단하게.

등을 오므려 중심을 낮춘 자세는 언제든 달려들 준비가 끝난 맹수와 같다.

두터운 주먹 위로 산의 두 눈이 번쩍이며 빛났다.

“허어? 저놈 저거! 타고났네, 타고났어!”

지켜보던 어른들이 탄성을 질렀다.

오직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눕히기 위해 만들어낸 부족의 대인 전투 자세.

긴 세월, 무수한 싸움을 반복하며 조금씩 다듬어온 자세가 타고난 본능에 의해 구현되었다.

‘요놈도 확실히 재능은 넘쳐흐른단 말이지.’

“갑니다. 할아범.”

앞에 놓인 왼발이 대지를 박찬다.

직선으로 짧게 뻗은 왼 주먹이 상대의 움직임을 유도하고, 결정타를 먹일 오른 주먹이 그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쒜엑, 쒜에엑!

전과는 확연히 다른 속도다.

본능이 일러주는 대인 타격술이었다.

타악!

가볍게 내친 손바닥이 귀찮은 파리를 쫓듯 날아드는 주먹을 튕겨냈다.

주먹을 뻗기에 최적화된 자세를 찾아낸 건 놀랍지만, 그뿐이다.

숙련되지 않은 기술로는 그믐의 옷깃조차 스칠 수 없다.

산의 주먹이 궤도를 크게 벗어났다.

“이게 정확한 타점의 중요성이니라.”

빠악!

올려치는 손바닥에 산의 고개가 꺾일 듯 하늘을 향해 들렸다.

‘큭!’

얻어맞는 순간, 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예상한 타격이다.

들어올 충격을 ‘각오’한다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다.

“호오, 턱을 맞고도 안 쓰러져? 한 방 더.”

그믐의 신형이 물 찬 제비처럼 휘돌았다.

머리는 땅으로, 다리는 하늘로.

쾌속하게 뻗어 나간 발차기는 하늘의 비조조차 격추시킬지니.

초저공에서 펼쳐진 비격, 날짐승 떨구기가 산의 턱을 강타했다.

콰아앙!

“끄윽…!”

집요하게 턱만을 노린다.

흔들린 뇌가 시야에 비친 하늘과 땅을 뒤집었다.

‘이것만 버티면!’

갓 떠올린 타격기로 숙련자인 그믐 할아범을 이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준다.

맷집으로 버티고 거리를 지웠다.

조이기.

처음부터 노린 건 이것 하나였다.

덥석!

흔들리는 시야를 억지로 잡아내며, 산이 자세를 추스르는 그믐을 껴안았다.

우드득!

“포기하세요, 할아범! 제가 이겼…!”

빠아악!

지체 없이 날아든 박치기가 산의 코뼈를 분질렀다.

“크악!”

“맷집 하난 기가 막히는구먼. 입 열 시간에 힘을 더 줬어야지.”

슥-

그믐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자세를 잡았다.

내뻗어서 오므린 다섯 손가락은 날카로운 새의 부리를 닮았다.

그의 반려수 어둔 날개의 사냥 모습을 참고하여 만들어 낸 일점 집중타!

“올빼미 사냥.”

빠바바박!

턱 한 곳에 집중되어 내리꽂힌 네 방의 좌우 연격이다.

질기게도 버티던 산의 동공이 스르륵 풀어졌다.

쿠웅!

흩날리는 먼지와, 내리쬐는 태양 아래 뒷짐 진 백전노장의 여유.

한 점의 군더더기도 찾아볼 수 없는 동작들은 그저 눈부실 따름이었다.

“데려가서 눕혀줘라.”

놀랍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청년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믐의 입이 씨익 보기 좋은 곡선을 그렸다.

“이, 이럴 수가…! 엄청난데? 그믐 할아범!”

“산이가 공격 한 번 제대로 못 했어…….”

“원래 저렇게 셌던 거야? 할아범이?”

소요가 일었다.

그믐은 청년들이 어릴 적부터 보아온 부족의 큰 어른이다.

걸쭉한 욕을 항상 입에 달고 사는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신기한 물건과 재미난 이야기를 한 아름 들고 오는 만물 보따리.

청년과 아이들이 바라보는 그믐이란 그런 존재였다.

“하긴……. 수리의 눈 수장이잖아. 아직도.”

“일선에서 물러난 거 아니었어? 할아범은?”

“그러고 보니 젊었을 때 굉장한 전사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청년들 중 산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산은 안개 걸음과 더불어 젊은 세대에서 그야말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런 산이 힘 한번 못 쓰고 나가떨어졌다.

청년 전사들이 받은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긴. 꼬맹이들이 알 턱이 있나.’

그믐올빼미.

원래의 이름은 ‘성난 그믐’.

너른 하늘과 매서운 눈, 우둔한 땅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는 부족 제일의 전사였다.

그들이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을 때 벌어진 한족과의 분쟁에서 그믐은 가장 많은 적을 죽였고, 또한 가장 많은 부족원을 살렸다.

그믐은 현재 부족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성인 전사들의 우상이었다.

지금 난다 긴다 하는 전사들 모두가 그믐의 등을 좇으며 성장해온 것이다.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노인네인 줄만 알았겠지.’

그가 직접적인 사냥이나 전투에서 손을 뗀 지가 이십 년에 가깝다.

오늘처럼 교육을 위해 가끔 나설 때 말고는 그 매서운 손속을 보기가 힘드니, 이 세대의 아이들은 그믐의 진면목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 무섭던 양반이 이렇게 유해질 줄 누가 알았을까.’

간간이 끼워 넣는 반말과 짓궂은 농.

예전 같았으면 머리부터 땅에 처박혔을 터다.

‘그 일’ 이후, 그믐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그 녀석은… 잘 살고 있으려나.’

매서운 눈이 서글서글했던 어린 시절의 친우를 떠올렸다.

“어이, 눈깔이. 뭘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게야?”

뒷짐을 진 그믐이 뻐끔뻐끔 연기를 피워 올리며 다가왔다.

“아, 역시 24년 전이 맞구나, 생각하던 참이오.”

“응? 뭐가 말이냐?”

“할아범이 밤일을 제대로 못 하게 된 것이지 뭐겠소. 산이 같은 꼬맹이를 상대로 11수라니. 영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지.”

“이눔 시키가 또 깐죽대네. 이십 년 만에 먼지 나게 맞아볼 테야?”

나오는 말과 달리 키득거리는 그믐의 표정은 유쾌하기만 했다.

“그게 가능하겠소? 뼈마디가 쑤시다 못해 삭을 나이 아니오.”

“큭큭, 그래. 네 말이 맞다. 이거 영 몸이 예전 같지 않구먼.”

그믐이 비명을 질러대는 허리를 좌우로 휘돌렸다.

“노인네, 엄살은.”

이십여 년 전, 성년식을 마치고 돌아온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은 산이 쓰러져 있는 바로 저 자리에서 죽기 직전까지 그믐에게 두들겨 맞아야 했다.

기절할 때마다 정신이 나약하다고 급소를 걷어차서 깨우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믐이 만족한 얼굴로 돌아선 건 꼬박 이틀이 지나서였다.

온종일 기절을 반복하면서도 투지가 꺾이지 않고 달려들었던 둘에게, 그믐은 말했다.

‘그럭저럭 쓸 만하군. 쉬어도 좋다.’

그대로 무너져 내린 둘은 삼 일이 지나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만약에… 몸 추스르고 감각만 되찾는다면.’

매서운 눈은 그믐과 산의 대련을 지켜보며 확신했다.

‘나나 우둔한 녀석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족장님 말고는 확실히 압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썩어도 준치라고 이십 년이 지났음에도 그 날카로운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저 많이 무뎌졌을 뿐.

“어이구~ 벌써 일어서는 거 봐라. 저놈 저거, 확실히 타고났지?”

그믐의 눈길은 막 일어나 앉아 어지러운 듯 머리를 흔드는 산에게 닿아 있었다.

“저놈과 걸음이야 원래 뛰어났지. 족장님이 말도 안 되게 강해서 상대적으로 비교가 될 뿐, 둘 다 족장이 되고도 남을 재능이잖소.”

“그러게 말이다. 비아와 노을이. 산이와 걸음이. 그냥 놔두기 아까운 녀석들이야. 한번 붙잡고 가르쳐볼까?”

매서운 눈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번졌다.

“가르친다고? 무슨 바람이 분 거요? 검은 수리 전사들이나 가끔 봐주는 거 말고는 죽어도 싫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그거야 성에 차는 놈이 없어서 그랬던 거지. 고 녀석들은 제법 가르치는 맛이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뭐라도 남기고 싶어지는구나.”

“재수 없는 소리를……. 내키진 않지만 원한다면 옆에서 수발이라도 들어드릴 테니 오래오래 사시오.”

뭐 잘못 먹었냐는 표정의 그믐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미친놈. 별 징그러운 소릴 다하고 자빠졌네. 야! 교자설산 흰 수리알! 다 들었다! 올 때 내꺼도 가져와!”

입으로 내뱉는 약한 소리와 달리 정정하기만 한 그믐이었다.

‘세상에!’

마른 비의 맑은 눈동자를 가득 채운 건 오직 놀라움, 그 하나뿐이었다.

‘사람이 저렇게도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마을 주변의 사냥감들은 본능적인 움직임만으로도 포획이 가능했다.

사람이 투쟁을 위해 고안해 낸 동작이라고 해봤자 잽싼 다리가 보여준 날짐승 떨구기 정도가 전부였다.

아버지와 괴후의 싸움.

분명 엄청났지만, 그건 기술을 배제한 채 힘과 속도에 의존한 원시적인 싸움에 가까웠다.

인간 대 인간.

제대로 된 싸움을 본 것은 처음이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쏟아내는 현란한 몸짓들은 경이 그 자체였다.

‘균형을 무너뜨리고, 날아오는 주먹을 쳐내고, 턱을 집중공격하고…….’

뇌를 흔들기 위해 턱을 공략했다는 사실까지는 모른다.

그저 산의 위압적인 덩치와 힘을 가뿐히 제압한 동작들이 잊히지 않았다.

가열한 공방의 와중에 터져 나온 날짐승 떨구기.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기술이 아닌가.

‘그걸 그 상황에 쓰다니!’

놀라움의 연속이다.

뒤늦게 전투에 관심을 갖게 된 소년의 머릿속에선 산과 그믐의 싸움이 반복해 그려졌다.

그런데 마른 비 외에도 눈빛을 반짝이는 사람이 또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