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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6화 (26/463)

26화

“후우……. 못난 꼴을 보였구나. 원래는 물으려는 게 있었지만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국영이 너나 유립이나 같이 움직였을 테니. 이만 나가 보거라.”

호국영은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며 공지량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씩씩거림이 잦아들자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장문인.”

“할 말이 있느냐?”

“미개한 야만인들 때문에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 저 또한 이번에 그들을 직접 본 후 양립하기 힘든 자들이라 여겼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쓸데없는 소릴 하면 당장 내쫓으려던 공지량이 마음을 바꾼 건, 뒤에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와족을…… 지울 생각이시지요?”

공지량의 눈썹이 작게 꿈틀했다.

부서진 탁자를 치우고 교의에 앉은 그가 호국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난데없는 질문이군. 그리 느낀 이유나 들어보자구나.”

‘확실하다!’

저 반응.

추측한 게 맞았다.

자신 있게 밀고 나가면 된다.

“하니족의 토지를 강탈… 아니, 건네받는 과정에 저도 따라갔었습니다. 분명 대리의 법에 따른 절차였으나 하니족의 족장을 포함한 대부분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하니족 장로들에게 건넸다는 토지의 대금과 문서에 찍힌 족장의 날인(捺印). 아마도 장로들을 포섭한 것이겠지요.”

“……계속해 보아라.”

“법과 절차에 따라 진행했다는 대외적인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었겠지요. 과정이야 어찌 됐든 하니족의 구성원이 대금을 건네받은 건 사실이며, 대표자 격인 장로들이 문서에 족장의 신물(信物)을 찍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족장과 일반 부족원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무력이 없는 그들을 억누르는 건 간단했지요.”

호국영의 말이 이어질수록 공지량의 눈은 가늘어졌다.

“당장은 은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와족은 결국 그들의 사정을 전해 들을 겁니다. 억울하게 당했다 여기겠지요. 실제로 하니족에게 건넨 대금은 보이차 밭이 낳을 수익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대리의 법은 한족의 법. 그들이 부정하고 나선다면 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녀석이 이런 안목이 있었던가.’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녀석인 건 알았지만 정확히 상황을 읽고 있다.

약관을 갓 지난 나이.

백족이란 출신 성분과 점창의 배경에 취한 철부지인 줄만 알았거늘.

왕가를 일구었던 건국 가신의 피는 옅어지긴 했어도 계승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미숙한 제가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을 장문인께서 헤아리지 못하실 리 없지요. 이미 전부 다 계획된 판. 해서 궁극적으로 이번 기회에 와족을 정리하실 생각이 아닌지 추측해 보았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쩌겠느냐?”

“어쩌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이다.

준비한 패를 내놓아야 할 시점은!

의아해하는 공지량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호국영이 천천히 입을 뗐다.

“이번에 사절단으로 방문했을 때, 제가 와족 계집 한 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 * *

“이야압!”

“크허어엉!”

진녹색 밀림의 한복판.

제멋대로 뻗은 나무를 밟아 오른 두 생명체가 열기를 흩뜨린다.

대호가 휘두른 앞발을 교묘히 흘린 ‘마른 비’가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빠가각!

“크헝…!”

장대한 몸집의 호랑이가 턱을 얻어맞고 추락했다.

우수수 흩날리는 나뭇잎 아래, 벌떡 일어선 녀석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와~ 엄청 튼튼하네?”

네 발로 걷는 맹수들의 경추는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

사람이라면 턱에 가해진 충격에 몸을 가눌 수 없었겠지만, 대호는 탄탄한 목뼈가 두부(頭部)를 잡아주니 뇌를 흔드는 효과를 노리기 힘들었다.

‘체공 상태에서의 낙엽 가누기. 그리고… 날짐승 떨구기의 수평 응용?’

3년 내내 아이들 뒤를 따라다니는 건 지루한 일이다.

하지만 이 녀석을 지켜보는 건 재미있고, 신기하며, 유쾌하다!

마른 비의 성장을 살피고 분석하는 게 일상의 낙이 되어버린 ‘은빛 여우’였다.

‘꼬맹이가 저런 고등기술을……. 그것도 공중에서 정확하게.’

하도 기가 막힌 걸 많이 봐서 그런지 이제 저 정도로는 놀랍지도 않다.

그믐 할아범이 왜 비아를 눈여겨봤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천재야.’

저 유연한 움직임과 즉각적인 대응을 보라.

찰나의 기지, 그리고 실전 전투 감각에 있어서 비아보다 뛰어난 인간은 찾기 힘들 것 같았다.

‘마을에선 게으르던 녀석이 야생에 나오자마자 부지런해졌어.’

나아가는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사냥과 전투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며.

심지어 휴식을 취하는 짧은 순간까지.

끊임없이 궁리하고 탐구하며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시도해본다.

자연기의 운용은 이제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휘돌리며 모든 행동과 작업에 응용하고 있다.

열다섯이 될 때까지 몸 구석구석에 축적된 자연기 전부를 느끼고, 일으켜서, 활용한다.

‘볼 것도 없어.’

범과의 싸움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평소처럼 때려눕히고 나서 그 이상한 야수 제어술로 다독이겠지.

그러면 금세 친해져서 한동안 밀림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인사하고 헤어질 거다.

‘진짜 이상한 놈이야.’

장담할 수 있다.

3년간 죽지만 않는다면 저 녀석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될 거라는 걸.

마른 비를 내려다보는 은빛 여우의 눈은 묘한 기대에 차 있었다.

* * *

“어찌 되었소?!”

문짝을 부술 것처럼 들이닥친 사내가 회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신령목 주변에서 단련을 하다가 너른 하늘의 소집 명령을 받고 달려온 ‘매서운 눈’이었다.

“일단 앉아봐라.”

‘너른 하늘’과 ‘그믐의 표정’은 무거웠다.

“뭐요? 어찌 된 거요?”

“이사앙해애~ 하아니조옥이…!”

“아, 시끄러! 이 느려터진 놈아! 싸울 때 아니면 말하지 마, 너는!”

평소 같으면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못 참겠다.

‘우둔한 땅’이 상황 설명을 위해 나섰다가 매서운 눈이 빽 내지른 핀잔에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 거 말을 해보시라고! 힘으로 빼앗은 거 맞지, 할아범?!”

“아니라더라.”

“거봐, 역시! 그 새끼들…! ……·뭐요? 아니라고?”

“그래. 아니라고 했다.”

매서운 눈의 얼굴이 지켜보기 안쓰러울 만큼 일그러졌다.

“그럴 리가…….”

믿을 수 없다.

수백 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을 그깟 푼돈에 내던졌다고?

말도 안 된다.

역사와 전통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그 하니족이?

한족 놈들이 뭔가 꼼수를 부린 것이리라.

온갖 곳을 파헤쳐 자원을 캐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토착부족의 터전까지 침범하기 시작한 게 틀림없다.

30년 전에 그랬듯이 말이다.

매서운 눈은 점창의 사절단이 돌아간 날부터 단련에 단련을 거듭해왔다.

장담할 수 있다.

무력 충돌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놈들이 하니족의 땅을 강탈한 게 분명했다.

그런 확고한 믿음 아래, 매서운 눈은 ‘나무 표범’ 전사들을 쥐 잡듯이 잡으며 혹독하게 수련해왔다.

소식이 당도하는 대로 출정하여 힘으로라도 부당한 것을 바로잡으리라 다짐했다.

“아니라니……. 확실하오?”

매서운 눈이 바람 빠진 허파에서나 날 법한 소리를 흘렸다.

하니족은 대리에서 쫓기듯이 빠져나와 무정(武定)으로 이동 중이었다.

검은 수리 전사들이 운남 서남부 끝자락에 있는 청죽림에서 출발하여 하니족을 따라잡는 데만 한 달 가까이가 걸렸다.

사실 여부를 묻고 자체적인 조사와 탐문을 하는 데 10일.

반려수 중 가장 빠른 ‘흰 수리’가 서찰을 다리에 묶고 와족 마을까지 날아오는 데 17일.

무려 두 달 만에 받은 소식인 것이다.

그런데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수백 년간 살아온 땅을 넘겼다고? 그 하니족이? 제 새끼 키우듯 공들인 보이차 밭도 내던지고?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가 직접 다녀오겠소! 분명 놈들이 무언가 농간을…!”

“매서운 눈. 진정하고 앉아라.”

“진정이오? 족장님, 지금 진정하게 됐습니까! 그깟 욕심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흥분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알지 않느냐. 앉아라.”

중후한 음성이 다독이듯 스며들었다.

절정에 이른 야수 제어 덕분일까?

분노를 못 이기고 폭발하려던 매서운 눈이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그도 안다.

자신이 간다고 달라질 게 없음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니족 족장이 공언했다고 한다. 점창파가 건넨 대금을 받은 것이 맞노라고. 그들이 보유한 증서에 부족의 신물이 찍혀 있는 게 사실이라고. 검은 수리 전사가 직접 확인한 내용이다.”

“문자를 다룰 줄 아는 전사가 상세히 적어서 보내왔더구나. 표면적으론 점창파 젊은이의 말이 맞는 듯해. 직접 탐문해 본 결과도 마찬가지고. 다만…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하니족 족장의 표정이 어두웠다더군.”

자의로 내린 결정이라면 그럴 리 없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그걸 밝혀내기가 힘들뿐.

“당사자인 하니족이 인정했고, 문서의 형태로 명백한 증거까지 보유하고 있다. 끼어들 명분이 없어. 미심쩍은 부분을 계속해서 파고들어 보겠지만, 아마 별 소득은 없을 게다. 무엇보다 이 이상 관여하는 건 우리의 오지랖일 수 있어.”

상황을 설명하는 그믐 또한 침중함을 감추지 못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게 와족의 수뇌부를 답답하게 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지켜볼 수밖에.”

어쩌면 자신들이 잘못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니족이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지 않나.

오랜 전통을 깨뜨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해서 표정이 안 좋았을 수도 있다.

과거에 전쟁을 치른 기억 때문에 무작정 점창파를 나쁘게만 본 건 아닐까?

또는 변화하는 시대를 자신들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그믐이 묵직하게 뿜어낸 연기가 모두의 가슴을 짓눌렀다.

“만약에 말이다. 이번 일이 우리가 예상한 것처럼 놈들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제각각 상념에 빠져 긴 침묵이 이어질 즈음, 그믐이 나지막이 입술을 뗐다.

“이걸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분명히 다른 움직임이 이어질게야. 일단은 기다려보자구나.”

점창의 사절단이 다녀간 지 약 두 달을 넘어서는 시점이었다.

* * *

쌍강(雙江).

물소 떼가 대규모로 서식하는 두 줄기 강의 언저리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음머어어!”

콰아앙!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물소의 박치기에 강변에 선 아름드리 거목이 무너져 내렸다.

“푸르륵!”

못생긴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온 콧김이 공기를 덥힌다.

땅을 헤집는 오른발이 다시 시작될 돌진을 알렸다.

“와 봐!”

앳된 얼굴의 소년이다.

하지만 육체는 청년의 그것처럼 탄탄하기만 했다.

석 달 사이 필요 없는 부분을 남김없이 덜어내 매끈하게 다듬어진 몸이었다.

두두두두!

바윗덩이가 굴러오는 것 같은 물소의 돌진에도 위축되지 않는다.

마른 비의 왼발이 힘차게 땅을 밟았다.

“하압!”

끌어올려 응축시킨 자연기가 오른손에 깃든다.

일격필살의 강권이 적중의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산’이 ‘그믐’과의 대련에서 선보였던 바위 부수기, 그 강렬한 정권이 충돌 직전의 물소 얼굴을 후려쳤다.

뻐엉!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물소의 고개가 튕기듯 돌아갔다.

돌진하던 궤도는 틀어졌지만, 육중한 몸체는 여전히 달리던 속도를 업고 짓쳐 온다.

두 다리가 흐르는 물결처럼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충돌을 비껴냈다.

“휘유~.”

저 멀리 나가떨어진 물소가 파르르 떨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다.

치명적인 급소는 비껴 쳤으니까.

이마의 땀을 훔치는 마른 비의 손은 꽤나 야무져 보였다.

운현(云縣).

바람이 거칠기로 유명한 산속에서 산풍을 견디지 못한 잎들이 나무의 품을 떠난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잎들은 체념한 듯 바람에 몸을 맡겼다.

휘오오오―

거센 흐름 속에서도 그림자는 꼿꼿이 서서 중심을 잃지 않았다.

살짝 구부려 앞뒤로 중심을 잡은 두 다리가 굳건히 몸을 지탱했다.

내뻗어서 오므린 다섯 손가락은 사냥감을 노리는 올빼미의 부리를 닮아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

미약한 빛들을 끌어모은 소년의 눈이 홀로 빛났다.

팟! 파밧! 파파파팟!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야밤의 산중에서 바람에 휩쓸린 잎들이 연달아 터져나간다.

시야에 들어오는 잎을 하나도 놓치지 않게 되었을 때, 침식을 잊었던 소년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은빛 여우의 눈이 커졌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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