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뱀?”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던 이대 제자 한 명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가지인 줄만 알았던 녀석들은 의태한 채 먹잇감을 기다리던 뱀들이었다.
“사나운 녀석들이지요. 청죽사라 합니다. 흑살사라는 악독한 녀석을 제외하곤 운남의 뱀들 중 가장 강한 맹독을 지닌 놈입니다.”
“지금… 저 뱀들을 묶어 놓고 있는 거요?!”
뱀을 보고 물러섰던 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야수 제어. 그게 바로 와족의 야수 제어로군요.”
공유립이 은빛 여우의 등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정면을 향한 자세 그대로, 은빛 여우가 담담하게 시인했다.
“하긴… 우리 세대가 겪은 일은 아니지만, 서로 어른들께 들은 바가 있겠지요.”
점창파와 와족 간 전쟁은 양자 모두에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점창파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운남의 원시부족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했고, 와족은 맹수도 아닌 인간과의 싸움에서 수많은 생명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30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당사자들은 세상을 떠나거나 한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기억이란 전승되기 마련이다.
모두에게 전한 와족과 달리 수치스런 과거를 쉬쉬한 점창파에선 전해 들은 이들이 많지 않다는 차이는 있었지만.
그리고 갓 약관을 지난 공유립과 이십 대 중반의 은빛 여우는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들은 이들이었다.
“네. 전쟁을 겪으셨던 대 장로님께 들었습니다만, 솔직히 믿기 어려웠지요. 직접 보니 놀랍기만 합니다.”
“…….”
은빛 여우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청죽림에 들어선 이후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그가 점창파 일행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 왔습니다. 와족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작게나마 미소를 내비쳤던 은빛 여우.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화아악―
급격히 시야가 열린다.
푸른빛 대나무 하나로 모든 걸 만들고 쌓아 올린 마을이었다.
그 소박하고도 무구한 광경에 공유립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요!”
물론 모두가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이군. 고작 이런 원시부족에게 점창이 패했단 말인가!’
호국영은 이제는 몰락해버린 백족 출신의 사내다.
운남의 소수부족 중 유일하게 국가를 건설하고 문명을 꽃피웠던 대리국(大理國)의 후손인 것이다.
백 년 전, 몽골의 침공으로 대리국이 멸망한 이후 그의 선조들은 줄기차게 저항을 이어왔으나 그들이 모시던 왕족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이제는 몸을 의탁했던 점창파의 일원일 뿐, 호국영에게 케케묵은 항쟁이나 뿌리 따위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운남의 다른 소수부족을 대할 때는 문명을 꽃피운 백족이라는 자부심을 내세우니 실로 이중적인 사내라 할 수 있었다.
“들어가시죠.”
은빛 여우의 안내를 받은 점창의 제자들이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랗고 둥근 건물 앞에 섰다.
그들이 대나무로 이루어진 건물의 문간을 넘어섰다.
“후우우―.”
장죽을 입에 문 채 뻐끔뻐끔 연기를 피워 올리는 노인이 사절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들 오게.”
‘이자가 족장인가?’
늙수그레한 노인이다.
허름한 검은색 마의에 동물의 이빨 따위를 매단 조악한 팔찌.
대충 틀어 올려 묶은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물물교환을 하려고 대리에 오는 다른 소수부족의 늙은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인상이었다.
“손님들이 온단 이야기를 듣고 음식이라도 대접해야 하지 않겠냐며 족장이 사냥을 하러 뛰쳐나가 버렸네. 금방 올 게야. 조금만 기다려주시게.”
‘역시… 족장이 아니었군. 너무 평범해. 그냥 나이만 먹은 노인이 아닌가.’
호국영은 처음 대면하는 순간부터 노인을 샅샅이 탐색하고 있었다.
“반갑구먼. 난 그냥 소일거리나 하며 지내는 부족의 늙은이일세. 따로 이름을 알아둘 필요도 없을 게야. 족장이 올 때까지 잠시 앉아서 늙은이 말 상대나 해주시겠는가?”
땅을 가리키는 손짓에 호국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바닥에 앉으라고? 교의(交椅)도 없는 건가? 이래서 야만인들이란!’
보아하니 자기들끼리 의논을 하거나 손님을 맞을 때 사용하는 건물인 모양인데 걸터앉을 걸상 하나가 없다.
건물 내부를 훑은 그가 속으로 투덜댔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이리 뵙게 되었는데 어찌 존함을 여쭙지 않을 수 있을까요.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점창파 일대 제자 공유립입니다.”
왼손 손바닥으로 감싼 오른 주먹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며 절도 있게 인사를 건넨다.
정중한 예를 담은 포권이었다.
중원 무림을 주름잡는 아홉 개의 문파와 한 개의 방파, 구파일방.
운남이라는 변방에 위치했음에도 그 뛰어난 무력으로 말미암아 10년 전 구파에 진입한 점창이다.
그 점창파를 대표해서 찾아온 일대 제자는 이처럼 정중했다.
“허허, 이것 참. 예나 지금이나 한족들의 예는 참으로 번거롭구먼.”
그냥 간단히 인사하고 담소나 나누면 충분한 것을.
저토록 예의 바르게 나오는데 무시할 수도 없다.
자세를 가다듬은 그믐의 눈이 푸른 정기를 품었다.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땅.
오른손은 하늘이요, 왼손은 땅이라.
위와 아래에서 손가락 마디 끝으로 둥글게 맞잡은 두 손이 가슴 앞에 위치했다.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땅이 맞물리니 그것은 곧 대자연이라.
중원에서 이야기하는 태극(太極)의 형상을 그려낸 두 손에 정심한 자연기가 담겼다.
푸화악―!
전력을 다해 끌어올린 기세가 회의장을 잠식한다.
폭풍처럼 터져 나온 가공할 기운에 점창의 제자들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이… 이게……!”
호국영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저 별 볼 일 없는 촌로인 줄만 알았는데.
건물 전체를 떨쳐 울리는 이 어마어마한 기운이라니!
자연기를 머금어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압도적인 위엄을 담고 사절단을 내리눌렀다.
“와족 22대 장로 그믐올빼미일세. 회효(晦梟)라 부르면 될게야.”
사아악-.
짧게 인사를 마친 그믐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기운을 흩뜨렸다.
“가, 갑자기 왜?”
경악에 빠진 호국영이 말을 절었다.
“응? 알고 인사한 것 아니었나?”
“무, 무얼 말이오?”
“와족의 인사법 말이야. 우리는 정중히 예를 갖출 땐 힘을 최대한으로 개방하네. 과거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한 데서 유래했지. 다른 부족원과 만났을 때 미리 힘과 기세를 내보여서 무익한 시비를 피하는 게야. 뭐, 그래도 해볼 만하다 싶으면 인사가 끝나자마자 달려드는 놈들도 있었다지만.”
“몰랐… 소.”
“이 청년은 아는 것 같은데?”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자.
공유립이었다.
정중히 예를 갖춘 인사.
맞다. 알고 한 것이다.
노인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30년 전 인간 같지 않은 무력으로 점창 제자들을 휩쓸었다던 그 남자가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역시 살아 있었나?’
기운이 터져 나올 걸 예상했기에 당황하지 않았을 뿐, 평정심까지 유지할 순 없었다.
이토록 강대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최소 장문인에 버금간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목덜미 위로 하얗게 식은땀이 옷깃을 적셨다.
“역시 회 장로님이셨군요. 그 엄청난 무명(武名)은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유립이 또 한번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클클. 젊은 친구가 꽤 능글맞구먼. 그냥 물었어도 알려주었을 텐데. 누군가 힘을 확인해보라 일러준 겐가?”
우회적인 간 보기 따윈 없다.
직설적으로 찔러오는 화법에 공유립이 뜨끔했다.
“……거짓을 입에 올리기는 싫군요. 예, 그리 언질 받은 것이 맞습니다. 어쭙잖게 잔머리를 쓴 게 돼 버렸네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꾸벅.
솔직한 시인과 깔끔한 사과였다.
과거 전쟁까지 겪었던 사이에 그 정도 탐색이 대수일까.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믐은 공유립의 진솔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자네들 같은 애송이… 아니, 젊은 제자들만 보낸 건 그쪽의 힘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고? 우리가 경각심을 높이는 걸 피하고 싶었나 보군.”
“……맨몸으로 앞에 선 기분이군요. 점점 부끄러워집니다. 저희의 입장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과거의 일도 있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더군요. 혹시 격에 맞지 않는 사절이라 오해하셨다면…….”
“아닐세. 그런 오해는 하지 않네. 현 장문인의 아들이 직접 온 것인데 그리 생각할 리 없지.”
“그것까지…… 알고 계셨군요.”
공유립.
현 점창파 장문인 공지량의 둘째 아들이다.
사절이라 하면 문파 내 주요조직의 수장이나 장로급 인사를 파견하는 것이 예의임에도 젊은 제자들만 보낸 건 그만한 격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흠. 과거의 일이라…….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지. 다시는 없어야 할 일이고.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다네.”
아픈 기억이라도 떠올린 걸까.
그믐이 아련한 눈으로 장죽을 꺼내 물었다.
이 반응.
나쁘지 않다.
아무런 교류도 없었던 와족에 사절의 임무를 띠고 파견된 건 얼마 전에 벌린 일로 인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30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해진 점창이지만, 와족과의 마찰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미래의 일이란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것이지만 가급적 부딪히지 않는 편이 좋다.
공유립은 이번 임무를 원만하게 끝마칠 수 있겠다는 고무적인 생각이 들었다.
‘전혀 알아채지 못했어.’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호국영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토록 강한 자였다니!’
외기(外氣)를 받아들여 단전에 축적하는 내공심법(內功心法)은 그 성취가 높을수록 드러냄과 숨김을 자유자재로 조절 가능하다.
저 정도의 고수가 작심하고 기운을 감췄다면 자신이 알아챌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몸 전체에서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기운을 감지했었다.
그래서 숨기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별 볼 일 없는 노인이라 결론지은 것인데…….
‘기를 운용하는 방식이 다른 건가?’
와족은 단전에 내공을 축적하는 인위적인 형태의 심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온몸 구석구석까지 자연기가 자연스레 휘돌게 하고 역시 자연의 이치에 맞게 신체 곳곳에 깃들인다.
필요할 때 호흡과 함께 받아들이는 외부의 자연기를 더해 잠든 기운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또래에서는 출중한 편이라 해도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호국영으로서는 그저 기의 활용법이 다르겠거니 짐작할 뿐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채긴 어려웠다.
‘그럼 아까 우릴 안내했던 그자도 고수일 수 있겠군.’
뱀들을 꼼짝 못 하게 제압했던 그 능력.
다시 생각해보니 절대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신중해야겠어.’
일반적인 중원의 잣대로 평가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뒤늦게 경각심을 갖게 된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배경과 뿌리에 대한 뒤틀린 자부심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님에도 몸담은 집단의 위세가 곧 본인의 능력이라 착각하는 자.
출신 성분에 따른 대접에 목말라하는 자.
적어도 이 운남에서 점창과 백족의 이름은 어딜 가나 통하는 힘과 권위의 증표였다.
“족장은 언제 오는 것이오?”
위대한 백족. 막강한 점창.
늙은이의 생각지도 못한 무력에 기가 죽었지만, 그래 봐야 미개한 야만 부족일 뿐이다.
대 점창의 사절로 방문한 자신이 꿀릴 이유가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것인가!
배에 있는 대로 힘을 준 호국영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그믐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거슬리던 참인데…….”
장죽을 입에 문 그믐이 삐딱하게 호국영을 노려봤다.
“말이오, 몰랐소, 것이오? 어린놈의 새끼가 건방지게……. 사절이라서 그냥 봐주고 넘어갈까 했더니만 끝까지 그따위로 말할 셈이냐?”
“나, 나는 점창의 이대 제자요!”
“난 장로다.”
“그리고… 위대한 대리국의 후손이자 백족 출신의…!”
“난 그 대리국을 품었던 운남의 아들이자 와족 출신이야. 백족이 뭐?”
“배, 백족은…!”
“아따, 그 새끼 말 많네. 그리고 뭐? 족장? 족장이 네 친구냐? 존칭 똑바로 안 붙여?!”
바로 잡으려 마음먹은 이상 확실히 한다.
자연기를 담아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호국영의 심신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