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3화 (23/463)

23화

“크윽…! 주, 주의하겠습니다…….”

호국영이 주눅 든 목소리로 답했다.

부끄러움은 함께 온 자들의 몫이었다.

그때,

쿵!

묵직한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곧 출입문을 꽉 채우는 체격의 사내가 회의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사내를 보는 공유립의 눈이 빛났다.

‘이자다!’

보는 순간 알겠다.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 산발에 가까운 머리.

그러나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무엇으로도 속박할 수 없는 자유로운 절대자.

처음 본 와족의 수장은 야생을 누비는 한 마리 대호와 같았다.

“젊은 분들이 오셨구려. 나, 너른 하늘이오.”

굵고도 정대한 목소리다.

억지로 쥐어짠 호국영의 허세와는 격이 다를 수밖에.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위엄이 사절단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 점창파 일대 제자 공유립입니다.”

예를 갖추려던 공유립이 주춤했다.

‘주먹? 주먹을 왜 내밀지?

쇠망치 같은 큼지막한 주먹이 슥 앞으로 나왔다.

무슨 뜻인가.

호랑이의 그것을 닮은 형형한 눈은 마주 보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온화한 기운.

싸우자는 뜻이 아닌 건 알겠다.

‘이, 이렇게?’

공유립이 주춤거리며 오른 주먹을 마주 뻗었다.

툭.

가볍게 밀어내듯 두 남자의 주먹이 맞닿았다.

난생처음 해보는 동작이 어색했지만, 부딪히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적의가 없다는 뜻이, 만나서 반갑다는 감정이 주먹을 타고 전해져 온다.

무(武)에 살아가는 자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미묘한 고양감이었다.

훗날, 중화 남부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될 와족식 간이 인사법이 처음 전해진 순간이었다.

‘마치… 쇠뭉치 같다!’

굳은살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슬쩍 부딪힌 족장의 주먹은 말 그대로 쇳덩이 같았다.

육중한 무게감과 뼈를 울리는 둔탁한 감촉이 생생히 전해져 왔다.

‘이거로군. 철골(鐵骨)과 강피(強皮)!’

기를 주입하지 않으면 검도 제대로 박히지 않는 단단한 피부와 철심을 박아 넣은 듯 쉬이 잘리지 않는 뼈.

30년 전 전쟁에서 점창 무인들이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였다.

절세의 외문기공이라도 수련한 듯 와족의 전사들은 하나같이 튼튼하기 짝이 없었다.

막강한 몸뚱어리를 믿고 용맹하게 부딪쳐 오는 야만 전사들의 돌진에, 점창의 검사들은 정신없이 뒤로 밀려나야만 했다.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는가?”

공유립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주먹에서 시선을 뗐다.

다 안다는 듯 너른 하늘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전부 다 읽히나.’

쓴웃음이 배어 나왔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구파의 후기지수라고 해봤자 아직은 미완의 그릇일 뿐.

공고히 뿌리내린 거목 앞에선 막 돋아난 푸른 새싹에 불과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족장님. 장문인의 전갈을 가지고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공유립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 * *

“엄청나군요!”

너른 하늘이 잡아 온 멧돼지는 창산 주변에 서식하는 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들어들 보게. 맛있을 거야. 이 녀석을 잡으려고 산 두 개를 넘었지 뭔가.”

불에 구운 멧돼지 통구이가 사절단의 식욕을 돋웠다.

“마을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저쪽에 앉은 백족 청년이 수소문했나 보군.”

얼떨결에 지목을 받은 호국영이 화들짝 놀라 대꾸했다.

“네?! 네… 그렇습니다. 장문인께서 사절을 파견하신다고 하여…… 저, 절대로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믐의 경고 이후 바짝 긴장한 호국영이다.

주의를 받지 않았어도 똑같았을 거다.

보는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와족의 족장은 감히 그가 배짱을 부려볼 엄두도 안 나는 존재였다.

“왜 그리 놀라나? 탓하는 게 아닐세. 같은 시대, 한 땅에서 살아가는 이웃인데 찾아오는 것이 무에 문제가 될까.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네.”

너른 하늘의 미소를 확인한 호국영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젊은 청년들이 이 먼 곳까지 온 이유를 들어봐야겠지. 장문인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너른 하늘이 멧돼지 다리 한쪽을 붙잡고 쭉 찢어서 공유립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족장님. 얼마 전, 대리 주변에 터 잡고 살던 하니족이 이주하는 일이 생겼지요. 그 땅이 저희의 소유가 됐기 때문인데…… 그 문제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사절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순간이 왔다.

몸가짐을 바로 한 공유립이 차분하게 준비한 대답을 내놨다.

“30년 전의 점창은 잘못된 선택을 하였지요. 아창족의 터전에 그렇게 다가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사납게 달려드는 아창의 전사들과 응전하는 점창 제자들 사이에 많은 피가 흘렀지요. 그리고…… 아창족 마을의 몰살. 실로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공유립이 너른 하늘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와족이 운남의 토착 부족으로서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걸 이해합니다. 점창은, 저희는…… 분명 도를 넘었지요. 그 일 이후 점창도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하니족의 이주는 무력에 의한 충돌이 아닌, 적법한 절차에 따른 결과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적법한 절차라…….”

“네. 대리와 곤명 일대는 땅의 주인들이 존재합니다. 땅은 서로의 이익에 따라 사고파는 하나의 상품이지요. 하니족은 그 땅에서 수백 년간 살아온 주인이며, 그 땅은 분명 하니족의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법에 따른 절차대로 매입하였습니다. 서로가 합의한 결과였지요.”

“…….”

너른 하늘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계속하라는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들은 저희가 건네는 돈을 받았고, 땅을 저희에게 넘겼습니다. 서로의 이해가 합치된 사안이며 절차상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건네고 싶은 말과 묻고 싶은 의문은 많으나 끝까지 듣겠다.

너른 하늘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공유립의 말을 경청했다.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될 사안이지만, 장문인께서는 이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자들의 수호자인 와족을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이번 하니족의 이주 사태에 대해 행여나 오해가 없도록 저희를 파견하신 겁니다.”

어떻게 나올 것인가.

과거의 앙금과 생소한 토지 매매의 개념.

오랜 이웃에 대한 감정적 이입.

점창의 수뇌부는 말도 안 된다고 분노하는 족장을 예상했다.

사절을 절대로 해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으나, 최악의 경우 사절의 대표가 희생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와족이란 언제든 감정에 휩쓸릴 수 있는, 힘 좀 센 야만인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파견되었다.

씁쓸한 감정이 공유립의 눈가에 맴돌았다.

“그렇군.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호된 질책.

또는 분노가 가미된 폭력.

너른 하늘의 반응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권할 뿐이다.

“음식이 식겠군. 어서들 드시게.”

하늘을 올려다본 그가 사절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날이 어두워졌군. 지금 돌아가는 건 힘들뿐더러 먼 곳까지 온 사람들을 그냥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집을 하나 치워놓았으니 편히 쉬시게. 우리도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니 내일쯤 다시 보세나.”

각자의 심중을 드러내지 않는 만찬이 이어졌다.

* * *

“말도 안 되는 소리!”

날 선 눈빛에 진한 노여움이 담겼다.

진심으로 화를 내는 매서운 눈의 기세에 회의장 중앙에 피운 모닥불이 꺼질 듯 일렁였다.

“땅을 사고판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누가 허락하여, 무엇을 근거로 땅의 주인을 제멋대로 정한단 말이오!”

땅 위를 거니는 피조물들은 어머니 대지의 넉넉한 품에 잠시 몸을 의탁할 뿐이다.

강대한 힘으로 영역을 차지했더라도, 설령 그곳에서 수백 년간 살아왔을지라도, 기나긴 세월 중 잠시 스치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와족도 편의상 주인이라 칭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단지 그때 그곳에 머무는 자들을 가리킬 따름이었다.

인간만의 알량한 규칙을 만들어 마치 포목을 주고받듯 땅을 사고판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신성하게 여겨 온 어머니 대지가 그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주고받는 물건 정도로 치부되는 건 진실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북쪽의 한족들은 오래전부터 땅을 사고파는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왔어. 그것이 이제 운남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것 같구나.”

운남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부족원들에게는 생소한 일이겠지만, 한족의 땅을 오래도록 왕래한 그믐에겐 익숙한 개념이었다.

어디 한족뿐이던가.

문명이라는 것을 뽐내는 모든 인간 집단들이 그러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계량화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상품으로 환원하여 소유의 여부를 명확히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가 걸려. 애송이는 법을 언급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지킬 이유가 없는 규칙이지만, 하니족은 대리 주변에서 한족들과 교류하며 오랫동안 살아왔어. 하니족이 그들의 법에 순응하기로 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 어떠한 문제가 없었는지는 철저히 알아봐야 할 것 같구나.”

“만약 그 청년의 말처럼 하니족이 자의로 결정한 일이라면…… 우리로선 개입할 여지가 없겠지요.”

조용히 듣고 있던 너른 하늘의 말이었다.

“족장님!”

“명분이 없다. 하니족이 스스로 그들의 공동체에 편입되길 원하는 것이라면. 하여 정당한 대가까지 주고받았다면. 우리가 어찌 끼어들 수 있겠느냐. 수백 년간 살아온 땅을 넘겼더라도 그들의 의지가 그러한 것을.”

매서운 눈도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불안함과 심정적인 거부반응일 뿐.

“문자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할아범밖에 없군요. 서찰을 작성해 주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하니족이 본인들의 의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어찌 문제 삼을 수 있겠냐고. 다만…….”

잠시 모닥불을 바라보던 너른 하늘의 눈이 번쩍였다.

“힘에 의한 압제. 온당하지 못한 수단. 비정상적인 절차. 부당한 무언가가 개입되어 하니족이 땅을 ‘강탈’당한 것이라면. 그리고 하니족의 요청이 있다면…….”

건장한 육신을 타고 수증기가 피어오르듯 자연기가 서서히 끓어올랐다.

이성이 판단을 유보하지만, 느낌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며,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본능적 육감이었다.

“와족은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너른 하늘은 눈앞에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화염으로 던져질 인간들의 미래를 예감했다.

* * *

“후우…….”

달이 내려앉았지만 호국영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대나무로 엮어 만든 형편없는 침상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를 잠 못 들게 만드는 건 낮에 겪은 치욕적인 경험이었다.

야만인 늙은이와 웃통을 벗고 다니는 미개한 원숭이에게 겁을 먹다니!

‘빌어먹을.’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민다.

호국영의 가느다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뽀얀 피부와 그린 듯 오뚝한 콧날이 달빛 아래 눈부셨다.

‘아름다워…….’

달밤에 서성이는 이는 호국영만이 아니었다.

그믐의 명령으로 반려수를 비롯한 와족 구성원들은 사절단 앞에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적으로 대치할 수도 있는 자들에게 전력을 노출하지 말라는 엄한 당부가 있었다.

하지만 겨울 달은 궁금했다.

외부에서 온 손님들.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한 자들의 후손.

반짝이는 장신구와 세공품은 모두 그들이 만든 것이다.

성년식 기간에는 원시림만을 헤집고 다녀서 토착 부족을 제외한 사람들은 만나보지 못했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

그녀가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고 사절단이 머무는 집 근처를 배회하는 이유였다.

‘사내가 저토록 아름답다니!’

달빛 아래 선 남자는 수려했다.

우락부락하고 힘밖에 모르는 부족 사내들과 달리, 깎아놓은 것 같은 이목구비와 화려한 옷이 대번에 눈길을 끌었다.

“아!”

넋 놓고 있던 겨울 달과 호국영의 눈이 마주쳤다.

‘와족의 여인? ……엄청 예쁜데?!’

조악한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원시인 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대리에서도 보기 힘든 섬세한 외모와 원시부족 특유의 활력, 또래에서 보기 힘든 관능적인 매력까지.

호국영은 여자에 익숙했다.

허세를 겸비한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점창파 이대 제자이자 백족 출신인 호국영입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겨울 달. 와족의 겨울 달이에요.”

머뭇거릴 거란 예상과 달리 곧바로 답변이 튀어나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겨울 달.

가까이서 본 원시부족의 여인은 참을 수 없이 예뻤다.

다음 날, 너른 하늘이 건넨 서신을 든 점창의 사절단이 청죽림을 빠져나갔다.

긴장이 풀려 떠드는 제자들 사이에서 호국영이 힐끔 뒤를 돌아봤다.

‘후후후. 그래도 하나 건진 건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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