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점창파 삼대 제자 원승은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간신히 삼켰다.
‘문자를 모르는 건 물론이고, 증서에 날인을 한다는 것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순박한 사람들이다.
중화를 기준으로 보면 변방 중의 변방인 운남의 토착부족들은 꾸밈없이 순수하며 정이 많다.
중원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더러운 인간 군상들의 모습에 질릴 대로 질린 원승은 운남의 무구한 사람들이 좋았다.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왔거늘.’
서른 중반에 이를 때까지 밑바닥에서 아등바등 구르며 익힌 실전 무예는 나름 일류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좌절감에 빠졌다.
힘없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떠돌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그분’은 원승이 운남행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점창고검 여휘.
고고한 기상과 굽힐 줄 모르는 신념은 마치 협을 위해 태어난 화신 같았다.
술에 취해 한족 부녀자를 겁탈하려는 몽골 기병대의 백호장(百戶長)을 단칼에 두 동강 낸 무위!
황실에 쫓기는 수배자가 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아녀자를 구하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몇 년 후 여휘가 원 황실에 투신했을 때, 원승은 궁벽한 운남 땅까지 무작정 내려와 점창파의 문을 두드린 후였다.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분명 뜻있는 결정이리라.
하지만 여휘는 사문에서조차 손가락질받았다.
여휘를 흠모해 그의 사문에 몸담은 원승은 지난 수년간 눈에 띄게 타락해가는 점창을 누구보다 우려하는 사람이었다.
‘제자를 나누는 구분부터 썩어빠졌어. 입문 순서나 실력은 무시하고 오로지 누구의 제자인지에 의해서만 차등을 두다니!’
배분을 완전히 무시하는 건 아니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대다수의 명문 정파가 그렇듯 배분에 따른다.
하지만 일대 제자는 장문인, 이대 제자는 장로에게 배운 자들만이 편성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삼대 제자다.
그리고 그것이 점창파 내부 서열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정파로 분류되는 문파들 중 이따위로 제자를 구분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이 편제는 공지량이 장문인이 된 뒤에 무수한 반대를 묵살하고 만든 것이며, 그 의중은 뻔했다.
‘장문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천산에 웅크리고 있는 마교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사파라면 모를까.
혈족으로 이루어진 세가가 아닌 바에야 직위를 혈육에게 승계하는 정도의 문파는 없다.
창산에 온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원승은 점창파가 점점 정도에서 벗어나는 원인이 장문인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서둘러 마무리해라.”
멋들어진 백색 무복을 갖춰 입고 왼손에는 부채를, 오른손엔 보검을 쥔 이십 대 중반의 사내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머리카락 한 올 삐져나오지 않게 바짝 넘긴 머리는 과할 정도로 단정했다.
장문인의 얼굴을 빼다 박은 것처럼 똑 닮은 남자였다.
장문인의 첫째 아들이자 일대 제자인 공유환이었다.
“한데 대사형……. 이렇게 갑자기 내쫓으면 이들이 갈 곳이 있을까요?”
원승만 꺼림칙한 게 아니었다.
문파 차원에서 추진하는 일이고, 나름의 명분이 있다 보니 대놓고 반발은 못 하지만,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젊은 제자가 공유환에게 물었다.
“그런 걸 왜 고려해야 하느냐?”
“갑자기 통보받고 쫓기듯이 나가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머물 곳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주는 게….”
“그런 배려는 사람에게나 하는 것이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야만인이 아니라.”
장문인의 핏줄이라서 그런지 공유환의 능력은 출중했다.
무공은 물론이거니와 병법과 군략까지도.
하지만 원승은 평소에 그를 보며 늘 무언가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았다.
‘치다꺼리나 하게 될 걸 알면서도 삼대 제자의 신분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 대협의 사문에서 남은 생을 조금이라도 뜻있게 살고 싶은 마음이었거늘. 계속 이렇게 흘러간다면 난 어찌해야 할까.’
사실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이가 많고 신분도 애매한 그를 점창과 같은 대 문파에서 받아들인 것은.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자신과 같은 자들이 삼대 제자에 허다했다.
이 역시 중원의 어떤 문파에서도 행하지 않는 일이다.
‘이 기묘한 편제. 그리고 예고도 없이 시작된 대규모 토지 매입. 아니, 몰수 내지는 강탈이란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혹시 요 몇 년간 닥치는 대로 무인들을 받아들인 이유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설마… 아니야. 아무리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지만 정파를 영도하는 구대 문파의 하나인 점창이…… 기우겠지.’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원승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 * *
저 멀리 보이는 동굴의 입구는 크지 않았다.
입구 주변을 장식한 뜻을 알 수 없는 그림들과 동굴 초입에 늘어선 동물 조각상만 아니라면, 운남에 널린 여느 동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외진 곳에…! 와족 마을과도 상당히 동떨어진 위치야. 동월이 아니었다면 절대 못 찾았겠군.’
호국영은 고목 뒤에 몸을 숨긴 채 주변 지형을 눈에 새기고 또 새겼다.
“쉿! 할멈이에요.”
동굴 입구를 주시하던 겨울 달이 들릴 듯 말듯 말했다.
호국영의 시선이 다시 동굴 쪽으로 향했다.
‘드디어 자릴 비우는 건가.’
잠복한 지 두 시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푸른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연녹색 옷자락을 늘어뜨린 검은 머리의 여자가 동굴을 나와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할멈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젊은데?’
호국영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부족 유일의 주술사라고 하니 존경의 염을 담은 존칭쯤 되겠지.
야만인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부르든 그따위 호칭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약초 채집을 하러 나온 걸 거예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얼른 구경하고 나와요.”
한 쌍의 남녀가 몸을 숨긴 고목에서 빠져나와 동굴로 접근했다.
‘가가가 그토록 강하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은 없었어. 선물한 광석이 그렇게나 마음에 든 건가? 벽화도 보고 싶다고 하고……. 같이 들어가도 괜찮은 거겠지? 뭐, 어때. 뼈밖에 없는 동굴인데.’
겨울 달은 영묘를 구경하고 싶다는 호국영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앞으로 미래를 함께할 사이다.
마을에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조그만 동굴을 보여주는 게 전부이지 않나.
그녀는 이 방문이 별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가가. 이쪽이에요.”
대낮임에도 동굴 안은 어두웠다.
미리 준비한 횃불에 화석을 부딪쳐 불을 붙인 후 안으로 진입했다.
사아아아―
‘왠지… 기분이 이상한데.’
추모를 위해 들렀을 때와 호국영의 선물을 준비하러 왔을 때.
부족의 영묘는 지난 두 번의 방문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서늘함과 축축함…….’
전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따스하고 영험한 기운이 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뱀의 비늘을 더듬듯 차갑고 불쾌한 감각만이 가득하다.
마치 누군가가 은밀히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가가.”
“응?”
벽화가 신기한 걸까?
호국영은 입구에서부터 횃불을 비추며 동굴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 나가요.”
“그게 무슨 말이야, 월 매?”
“뭔가 이상해요. 눅눅하고 끈적이듯 달라붙는 이 느낌……. 지난 두 번은 이렇지 않았어요. 설명하기 어렵지만 들어가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호국영은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수고스러움을 마다하고 이 먼 곳까지 달려왔는데, 동굴 초입에서 나가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동굴을 지킨다는 여자가 오기 전에 빨리 확인을 끝내야 하는데.
동굴은 원래 습하고 축축한 곳이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나가자고 하다니…….
호국영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애써 누르고 부드럽게 말했다.
“월 매. 동굴 안은 원래 그런 기분이 들기 마련이야. 거의 다 왔잖아. 마저 살펴보고 나가자. 이 벽화들은 운남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흔적이야. 언제 또 이런 걸 보겠어. 조금만 더 구경할 수 있게 해줘.”
지저분한 낙서와 다를 바 없는 벽화 나부랭이엔 관심 없다.
부족의 주술사로 선정되면 평생을 이곳에서 홀로 묘를 지키며 살아간다고 했던가.
이따위 걸 선조의 흔적이랍시고 애지중지 돌보고 가꾸겠지.
‘한심한 놈들! 이래서 야만인들이란.’
이 동굴의 진정한 가치는 벽화 따위가 아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중에 두었으면서도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오늘의 발견을 기점으로 점창은 비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이 있으리라.
빛나는 미래가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얼른 구경하고 나가요.”
겨울 달이 점점 짙어지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호국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동굴의 막다른 지점.
뼈가 담긴 항아리들이 벽면을 빼곡히 둘러친 그곳에.
호국영이 애타게 그리던 풍경이 있었다.
‘맙소사!’
횃불의 빛을 받은 광석들이 동굴 곳곳에서 찬란하게 번쩍였다.
본래는 백색 광석에 함유된 알갱이들이 누런빛을 슬쩍 내비치는 게 전부다.
그것으로 존재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굴에 있는 것들은 작은 암석이라고 해도 될 만한 크기로 표면에 환히 노출되어 있었다.
‘확실해! 금광이다!’
눈이 부실 정도의 영롱한 금광석(金鑛石)들이 동굴 여기저기에 알알이 박힌 채 빛을 뿜었다.
‘이렇게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니!’
매장량이 얼마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금광석의 상태로 보아 순도 또한 탁월할 게 분명했다.
어지러울 정도의 환희!
호국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큭큭, 큭큭큭큭!”
“…….”
겨울 달은 바보가 아니다.
벽화가 보고 싶다고 했지만 호국영이 이곳에 오고자 했던 진짜 이유가 자신이 건넨 선물 때문임을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저 광석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이유가 뭐든 상관없다.
그가 기뻐하기만 한다면 그까짓 게 대수일까.
하지만 동굴에 진입한 이후로 호국영은 조금씩 이상해지고 있었다.
“가가?”
불안함을 담은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응? 아아, 월 매! 월 매는 역시 나의 보물이야! 덕분에 구경 잘했어. 정말 고마워.”
꽉 끌어안는 포옹에 겨울 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아무렴 어때.’
이거면 충분하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자, 방문한 기념으로 나도 조금만 떼어갈게. 최고의 선물이야, 월 매. 우린 앞으로 영원히 함께할 거야.”
정제를 거치지 않은 자연 상태의 금이 이토록 뚜렷할 수 있다니!
찬란한 빛을 뿜는 광석 조각을 떼어낸 호국영이 동굴 입구 쪽으로 등을 돌렸다.
“뭐 하는 짓들이냐!”
분노를 머금은 음성이 동굴에 메아리쳤다.
노기 어린 표정의 여인이 동굴을 나가는 유일한 출구를 막아선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