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5화 (25/463)

25화

‘이 호흡…….’

가늘고 긴 숨결이 정수리 위에서 느껴진다.

녀석의 존재는 처음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이놈만이 아니다.

주변에서 사냥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다른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원래부터 감각은 뛰어난 편이었으나 자연기를 인지한 후부터 그 범위가 극적으로 확장되었다.

웬만한 짐승들은 바로 옆에서 심장 소리를 듣는 것처럼 명확하게 위치가 잡혔다.

‘뱀의 호흡.’

녀석의 들숨과 날숨에 자신의 호흡을 동조시킨다.

모습은 다르되 하나의 몸인 것처럼.

마른 비의 심장이 활동을 늦추며 천천히, 그리고 낮게 뛰기 시작했다.

호흡기를 통해 오고 가는 숨이 현저히 잦아들었다.

“……?!”

마른 비를 덮치려던 뱀이 움찔 행동을 멈췄다.

이 먹잇감은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험난한 생존의 장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다니?

스르륵 다가가 한입에 삼키려는 순간, 상대의 심장박동이 변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느려지던 소리가 마치 동족들의 그것처럼 변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과 완전히 동일해졌다.

급기야 들이쉬고 내쉬는 숨의 박자까지 똑같았다.

뱀이 묘한 동질감에 사로잡혀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은은한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싸우기 싫어. 돌아가.』

거부하기 힘든 명령이자 거스르기 싫은 속삭임이었다.

비단뱀이 무언가에 홀린 듯 멀어져갔다.

‘뭐, 뭐야! 저게?’

가장 놀란 건 숨어서 지켜보던 은빛 여우였다.

‘야수 제어? 아니야. 그런 강렬함은 없었어. 마치 따스하게 다독이는 듯한……. 대체 뭐지, 저게?’

진보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문을 두드린다.

훗날, 야수 친화(野獸親和)라 불리게 될 마른 비만의 독특한 야수 제어술이 그 싹을 틔운 순간이었다.

‘결.’

나무의 결. 바위의 결. 땅의 결.

모든 지형의 표면엔 세월이 켜켜이 쌓아 올린 무늬나 높낮이가 존재한다.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한 형태를 빚어내면, 그것은 이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리가 없는 동물, 뱀.

뱀이야말로 결을 가장 잘 찾는 동물이다.

온몸을 지형에 문대며 이동하는 신체구조 상 결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다.

결을 따라 이동해야 작은 힘으로도 수월하게 전진이 가능하고, 결을 찾아야만 소리를 적게 흘릴 수 있다.

땅에 바싹 엎드린 마른 비가 그물무늬비단뱀의 뒤를 쫓았다.

‘설마, 저 녀석……. 결을 찾는 건가?’

나무 위에 은신한 채 마른 비를 뒤따르던 은빛 여우의 눈이 커졌다.

고요한 이동의 핵심이 바로 결을 찾는 작업이다.

소리를 죽이거나 몸을 가볍게 하는 기술 따위는 노력으로 얼마든지 습득 가능하다.

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지형의 결을 순식간에 읽어내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타고난 감각 없이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환장하겠군.’

온몸을 바닥에 붙인 채 뱀처럼 이동하는 소년이 진짜 뱀의 뒤를 쫓는다.

결을 무시한 채 꿈틀대던 녀석이 어느 순간 제법 지형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호흡까지 뱀과 일치시킨 인간 뱀이 수풀을 기고 있었다.

‘벌써 적응 단계인가!’

식음을 전폐한 채 뱀의 뒤만을 쫓은 지 삼 일.

마침내 땅을 딛고 일어선 마른 비의 발은 대지의 결을 정확히 밟고 있었다.

“짹, 짹.”

나뭇가지에 앉은 곤줄박이가 제 몸을 부리로 콕콕 단장한다.

바로 옆에 인간의 아이가 앉아 있는데,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엉덩이를 가지에 걸친 자세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저게 대체…!’

점창파에서 파견한 사절들을 마을로 안내한 직후, 은빛 여우는 마른 비에게 달려왔다.

결을 읽는 걸 보고 경악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사이 마른 비는 또 성장해 있었다.

‘비교가 안 돼.’

성년식이 시작된 지 한 달.

한어가 가장 유창하단 이유로 잠시 마을로 소환됐던 시간을 제외하면, 은빛 여우는 마른 비와 자신이 맡은 또 다른 아이를 쉴 새 없이 오가며 관찰했다.

마른 비와 동갑인 그 아이도 제법 야생에 적응한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었다.

여리던 눈동자는 빈틈없이 사방을 경계하는 야생 짐승의 그것을 닮아 갔고, 쉴 곳과 먹을 것을 구하는 손놀림도 야무지게 변했다.

출발 전에 배웠던 은신과 사냥법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는 시점이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적응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야생에 들어선 지 한 달 만에 지형의 결을 찾아낸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자연기를 느끼는 능력 또한 일취월장했다.

내딛는 발끝에 자연기를 퍼뜨려 체중을 분산시키는 기의 응용.

소년의 발걸음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은빛 여우를 제외하면 원시림 내에서 마른 비의 은밀한 이동을 잡아낼 수 있는 생물은 없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강한 놈들은 없다지만…….’

이 숲은 부족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통로나 다름없다.

상대를 읽을 만한 능력이 있는 맹수들은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떠났다.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존재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곳에서 맘 편히 자리 잡을 짐승은 없는 것이다.

‘가장 신기한 건 저거야.’

결을 읽고, 자연기를 활용한다?

습득하는 속도가 경이적이지만, 전사의 칭호를 짊어진 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룩한 경지는 천차만별일지라도.

은빛 여우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짹, 짹짹!”

바로 옆에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존재가 있는데도 곤줄박이는 태평했다.

녀석은 분명 마른 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치 제 짝과 앉아 있는 듯 평온한 태도라니.

‘호흡을 일치시킨 것과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한데…….’

그 이상은 모르겠다.

마른 비가 보여주는 능력은 은빛 여우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영역이었다.

“읏차차!”

위태한 가지 끝을 여유롭게 딛고 선 마른 비가 기지개를 켰다.

“기러기야. 난 이만 가볼게. 여기서 배울 건 다 배운 것 같다.”

‘곤줄박이야, 그건.’

머리는 그다지 좋지 않을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놈이라는 생각에 은빛 여우가 고개를 저었다.

* * *

비취색으로 물든 고운 빛깔이, 내리쬐는 햇빛에 기대어 사시사철 푸른빛을 울려 낸다.

하여 창산(蒼山)이다.

구름을 뚫고 치솟은 열아홉 봉우리가 저 아래 인간들의 도시인 대리와 구름을 담은 호수, 이해를 굽어봤다.

드높은 봉우리들의 상부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만년설.

그 고고함만큼이나 걷히지 않는 눈으로 치장한 봉우리들은 실로 눈부셨다.

“후우……. 높긴 높구나.”

열아홉 개 봉우리 중 주봉을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마룡봉(馬龍峰)이다.

그 마룡봉이 뻗어 나가는 지점에 천하 구파 중 하나인 점창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달 만인가.”

빠르게 움직였음에도 왕복 두 달이 걸리는 거리였다.

젊은 층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었기에 망정이지, 어정쩡한 인원 구성이었다면 가는 길에 몰살했을 거다.

운남의 지리를 잘 아는 호국영이 있어 위험지역을 피해 다녔지만, 가끔씩 습격해오는 짐승들은 말 그대로 규격 외였다.

창산과 대리 주변에 서식하는 놈들과는 급이 다른 맹수들이었다.

‘아버지께서… 칭찬해 주실까?’

와족의 위치를 찾았고, 장문인의 전언을 건넸으며, 족장의 답을 받아왔다.

서신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어진 임무는 완수한 것이다.

장문전 입구로 들어서는 공유립의 눈이 희미한 기대에 빛났다.

“점창파 일대제자 공유립,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 있더냐?”

두 달 만에 본 아비는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네. 살아 있었습니다.”

“그자가 족장이 맞느냐?”

“아닙니다. 누차 언급하셨던 그자는 장로였습니다.”

“장로라고?”

“네. 그들의 언어로는 그믐올빼미. 한어로 옮기면 회효라고 불린다 했습니다.”

“장로라니! 그런 자가 장로란 말이지…….”

“…….”

잘했다, 고생했다, 어떠했느냐…….

야속하게도 아비는 아들의 노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채근하며 자신의 궁금증을 채울 뿐이다.

“어떻더냐.”

“무엇이 말입니까?”

“무력! 그자의 무력 말이다! 뻔한 걸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강했습니다.”

“강하다? 그것뿐이냐?”

‘그럼 그렇지. 대체 무엇을 바란 것이냐.’

야속함에 심경이 흐트러진다.

심호흡을 한 공유립이 생각을 정리했다.

“저희 모두를 일순간에 위압하는 기세. 기운이 터져 나올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외모는 대리에서 볼 수 있는 소수부족 노인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나, 간직한 기운은…… 외람되오나 장문인에 못지않다 느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럴 것이다.”

공지량은 전혀 기분 상한 기색이 아니었다.

아직 이십 대 초반의 애송이였던 시절, 그믐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력을 직접 목도한 그다.

강한 게 당연하다.

아니, 그 정도인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문제는 그가 족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데 족장이 아니란 말이지? 운남의 소수부족들은 가장 강한 자가 족장으로 선출된다. 나이가 들어서 물려줬다 여기기엔 미심쩍고……. 족장도 보았겠지? 어떻더냐.”

“예. 보았습니다. 그자는 직접 기운을 드러내지 않아서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기운을 드러내지 않았다? 네가 예를 갖추지 않은 것이냐?”

“족장과 대면했을 때는 그럴 상황이….”

“못난 놈! 가장 중요한 걸 빠뜨리다니!”

“…….”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대체 무엇이더냐!”

많은 걸 바란 게 아니다.

잘했다. 아니, 고생했다.

그 한마디면 충분한 것을.

“썩 나가라! 그리고 호국영을 들라 해라!”

공유립이 파래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족장의 서신을 놓고 뒤돌아 나가는 그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

“좌시하지 않겠다? 이런 건방진…!”

콰아앙!

최고급 자단목(紫檀木)으로 짠 집무용 탁자가 힘없이 터져나갔다.

튼튼하기로 유명한 자단목이지만, 반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단련한 주먹을 버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얼굴이 벌게진 채 노기를 감추지 못하는 공지량 앞에서 호국영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대체 뭐라고 답변이 왔기에…….’

장문인은 여간해선 제자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저토록 분기탱천할 일이라면 하나뿐.

와족 족장의 답신이 심기를 건든 게 분명했다.

“벌거벗고 다니는 야만 원숭이 놈이 감히!”

쨍그랑, 쨍강!

폭발하듯 터져 나온 기운에 집기들이 휩쓸려 사방으로 비산했다.

장문인은 화를 억누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큭…! 과연 장문인……! ‘그자’에 비해 떨어지는 것일 뿐, 대단하구나!’

호국영은 덮쳐오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창백하게 질렸다.

문득 마지막 출타 후 수년째 돌아오지 않고 있는 한 남자가 떠올랐다.

호국영에게는 사숙이 되는 자.

점창파 역대 최고의 기재이자 최연소 장로였던 그는 원 제국 치하에서 핍박받는 한인들을 도와야 한다며 중원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힘이 있는 자는 그만한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고 했던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자들이 무슨 상관이라고!’

호국영은 차기 장문 자리도 걷어 차버린 채 중원으로 떠난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10년에 가까운 중원행 동안 천하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점창의 이름을 떨칠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의 협행과 원에 대한 저항운동은 나이를 뛰어넘은 무공과 함께 점창의 이름을 드높였기 때문이다.

점창이 구파에 진입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실 그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작스레 원 황실에 투신해버렸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고통받는 한인들을 위해 내린 결정이니 이해해달라는 서찰 하나 보내온 게 전부였다.

착취당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한인들을 돕겠다고 떠난 자가 몽골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짓거린가?

변절자의 오명은 사문인 점창도 함께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점창고검? 웃기는 소리!’

점창고검(點蒼孤劍) 여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된 길을 홀로 걷는 점창의 외로운 검.

대의를 위해 굴욕과 오명을 감내한 결정이라며 그에게 찬사를 보낸 몇몇 강호인들이 붙여준 별호라 했다.

‘지친 거겠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던 거야. 사문 따위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자일뿐!’

호국영이 보기에 그는 그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오랑캐에게 무릎 꿇은 변절자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무예만큼은 정말 엄청났었지.’

공지량도 뛰어난 재목이지만, 젊은 시절 여휘가 있었기에 항상 비교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구파일방의 수장 중 무력 측면에서 암암리에 최약체로 평가받는 게 공지량이다.

드넓은 천하에는 시대를 초월한 무재(武才)들이 곳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토록 세력 확장에 집착하는 걸지도.’

무인으로서의 뿌리 깊은 열등감.

공지량이 기를 쓰고 문파를 키우려 하는 저변에는 해소되지 않는 열패감과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짙게 깔려 있었다.

업적.

점창을 부흥시켰다는 확고한 업적만이 자신이 위엄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나에겐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편승해야만 해.’

장문인의 불안과 초조함이 호국영에게는 득이 된다.

일파의 종주답지 않은 도량과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는 공지량의 성격이 우습게도 그에겐 활로를 열어주고 있었다.

‘현시점에서 백족은 요직에 오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말이지.’

결국 백족은 한의 뿌리를 지닌 점창에 있어 객일 뿐이었다.

애초에 받아들인 것도 백족이 지닌 힘과 명성을 흡수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쩔 것인가.

점창파를 떠나 다시 운남의 일개 부족으로 돌아간다?

생각하기도 싫다.

문명의 맛을 알아버린 백족은 혹독한 야생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뿐이다.

불평등한 대우를 감수하고서라도 붙어 있는 것.

점창의 울타리 안에서 살길을 모색하여 치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를 불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지량은 호국영에게 있어 더없이 좋은 장문인이었다.

‘내가 올라가려면 공을 세워야만 하니까.’

마침 호국영은 우연찮게 손에 넣은 그럴듯한 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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