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4화 (14/463)

14화

‘저거야!’

마른 비의 옆.

노을의 영리한 눈동자에 희열의 빛이 차올랐다.

소년이 새로운 영역에 눈 뜨는 사이, 소녀는 막막하던 난관을 뚫어낼 돌파구를 찾아냈다.

‘산이 오빠를 저렇게 쉽게…!’

부족한 근력.

그로 인한 힘의 열세.

육체의 강건함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전투라는 측면만 놓고 봤을 때, 여성은 남성에 비해 명백한 열위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힘과 속도에 치중한 부족의 싸움법은 남성의 타고난 육체를 활용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급소를 노리는 정밀한 타격. 그리고 허를 찌르는 의외성!’

이거다.

약자가 강자를 상대할 수 있는 비책!

그믐이 보여준 노련함에서 노을은 길을 보았다.

짧은 11수의 대련이었지만 타고난 재능들의 가슴에 불씨가 옮겨붙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 *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청죽림이 다시금 들썩이기 시작했다.

“저희, 도착했습니다!”

후리후리 큰 키에 탄탄한 체구가 시선을 끈다.

날렵한 턱선과 곧게 뻗은 콧날은 우락부락하기만 한 부족의 남성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성년식의 나머지 인원들을 인솔해온 ‘안개 걸음’이 시원한 웃음과 함께 마을로 들어섰다.

“왔구나!”

“오, 드디어! 고생 많았다!”

마침내 성년식을 떠났던 청년들이 모두 모였다.

오지 않는 자식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들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달려 나갔다.

“다 왔구먼. 시간을 맞추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족장 이 망할 인간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게야?”

그믐은 늦어지는 토벌대가 못마땅한지 연기를 뻑뻑 거칠게 내뱉었다.

“할아범!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오, 비아와 노을이 아니냐! 엄청 컸구나! 성년식을 떠날 준비는 잘 되어가…… 응?”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지만, 변함없이 정정한 그믐 할아범과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비아와 노을이.

너무 보고 싶던 얼굴들이다.

반갑게 다가서던 안개 걸음이 한옆에 주저앉아 코를 매만지는 거구의 사내를 보고 주춤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사내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산? 너 산이지? 오랜만이다! 성년식은 어땠어? 그새 몸집이 더 커졌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러냐?”

3년 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내려앉은 코뼈는 부러지기라도 한 것 같다.

어딘가에서 된통 두들겨 맞은 모양이었다.

“엉. 잘 지냈냐? 고생 많았다, 걸음아. 무사히 돌아와서 보니까 좋네. 얼굴은…… 할아범과 대련하다가 이리됐다.”

‘끄응, 3년 만인데 하필 이런 모습을…….’

반가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산의 어조는 기묘했다.

“응? 할아범과 대련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너, 3년간 놀았냐?”

안개 걸음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

다른 청년들이 그랬듯 그믐의 진면목을 몰랐을 뿐.

하지만 그믐의 눈썹은 이미 하늘로 치솟은 뒤였다.

‘이놈의 자슥이?’

안 그래도 족장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는데 잘 걸렸다.

그믐이 안개 걸음에게 검지를 까딱거렸다.

“너도 이리 와라. 실력 좀 보자.”

“에이, 할아범. 전 3년간 놀지 않았어요. 연세도 있으신데…….”

요란한 비명을 남긴 채 뻗은 안개 걸음을 보며 산이 즐거워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 *

타닥, 타닥.

횃불이 타올랐다.

해는 지평선 너머로 잠들고 아리따운 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늘에서 시선을 내린 그믐이 말했다.

“괴후는 이미 때려잡았다.”

성년식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들이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공터에 모였다.

반려수들과 나란히 도열한 그들의 모습은 헌앙하기만 했다.

“먼저 달려온 검은 수리 전사들이 토벌의 성공을 알려 왔다. 족장과 전사들이 늦어지고 있지만, 곧 도착할 게야.”

그믐의 말이 맞았다.

청년들의 우려와 달리 어른들은 훌륭히 괴후를 처리한 것이다.

‘아직 멀었구나.’

산과 안개 걸음의 충격적인 패배.

일선에서 잔뼈가 굵은 성인 전사들의 힘에 대한 오판.

성년식을 마치고 들떠 있던 청년들이 섣부른 자만을 반성했다.

“오래 기다렸다. 먼저 신령목(神靈木)으로 이동해서 족장과 전사들을 맞이하자꾸나.”

부엉이 우는 소리와 함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흠……. 금년은 희한하게 조용하구먼.’

청년들이 앞서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부족원들이 그 뒤를 따른다.

부족이 신령시하는 고대의 거목으로 사람들을 인솔하며, 그믐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 아이들이 유독 야수 제어(野獸制御)가 뛰어난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우둔한 녀석을 내보내지 않았어도 됐겠는데?’

새로 길들여 온 야생의 짐승들.

교류의 기간이 길어지고 야수 제어가 능숙해지면 걱정할 바가 없으나, 청년들은 반려수와 연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성년식 직전에 성공한 경우라면 기껏해야 한두 달밖에 되지 않은 짝도 있다.

새로이 접한 환경과 아직은 느슨한 반려관계.

반려수들이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게 정상이었다.

‘아니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야수 제어는 숙련도가 가장 중요해. 가장 빨리 맺어진 녀석이라고 해봤자 고작 2년에서 2년 반. 운남 각지에서 온 야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왜 이리 조용한 거지?’

반려수의 심적 동요를 가라앉혀 줄 수 있는 건 야수 제어가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일이다.

청년들에게는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믿음이 두터워서?’

야수 제어와 관계없이 반려수가 자신의 벗을 극히 신뢰한다면 가능할 법도 하다.

‘아니야. 그것도 어렵지.’

연을 맺은 기간이 너무나 짧다.

이제 겨우 서로를 알아가며 친분을 다지는 시기였다.

그새 반려수가 생리적 불안감을 억누르고 얌전히 대기할 만큼의 신뢰를 쌓았다?

그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시간인데.’

우둔한 땅이 마을 멀리 나가 있는 이유.

그는 새로 마을에 들어온 반려수들을 위해 적응이 끝난 기존 부족원의 반려수들을 모두 데리고 나갔다.

오늘 도착한 야수들은 지독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서로를 탐색하고 나름의 서열을 정리 중일 터다.

그 과정에서 애매하거나 인정 못 할 부분이 있다면 부딪힌다.

그건 짐승들에게 있어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이나 다름없었다.

자연스럽게 정리될 때까지.

그저 모아놓고 지켜보는 방법밖에는 없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건 반려수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 놈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어.’

이런 적은 없었다.

초식동물은 초식동물끼리.

사나운 육식동물은 그들끼리.

가끔은 초식과 육식까지도.

상대를 인정 못 하는 녀석들은 박 터지게 싸우고 나서야 서로의 서열을 정리해왔다.

‘아! 있었구먼. 두 번.’

자신을 따라왔던 어둔 날개와 너른 하늘이 데려왔던 푸른 눈.

‘그놈들이 마을에 온 날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었지.’

어둔 날개는 그믐이 이름을 지어주기 전에 맹효(猛梟)라 불리었다.

사나운 올빼미.

수식어가 붙은 사모 일대 밤의 제왕이었다.

푸른 눈은 족장을 만나기 전부터 푸른 눈이었다.

애뢰산의 산군이자 고유의 이름으로 불리던 영수가 바로 녀석이다.

감히 이빨을 들이댈 엄두조차 나지 않는 압도적인 힘.

그 둘과 같은 시기에 들어온 짐승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었다.

‘그렇게 강한 녀석이 있나?’

그믐이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따르는 반려수들을 둘러봤다.

그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도 다른 야수들을 얌전하게 할 만큼 강한 맹수가 존재했다.

문제는 한 마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둘은 오후에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내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크르르…….”

적대감 서린 울음이 숲을 뒤덮은 어둠만큼이나 짙게 내리깔렸다.

잡티 하나 없이 새카만 털에선 달빛도 미끄러질 윤기가 흐른다.

그믐이 겨우 손에 넣었다며 자랑하던 머나먼 바다 흑진주의 보배로운 광택처럼.

한낱 짐승임에도 도도한 품격을 휘감고 있는 맹수가 위협적으로 앞발을 디뎠다.

“밤! 가만있어!”

안개 걸음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벗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힘들게 차지한 대흑산(大黑山)을 버리고 떠나올 때도 고분고분했던 녀석이다.

마을에 들어설 때까지도 순조로웠다.

시무룩한 표정의 산, 그 옆에 뚱하게 웅크린 회색곰을 보기 전까지는.

“꾸웅, 꾸어엉!”

“큰 발, 인마! 말 좀 들어!”

산도 죽을 맛이었다.

‘일단 따라오긴 했다만 이 상황, 그리고 너. 죄다 맘에 안 들어.’

큰 발이 인간이었다면 분명 그리 말했을 거다.

있는 대로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그래도 철퍼덕 엎드려 얌전히 있던 녀석이다.

대나무 숲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온 흑표범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두 야수가 서로를 ‘인식’한 순간.

흑표범 ‘검은 밤’은 주둥이를 열어 이빨을 드러냈고, 엎드려 있던 회색곰 ‘큰 발’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사나운 눈빛을 쏘아냈다.

불꽃이 튀는 순간이었다.

검은 밤 때문에 마을로 오는 내내 애꿎은 땅만 헤집어야 했던 야수들과, 큰 발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마을의 짐승들이 더욱 피곤해진 순간이기도 했다.

“끄우웅!”

“크릉!”

나란히 걷는 산과 안개 걸음.

산의 왼편에 있는 큰 발과 안개 걸음의 오른편에 선 검은 밤.

두 마리의 맹수는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며 끊임없이 기 싸움을 벌였다.

“오~ 적극적이네! 이 녀석들, 친해지고 싶은가 봐!”

이인이수(二人二獸)를 뒤따르던 마른 비가 똥줄 타는 두 사람의 속도 모르고 즐거워했다.

‘대, 대체 어딜 봐서?’

‘놀리나, 이 꼬맹이가…!’

천진난만하게 웃는 마른 비와 으르렁대는 두 마리의 맹수.

큰 발과 검은 밤은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우우웅―

안 되겠다.

더 이상은 두고 보지 못하겠다.

안개 걸음의 눈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강압적인 건 싫지만,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는 건 더 싫다.

안개 걸음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만하라고 했지.』

언령(言令).

자연기에 바탕을 둔 야수 제어의 술(術)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뛰쳐나갔다.

야수의 심혼을 위압하는 지상명령이었다.

음성으로 발현된 기의 압제가 흑표범의 전신을 거세게 내리눌렀다.

“카앙…!”

시간이 흘러 신뢰를 쌓고 보다 두터운 관계로 발전한다면.

또는 야수 제어가 숙련에 이르러 반려수의 심적 동요까지 가라앉혀 줄 수 있다면.

지금처럼 제압이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아도 되리라.

아직은 안개 걸음이 미숙하다는 증거였다.

『너도 적당히 해라.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거꾸로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어르고 달래는 건 여기까지다.

도통 말을 듣지 않으니 남은 건 실력 행사뿐.

큰 발을 노려보는 산의 눈에서 섬뜩한 푸른빛이 번뜩였다.

“끄우웅…….”

말을 듣지 않고 까불다가 형에게 혼쭐이 난 철부지 동생 같다.

인간이 건넨 나지막한 경고에 눈을 내리까는 회색곰의 모습은 이채롭기만 했다.

‘호오, 제법…….’

정말 제법이다.

위압하지 않아도 말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 상승의 경지라지만, 야수 제어를 연마한 지 3년도 되지 않은 꼬맹이들이 눈빛과 언령 한 마디로 맹수를 제압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산 일대를 평정한 큰 발과 대흑산의 패자 검은 밤.

제 나름의 영역까지 구축했던 놈들이 아닌가.

매서운 눈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아냐, 아냐. 한번쯤 살풀이를 하는 게 나은데 말이지.’

같은 광경을 보더라도 드는 생각은 다른 법이다.

똑같은 미소지만, 그믐의 그것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달랐다.

‘흐흐흐,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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