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우리 나이 때라고 했지? 저걸 처음 만드셨을 때가.”
“장신구? 응, 그렇게 들었다.”
선명하다 못해 터질 듯이 꿈틀대는 너른 하늘의 흉근 위에서, 금수의 것으로 짐작되는 발톱과 이빨들이 찰랑였다.
목걸이.
조악한 그것은 언뜻 보기에 정말 볼품없어 보였다.
하지만 실상을 안다면 달리 보일 것이니, 그것은 곧 패왕의 징표다.
운남을 수놓는 각양각색의 지형과 기후.
그중에서도 가장 생존경쟁이 치열한 지역에 군림하는 맹수들을 꺾고 습득한 전리품인 것이다.
“제길. 진짜 멋지다, 저거.”
번들거리는 흑색 줄은 남방 밀림의 대망을 굴복시키고 뜯은 비늘을 가공하여 엮었다.
좌측 끝에 매달린 부러진 뼛조각은 광서우가 자랑하던 뿔의 파편이다.
이해(洱海) 부근 늪지대의 악몽이라는 거악의 어금니와 운남 최북단 매리설산(梅里雪山)의 주인인 하얀 깃의 발톱, 초식동물답지 않게 광포한 야생곡(野生谷) 전상(戰象)의 부러진 상아 끝도 보인다.
앞선 맹수들이 사투 끝에 굴복의 증거로써 자랑하는 신체의 일부를 빼앗기는 데 그쳤다면, 가장 최근에 추가된 송곳니의 주인은 유일하게 목숨을 잃었다.
괴후.
인육을 즐기던 습성 때문이다.
놈은 살려둘 수 없었다.
“나도 다시 나가서 장신구나 만들어 올까.”
“아서라. 운남 전체가 인정하는 맹수가 아니면 걸지 못하는 거 몰라? 각 조직의 수장들도 기껏해야 한 개가 전부야. 매서운 눈 아저씨의 귀걸이나 우둔한 땅 아저씨의 코걸이 정도. 아, 그믐 할아범은 세 개였나? 팔찌였지, 그거? 여섯 개나 모아서 목걸이로 만든 건 족장님밖에 없다고. 우린 아직 일러.”
“칫. 몰라서 그러냐. 부러워서 그러지. 멋지잖아.”
힘을 숭앙하는 전사로서 너른 하늘은 존경을 보낼 수밖에 없는 남자다.
야수들에게 생존을 위협받는 운남 소수부족들의 수호자.
먹이사슬 최상층에 군림하는 야생의 제왕들을 무릎 꿇린 절대적인 힘의 상징이었다.
‘장신구?’
둘의 대화를 듣던 마른 비의 눈이 빛났다.
큰 발과 검은 밤의 움직임을 낱낱이 뜯어보고, 젊은 세대에서 최고로 꼽히는 산과 안개 걸음이 그믐과 대련하는 걸 지켜봤다.
전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마른 비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모든 걸 뇌리에 단단히 각인시켰다.
‘저 목걸이가 그렇게 대단한 거였어?’
흉물스럽게 그런 걸 왜 매달고 다니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그냥 웃었다.
관심이 없어서 그 이상 묻지도 않았다.
한데 그런 의미가 있었다니…….
마른 비가 장신구를 빤히 바라보는 중에도 청년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나 거악 만난 적 있다.”
“거악?! 성년식 기간에?”
안개 걸음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응. 이해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잖아. 호수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멋지더라고. 큰 발이랑 둘러보고 남하하는 길에 늪지대를 지나는데 악어 떼가 보이는 거야. 한 마리 잡아서 요기나 하려고 달려들었는데…… 무리 중앙에서 시퍼런 게 솟더군.”
“그렇게 크디?”
“엉. 큰 발의 두 배는 되겠더라. 잘 됐다 싶었지. 때려눕히고 이빨 하나 뽑아오면 너한테 자랑할 수 있잖아.”
‘그리고…… 노을이한테도.’
산이 마른 비 옆에 딱 붙어 있는 소녀를 힐끔 바라봤다.
세 살의 나이 차.
어릴 적부터 살갑게 지내온 사이다.
너른 하늘 쪽을 보며 까르르 웃는 소녀는 삼 년 새 쑥쑥 커 어느덧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둠을 물리치는 달빛과 하늘을 수놓은 별빛 아래 환히 웃는 소녀.
산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벌게졌다.
“그래서?”
“으응?”
“왜 갑자기 멍해졌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아…! 어떻게 되긴. 몸뚱이가 반 토막 날 뻔했지. 큰 발이 없었으면 살아나오지 못했을 거다. 날 구하다가 꼬리에 얻어맞은 큰 발도 한 달 내내 누워 있었어.”
“그랬군. 난… 붉은 발톱.”
“붉은 발톱?! 석림(石林)에 갔었어?”
산이 화들짝 놀라며 안개 걸음을 돌아봤다.
“응. 밤이를 길들이고 1년 정도 단련하니까 못 이길 게 없을 것 같더라고. 때려눕히고 발톱 하나 뽑아 오려 했지. ‘인간의 마을 주변에는 얼씬거리지도 마라!’ 멋지게 선포도 하고 말이야.”
“그놈은 원래 인간은 안 건드려. 그래서 족장님도 한 번도 안 찾아간 거지.”
“어쨌건 간에. 족장님도 녀석의 발톱은 없잖아. 내가 최초가 되려 했지.”
“미쳤군. 살아 나온 게 용하구만. 그래서 어땠냐? 그놈은?”
“놈은 보지도 못했어. 붉은 발톱 주변에 항상 머문다는 흑랑(黑狼), 그 한 놈한테 혼쭐이 났지. 밤이와 둘이 덤볐는데 스치지도 못했다.”
“고유의 이름을 지닌 놈과 수식어가 붙은 놈. 그런 괴물들이 한데 뭉쳐 다니는 건 석림의 늑대들밖에 없다더라. 그놈들은 잽싸서 도망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잘 빠져 나왔네.”
“아냐. 그게 좀… 이상했어. 일부러 살려준 느낌이랄까. 내가 먼저 덤벼들었는데도 희한하게 적대적이지가 않더라고.”
바닥에 나뒹군 안개 걸음과 검은 밤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검은 늑대.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눈동자엔 분명 적의도 없었다.
조용히 둘을 바라보던 녀석은 몸을 휙 돌리더니 그대로 멀어져갔다.
마치 이번엔 살려줄 테니 그냥 가라는 듯.
기묘한 일이었다.
“수식어가 붙은 놈만 해도 그렇게 센데…… 족장님이 엄청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성년식 기간이었지? 푸른 눈을 길들인 게.”
“그렇지. 저 괴물 같은 녀석.”
산과 안개 걸음.
둘의 시선이 신령목 아래 드리운 그늘로 향했다.
천지를 뒤덮은 운남의 밤.
그보다도 어두운 장막이 짙게 내리깔린 곳이다.
사물을 식별하기조차 어려운 그곳에서 한 쌍의 푸른 점이 번쩍였다.
감고 있던 눈을 떴음인가.
산과 안개 걸음의 대화를 듣고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언급되자 슬며시 고개를 든 ‘그것’이 사람처럼 이쪽을 응시했다.
“어엇? 오랜만이야, 푸른 눈.”
안개 걸음과 한창 대화를 나눌 때였다.
기척도 없이 스르륵 나타난 녀석은 신령목 아래 그린 듯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쪽의 대화를 듣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으윽……. 여전하네. 이 압박감은.’
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차, 깜빡했군. 인사해라. 내 반려수 푸른 눈이다.”
큰 발과 검은 밤을 쓰다듬던 너른 하늘이 자신의 벗을 소개했다.
“끄… 우웅…!”
“갸릉……!”
큰 발과 검은 밤은 다시없을 충격에 휩싸였다.
보산에도, 대흑산에도 저것과 유사한 생김새의 경쟁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다르다.
겉모습만 비슷할 뿐 저것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봐야 한다.
왜 감지하지 못했지?
족장이라는 인간의 존재감에 가렸기 때문일까?
아니다.
저런 괴물을 놓칠 리 없다.
의도적으로 기운을 감추고 고요히 있던 것이리라.
큰 발과 검은 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늘 속에 들어앉은 ‘그것’을 망연히 바라봤다.
“그르르…….”
넘치는 생명력의 반영인 듯 호화로운 금빛 털은 찬연하기만 했다.
거체를 가로지르는 흑색 줄무늬가 조화롭게 위엄을 더한다.
고풍스럽게 감색(減色)한 털빛.
운남의 대지에 던져져 오랜 시간을 견뎌낸 존재가 분명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걸 천오백 번도 보지 못한 둘로서는 짐작조차 불가능한 긴 세월을 말이다.
하지만 쇠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지 못한 과거의 어느 때보다 왕성한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둠 속에서 짙푸르게 타오르는 눈동자.
흠뻑 머금은 자연기의 증거인 그것은 마주 보는 것조차 버거웠다.
뿐이랴.
상상할 수 없는 투쟁을 겪고 일세의 패자로 군림했던 관록이 엿보인다.
감히 발톱을 들이댈 엄두도 나지 않는 상대였다.
까딱-
옆으로 오라.
소리 내어 부를 필요도 없다.
번뜩이는 안광을 내비치며 슬쩍 고개를 움직였을 뿐이지만 그것은 곧 제왕의 부름일지니.
꼬리를 내리고 머리까지 낮춘 두 짐승이 무언가에 홀린 듯 발을 옮겼다.
“저, 저 자존심도 없는 곰탱이가! 족장님이야 그렇다 쳐도 같은 맹수끼리 대들어 보지도 않는 거냐?!”
“아서라. 상대가 푸른 눈이면 어쩔 수 없지.”
대적 불가능한 강자라는 점은 같다.
하지만 족장이라 불린 인간과는 다르다.
그가 어여쁜 새끼를 보듯 반갑게 불러주었다면, 푸른 눈이라는 맹수가 보이는 태도는 단 하나, 귀찮음이었다.
‘와서 인사하고 조용히 대기해. 내 앞에서 또다시 다투어 시끄럽게 하지 마라.’
단도직입적이고 단순 명료하기에 더 무섭다.
까불었다간 십 할의 확률로 비명횡사할 게 뻔했다.
“꾸웅…….”
푸른 눈의 곁에 다소곳이 앉은 큰 발이 산에게 눈을 흘겼다.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꾸엉… 끄어엉!”
‘자신 있으면… 네가 해봐?’
못 알아들을 리 없다.
산이 뒷목을 붙잡았다.
“어억! 뒷골이야! 덩치는 산만 한 게 겁만 많아가지고! 보는 순간 꼬리를 만 놈이 뭐가 잘났다고 투덜대!”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한바탕 후련히 싸운 뒤에 이런 압도적인 존재들까지 접하니 오히려 차분해진다.
조금 전까지의 기 싸움이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느끼는 큰 발과 검은 밤이었다.
둥! 두둥! 둥둥둥!
푸른 신령목 아래, 너른 하늘이 가지런히 정렬한 부족원들 앞에 섰다.
고수(鼓手)가 두들기는 장중한 북소리가 한밤의 고요를 밀어젖혔다.
“3년 만에 보는구나. 고생들 많았다.”
근엄한 음성, 하지만 한없이 따뜻한 얼굴로 너른 하늘이 말했다.
“오늘부로 너희는 와족의 자랑스러운 전사들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걸 잊지 마라. 매사에 겸손해라. 순간의 방심은 목숨을 앗아가니 항상 신중하고 침착해라. 사람을 구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라. 잊지 말거라. 너희는 운남에 터전을 둔 채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수호자다.”
둥! 둥-! 탁!
잦아드는 북소리를 배경으로, 너른 하늘이 넉넉한 웃음을 내비쳤다.
“어울리지도 않는 연설은 이쯤하고. 긴말할 필요 없겠지. 무사히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오오오오!”
힘찬 함성이 밤의 어둠을 밀어낸다.
전사들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전사의 의식, 전투화장을!”
오색빛깔 야초(野草)들을 배합해 색을 낸 염료다.
비법으로 제조된 특수 분말에 염료를 섞은 그것을 얼굴에 바른다.
성년식을 통과한 전사들에게만 허락되는 전투화장은 성년식의 대미를 장식했다.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땅. 그리고 영험한 부족의 신령목 아래, 와족 22대 족장 너른 하늘이 고하노라. 지금 이 순간, 성년식을 마친 48명의 청년은 진정한 전사로 거듭났음을 선포한다!”
“우오오오오!”
밤하늘을 가르는 함성은 청년들이 내지르는 기쁨의 포효다.
힘겨웠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가슴 깊이 벅찬 감격이 차올랐다.
“고생들 많았다.”
뿌듯한 웃음을 머금은 달이 구름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창산(蒼山)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족장.”
부족의 영묘(靈墓)로 향하는 길.
너른 하늘의 옆에 선 그믐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참, 말씀 편히 하시래도요. 매번 볼 때마다 일일이…….”
“오냐.”
냅다 승낙하는 그믐이다.
“창산이면 대리(大理) 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운남의 북서부.
대리는 곤명과 더불어 운남 땅에서 인간이 뿌리내린 몇 안 되는 도시다.
야수의 지배로부터 비켜난 땅.
한족들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삶의 형태가 어렴풋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믐이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너른 하늘의 표정도 굳어졌다.
“대리가 아니라면…… 그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