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한쪽 벽 전체에 걸쳐 그려진 거대 호랑이.
살아 있는 듯 울부짖는 짐승은 그림만으로도 무시무시했다.
“아버지. 이 호랑이는 송곳니가 왜 이리 길어요?”
“음? 아, 그놈은 이미 사라진 종이다. 칼이빨 호랑이라고 불리었다고 들었다. 기형적으로 발달한 두 개의 송곳니가 특징이지. 나도 아버지의 아버지께 어릴 적에 들은 게 전부야. 대단히 난폭하고 강인했다고 들었다.”
“흐음……. 정말 세 보이는데.”
처음 영묘에 들어온 마른 비는 그저 모든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벽화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넓게 뚫린 둥그런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르륵-
동굴 곳곳에 박힌 샛노란 광석들이 횃불의 빛을 반사하며 황홀한 빛을 뿜어낸다.
부족의 선조는 찬란한 빛을 띠는 희귀한 광석들이 어머니 대지의 축복이라 여겼다.
게다가 자연기가 평안히 가라앉은 장소.
부족의 공동 묘로 사용하라는 아버지 하늘의 뜻이 분명했다.
“유골을.”
너른 하늘의 명에 따라 항아리를 들고 대기하던 전사들이 움직였다.
벽면을 타고 죽 늘어선 항아리들의 끝에 새로이 여덟 개의 항아리가 놓였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다 쓰러진 세 명의 전사. 잽싼 다리, 깊은 목소리, 하얀 돌. 그리고 그들의 세 벗들. 성년식 기간 중 피지도 못한 채 져버린 다섯의 꽃다운 목숨. 어머니 대지시여. 그들의 넋을 위로하시고, 혼백이 구천을 떠돌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간 귀한 자녀들을 품어 안으소서.”
휘오오오―
잎의 노래가 두 손으로 맞잡은 죽장이 연녹색 기운으로 물들었다.
지팡이에서 뻗어 나온 따스한 기운이 유골이 든 여덟 개의 항아리에 스며든다.
제각각 농도가 다른 붉은 기운들이 항아리 위로 연기처럼 번져 올랐다.
한, 미련, 원통함, 아쉬움, 두려움…….
유골에 남은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들이다.
항아리 위를 맴도는 붉은 연기를 연녹색 기운이 다독이듯 감싸 안았다.
광석이 비춰낸 영롱한 빛의 배웅을 받으며, 엉킨 두 기운이 항아리 속으로 잦아들었다.
“흐흑……!”
꾹꾹 눌러온 유족들의 슬픔이 터져 나왔다.
돌아오지 않은 남편과 자식들의 소식에 망연자실 주저앉았지만, 큰일을 마치고 귀환한 토벌대와 청년들을 위해 무너지는 가슴을 끌어안고 여기까지 왔다.
‘아저씨……. 느림보…….’
감정을 눌러온 건 마른 비도 마찬가지다.
잊히지 않는 순간.
잊을 수 없는 광경.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들…….
이 순간만큼은 흘러넘치는 감정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다짐을 되새긴다.
조용히 다가온 노을이 소리 죽여 우는 마른 비의 손을 잡았다.
범람하는 슬픔 속에서.
전투화장을 그린 채 대기하던 전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기에 추모는 언제나 맨 마지막이다.
형제자매와 벗들이 떠나는 길.
최상의 예를 갖춘 부족원들의 경의 어린 송별이었다.
힘
“이얍!”
야무진 주먹이 거한의 옆구리를 파고든다.
구릿빛 두툼한 손이 절도 있는 손날치기로 날아드는 주먹을 튕겨냈다.
“윽!”
팔이 젖혀지며 활짝 열린 가슴.
손쉽게 방어에 성공한 손날이 순식간에 궤도를 바꾸어 소년의 목을 가격했다.
퍼억!
“다시.”
엄격한 음성이 풀썩 쓰러진 마른 비를 재촉한다.
햇빛을 등지고 선 너른 하늘의 기도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너무 정직하다.”
“정직… 요?”
“사람을 상대로 그런 단순한 공격을 성공시키려면 압도적인 힘이나 속도가 있어야 해.”
아비가 목을 주무르며 일어서는 아들에게 조언을 건넸다.
구결이나 비급 따윈 없다.
직접 주먹을 맞부딪히며 전하는, 실전 대련을 통한 가르침이었다.
“힘, 속도, 기술, 경험, 자연기의 운용과 숙련까지. 모든 게 너의 열세다. 투로(鬪路)까지 정직하다면 일말의 승산도 없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마른 비의 자세가 변했다.
겨드랑이에 바짝 붙인 팔꿈치와 턱 앞으로 들어 올린 두 주먹.
웅크린 자세와 좁게 디딘 두 다리는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믐과의 대련에서 산이 보여주었던 형태.
대인 전투를 위한 부족의 결투 자세가 소년의 육신을 가다듬었다.
“너 그거, 어디서…?”
딱 좋다.
너른 하늘이 질문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마른 비가 지체 없이 전면으로 튀어 나갔다.
파파팟!
직선으로 내뻗은 왼손 견제타 세 방이 너른 하늘의 안면을 노렸다.
쫙 편 손바닥 하나로 어렵지 않게 막아내자, 이번엔 오른 주먹이 날아들었다.
“정직하다니까.”
왼손 견제에 이은 오른손 일격?
너무 뻔하다.
손아귀로 붙잡아 제압하고 직접 시범을 보여주리라 마음먹은 순간, 마른 비가 주먹을 급격히 거두었다.
“음?”
오른손이 당겨지자 몸 쪽으로 쏠린 힘의 방향.
그대로 이어받아 몸을 비튼다.
버텨선 오른 다리가 몸을 지탱하고, 체중이 실린 왼발 하단 차기가 너른 하늘의 정강이를 쓸어갔다.
“제법이지만…….”
갑자기 시도한 변칙 공격치고는 쓸 만하지만, 이 정도에 당황할 너른 하늘이 아니다.
슬쩍 들어 올린 다리 밑으로 발차기가 빈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어설퍼. 그렇게 공격이 실패하고 나면 자세가…….”
소년의 몸이 휘돈다.
왼발 하단 차기? 당연히 실패할 줄 알았다.
허공을 가른 발차기, 그 힘의 방향 그대로.
오른쪽으로 돌아간 몸체의 회전을 따라 소년의 머리가 급격히 땅으로 기운다.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비격 날짐승 떨구기가 너른 하늘의 턱을 급습했다.
파아앙!
‘이것 봐라? 요 녀석이 언제 이렇게…!’
공격은 어렵지 않게 막아냈지만, 너른 하늘은 아들의 움직임에 진심으로 놀랐다.
두 번 세 번 덧댄 눈속임과 힘의 방향을 거스르지 않는 신체의 자유 전환.
날짐승 떨구기는 또 언제 배운 것인가.
휘리릭!
‘엇? 끝이 아니야?’
오른발이 손바닥에 가로막혔지만 왼발은 아직 살아 있다.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 휘돌려 찬 왼발 직선타가 너른 하늘의 명치를 노렸다.
스르륵―
본능적인 반응이다.
낙엽 가누기.
선조가 창안해 낸 신체 이완의 기술은 단순히 긴장과 힘을 덜어내는 데에만 쓰는 게 아니다.
너른 하늘의 몸체가 유연히 낙하하는 나뭇잎처럼 발차기를 흘렸다.
“합!”
‘산 허물기.’
탄탄하게 조여진 어깨가 착지 직전의 마른 비를 들이받았다.
콰아아앙!
“아악!”
체공 상태.
무방비한 상황에서의 직격이다.
마른 비가 허공에 피를 흩뿌리며 날아갔다.
저 멀리에 풀썩 떨어진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 저…!”
멀찍이서 지켜보던 그믐이 벌떡 일어나더니 마른 비를 향해 부랴부랴 달려갔다.
“비아야! 괜찮으냐!”
의식을 잃고 기절했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다.
입으로 피 좀 뿜고, 내부 장기는 뒤틀려 엉망이 되었겠지만, 이쯤이야 잠 좀 자면 낫는다.
안도의 숨을 내쉰 그믐이 너른 하늘에게 삿대질을 했다.
“야, 이 무식한 새끼야! 그 덩치로 공중에 떠 있는 애를 제대로 들이받으면…!”
흥분하니 족장이고 뭐고 없다.
다시 말 놓는 게 보이면 포를 떠버리겠다는 잎의 노래의 엄포도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막말의 향연이 벌어졌지만, 너른 하늘은 그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버지. 싸움이란 거 배워보고 싶어요.’
몇 번이나 붙잡고 가르치려 했지만 산으로 숲으로 도망만 다니던 아들이다.
어릴 적의 자신을 똑 닮아 흥미가 없는 건 죽어도 안 하는 성격이었다.
먼저 대련을 요청해오기에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더니만 토벌전의 일로 자극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움직임을 보아하니 사람과 싸워본 적이 없는 건 확실한데.’
힘이면 힘. 속도면 속도.
특화된 능력 한 가지에 주력하는 일반 전사들과 달리 너른 하늘은 균형 잡힌 무력을 추구한다.
동물적인 감각과 백전을 통해 쌓아 올린 경험.
날카롭게 급소를 파고드는 예리함.
그 모든 게 골고루 갖춰져야만 진정한 강함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되겠어.’
투로를 읽히면 안 된다는 자신의 조언 한마디에 돌변했다.
이런 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른 하늘은 아들의 순간적인 몸놀림에서 풍부한 잠재력을 엿보았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그랬듯 흥미를 느낀 이상 비아는 강해질 것이다.
“하하하하!”
“뭐여, 이눔 새끼. 실성했냐?”
한참이나 퍼부은 욕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얼마든지 반복해주리라 마음먹은 순간, 너른 하늘이 그믐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하! 할아범!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절 닮아서 타고났네요.”
“……예전부터 느끼던 건데 넌 참 세상 살기 편하겠다.”
저 인간을 데리고 무슨 말을 하리.
주섬주섬 장죽을 들어 올린 그믐이 길게 연기를 뿜었다.
“시간 없다, 이 녀석아. 얼른 끝내. 너 끝나면 내가 데리고 갈 거다.”
“저도요. 할아범.”
마른 비의 대련을 지켜보던 소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노을이 총기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 * *
콰아앙!
너른 하늘과 마른 비가 위치한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공터.
같은 대련이지만 전혀 다른 양상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술? 감각? 민첩함?
쓸데없는 소리.
남자는 힘이다.
대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남자의 싸움이다.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하듯 곰 같은 체구의 남자 두 명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쿠콰아앙!
호쾌하게 휘둘러진 주먹이 청년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바위라도 부술 것 같은 강권이지만, 얻어맞은 자는 후퇴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피를 퉤 뱉어내고 체중을 실은 주먹을 휘두를 뿐이다.
매섭게 공기를 가른 주먹이 거인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퍼어억!
“약하다.”
꽈앙! 터지는 충격음은 하늘에서 내리꽂힌 박치기다.
눈앞이 핑 돌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전심전력을 다해 올려친 주먹이 거인의 턱을 강타했다.
뻐억!
“약하다.”
곰의 앞발 같은 손아귀가 청년의 얼굴을 덥석 쥐더니 그대로 하늘로 들어 올렸다.
허공에 뜬 청년이 두 발을 모아 상대의 가슴께를 힘껏 걷어찼다.
뻐어억!
“약하다.”
얼굴을 움켜쥔 우악스런 손이 청년을 뒤통수부터 지면에 내리꽂았다.
쿠아아앙!
“컥…!”
참으려 했건만 기어코 신음이 터져 나오고야 만다.
전신이 으스러진 것 같은 충격에 산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었다.
“할아범, 대련했다고 들었다.”
인간 같지 않은 힘과 체구.
비할 데 없는 체격을 자랑하는 산보다도 한 뼘은 더 큰 거인이다.
부족의 돌격대인 바위 곰의 수장, 우둔한 땅이 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급소를 찌르는 공격, 맞았다? 버텨 내지 못한 네 육체, 약한 거다. 단순한 투로, 읽혔다? 반격 엄두도 못 낼 압도적인 힘. 그런 거 무시하고 다 쓸어버린다. 간단하다. 너, 약하기 때문에 진 것이다.”
순한 걸 넘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던 눈이 정광을 담고 엄격하게 빛났다.
뭔가가 많이 빠진 것 같지만, 어눌하게 늘어지던 말투도 평소와 달리 명료하기만 하다.
부족 최고의 역사(力士).
싸움에 임한 우둔한 땅은 그와 같았다.
힘에 대한 절대적인 맹신.
햇빛을 등지고 선 거한은 철갑 같은 육체만큼이나 단단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바위 곰 전사된 이상 네 역할, 명확하다. 너, 도끼다. 최전선 적 진영, 힘으로 깨부순다. 또한 너, 방패다. 맹수 발톱이든, 전사 창칼이든. 강대한 육체, 날아오는 공격 다 받아낸다. 나무표범과 수리의 눈 전사들. 적 급소에 결정타 꽂아 넣을 때까지. 너 무너지면, 모두 무너진다. 자부심 갖는다. 바위 곰, 용맹무쌍 부족 최강 전사들이다.”
이런 말을 듣고도 누워 있을 순 없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선 산이 햇빛을 가로막은 거인을 올려다봤다.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맘에 들었다는 듯 씨익 웃는 우둔한 땅이다.
싸움에 임하며 말투는 변했지만, 사람 좋은 웃음만은 여전했다.
반면, 한쪽에서는 매서운 눈과 안개 걸음이 그들과 정반대의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생긴 대로 논다는 선조들의 말이 딱 맞아. 실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훤칠한 키와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
오밀조밀하게 꽉 짜인 근육은 척 봐도 날렵한 몸놀림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의 속도로 공방을 주고받는 두 남자의 육체는 명장이 심혈을 기울여 깎아놓은 석조 조각상 같았다.
“부족 최강의 전사는 얼어 죽을. 둔해 터졌으니 회피를 못 하고 몸으로 때우는 거지. 살아 있는 바윗덩이다. 저놈들은.”
쐐애액― 빠박!
사냥감을 노리는 표범과 같은 두 남자다.
섬전 같은 발차기가 햇살을 가르며 교차했다.
“일격으로 끝나선 안 돼. 나무표범은 창이다. 적이 쓰러질 때까지 휘몰아쳐야 해. 우린 바위 곰처럼 느려 터져서는 안 된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매서운 눈이 지면 위로 둥실 떠 올랐다.
순식간에 안개 걸음의 머리 위로 솟아오른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낙비.”
폭우처럼 쏟아지는 발그림자가 하늘을 뒤덮는다.
두 다리로 펼쳐낸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발차기의 홍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