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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5화 (15/463)

15화

“크으~ 3년 만이네.”

“언제 봐도 이건…!”

산과 안개 걸음이 뒤통수가 목에 닿을 듯 고개를 꺾고,

“우와아아~!”

마른 비는 꾸밈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청죽림의 끝자락,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개활지다.

대나무 숲을 벗어난 부족원들을 찬연한 대자연의 경이가 굽어보고 있었다.

짙어진 신록은 녹음을 지어낸다.

바야흐로 새잎의 푸른빛이 무르익으면, 진녹색 그윽한 그늘이 뒤따라 드리워지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지만, 그것이 늘어뜨린 음영은 에워싼 숲의 경계를 따라 개활지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크다아아아~!”

터져 나오는 탄성은 막을 도리 없는 심중의 격동이라.

대자연의 위엄을 목도한 마른 비의 순수한 찬탄이었다.

“볼 때마다 놀랍네요. 이건.”

하늘을 가리는 어마어마한 높이와 자그마한 숲을 끌어안은 듯이 넓은 품.

부족의 신령목은 그처럼 거대하기만 했다.

“힘이…!”

나무가 뿜어내는 순정한 기운은 자연기를 활용할 줄 아는 전사들에게 벅찬 희열을 안겨 주었다.

청정한 대자연의 기가 육신을 휘돈다.

호흡 호흡마다 영기 어린 숨결이 혈관을 일주하며 쌓인 탁기(濁氣)를 몰아내는 듯했다.

“신령목 주변에서 부족의 전사들은 훨씬 강해지지.”

그믐이 끌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공기의 농도부터가 다르다.

전사가 아니더라도 나무가 간직한 영험한 기운을 느끼기에 충분하리라.

부족이 대대로 고목을 신령시 해온 까닭이었다.

‘느껴져.’

혼자 사냥을 할 때도 활용했던 기운이다.

숲의 호흡을 느끼고, 주변 지형에 녹아들었을 때.

강인한 맹수들을 맨손으로 때려눕혔을 때.

자연기를 운용하지 못한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수년에 걸친 야생에서의 수렵과 자연기를 활용하도록 진화해 온 와족의 신체는 소년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자연기의 실체를 더듬게 해주었다.

마른 비는 괴후 토벌전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을 더욱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잽싼 다리가 원숭이들을 제압할 때 보여주었던 투기.

동굴 안에서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던 괴후의 살기.

둘 모두 자연기를 가다듬어 뿜어내는 무형의 기운들이다.

그리고 지금, 운남 전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자연기가 밀집된 장소에서 소년은 명확히 깨달았다.

‘부족 회의에서 언급됐던 자연기라는 게 이거였어. 그리고 난… 이걸 이미 활용하고 있었고.’

더욱 뚜렷해지는 후회다.

교육에만 제대로 참여했다면.

좀 더 많은 걸 쌓고,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면.

어쩌면, 잽싼 다리 아저씨를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신 후회하지 않을 거야.’

밤하늘을 뒤덮은 영험한 고목 아래서.

소년은 지금부터라도 부단히 힘을 키워 나가리라 다짐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아이와 비슷해진다는 세간의 말이 사실인 걸까.

마른 비가 모처럼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고 있을 때,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노인은 혼자 키득대고 있었다.

‘장소도 널찍하겠다. 슬슬…….’

그믐의 눈이 못된 장난을 준비하는 개구쟁이의 그것처럼 가늘어졌다.

“크흠.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말이야.”

신령목을 보며 감탄하던 모두가 그믐을 돌아봤다.

잠시 말을 끊은 노인이 후우 연기를 뿜었다.

가느다랗게 휘어진 눈은 곧 벌어질 재미난 볼거리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너희 둘, 누가 더 센 거냐?”

한순간에 모두의 이목이 산과 안개 걸음에게 집중됐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이 신성한 장소에서 난데없이 저런 엉뚱한 질문이라니.

어안이 벙벙해진 둘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산이가 더 세냐?”

“그럴 리가요! 저 둔탱이는 저를 스치지도 못합니다! 할아범!”

자세히 볼 필요도 없다.

붉게 달아오른 안개 걸음의 얼굴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 걸음이냐?”

“말도 안 되죠! 제가 저런 삐쩍 곯은 말라깽이한테 밀릴 것 같습니까!”

“뭐, 인마?!”

‘아차!’

‘안 돼. 말려들면 안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장난질을 거는 할아범의 수작엔 이골이 났다.

산과 안개 걸음은 심호흡을 하며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나 했더니…….”

“안 통합니다. 할아범.”

‘그렇겠지’

괜찮다.

어차피 노린 건 이 둘이 아니니까.

“그럼 큰 발이와 밤이는 어떠냐?”

“……?!”

산과 안개 걸음에게 혼나고 시무룩해 있던 짐승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놈을 인정할 수 없다. 붙어봐야 한다.’

오후 내내 이어진 둘의 공통된 욕망이었다.

“내가 책임지마. 누가 위인지 시원하게 한번 가려봐라.”

보았다.

자신의 벗이 저 나이든 인간에게 무참히 두들겨 맞는 것을.

저 인간이 강자다.

강자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눈치 볼 필요 없다!

“할아범! 이게 무슨…?!”

“크아아아아앙!”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놈이다.

그 시건방진 눈초리라니!

흑표범 검은 밤이 대기가 찢어져라 울부짖었다.

늘씬하게 뻗은 앞발에서 적들을 갈라 죽인 새하얀 발톱이 튀어나왔다.

땅을 박찬 다리가 거리를 지우고, 눈 깜짝할 사이에 측면으로 파고든 흑표범이 회색곰의 안면을 긁어내렸다.

촤아악!

“꾸어어어엉!”

이 같잖은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숲을 헤치고 나올 때부터 꼴 보기 싫었다.

이따위 녀석은 보산을 평정할 때 숱하게 보았다.

치고 빠지는 데에만 집중하는 겁쟁이들.

하루 세끼 이런 놈들로만 배를 채운 적도 있다.

허약한 놈들이다.

검은 밤이 그렇듯 산을 만나고 자아를 갖추게 된 큰 발은 보다 뚜렷한 인식과 감정의 구현이 가능해지고 있었다.

부와아앙―!

큰 발.

그 이름처럼 휘둘러진 앞발은 거대했다.

풍압에 휘말린 풀들이 허공으로 비산한다.

큰 발의 힘은 백 년이 넘은 거목을 일격에 부숴버릴 정도였다.

“크릉…!”

짤막한 울음소리와 함께 검은 밤의 자세가 한없이 지면에 가까워졌다.

곰의 앞발이 허공을 때리고 간 틈.

목표를 눈에 새긴 흑표범이 사납게 달려들었다.

콰악!

목.

모든 짐승의 약점은 목이다.

큰 발의 목을 짓씹듯 베어 문 검은 밤이 몸을 빙그르르 회전시켰다.

“캬아아오!”

목덜미가 짓이겨지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거웅(巨熊)이 앞발을 올려쳤다.

퍼어억!

줄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던 검은 밤이 힘없이 지면에 떨어져 내렸다.

날개 없는 추락이었다.

“꾸으… 엉…!”

살점째 뜯겨 나간 왼쪽 목덜미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내린다.

“그르르르…….”

얻어맞은 상처와 지면에 낙하한 충격으로 뼈와 내장이 상했다.

큰 발과 검은 밤.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한 격돌이었다.

“둘 다 그만해!”

“이 자식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건 산과 안개 걸음뿐이다.

어른들은 태연하게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한 전사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광서우(狂犀牛)의 갓 태어난 새끼.”

곧 교자설산 흰 수리알을 품으러 떠나야 하는 전사다.

“뭐여, 막 지르고 보는 거여?”

한 달 후, 흰 수리알을 건네받기로 한 전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기에서 지더니 정신줄을 놓은 모양이다.

수식어가 붙은 놈의 새끼를 훔쳐 오자니.

미친 코뿔소.

난폭하기로 소문난 밀림 폭군의 새끼를 말이다.

“워워~ 진정해, 친구. 알 가지고 오면 우리 나눠 먹자구.”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는 어른들과 달리 산과 안개 걸음은 조마조마했다.

큰 발과 검은 밤은 어떨지 몰라도 그들은 자신의 짝에게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멈춰야 해!’

저 정도만 해도 이미 치명상이다.

녀석들이 이 이상 다치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다.

강제로라도 멈춰 세우리라.

그들의 손에 푸른빛 자연기가 응집된 순간!

덜컥.

둘의 움직임이 일순 마비라도 된 것처럼 멎었다.

‘이, 이게 뭐야?’

‘할아범?’

야수 제어의 술.

짐승을 거느리기 위해 계승되어온 부족의 비전이다.

그 영향력을 사람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는 자.

너른 하늘과 그믐올빼미, 단 둘뿐이리라.

초월적인 무력과 강인한 정신력, 완숙에 이른 야수 제어.

절정의 문턱을 넘은 자만이 엄두를 내 볼 지고의 경지였다.

‘이, 이걸 사람에게 쓸 수 있다고?!’

잠시 행동을 멈추는 게 전부지만, 그것만으로도 믿지 못할 일이다.

산과 안개 걸음의 척추를 타고 전율이 스쳤다.

‘일단 놔둬 봐라.’

그믐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둘은 어른들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익숙함.

아마도 매번 이런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아…!”

이제야 기억이 난다.

3년 전에 있었던 성년식.

마을에 막 들어온 짐승들끼리 다퉜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투닥거리는 정도였는데…….”

“큰 발이와 밤이가 그놈들보다 월등히 세니까.”

싸움의 현장을 빙 둘러온 그믐이 산과 안개 걸음 옆에 섰다.

“첫날에 하는 게 좋다. 저렇게 비등한 상대라면 언젠가 반드시 싸우게 돼 있어.”

기나긴 연륜이 전하는 조언이었다.

뒷짐을 진 채 깊은 눈으로 싸움을 바라보는 그믐은 매우 ‘있어’ 보였다.

순진한 청년들의 눈에는 경험을 일러 주는 노숙한 큰 어른으로 비쳤으리라.

그리고 말 자체는 사실이기도 했다.

속마음은 싸움 구경에 더 비중이 실려 있었지만.

“그럼 미리 말씀을 해주시던지…!”

“클클. 그럼 재미가 없잖느냐. 꼬맹이들은 놀려 먹어야 제맛이지.”

역시 그냥 산과 안개 걸음이 당황하는 꼴이 보고 싶었던 거다.

짓궂은 그 말에 둘이 인상을 찌푸렸다.

“카아아앙!”

싸움은 점점 종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검은 밤이 사방팔방으로 날뛰며 큰 발의 몸 곳곳에 상처를 새겨 넣었다.

하지만 처음처럼 치명적인 피해는 없었다.

“쿠워어엉!”

회전하며 목을 물어뜯은 그 공격.

그걸 또 허용한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바짝 긴장한 큰 발은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방어를 견고히 조였다.

“캬악, 캭, 헤엑…!”

검은 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체력은 눈에 띄게 떨어지고, 상한 내장과 뼈가 고통에 찬 신음을 토했다.

아까 같은 일격을 또 얻어맞는다면 다신 일어나지 못한다.

긴장의 정도는 검은 밤이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꾸우워엉…….”

큰 발도 눈이 점점 흐려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가물가물한 눈을 가까스로 치켜뜨며 검은 밤을 노려봤다.

이대로 가다간 먼저 쓰러지고 말 거다.

“꾸웅…!”

한 방.

제대로 된 한 방이면 끝낼 수 있다.

큰 발이 성한 오른쪽 목 부위를 활짝 열었다.

“캬아아앙!”

승리란 놈은 참으로 얄궂어서 목숨을 걸었을 때만 그 뒷모습을 겨우 내보인다.

부러진 뼈가 장기를 찔러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유인?

모를 것 같나?

알지만 들어간다.

검은 밤의 눈에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키야아앙!”

“쿠워엉!”

이번 격돌로 결판을 낸다.

두 맹수가 사투의 종지부를 찍으려는 순간!

묵직하면서도 쾌활한 음성이 개활지를 울렸다.

“오오! 씩씩한 녀석들이구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모두가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상록 활엽이 만개한 신령목보다도 짙은 활력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남자다.

회색곰 중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크다는 큰 발을 압도하는 체구가 눈길을 끌었다.

아니다.

인간의 몸이 어찌 곰보다 클 수 있으랴.

내뿜어지는 존재감이 그를 거대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부족의 정점.

족장 너른 하늘이 신령목에 당도했다.

“아버지!”

한달음에 달려 나간 마른 비가 너른 하늘에게 안겼다.

“어이쿠! 이 녀석. 무사히 와 있었구나, 비아야.”

너른 하늘도 하나뿐인 아들을 힘껏 끌어안았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마른 비의 등을 토닥여준 그가 피투성이가 된 맹수들에게 눈을 돌렸다.

“서열 싸움 중인 모양이지? 씩씩한 건 좋다만 그쯤 하자꾸나. 이제 한식구인데 죽일 듯 달려들어서야 쓰겠느냐.”

너른 하늘이 큰 발과 검은 밤을 번갈아 보며 잔잔히 웃었다.

그 목소리에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자상함이 물씬 배어 있었다.

“그릉…….”

“끄우웅…….”

격렬하게 싸우던 두 야수가 일시에 물러섰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몸을 낮추는 인간처럼.

놈들의 눈망울에 떠오른 건 숨길 수 없는 놀라움과 은은한 두려움이었다.

“그래, 착하다. 이리 와라. 식구가 되었으니 인사나 나누자꾸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볼만한 광경이었다.

방금 전까지 광포한 기세를 내뿜던 두 맹수가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린 채 그에게 다가섰다.

너른 하늘은 귀여운 아이들을 대하듯 부드러운 손길로 큰 발과 검은 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 큰 발, 저놈! 나한테는 2년이 지나서야 머리를 내주더니…!”

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했던 탓인지 큰 발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머리 한번 쓰다듬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했던 지난 2년.

산은 허탈하기만 했다.

안개 걸음도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러게. 우리 명령은 듣지도 않고 그렇게 싸우더니만.”

이제 갓 습득한, 설익은 야수 제어를 어찌 완숙에 이른 너른 하늘의 그것에 비할 수 있으랴.

머리로는 알지만 부럽고 샘이 날 따름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반려수를 길들였지만, 아직 능숙하게 다스리진 못한다는 걸 이번 싸움으로 알게 되었다.

“끄응……. 어쩔 수 없지. 족장님이야 뭐.”

놈들은 영역의 패주였던 시절의 자존심 때문에 여전히 도도하기만 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배부르고 기분 좋을 때나 가능한 일인 것이다.

재빠르기로 유명한 고산 절벽의 산양을 잡아다 바쳐야만 겨우 머리를 내주던 놈들이 너른 하늘에게는 서로 만져 달라는 듯 애교를 부리고 있다.

당연히 속이 쓰릴 수밖에.

그때 산의 번뜩이는 시선이 맹수들을 어루만지는 너른 하늘의 상체에 머물렀다.

“아…!”

뭘 봤는지 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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