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8화 (28/463)

28화

겨울 달이 말꼬리를 흐렸다.

생략된 뒷이야기는 충분히 알 만했다.

‘아직 청년 전사들에게는 자세한 내용을 알리지 않았군.’

상황을 짐작한 호국영이 겨울 달을 안심시키기 위해 선수를 쳤다.

“아마 하니족의 이주 때문이겠지. 우리 점창파와 하니족 간의 토지 거래 문제. 그 일 때문에 내가 와족을 방문해서 월 매를 만날 수 있었잖아. 걱정하지 마. 사절로 갔던 내가 잘 알아. 예전에 다투었던 과거 때문에 와족이 점창을 수상히 여길 수는 있지만, 그건 오해야. 우리가 싸울 일은 없어.”

“가가의 말을 믿어요. 분명 잘 풀릴 거예요.”

겨울 달이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그녀는 호국영에게 푹 빠져 있었고, 서로 대치하는 상황은 절대로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언젠가 그를 따라 대리에 가겠지. 말로만 듣던 도시를 구경하고, 아름다운 옷, 반짝이는 장신구들을 마음껏 고를 거야. 커다란 집에 둘만의 가정을 꾸리고, 빛나는 문물을 누리며 평생을 함께하겠지.’

겨울 달은 다른 부족원들과 달리 속물적이며, 약은 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와족의 기준일 뿐, 속고 속이는 전장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계략이나 모략 따윈 겪어보지 못한, 첫사랑에 빠진 열여덟 소녀.

그녀는 둘의 사랑이 진실하며 영원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된 건가. 인원 구성과 규모, 전투 부대의 편성, 싸우는 방식과 생활 습관까지. 필요한 정보는 모두 습득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본격적으로 시작했겠지. 운남의 알짜배기 땅들은 거의 넘어왔을 거야.’

“아 참! 깜빡할 뻔했네. 가가에게 줄 선물을 가져 왔어요.”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 할 텐데. 깔끔히 하려면… 역시 죽여야 하나? 저 미모와 몸매. 너무 아까운데……. 뒷일은 모르는 거니까 놔두면 혹시 도움될 일이……. 아니, 아니야. 원래 계획대로 확실하게…!’

“짠!”

겨울 달은 호국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어… 엇?! 이, 이건…! 월 매, 이게 어디서 났어? 도시에 가본 적 없다더니 그새 다녀온 거야?”

“아뇨. 부족의 영묘에서 가져온 거예요. 반짝반짝 예쁘죠? 제가 가장 아끼는 광석이랍니다. 가가께 선물하려고 할멈이 자리를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들어가서 캐왔어요.”

“묘? 거기에 이게 있다고?”

“네, 그럼요. 잔뜩 있는 걸요. 저도 성년식에서 돌아온 날 처음 봤어요. 원래는 가져오면 안 되지만, 많이 있으니 뭐. 그날도 조금 떼어 가지고 나왔고요. 둘만의 비밀이에요, 이건.”

‘맙소사!’

호국영은 경악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이라면 이건 엄청난 정보다.

진위를 확인하여 장문인에게 들고 가면 최소한 차기 장로 자리는 보장받고도 남을 정도로.

“월 매! 그 영묘라는 곳, 구경시켜줄 수 있어?”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저 멀리 날아가고 없었다.

겨울 달의 어깨를 움켜쥔 호국영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 * *

“흐아아~암. 확실히 나이가 들었어. 아침마다 결리는구먼.”

장족(壯族)의 장로 ‘파란 물고기’가 어깨를 휘돌리며 움막 밖으로 나왔다.

장족은 사시사철 춤과 노래를 즐기는 유쾌한 이들이다.

오늘은 부족의 축제인 가우(歌圩)가 열리는 날이며, 파란 물고기는 금년 노래 경연에서 꼭 우승하고 싶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건 미리 목을 풀어서 경연 전에 최상의 목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이쿠! 이게 뭐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여명이 발을 건 물체를 비췄다.

“……코뿔소?”

갓 태어난 자그마한 새끼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헐떡이는 모습은 곧 생명의 불씨가 꺼질 듯 위태롭기만 했다.

“아니, 이게 웬 코뿔소여? 난데없이.”

간밤에 사냥을 나간 부족원은 없었다.

아직은 다들 잠에 취해 있었고 한적한 마을은 고요하기만 했다.

“시익, 시익, 시… 익…….”

툭.

가쁘게 숨을 내쉬며 괴로워하던 녀석이 끝내 고개를 떨궜다.

“이게 뭔 일이래?”

코뿔소의 새끼는 마을 한복판에 피 칠갑을 한 채 버려져 있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다.

어찌 됐건 싱싱한 아침거리를 주운 것 아닌가.

오랜만에 아이들이 포식하겠구나, 생각하며 새끼 코뿔소를 들어 올린 순간.

“푸르륵.”

뜨거운 콧김이 목덜미를 데웠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함.

다가드는 더운 공기가 무색하게도 몸은 차갑게 식었다.

불안감을 떨치며 고개를 돌리자, 야수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악!”

이날, 문산(文山) 밀림 일대의 장족 마을이 사라졌다.

* * *

“그것 보시오! 내가 뭐랬소! 역시 강탈한 게 맞지 않습니까! 그 더러운 놈들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고요!”

씩씩대는 매서운 눈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사십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이토록 화가 난 적이 없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따위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창산으로 쳐들어갈 것만 같았다.

‘사람들만 구하고 나면, 내 이놈들을 당장……!’

매서운 눈이 분개하며 피의 각오를 다졌다.

그의 머리가 방금 전까지 혼돈 그 자체였던 회의실의 상황을 되새겼다.

꼬리를 잡을 수 없었던 하니족의 이주 사건.

그믐은 점창이 야욕을 드러낸 것이라면 그 정도로 끝날 리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꽤 흐르도록 점창파는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금세 또 다른 사건이 터질 거라는 매서운 눈의 호언장담과 달리 점창은 조용하기만 했다.

오판을 한 것이었나 보다, 그럼 하니족은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정기회의 때마다 두런두런 그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즈음, 운남 각지에 퍼져 있던 검은 수리 전사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북동부 선위(宣威) 일대의 경포족 토지가 점창파에게 넘어갔습니다! 얼마 전부터 그곳의 경포족들은 귀주성(貴州省) 지역의 한족들과 교역을 시작하였는데…!”

“동남쪽 부녕(富寧)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도 분가한 경포족의 땅인데 증서로 덜미를 잡혀 강제로 쫓겨났습니다. 근처 강변에서 임시로 생활하고 있답니다.”

“서려(瑞麗)의 아창족은 철광을 빼앗겼습니다! 그들은 문서를 작성하거나 돈을 받지 않았는데도 그냥 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미 충돌이 일어나 아창족 선발대가 전멸한 상황입니다. 도움을 청하는 아창족 족장의 서신이…!”

“중부지역 남화(南華)의 포랑족도 이주 중입니다. 자단목 군락이 목적인 듯합니다.”

“운남에서 처음 농사를 시작한 원양(元陽) 부근의 하니족들은 제전(梯田)을 빼앗겼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갈아놓은 광활한 계단식 논밭이 전부 넘어갔습니다. 머무를 곳이 없어서 몇 개월 전 보이차 밭을 빼앗겼던 하니족 본가 쪽으로 합치기 위해 이동 중이랍니다.”

와족을 제외한 소수부족들은 운남 각지에 퍼져 살아왔다.

강대한 야수들의 땅에서 버틸 힘이 없기 때문에 야수가 없는 지역을 찾아 야금야금 분가하여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씨족이 모두 모여 사는 건 와족뿐인 것이다.

그래서 찾아올 수 있었다.

운남 서남부 끝자락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온 자.

두 손이 잘려 거동이 불편한 태족의 장로가 눈물을 쏟으며 주저앉았다.

“크흐흑…! 족장, 도와주시오! 나는, 나는 정말 몰랐소. 그저 종이에 신물을 찍기만 하면 된다기에……. 오랫동안 그들과 가죽이나 목재들을 거래하며 알고 지내 와서 그저 호의인 줄만 알았소. 큰돈도 아니오. 내 분명히 갚는다 하였거늘…! 어린 녀석이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기에 화가 나서 멱살 한 번 쥐었을 뿐이라오.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

태족 장로의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한참을 흐느끼던 그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들었다.

“크흑…! 잘린 내 손은 괜찮소. 쫓겨난 부락민들이 갈 곳이 없는 게 문제요. 주변이 모두 야생 짐승들의 영역이란 말입니다! 족장, 이렇게 부탁하오. 제발, 제발 도와주시오!”

밀려드는 보고와 태족 장로의 목메는 하소연.

너른 하늘은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걸 끝까지 들었다.

그가 눈물범벅이 된 사내의 등에 손을 올렸다.

“아무 걱정 마시오. 힘드셨을 텐데 잘 찾아오셨소이다. 바로 전사들을 보내 부족민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겠소.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곧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터이니.”

몸을 일으킨 너른 하늘이 회의실에 자리한 전사들을 둘러 봤다.

“확인 따윈 필요 없겠지. 창산으로 간다. 전쟁을 준비하라.”

“네! 족장님!”

전사들을 집결시키기 위해 전령들이 나가려는 순간, 검은 수리 전사가 회의실로 몸을 던지듯 달려 들어왔다.

“족장님! 큰일 났습니다! 문산의 장족 마을이 광서우의 습격으로 초토화되었습니다!”

“?!”

이게 무슨 소린가.

한 번도 영역을 벗어난 적이 없는 코뿔소 녀석이 갑자기 왜?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족장님! 남방 밀림의 대망(大蟒)이 영역을 넘어 인간의 마을을…!”

“야생곡의 전상(戰象)도 무리를 이끌고 골짜기를 벗어났습니다!”

“신평(新平)은 까마귀 떼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속속들이 들이닥치는 보고에 정신이 다 아찔해진다.

여간해선 평정심을 잃지 않는 너른 하늘과 그믐조차 할 말을 잃은 채 서로를 돌아봤다.

* * *

쐐액- 쐐애액―!

그림자 세 개가 미로처럼 얽힌 숲 속을 달린다.

운남 토착부족의 옷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주변 경물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와족 외에도 이런 몸놀림이 가능한 전사들을 보유한 부족이 있었던가.

세 명의 사내가 순식간에 숲을 가로질러 평야로 빠져나왔다.

“이런 제기랄! 무슨 놈의 짐승들이 그렇게 센 거야?!”

“미리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설마 했는데…….”

“멧돼지 따위에게 세 명이 당했어!”

사내들은 평야로 나오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질겁한 표정의 그들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쉴 새 없이 발을 놀렸다.

“거대한 뱀 쪽으로 갔던 3조는 조장 말고는 전멸했다더군. 조원들이 잡아먹히거나 온몸이 바스러지며 시간을 끈 덕분에 간신히 임무를 마치고 빠져나왔대.”

“이게 말이 돼? 고작 짐승에 불과한 것들한테…!”

왈칵 소리를 지른 사내는 아직도 동료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꾸이익!”

“시끄러워! 당장 죽여 버릴까 보다!”

사내가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새끼 멧돼지를 성난 눈초리로 내려다봤다.

콰아앙!

질주하는 사내들의 뒤편 저 멀리, 그들이 빠져나왔던 숲의 끝자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빌어먹을! 벌써 쫓아왔어!”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쳤는데! 어떻게 멧돼지가 이렇게 빠를 수 있지?!”

“그래도 3조에 비하면 여기는 훨씬 수월했어. 조장 쪽도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이동 중이다!”

“다 왔어! 갈라지자!”

“저놈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서 죽이는 것 잊지 마라! 옷은 전부 벗어서 마을에 던져놓고 이탈해!”

미리 의논을 끝낸 듯 세 명의 사내가 일시에 세 방향으로 찢어졌다.

그들의 품에는 새끼 멧돼지가 한 마리씩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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