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쿵!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바람의 경쾌한 연주에 불협화음을 얹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목표를 달성한 자의 흡족함이었다.
‘지독한 놈…….’
은빛 여우는 그제야 마른 비가 쓰러진 이유를 짐작하고 어둠 속에서 혀를 내둘렀다.
몇 날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힘이 넘치는 나이라지만 식음까지 전폐한 수련은 몸을 축내기 십상인데.
살다 살다 이렇게 악착같이 단련하는 인간은 처음 본다.
저건 이미 생존을 위한 수련을 한참이나 넘어선 상태다.
생존이 목적이라면 항상 몸을 돌보는 걸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니까.
특히나 야밤의 산속에서 널브러져 잠드는 건 맹수의 위장 구경을 하고 싶다는 것과 다름없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몰입.’
마땅히 고려해야 할 부분과 여타 조건 따위를 염두에 두지 않는, 깊은 집중의 결과였다.
‘재밌는 거겠지.’
상상한 대로 이끌리는 육체가 경이적인 춤사위를 뽑아낸다.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신체의 반응속도가, 자연기의 운용이, 사위를 더듬는 감각이 무섭게 발달한다.
그 흥분과 온몸을 찌르르 울리는 쾌감은 경험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은빛 여우는 마른 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기껏해야 하루 이틀이다.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뱃속의 아귀들과 힘이 다하여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팔다리, 고갈되는 체력, 감기는 눈꺼풀…….
무엇 하나라도 머리에 들어오는 순간, 집중은 깨지기 마련이다.
‘체력, 근력, 지구력. 죄다 흠잡을 데가 없지만, 특히 저 집중력은…!’
육체적 조건을 타고났다 해서 힘들지 않을 리 없다.
모든 걸 무마시킬 정도의 몰입이 대단한 것이다.
‘휴……. 반성해야겠군.’
마른 비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은빛 여우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 * *
“거기 서!”
봉경(鳳慶).
산양이 깎아지른 절벽을 풀쩍풀쩍 뛰어오르고, 소년은 그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단애에 미세하게 튀어나온 돌출부를 용케도 찾아내 이리저리 몸을 옮긴다.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등반하는 둘 사이의 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좁혀졌다.
“아자자! 이겼다!”
일주일.
마른 비가 산양을 앞지르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보산.
큰 발이 산을 따라나선 뒤에 무주공산이 된 보산을 차지한 건 집채만 한 불곰이었다.
거리낄 것 없는 맹수가 자신의 앞을 막아선 겁 없는 인간을 내려다봤다.
“쿠어어엉!”
느리다.
두 발로 버티고 선 불곰은 위압적이긴 했지만, 하품이 나올 만큼 느렸다.
휘둘러진 앞발을 손쉽게 피한 마른 비가 불곰의 품 안으로 바싹 파고들었다.
‘시험하기 딱 좋아!’
인체에 존재하는 무수한 급소.
그중에서도 신체의 정중앙에 자리한 다섯 개의 급소는 치명적이다.
사람이라면 한 곳만 허용해도 생사가 오가는 취약점이나 다름없다.
인간에게는 함부로 쓸 수 없는 기술이지만, 이렇게 튼튼한 놈이라면 괜찮을 거다.
마른 비의 눈이 불곰의 몸 정중앙에 한줄기 가상의 선을 그렸다.
탓!
사뿐히 지면을 박찬 소년의 몸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중선오격(中線五擊)이라 한다. 맞으면 기냥 콱! 황천길로 가는 거여!’
낭심, 단전, 명치, 목젖, 인중.
한족의 땅과 운남을 오고 간 이십여 년의 세월.
숱한 강적들을 거꾸러뜨려 온 그믐만의 비기가 마침내 마른 비의 육체를 빌어 세상에 나왔다.
퍽! 퍼버버벅!
오른발, 왼발, 그리고 다시 오른발!
교대로 내뻗은 다섯 번의 발차기가 불곰의 몸뚱이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끄, 꾸어…!”
쿠우웅―!
불곰이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어?”
입으로 거품을 부글부글 흘리는 녀석을 보고 오히려 마른 비가 더 놀랐다.
“어어? 그렇게 세게 안 찼는데? 사람이랑 급소도 다르잖아? 아…!”
배운 기술을 처음 써먹어 본다는 기쁨에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종에 상관없이 수컷이라면 치명적인 그곳!
“으와아아~! 어떡하지? 설마 터진 건 아니겠지?”
마른 비가 안절부절못하며 기절한 곰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불곰에게 제대로 감정을 이입한 이는 따로 있었다.
‘으욱…!’
자신이 얻어맞은 것처럼 인상을 찡그린 은빛 여우가 본인의 것은 안녕한지 어루만졌다.
* * *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은빛 여우는 작은 폭포를 발견하고 신이 난 마른 비를 내려다보았다.
야생에 나온 지 불과 반년.
마른 비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을 거듭했다.
평범한 맹수들은 이제 마른 비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이걸 말해도 믿을지 모르겠군.’
놀기 좋아하고 게을러빠진 꼬맹이가 이렇게 눈부시게 변모했다면 누가 믿을까.
‘그때 할아범이 보인 웃음의 의미가 혹시…….’
은빛 여우는 반년 전에 있었던 수리의 눈 회합을 떠올렸다.
“산이 아니면 걸음이 아니겠소?”
나이 지긋한 중년 전사의 말에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확실히 그 둘 외에는 없지요.”
은빛 여우 또한 이견이 없었다.
“갓 성년식을 마친 꼬맹이들이 그믐 할아범을 상대로 11수를 버티다니…….”
“강해졌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 놀랐었지.”
“할아범. 솔직히 말하쇼. 봐준 거 아닙니까?”
내기에 지는 바람에 한 달에 걸쳐 교자설산에 다녀온 전사가 볼멘소리를 토했다.
그가 인간 어미 새가 되어 품어온 흰 수리 알은 다시없을 별미였다.
“클클. 봐주긴 봐줬지.”
“엇! 뭐요? 진짜로?! 그럼 나는 왜 한 달 동안…!”
알에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잠도 제대로 못 자며 품고 온 지난날이 억울해진 전사였다.
“너희 때도 마찬가지다. 항상 6할 정도의 힘으로 상대했지. 이제 갓 성년식을 마친 핏덩이들 상대로 전력을 다할 순 없는 노릇 아니냐.”
“끄응……. 그랬소? 난 또 뭐라고.”
다행히 그의 한 달이 억울해질 일은 없었다.
“매서운 눈, 우둔한 땅 부 족장이 10수를 버텼다고 했지요?”
“그랬지.”
그믐이 오랜 기억을 더듬으며 주억거렸다.
“그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난리가 났다고 들었는데…… 기록 경신이군요. 아, 그러고 보니 족장님은 어땠습니까?”
“족장 놈 말이냐? 글쎄… 8수였던가?”
“8수? 족장님이?”
의외의 결과에 은빛 여우가 말을 흐리는 순간,
“전력을 다했다.”
“……!”
그믐이 클클 웃으며 장죽에서 연기를 뿜었다.
“6할만 가지고 싸우면 지겠더라고. 바로 최선을 다해서 눕혔지.”
“음… 그건 좀…….”
“으엉? 그럼 내가 누웠어야 했겠냐? 명색이 부족 최고의 전사였는데, 성년식을 막 끝낸 꼬맹이한테 뚜드려 맞고 뻗으라고?”
“그건 그렇긴 한데…….”
“너나 봐주다가 줘터지고 뻗어라!”
언성을 높이는 그믐을 보며 수리의 눈 전사들이 킥킥댔다.
“뭐, 아무튼 할아범은 둘 중에 누가 차기 족장 자리에 오를 거라고 보십니까?”
모두의 시선이 그믐을 향했다.
“내 생각 말이냐? 흠……. 그 둘 말고는 없을까?”
“?”
뛰어난 아이들이 많지만 산, 안개걸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청년은 없다.
그 둘은 젊은 세대에서 그야말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다.
“뭐, 모르면 됐다. 좀 더 지켜보자구나.”
전사들의 의문 어린 시선 속에서, 그믐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비아를 염두에 둔 거였어.’
아무도 비아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족장의 아들이란 점 때문에 유심히 지켜봤던 이들도 모두 고개를 저으며 기대를 거뒀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힘을 키우는 데 관심이 없는 건 물론이고, 너무나 나태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
할아범이 왜 비아를 눈여겨봤는지를.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세 살의 나이 차?
뛰어넘을 것이다.
산과 안개걸음으로 좁혀진 족장 후보군에 비아는 들어가고도 남는다.
‘벌써 족장 결정전이 기대되는데.’
비아는 당분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알아서 잘 살아남을 테니까.
폭포수를 맞으며 뛰노는 마른 비를 뒤로하고, 은빛 여우가 먼 곳에서 헤매고 있는 다른 아이에게 가기 위해 땅을 박찼다.
계략
“이, 이건 너무하지 않소!”
태족 사내가 부르짖었다.
비통한 항의는 절규나 다름없었고, 눈에선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뭐가 너무하단 말이야? 당신, 우리가 건넨 돈 받은 거 맞잖아? 그 돈으로 당신 부족원들이 옷이며 음식이며 잔뜩 사서 흥청망청 논 거 아니야?”
“도… 돈을 받은 건 맞지만, 그게 땅이랑 교환하는 거란 말은 없었잖소! 그냥 부족의 신물을 종이에 찍기만 하면 주는 것이라고…!”
“그 종이에 토지를 넘긴다는 말이 쓰여 있어요~ 장로 아저씨~! 한자 몰라? 당연히 읽어 보고 찍은 줄 알았지.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돈을 그냥 주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 그간의 교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했잖소! 난데없이 땅을 내놓으라니……! 이익, 이건 무효요! 내 반드시 돈을 마련해서 갚을 테니 돌아가시오!”
“아하~ 남의 돈 받아서 탕진해놓고 이제 와서 무효다? 장난해?”
살기등등한 눈빛이 태족 장로의 심신을 압박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건… 이건 속인 것이잖아!”
울화가 치민 사내가 점창파 삼대 제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분명히 당신이 먼저 잡았다? 난 내 몸을 지켰을 뿐이야.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마.”
검이 차가운 검광을 토하고, 잘린 두 손이 하늘을 날았다.
“아아악!”
주저앉은 사내의 비명을 끝으로, 태족은 수백 년간 살아온 토지를 잃었다.
하니족은 시작일 뿐이었다.
하니족의 이주가 끝날 즈음.
태족, 경포족, 아창족, 납서족…….
운남 각지의 풍요로운 토지의 주인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었다.
평화롭던 변방의 땅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 * *
쏴아아아―
호젓한 산속의 계곡.
달빛이 은은하게 스민다.
물가에 접한 바위 위에는 황급히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군살 하나 없는 늘씬한 남자가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여인을 쓰다듬었다.
“월 매(月妹). 내가 너무 서둘렀지?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만.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
두 남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까만 눈동자를 들어 올린 여인이 남자의 볼을 어루만졌다.
“아니에요. 호 가가(哥哥). 저도 그랬는걸요. 편하게 동월(冬月)이라고 부르세요. 언제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실 건가요?”
서운하다는 듯 살짝 찌푸린 눈썹.
달빛이 맺힌 붉은 입술은 또 달려들고 싶을 만큼 관능적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여자야.’
사랑에 빠지고 남자를 알게 된 겨울 달은 나날이 농염해지고 있었다.
손이 닿기만 해도 녹아내릴 것 같다.
호국영은 그녀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느꼈다.
‘여러모로 말이지.’
겨울 달은 남자를 홀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야만인만 아니라면 쭉 만나도 될 텐데.’
하지만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매력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적당히 만나다가 정리해야 할 여자였다.
더군다나 곧 충돌할 적대 세력의 일원.
답은 나와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야만인이란 신분이 나에게 있어 최고의 복이란 점이야.’
겨울 달을 지그시 바라보던 호국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술을 뗐다.
“월 매. 전에도 말했지만 문명인들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아. 가족처럼 정말 가까운 사이가 된다면 모를까. 월 매도 우리가 연인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잖아.”
“가가라고 부르는 건 그저 당신들의 방식을 배우는 것뿐이에요. 전 오빠라고 부르는 게 훨씬 친근하고 좋은 걸요. 제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불러주길 바라고요. 이미 우린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지 않나요?”
배시시 웃으며 몸을 밀착해온다.
겨울 달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미치겠군.’
잠깐만 방심해도 또 이성을 놓을 것 같다.
오늘은 중요한 일 때문에 오지 않았나.
호국영이 겨울 달과 살짝 거리를 두며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렀다.
“알았어. 월 매가 원한다면 고려해보도록 할게. 그나저나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뭘 듣고 싶은데요?”
“와족의 이야기는 정말 놀랍고 재밌어. 돌격대인 바위…… 흠, 아무리 해도 와족어는 발음이 어렵네. 돌격대인 암웅(岩熊)과 유격대인 목표(木豹), 그리고 수색대이자 첩보대인 단목(鷻目). 단출하지만 짜임새 있는 구성이야. 와족이 강한 이유를 알겠어.”
문명을 동경하는 겨울 달이지만 자신의 뿌리인 와족을 칭찬하는 게 싫을 리 없다.
호국영은 언제나 자신과 와족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고, 어떤 말이든 귀 기울여 준다.
항상 감탄하며 맞장구치는 호국영에게, 그녀는 만날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 성인 전사들은 정말 강해요. 항상 부단히 단련하는 걸요. 특히나 요즘은 더욱 그렇고요.”
말을 잇던 겨울 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그래, 월 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어른들이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해주지만…… 열심히 단련하는 이유가 전쟁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래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