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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4화 (24/463)

24화

성장

“아하하하! 끼야호~!”

마을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는 제약이 없어지니 이토록 좋을 수 없다.

어지러이 얽힌 덩굴줄기와 흐드러지게 만개한 오색빛깔의 화초들.

운남의 햇살을 머금은 고대의 거목들은 푸른빛 머리칼을 겹겹이 드리우고 있었다.

마른 비는 무한히 뻗은 자연의 품으로 입수하듯 뛰어들었다.

“어엇?”

청죽림을 넘어 원시림에 접어든 순간.

기다렸다는 듯 덮쳐오는 녀석들이 있었다.

늑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주둥이와 팔다리가 짧고, 귀는 곧으며, 꼬리가 아래로 늘어져 있다.

황갈색의 털을 지닌, 늑대보다 작은 체구의 짐승이다.

……원래대로라면.

“뭐가 이렇게 커?!”

한 마리 한 마리의 몸집이 웬만한 늑대를 상회한다.

샛노랗게 빛나는 눈동자는 맹수 특유의 야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굶주린 십여 마리의 승냥이가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크아아앙!”

‘큭! 사방이…!’

움치고 뛸 곳이 없다.

완벽한 포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물러서!』

마른 비의 눈에 푸른빛 자연기가 어렸다.

“카… 아앙!”

“끄, 끼잉…….”

요령은 배웠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건 처음이다.

수백 년 동안 피를 타고 이어 내려온 야수 제어의 술.

승냥이 떼가 달려들던 모습 그대로 덜컥 멈췄다.

‘성공이야!’

와족 비전, 야수 제어.

그 요체는 상단전(上丹田)과 중단전(中丹田)에 있다.

상단전, 즉 뇌다.

인간이 짐승에 비해 유일하게 우월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뇌력(腦力)이며, 와족의 선조들은 뇌력을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데에 활용하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수월한 생존을 위해 야수들을 통제하고 싶다는 염원.

마음의 밭인 중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간절함이 상단전의 뇌력과 만나 기적을 일군다.

그저 상상에 불과한 바람을 실현시켜 주는 것은 자연기다.

자연에 가득 찬 무형의 기운이 뇌리를 맴돌던 허구적 상상에 실체적 힘을 불어넣었다.

멈추어라!

음성을 매개로 뻗어 나간 속박의 의지가 지능의 열위에 선 개체들의 심신을 억압했다.

“윽…!”

하지만 잠시뿐이다.

뇌력의 숙련도도, 염원을 뿜어내고 유지하는 능력도, 자연기의 활용도 너무나 미숙하다.

처음 시도한 야수 제어로 십여 마리의 움직임을 멈춘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

몸을 빼낼 시간을 번 마른 비가 잽싸게 고목을 타고 올랐다.

“후우……. 엄청 지치네, 이거.”

육체의 고단함이 아니다.

온종일 난제에 매달려 뇌를 혹사시킬 때 몰려오는 짙은 피로감.

훈련되지 않은 뇌력의 개방은 마른 비에게 극심한 무기력감을 안겨 주었다.

“먹을 게 아니면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데.”

마른 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응?”

머리털이 쭈뼛 곤두선다.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두 다리가 고목의 가지를 박찼다.

빠지직!

쩍 벌린 주둥이가 머물던 가지를 통째로 분질렀다.

나무 위에 잠복해 있던 먹구렁이였다.

“이놈들……. 엄청 공격적이네.”

마을 주변에 서식하는 짐승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훨씬 크고, 사나우며, 호전적이었다.

주변에 움직이는 게 있으면 일단 덮치고 보는 듯했다.

“크르르…….”

옮겨 간 가지의 옆.

기척을 죽이고 있던 표범이 이빨을 드러냈다.

“미치겠네.”

덤벼든 삵 한 마리를 때려눕힌 마른 비가 생각에 잠겼다.

‘몸을 숨기는 법.’

그게 가장 시급하다.

원시림 전체를 둘러봐도 몸을 훤히 내놓고 돌아다니는 건 자신뿐이었다.

이대로는 계속해서 도망치거나 싸우다가 체력이 고갈되어 쓰러질 터.

모습을 감추고, 소리를 죽이며, 냄새를 숨긴다.

존재를 지우는 법.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해야 할 최우선 과제였다.

‘쉽지 않을 거다.’

고목 위, 한참을 올라간 지점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마른 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수리 전사 은빛 여우였다.

3년간 야생을 헤매는 아이들의 뒤에는 검은 수리들이 몰래 따라붙는다.

전사 한 명당 아이 두세 명씩을 담당하여 살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은 아이들의 유골이 무사히 돌아와 영묘에 안치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원칙은 절대 개입 불가.

설령 맹수와 싸우다 상처 입고 죽어갈지라도 그저 지켜본다.

성년식에 뛰어든 이상, 아무리 혹독한 상황이 닥쳐와도 아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은신을 가르칠 때 비아는 불참했었지.’

산과 안개 걸음 등이 성년식에서 귀환하기 전부터 생존을 위한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아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비아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왔었고, 그게 당연한 것이다.

교육의 참여 여부는 각자의 의사에 맡기기 때문에 붙잡아 올 수도 없었다.

은빛 여우를 울컥하게 만든 건 불참 사유였다.

‘햇볕이 좋아서.’

우기가 아니면 햇볕은 항상 좋다.

저놈은 그냥 게으른 거다.

은빛 여우는 왜 그믐이 마른 비를 눈여겨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생 좀 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뒤늦게 불안해졌는지 성년식을 한 달 남겨놓은 시점부터는 대련도 하고, 막바지 교육에도 참여한 모양이지만 그 정도론 어림도 없다.

고작 한 달 배우고 강해질 수 있다면 아이들이 죽어라 단련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뭐, 그래도 쉽게 당하진 않겠지.’

하지만 이 정도 맹수들에게 쓰러질 리는 없다.

아무리 엉망일지라도 와족의 아이인 것이다.

‘비아가 고민할 동안 표식부터 새기고 올까?’

애뢰산에 진입하지 말라는 그믐의 전달사항을 알려야 한다.

아이들은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면 항상 가장 높은 지형을 찾아 표식을 확인한다.

성년식 기간 중 꼭 알려야 할 내용이 발생할 경우, 표식으로 남겨두면 얼굴을 맞댈 일 없이 전달이 가능한 것이다.

은빛 여우가 장막처럼 드리운 원시림의 꼭대기를 훑었다.

* * *

깎아지른 절벽 끝에 고풍스러운 전각이 그린 듯이 걸렸다.

이제는 멸망해버린 남송(南宋)의 건축 양식을 반영하여 지붕과 처마 하나까지 섬세하게 축조된 목조 건물은 하나의 예술품이나 다름없었다.

완전 대칭형의 건물 구조를 벗어나 자유로운 배치형식이라는 변화를 시도했음에도 절벽과 어우러진 전각은 일말의 위화감 없이 놀라운 파격을 선보이고 있었다.

“사절단이 무사히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전각 3층의 끄트머리.

묵직한 기도를 흘리는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산을 굽어보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휘도는 구름의 여정을 감상하는 그의 등에 명료한 보고가 와 닿았다.

“이대 제자 호국영이 예상한 지점 중 한 곳에 마을이 있더군요. 명하신 대로 접근하지 않은 채 주변 고지대에서 위치만 확인해 두었습니다.”

활동성에 치중한 검은색 무복.

왼쪽 가슴에 수놓은 매의 문양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 선명하다.

봉우리를 넘나들며 창산을 굽어보는 매의 눈.

점창의 첩보조직 응목대(鷹目隊)의 대주 지석인이 보고를 마치고 남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수고했네. 지 대주.”

발아래서 노니는 구름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등을 돌렸다.

멋들어지게 기른 문사 풍의 수염과 말끔히 빗어 넘긴 머리가 정갈하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순백의 무복.

언뜻 봐선 평생 책이나 들여다봤을 법한 서생의 모습이지만, 단련된 몸의 굴곡과 날카로운 기도는 정련된 한 자루 검을 떠올리게 했다.

중원을 기준으로 본다면 오지나 다름없는 운남의 점창파를 천하 구대 문파 안에 진입시킨 남자.

당대의 점창 장문인 공지량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지석인을 바라봤다.

“눈치챈 자는 없었겠지?”

“네. 짐승들의 감각 범위까지 감안해 상당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절대로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래. 유립이는 어찌 되었나?”

“무사히 빠져 나와 귀환하는 중입니다.”

“역시 그리됐군. 차라리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라면 일이 편했을 텐데. 웬만해선 걸려들지를 않는단 말이지.”

짧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공지량이 고개를 들었다.

“기존의 계획대로 진행한다. 야만인 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 일을 끝마치도록.”

“알겠습니다. 장문인.”

등 돌린 공지량의 입에서 한탄이 새어 나왔다.

“참으로 피곤한 곳이야, 이 운남은. 중원의 알짜배기 땅들을 틀어쥔 채 희희낙락하는 녀석들은 모르겠지. 앉아만 있어도 모든 게 굴러들어오는 금싸라기 땅들. 뒤집으려야 뒤집을 수 없는 그 엄청난 격차를.”

한탄은 곧 냉소로 변했다.

“하지만 하늘이 점창을 도왔다. 북방 초원의 냄새나는 야만인 놈들. 이리저리 이동하며 양이나 치던 유목민족 따위가 중원을 차지할 줄 누가 알았겠나.”

“네. 누구도 그리될 줄은 몰랐을 겁니다.”

지석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원이 대제국을 건설한 지 벌써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본토에서 한족에 대한 핍박은 상상을 초월한다더군. 병장기 금지령까지 내려졌지. 강호의 유수한 문파들이 몸을 바짝 낮추고 있어.”

“네. 그래서 원 황실의 관심에서 비켜나 있는 저희에겐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죠.”

“그렇다네, 지 대주. 30년 전 전쟁만 없었다면 점창은 지금쯤 구파의 수위를 노려볼 만했을 거야. 운남 촌구석의 원시부족 따위가 그런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비상하려던 점창을 20년은 주저앉게 만들었던 그 전쟁.

어쩔 수 없이 한편에 밀어두어야만 했던 분노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이제 정리할 때가 되었지. 고지식한 대 장로들이 눈치 못 채게 은밀히 진행하도록.”

“네. 염려 마십시오.”

“아, 그리고 일전에 지시한 ‘그건’ 어찌 됐나.”

“삼분지 일에는 이미 응목대가 따라붙었습니다. 나머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좋아. 준비되는 대로 보고하게.”

깊이 고개를 숙인 지석인이 집무실을 벗어났다.

먼 하늘을 건너보는 공지량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 *

살아 있는 생명체는 숨을 쉰다.

동물도, 식물도.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미세한 녀석들조차도.

마른 비는 원시림에 스민 생명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순응.’

아버지는 자연에의 순응을 말했다.

자연에 거스르지 말고 녹아들라.

받아들이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마른 비가 주목한 건 생명이 내뿜는 숨결이었다.

‘모두 다 달라.’

등을 기대고 있는 나무의 숨.

건너편 수풀에 숨은 너구리의 호흡.

발아래 땅이 토해내는 숨결에 이르기까지.

들숨과 날숨의 박자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의 자연이다.

오감을 끌어올려 느끼는 대자연의 약동과 순환은 경이로웠다.

‘왜 이걸 몰랐지?’

자연이 토해내는 숨결이 곧 자연기다.

선조들이 언급한 순응이란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기를 느끼고 그 안에 녹아들라는 뜻이었다.

‘신기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곳에서.

심지어 마른 비 본인의 신체 내부에서도 거센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한 번 걸음을 떼면 의식하지 않아도 쉽게 대지를 걸어 나가는 것처럼, 한 번 깨닫고 나니 천지를 휘도는 자연기가 잡힐 듯이 느껴졌다.

눈을 감은 마른 비가 예리하게 다듬은 오감으로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들을 좇기 시작했다.

‘뭐야? 관조?!’

고요히 가라앉힌 마음으로 주변에 널린 사물들과 일어나는 현상들을 담담히 들여다본다.

마른 비의 상태는 자연기의 감응이 일정 수준에 올라서야 가능한 관조(觀照)의 경지가 분명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얼마 전까지 몸을 숨길 방법이나 찾던 꼬맹이가 난데없이 관조라니?

표식을 새기고 돌아온 은빛 여우의 얼굴이 놀라움에 물들었다.

‘근데 저 멍청이가!’

저런 몰입은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나 하는 것이다.

무방비나 다름없는 마른 비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다가들었다.

‘그물무늬비단뱀!’

열대우림에 서식하는 난폭한 파충류가 인간의 아이를 통째로 삼키려고 접근 중이었다.

‘망할! 도와, 말아?’

개입 불가의 원칙이 있다지만 눈앞에서 막내동생뻘의 아이가 산채로 잡아먹히는 걸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은빛 여우는 스물 중반의 나이에도 제 몫을 해내는 뛰어난 전사지만, 성년식에 투입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커다란 뱀이 마른 비에게 가까워질수록 그의 몸이 불안하게 들썩였다.

‘안 돼. 예외는 없다!’

도와선 안 된다.

족장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도 예외는 없다.

아니, 오히려 족장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예외를 두어선 안 된다.

은빛 여우가 뛰쳐나가려는 몸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그새 소리 없이 접근한 뱀은 마른 비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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