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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9화 (19/463)

19화

‘큭…! 언제까지 차는 거야?!’

회피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방어를 위해 들어 올린 양팔.

반격을 하려고 마주 쳐낸 주먹과 발.

매서운 눈은 육신이 부딪힐 때마다 안개 걸음의 손발을 디딤돌 삼아 두둥실 떠오르며 체공 상태를 유지했다.

한여름 장맛비처럼 끝도 없이 내리꽂히는 발차기에 안개 걸음의 몸이 퍼렇게 멍들어갔다.

“컥!”

방어를 뚫고 들어온 단 한 방의 직격.

안개 걸음은 패배를 예감했다.

빠바바바박!

얼굴, 어깨, 가슴, 복부, 다리의 순으로.

튕겨나가지도 못한다.

정수리 위에서 교묘한 각도로 내리찍는 발차기는 안개 걸음의 몸을 수직으로 고정시킨 채 무참히 짓밟았다.

온몸이 잘근잘근 다져진 안개 걸음은 결국 선 채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약해 빠졌군. 힘도 뺀 채로 때렸는데.”

매서운 눈이 사뿐하게 착지하며 중얼거렸다.

“저거, 본다.”

우둔한 땅이 시선을 산에게 고정한 채 손가락만으로 매서운 눈을 가리켰다.

달려들기 위해 자세를 잡던 산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우리, 한 방이면 끝낸다. 수십 대 때려댈 이유, 전혀 없다.”

매서운 눈의 눈썹이 꿈틀 치솟았다.

“사방팔방 촐싹촐싹……. 간단하다. 약하기 때문이다.”

언어로 되갚는 완벽한 응수였다.

매서운 눈의 표정이 어떻건 간에 우둔한 땅의 눈은 확고한 신념으로 불타고 있었다.

“눈깔. 약하다.”

* * *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라.’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아이들은 호흡을 멈춘 채 가르침을 되새겼다.

‘사냥감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는 곳. 자신의 체취는 숨길 수 있는 곳. 숨을 죽이고, 모습을 감춘다. 사냥감의 후각, 청각, 시각에서 벗어나라.’

위치는 좋다.

표적은 자신들을 감지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럴 수밖에.

상대의 동선을 미리 파악하고, 반나절 가까운 시간을 잠복해 있었으니까.

‘인내심. 사냥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추가로 한 가지를 더 새겨둬. 만약 사냥감이 정면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맹수라면, 십 할의 확신이 들기 전까지 움직이지 마라. 야생에서 사냥꾼이 사냥감으로 전락하는 건 한순간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번 표적은 고작 맹수 따위가 아니니까.

소년소녀들의 등줄기로 긴장 어린 땀이 흘러내렸다.

틱! 틱, 티틱!

푸른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쾌청한 하늘이 보이는 곳.

청죽림 최고의 명당이다.

등을 보인 채 바위에 걸터앉은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화석을 부딪쳤다.

‘지금!’

쾌애액―!

검은 그림자가 들불처럼 일어난다.

청죽림 곳곳에 매복해 있던 아이들이 노인을 덮쳤다.

“미숙하다. 핏덩이들.”

후우우―

슬쩍 고개를 돌린 노인이 뿌연 숨을 내뿜었다.

급격하게 좁혀지는 간격 안으로 매캐한 연기가 들어찼다.

‘들켰어?!’

‘시야가…!’

빠바바바박!

짤막한 놀람을 끝으로, 기습을 시도했던 십여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거꾸러졌다.

“쯧. 날 표적으로 삼은 건가?”

그믐이 기절한 아이들을 슥 둘러보며 혀를 찼다.

경지에 이른 사냥술은 대인전에서도 더없이 유용하다.

은신과 암습.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급습하는 건 사냥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 날 지목한 적이 없었는데?”

누구나 성년식을 떠날 아이들의 수련 대상이 될 수 있다.

성인 전사가 아이들에게 쓰러질 리 만무하기 때문에 교육 담당자가 아무나 지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묘한 건 그간의 담당자들이 예우 차원에서 그믐을 표적으로 삼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

“에잉, 어떤 놈이야? 귀찮게 시리.”

실력 차가 나도 너무 난다.

적당히 투닥거릴 만한 젊은 전사로 표적을 정하는 게 차라리…….

“으엉? 그러고 보니 이번 암습 교육을 맡은 게…….”

그믐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청죽림 어딘가에서 웃고 있을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깔이, 이놈 새끼가?”

기절한 아이들을 깨우고, 부족한 부분을 다듬고, 시범을 보여주고.

오늘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갈 게 틀림없다.

안 그래도 비아와 노을이를 붙잡고 가르치느라 쉴 틈이 없었는데, 매서운 눈은 자신을 가만 놔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끄응……. 소리나 기척만 죽인다고 되겠나. 기운을 지우는 법부터 일러줘야겠구먼. 이놈은 가장 귀찮은 걸 나한테 떠넘기…… 응?”

대숲이 뿜어내는 기운 틈에서 갑자기 돌출된 이질적인 감각!

그믐의 고개가 하늘로 번쩍 들렸다.

패애액―!

쭉 뻗은 발이 날카로운 창처럼 내리꽂힌다.

눈빛까지 감춘 채 대나무 꼭대기에 은신해 있던 마른 비였다.

파사삭- 쐐액―!

인간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조그만 풀숲.

먼저 공격한 아이들과는 다른 지점에 매복해 있던 노을도 신형을 쏘아냈다.

‘호오……. 이 꼬맹이들!’

그믐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건만 둘은 스스로의 기운을 조율해 숲의 호흡에 동조시켰다.

‘비아는 본능적으로, 노을이는 머리로 깨달은 거겠지.’

방법이야 어찌 됐든 타고난 재능이다.

여유 있게 손을 들어 올린 그믐이 자세를 취했다.

“자연의 숨결을 느끼고 지형지물에 녹아든 것. 훌륭한 발상이다. 그를 일컬어 ‘일체화’라 하느니.”

그믐의 양손이 새의 부리 형태를 그리고,

“자세한 건 정신이 들면 일러주마.”

쾌애애액―!

섬전처럼 쏘아진 예격(銳擊), 올빼미 사냥이 햇살을 쪼갰다.

“큭!”

“아악!”

마른 비와 노을을 일수에 기절시킨 그믐이 흡족하게 웃었다.

거절

“후우, 후욱…!”

푸른 대나무 숲 한복판에서 준수한 외모의 사내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소낙비’.

방어를 뚫고 들어온 최초의 유효타.

허용한 건 그 한 방뿐이었지만, 곧이어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는 수십 방의 발차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아직 풋내기에 불과한 자신이 백전의 전사인 매서운 눈을 이기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손 한 번 못 쓰고 방망이에 다져진 빨랫감처럼 흠씬 두들겨 맞은 건 충격이었다.

‘강해져야 한다!’

탓!

자연기를 퍼뜨린 다리가 대지를 박차자 안개 걸음의 신형이 공간을 갈랐다.

단거리 고속이동 기예 ‘번갯불’.

암천에 번뜩이는 전광과 같이 안개 걸음의 육신이 잔상만 남긴 채 사라졌다.

어느새 대나무 줄기 위에 모습을 드러낸 그가 눈부신 속도로 청죽과 청죽 사이를 누볐다.

타탓-

두둥실 허공에 몸을 띄우고, 낙엽 가누기로 신체의 이완과 자연스런 체공을 꾀한다.

우수수 쏟아지는 발차기는 급작스레 퍼붓는 한여름의 소나기다.

매서운 눈의 독문 기예 소낙비가 안개 걸음의 몸을 통해 구현되었다.

파파파팟!

‘이게 아냐! 어설퍼!’

이 정도로는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한다.

성년식에서 복귀한 지 한 달.

자신과 산, 비아와 노을이를 포함하여 강해지길 원하는 이들은 마을에 머무는 성인 전사들에게 집중 지도를 받았다.

기술의 이치와 요령은 모두 배웠다.

몸에 붙이는 건 어디까지나 각자의 몫.

그저 연련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열심이네?”

갑작스레 들려온 매혹적인 목소리가 안개 걸음의 집중을 깨뜨렸다.

나른하면서도 또렷한, 묘하도록 귀에 착 감기는 음성이다.

대나무에 한쪽 어깨와 머리를 기댄 여인이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힐끗 쳐다본 안개 걸음이 무심히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어. 열심히 해야지.”

갈색을 띤 검은 머리칼이 어깨선을 타고 탐스럽게 흐른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와 봉긋한 가슴.

붉은빛 작약(芍藥)과 같은 입술이 놀랍도록 고혹적이다.

열여덟 어린 나이임에도 농염한 매력이 물씬 묻어나는 여인이었다.

“흐응.”

나지막한 콧소리를 흘린 그녀가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또박또박 걸어왔다.

안개 걸음의 어깨에 스르륵 얹는 손은 나긋하기만 했다.

“오랜만이잖아. 좀 더 반가워하면 안 돼?”

살짝 베어 문 미소는 은근하면서도 대담했다.

“어릴 때부터 말했지. 붙지 말라고.”

가볍게 비튼 어깨가 손을 떼어냈다.

안개 걸음이 그제야 몸을 돌려 여인을 똑바로 마주 봤다.

“복귀한 날은 인사할 겨를이 없었고. 그 뒤로 한 달간은 단련하느라 바빴네. 오랜만이다, 달아.”

“여전히 무심하구나. 3년 동안 나 안 보고 싶었어?”

배시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른 치아가 하얗게 웃었다.

부족에는 활달하고 매력적인 여인들이 많지만, 사내의 마음을 살살 녹일 줄 아는 건 ‘겨울 달’뿐이었다.

아리따운 외모를 지닌 데다 남자를 애태울 줄 아는 겨울 달은 청년 전사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다들 보고 싶었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다른 사람들 말고. 나 안 보고 싶었냐구.”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 또래 여인들과는 다르다.

겨울 달은 자신의 매력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안개 걸음은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그녀가 꺼려졌다.

‘저 눈.’

묘한 열망에 달뜬 저 눈빛.

무언가 바라는 바가 확실히 있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흔들림 없는 신념과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단단함이 없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산, 그 멍청이가 몰래몰래 훔쳐보는 노을이의 또렷한 눈빛과 대비된다고 할까.

스스로의 노력으로 목표를 이루어가는 부류가 아닌 건 확실하다.

그리고 안개 걸음은 남자건 여자건 그런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성년식 기간 동안 반려수를 길들이면서 깨달은 게 있어.”

“…….”

겨울 달이 은근한 눈빛으로 말을 건넸지만, 안개 걸음은 침묵을 지켰다.

“무엇이든 어울리는 짝이 있다는 것. 마치… 반려수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야. 난 배우자도 그렇다고 생각해. 그런 면에서 너와 난 여러모로 잘 어울려. 그게 외모든, 능력이든.”

안개 걸음의 꽉 짜인 가슴에는 어느새 그녀의 손이 살포시 포개져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겼다.

‘엄청 끈적끈적하구만.’

안개 걸음도 한창 왕성한 때의 사내다.

야릇한 생각이 들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있다.

그게 어떤 부분이 됐든 겨울 달과는 한번 엮이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생각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이성적인 반발과 생리적인 거부감이 안개 걸음으로 하여금 단호히 그녀를 떼어놓게 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반려수만 해도 자신과 특질이 유사하면 다양한 녀석들에게 유대감을 느낄 수 있어. 그중 가장 밀접하게 느껴지는, 무조건 이놈이다 싶은 녀석이 존재할 뿐. 하지만 반드시 그놈과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지. 그리고 난 우리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론 이러지 마라.”

겨울 달이 미간을 곱게 찡그린 순간, 그녀의 품에서 칠흑색 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샤아악!”

“음? 흑살사?!”

“쉬― 괜찮아. 화내지 마. 나 기분 나쁘지 않아.”

햇빛조차 흡수해버릴 무광택의 비늘.

시커먼 밤이 내려앉은 듯 온통 검은빛 일색인 뱀이었다.

표독스런 눈동자와 날름거리는 혀만 새빨간 핏빛으로 번들거렸다.

세모꼴 대가리를 쳐든 녀석이 안개 걸음에게 강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독사를 반려수로 삼다니…! 녀석들은 악랄해.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다. 네가 약해지면 널 해칠지도 몰라.”

반려수를 고르는 데 있어 딱히 제약은 없으나, 독물은 꺼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첫째는 와족의 전사들이 순수한 육체적 힘을 숭앙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인간은 독을 생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함께 성장하며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독물, 특히 독사를 반려수로 삼은 선조들이 녀석들에게 공격받은 경우가 왕왕 있었다.

모두 병이나 부상으로 쇠약해져 있을 때였다.

“밤이는 그렇지 않아. 내가 약해질 리도 없고. 내 장기는 유연성과 암습이지만, 밤이를 보는 순간 인연이란 걸 알았어. 밤이의 맹독과 날렵함이 내 장점과 합쳐지면 상승효과를 낼 거야.”

겨울 달이 새카만 독사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흑살사……. 그래, 그 독은 운남 최고이긴 하지. 청죽사보다도 지독한 놈들이니까. 움직임도 날쌔고. 그런 만큼 항상 조심해라. 그런데… 이름이 밤인 거냐?”

겨울 달이 빙글 돌아서며 말했다.

“그래. 밤이야. 검은 밤.”

안개 걸음이 한옆에 웅크리고 있는 흑표범을 힐끔 쳐다봤다.

녀석의 눈빛을 보아하니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독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분 나쁘겠구나, 밤아. 왜 하필 너랑 이름이……. 후우, 어릴 때부터 봐왔지만 쟤 생각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안개 걸음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겨울 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느낌이 찜찜했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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