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1화 (21/463)

21화

성년식

부족의 신령목은 대낮에도 웅장하기만 했다.

만물을 아우르는 햇살과 거목의 약동하는 생명력은 땅을 거니는 피조물들에게 아버지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둥! 둥! 두웅!

그림처럼 채색된 풍광 아래, 고대의 벽화를 깨부수고 나온 것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햇볕 아래 드러난 구릿빛 탄탄한 체구에선 충일한 활력이 용솟음쳤다.

남자의 앞에는 단출한 복장의 소년 소녀들이 가지런히 정렬해 있었는데,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남자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운남 땅에서, 인간은 생존 경쟁에 패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심장을 데운다.

감았던 눈을 뜨며, 너른 하늘은 그렇게 운을 뗐다.

“많은 이들이 있었다. 날카로운 쇠붙이를 만들어 대항했던 자들, 덫과 함정을 팠던 자들, 단단한 울타리 안에 숨어 삶을 도모했던 자들. 결국에는 모두 맹수들의 먹이가 되거나 풍요로운 땅에서 쫓겨나 척박하고 조막만 한 대지에서 연명하는 게 고작이었다.”

날카로운 발톱도, 몸을 지킬 맹독도, 바람 같은 민첩함도, 경이로운 위장술도 없다.

인간의 타고난 몸뚱이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성? 지능?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라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운남의 대자연이 낳은 강인한 맹수들에게는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멸망한 부족들은 모두 인간의 방식을 고집했지. 인간의 집을 짓고, 인간의 기술을 연마하고, 인간의 사냥 방식을 발달시키는 데 집중했다. 잘못된 판단이었어. 지금은 사라져버린 수많은 부족들이 증명하고 있다. 적어도 이 운남에서, 인간은 도태된 종이었다.”

도태.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단 한 집단.

자연에의 순응과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적응 끝에 결실을 일궈낸 부족이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인간의 방식을 버리고 대자연에 ‘순응’하기로 했다. 몸에 밴 인간의 습성을 버리고 오감을 발달시키며 자연에 녹아들었지. 수많은 부족이 멸절하는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위의 아버지.

기나긴 세월 동안 입을 통해 아들들에게 전승되어 온 이야기다.

너른 하늘의 눈이 오랜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다음은 ‘적응’이었다. 적응은 모방에서 출발했지. 선조들은 치열한 야생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을 관찰했다. 습성, 생존법, 움직임, 호흡……. 모든 걸 따라 했어.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래, 우리의 선조들은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장점인 지능을, 자연을 효과적으로 모방하는 데 쓴 것이다.”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대부분의 부족원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깨달은 것도 있었다.

모든 인간은 나름의 특화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우리 모두는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누구는 힘이 세고, 어떤 이는 민첩하며, 누군가는 영리하거나 섬세하다. 냄새를 잘 맡거나, 먼 곳을 볼 수 있거나,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는 자가 있지. 선조들은 각자의 재능에 집중했고,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타고난 천성에 맞는 동물을 말이다. 누군가는 범을, 누군가는 노루를, 늑대를, 토끼를, 박쥐를.”

잠시 말을 멈춘 너른 하늘이 고개를 들었다.

드높은 신령목의 허리께에서 강대한 벗이 꼬리를 늘어뜨린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아남은 짐승이라면 반드시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백여 년에 걸친 집요한 모방이 시작됐지. 그리고 그 이유를 습득하여 몸에 붙였을 때, 선조들은 비로소 운남에서의 생존이 가능해졌다.”

결실은 인간으로의 회귀였다.

긴 세월에 걸친 몰입의 결과, 살아남은 부족원들은 인간의 특징이 희미해질 정도로 특정 동물에 의태해 있었다.

자연에의 적응을 마친 그들이 각자의 장기를 갈고 닦아 다시 모였을 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인간의 습성을 회복했을 때.

와족은 비로소 가혹한 운남의 땅에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인간 특유의 군락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또 한 가지 달콤한 열매는 의태를 했던 동물과의 교감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특정 짐승만을 바라본 결과가 아닐까 추측할 뿐.

세대를 몇 번 더 거치자 드디어 와족은 반려수를 거느리게 되었다.

“자연기의 운용을 ‘터득’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조들은 대자연에 가득한 생명의 근원을 느끼고, 활용하기 시작했어. 그로부터 몇백 년. 우월한 지능에 야생의 생존법, 그리고 자연기를 활용한 전투기법이 더해진 지금. 더 이상 이 운남에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천 년에 이르는 부족의 역사였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미래이기도 했다.

부족의 앞날을 책임질 자들.

너른 하늘이 곧 성년식을 출발할 아이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야생의 맹수들이 가혹한 자연의 손아귀에 새끼들을 던져 넣듯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생존의 의식이 아이들을 떠민다.

하지만 누구도 겁을 내는 이는 없다.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약간의 긴장.

아이들의 앙다문 입술에서 다부진 각오가 전해졌다.

“와~ 드디어 나가네! 재밌겠다!”

모두가 침착한 분위기 속에서 성년식의 시작을 기다리는 가운데, 싱글벙글 웃는 건 마른 비뿐이었다.

“항상 조심해, 비아야. 절대 위험한 행동하지 말고.”

노을이 걱정스런 얼굴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응. 걱정 마. 건강히 지내다가 3년 후에 보자!”

마을을 넘어 새로운 곳을 탐험할 생각에 마른 비는 마냥 신이 나 있었다.

애틋한 인사 한마디 없는 그가 야속할 만도 하련만.

마른 비를 물끄러미 보던 노을은 마주 웃어주었다.

“그래. 3년 후에. 그때 난 강해져 있을 거야. 비아, 너보다도 더.”

확고한 의지를 담은 선언이 소녀의 조그만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 결의에 호응하듯 북소리가 개활지를 울리고, 전투화장을 한 전사들의 심장박동이 떠나는 아이들을 격려했다.

“다들 잊지 말아라. 순응과 적응, 그리고 터득이다. 그것이 너희를 강하게 할 것이다.”

재차 강조한 너른 하늘이 시야를 넓게 두었다.

“3년 후. 강해져서 돌아오너라.”

와족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던 성년식의 시작이었다.

* * *

청죽으로 짠 둥그런 회의실.

너른 하늘과 와족의 수뇌부가 모여 앉았다.

아이들을 떠나보낸 그들은 그믐의 소집에 의해 부랴부랴 이곳으로 달려와야만 했다.

“무슨 일이오, 할아범?”

별일 아니라면 이토록 급하게 불러들일 리 없다.

그믐을 바라보는 매서운 눈은 장난기 하나 없이 진중하기만 했다.

“일전에 이야기한 애뢰산 말이다.”

후우우―.

그믐이 뿜어내는 연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묵직해 보였다.

“파견한 전사들이 실종됐다.”

“실종되다니? 검은 수리가?”

“그래. 여섯 명이 모조리.”

“그게 무슨…! 할아범이 직접 키운 전사들 아니요.”

수리의 눈.

운남의 소수부족을 돌아보고 금수들의 동정을 살피는 와족의 정보 조직.

검은 수리와 흰 수리로 구성된 그들은 그믐의 명을 받는다.

은신, 암습, 탐색, 추적 등의 기술 숙련이 모자라고 경험이 부족한 흰 수리와 달리 검은 수리는 노련한 전사들이다.

그믐이 직접 붙잡고 가르친 전사들이기에 근 십여 년간 문제가 생긴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데 실종이라니?

“거리만 유지하면 수식어가 붙은 맹수들의 이목도 피해내는 전사들인데…….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니오?”

“실종이라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전멸이다. 애뢰산 곳곳에서 갈기갈기 찢긴 채 발견됐지. 후발대로 들어간 전사들이 시체를 모아왔어.”

“전… 멸이라니?! ……그놈이겠군. 새로이 애뢰산의 주인으로 등극했다는 놈.”

“그놈밖에 없겠지.”

깊은 침묵이 흘렀다.

슬픔과 분노, 상대에 대한 궁금증.

애통한 일이지만, 그들은 부족을 책임지는 이들이기에 감정에 매몰되기보다는 상황 파악이 우선이다.

가까스로 감정을 누른 매서운 눈이 고개를 돌려 너른 하늘을 찾았다.

“족장님.”

“은신에 특화된 전사 여섯이 몰살.”

“…….”

“하나밖에 없지 않느냐? 고유의 이름을 획득할 만한 녀석이란 뜻이겠지.”

“하지만 갓 왕좌에 오른 녀석이…!”

“드물지만 사례가 없진 않지.”

너른 하늘이 한옆에 웅크린 푸른 눈을 내려다봤다.

“으음…….”

매서운 눈이 침음했다.

상황을 파악하는 건 너른 하늘이 가장 빨랐다.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는 차후의 문제다. 중요한 건 사람을 해치냐는 것. 애뢰산은 워낙 맹수들이 들끓는 통에 주변에 터 잡은 부족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군.”

“검은 수리들이 녀석의 영토에 먼저 침입한 셈이니 침입자를 제거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상대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내 불찰이야. 귀한 목숨이 여섯이나 떠나다니…….”

여건 따윈 중요치 않다.

상대를 알았건 몰랐건 간에 휘하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불가항력의 상황일지라도 그건 무조건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그믐이 생각하는 수장의 자리란 그러했다.

“이 이상 애뢰산으로 진입하지 말라고 해야겠어. 운남 전역에 상황을 알리고 성년식을 떠난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표식을 남기도록 하마.”

“애뢰산……. 제가 가보도록 하죠.”

너른 하늘이 찬찬히 그믐을 돌아봤다.

“아니다. 산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당장은 별문제 없을 거야. 다른 일도 있다. 그 때문에라도 넌 마을에 있어야 해.”

“……?”

복잡한 심경의 버무림 속에 그믐이 무겁게 연기를 뱉었다.

“점창산에서 사람이 출발했다.”

사절

사아아아―

바람이 댓잎을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적신다.

무수한 생명의 기운이 감지되지만, 눈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의 색을 머금은 대나무가 병풍처럼 늘어선 곳.

아름답긴 해도 왠지 모르게 진입이 꺼려지는 숲이었다.

여간해선 외지인이 찾지 않는 청죽림의 외곽에서 일단의 무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맞게 찾아온 것 같은데…….”

운남의 소수부족들과 머리색은 비슷하지만 생김새가 달랐다.

복식은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다.

훨씬 고급스러운 질감의 백색 무복 위로 화려한 무늬들이 춤췄다.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과는 이질적인 문화를 지닌 자들이 분명하리라.

숲으로의 진입을 망설이는 그들 앞에 검은 그림자가 스르륵 솟아올랐다.

“음…!”

점창파 이대 제자 호국영이 가까스로 침음을 삼켰다.

그림자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존재를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외양으로 미루어봐선 제대로 찾아온 듯했다.

훨씬 키가 크고 골격이 좋을 뿐, 얼굴의 생김새가 운남에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야만인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은신에 특화된 자인가?’

빛을 반사하지 않도록 검게 물들인 가죽옷이 남자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식물 줄기를 가공하여 엮은 끈으로 손목과 발목, 허리를 칭칭 동여맸다.

소리를 흘리지 않기 위한 조치임이 분명했다.

‘그럼 내가 눈치를 못 챌 수도 있지.’

백족천인공(白族天引功)을 조용히 끌어올려 보았지만, 상대에게선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려입은 복식과 미약한 기도로 미루어볼 때, 전투보다는 추적이나 잠입, 수색 따위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 같았다.

“창산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유창한 한어가 흘러나왔다.

원시를 간직한 야만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제된 언어.

그 간극이 주는 괴리에, 점창의 인물들은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놀라신 모양이군요.”

검은 옷의 사내가 고요히 웃었다.

“부족원 대부분은 고유의 언어와 한어를 섞어 사용합니다. 조금 알아듣기 힘드실 겁니다. 저는 맡은 직책상 한어를 제대로 배웠을 뿐이지요. 검은 수리 전사 은빛 여우입니다.”

통성명.

그렇다면 대표가 나섬이 마땅하다.

온화한 분위기의 청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아! 반갑습니다. 이렇게 한어를 잘하실 줄은 몰랐던 터라……. 점창파 일대 제자 공유립입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성함은 알아듣기가 힘들군요.”

“당연합니다. 이름은 저희 고유의 언어를 쓰거든요. 한어로 바꾼다면 은호(銀狐) 정도가 될 겁니다.”

“그렇군요. 한데 저희가 오는 것을 어찌 알고 계셨던 건지…….”

“부족의 눈과 귀는 운남 곳곳에 퍼져 있지요.”

의미심장한 말이다.

점창 제자들의 방문은 물론이고, 그 목적과 이유까지 알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일개 원시부족이 정보조직까지 따로 두고 있단 건가.’

공유립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마을로 모시라는 어르신의 명이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은빛 여우가 미소를 띤 채 길 안내를 자처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불안하기라도 한 걸까.

서로의 얼굴을 흘깃거리던 점창 제자들이 머뭇머뭇 청죽림에 들어섰다.

“앞으로 나서지 마십시오. 뒤를 따르시면 됩니다.”

기묘한 기의 운용이 감지된다.

앞서가는 은빛 여우라는 남자는 분명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등을 쫓던 호국영은 왠지 주눅이 든 것만 같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얼 하시는 거요?”

기껏해야 길 안내나 하는 하급 무인이다.

아니, 저들은 전사라고 하던가.

어찌 됐건 그런 자에게 휘둘리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껴지는 내공의 수준도 미미한 자가 아닌가.

“청죽림에는 귀찮은 녀석들이 도처에 깔려 있지요. 손님들께서 편히 걸으실 수 있게 정리 중입니다.”

스스스스-

그 말을 듣고 보니 미세한 움직임들이 감지됐다.

주변을 둘러싼 푸른 대나무의 가지들이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호국영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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