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일렁이는 횃불이 그림자를 흔든다.
하지만 그림자의 주인은 흔들리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꼿꼿이 버티고 선 자세와 노기 어린 표정은 절대로 길을 비켜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자신을 납득시켜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여인과 젊은 남녀.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불안한 침묵이 이어졌다.
“하, 할멈. 그게…!”
자신밖에 없다.
상황을 설명하고 할멈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겨울 달이 무언가 얹힌 듯 뜻대로 나오지 않는 음성을 억지로 가다듬었다.
“이, 일단 이쪽은 호국영, 호 가가에요. 그… 창산에 있는… 저, 점창파의 이대 제자이고…… 저와는 미래를 약속한 사이에요.”
“…….”
싸늘한 눈동자.
잎의 노래의 입술은 여전히 열리지 않고 있었다.
영묘에 온 것이 불순한 목적의 침입이 아니라 단순히 구경을 위한 방문임을 알려야 한다.
한 번 입술을 떼고 나니 전보다는 수월하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반영하듯 겨울 달이 빠르게 말을 뱉었다.
“호 가가는 점창에 몸담고 있지만 뿌리는 우리와 같은 운남 출신이에요. 대리의 백족, 왕가를 모셨던 건국 가신 가문의 후손이고요. 오, 오늘 영묘에 온 건 운남의 역사가 담긴 벽화를 구경하려고…….”
겨울 달은 다른 사람 앞에서 주눅 든 기억이 없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다.
까마득한 어른이자 부족 유일의 주술사.
나이나 직책을 차치하더라도 잎의 노래는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여느 사람들과는 현격히 다르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며 말을 쏟아내던 겨울 달이 입을 다문 건, 잎의 노래의 입술이 달싹였을 때였다.
“네가…….”
드디어 입을 연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바짝 긴장한 겨울 달이 그녀의 입술을 주시했다.
“제대로 미쳤구나.”
‘제길!’
틀렸다.
저 꼬장꼬장한 노인네는 어떤 말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왜 모를까.
영묘에 외인을 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괜찮겠지, 안이하게 생각했고 절대 걸리지 않으리라 여겼다.
삭아 빠진 뼈 외엔 아무것도 없는 동굴이다.
솔직히 걸리더라도 큰 문제가 있을까 싶었다.
“할멈, 여기는 뼈와 벽화 외엔…!”
“꽤 영리한 편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었군. 주술사로 선정된 이들이 평생 이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 뼈와 벽화가 중요한 것이다.
“하, 하지만…!”
“점창의 제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게냐? 언제 충돌이 일어날지 모를 일촉즉발의 상황이거늘. 이 삼엄한 시기에 적이 될지도 모를 자를 영묘로 데려와? 그리고 뭐라고? 가가?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점창파 이대 제자 호국영입니다. 와족의 어르신을 뵙습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분위기가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떼어낸 금광석을 슬쩍 숨긴 호국영이 직접 대화의 물꼬를 틀기 위해 끼어들었다.
“개기름 번지르르한 백족 애송이가 어딜 감히 끼어드느냐! 네놈의 처분은 결정되어 있으니 그 입 닫고 기다려라.”
옷만 갈아입으면 대리의 귀부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상한 외모지만, 내뱉는 언사는 개차반이나 다름없다.
호국영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섰다.
‘야만 부족의 사이비 주술사 따위가!’
여긴 와족의 세력권이다.
게다가 문자 그대로 금쪽같은 정보를 손에 넣은 상황이기에 가급적 원만히 해결하고 빠져나가는 게 여러모로 좋다.
호국영이 울컥 치미는 성질을 내리눌렀다.
“하하. 일전의 일로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어르신. 저희와 와족 간에 충돌은 없을 겁니다. 만약 위험한 상황이라면 제가 어찌 여기까지 왔을까요. 그리고 저희는 미래를 약속한 사이가 맞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
“주둥이 닥치라고 했다.”
잎의 노래는 호국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와족의 영역만 아니라면 당장 저 입에 검을 꿰어주고 싶다.
아니, 어쩌면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호국영이 은밀히 백족천인공을 휘돌려 주변의 기를 탐지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몰래 들어왔던 이유가 고작 저런 놈을 위해서였더냐?”
‘알고 있었어?!’
자신이 광석을 캐기 위해 들어왔던 걸 알고 있다.
그냥 모른 척해 주었던 것인가.
완벽히 눈을 피해냈다고 자신했지만, 잎의 노래의 손바닥 안이었다.
“저놈이 너를 홀린 거겠지.”
“아니에요, 할멈! 우린 진심으로 서로를…!”
“확신하느냐?”
“?”
“확신하냐고 물었다.”
“당연하죠!”
겨울 달의 얼굴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불쌍한 것.’
자신이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잎의 노래는 겨울 달에 대한 안쓰러움이 금기를 어긴 분노를 앞지르는 걸 느꼈다.
영묘에 외인을 데려온 건 큰 잘못이지만, 처음 사랑에 빠지고 눈이 먼 아이다.
냉철하게 앞뒤를 살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악의는 없었을 터.’
문제가 있는 건 저놈이었다.
‘당장은 힘들어하더라도 여기서 확실히 끊어줘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잎의 노래가 호국영에게 눈을 돌렸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다, 충돌은 없다, 미래를 함께할 사이다……. 네 입으로 말했지. 그렇다면 증명해봐라.”
“무얼 말입니까?”
“무장을 해제하고 포박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마을로 간다. 그러면 네가 달이와의 관계를 중히 여긴다는 걸 믿어주마. 너는 우리의 중지(重地)를 침범했다. 그것 또한 불문에 부치겠다. 너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네 말대로 점창과 와족 사이에 불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바로 돌려보내 주마. 네가 말한 게 모두 사실이라면 그리해도 문제가 없겠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십중팔구 곧 전쟁이 터진다.
아니, 어쩌면 이미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전에 와족의 영토에서 벗어나 이 중요한 정보를 한시라도 빨리 장문인에게 가져가야만 한다.
한데 지금 와족 마을에 가자고?
무장 해제에 포박을 당한 상태로?
개소리!
들어가는 순간 절대 풀려나지 못하고 인질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려는 입을 가까스로 붙든 호국영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그건 과한 요구입니다. 저는 월 매의 안내로 이곳에 왔고, 들어와선 안 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벽화를 구경하고 안치된 분들에게 추모를 했을 뿐인데….”
“주머니.”
세 글자.
단 세 글자로 구성된 낱말이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는 호국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열어봐라.”
“……!”
“못 열겠지. 몰래 숨긴 것이 있으니까. 금광석. 내 말이 틀렸나?”
호국영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치떴다.
이곳에 온 목적.
금을 떼어내 숨긴 것.
그리고 품고 있는 생각까지.
아니, 그 이전에 문명 세계에서 금이 갖는 가치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전부 다 알고 있으면서 시험해본 거다.
호국영의 눈이 음험하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길은 하나뿐이군.’
“맞습니다, 금! 하하, 이것 참! 다 알고 있을 줄이야. 어쩔 수가 없네요.”
호국영이 차라리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 겨울 달뿐이었다.
‘금? 금이 뭐야? 그 반짝이는 광석?’
“이것 참. 좋게 지나가고 싶었는데……. 멍청한 야만인이 제 죽을 줄 모르고 나서서 피를 보게 만드네.”
스르릉-
검갑을 벗어난 검이 횃불의 빛을 반사하며 붉게 빛났다.
“가, 가가? 왜 그런 말을? 무기는 갑자기 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급변하는 상황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겨울 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직도 모르겠니, 달아? 넌 속은 거다. 저놈은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너에게 접근한 게야.”
명확해진 상황.
잎의 노래가 호국영을 노려봤다.
“기운에선 존재의 근원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알아봤지. 이 음습하고 기분 나쁜 끈적거림. 네놈은….”
“닥쳐. 인간이 되다만 야만 원숭이가 감히 누굴 평가해.”
암암리에 끌어올려 둔 백족천인공이 두 다리에 집중된다.
점창 비전 비천십이표가 호국영의 몸을 튕기듯 밀어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삽시간에 지워졌다.
호국영이 그의 기습에 반응조차 못 하고 있는 잎의 노래를 훑었다.
‘주술사라고 했지? 감히 뭘 믿고 무인에게!’
탐지 결과,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신속히 처리하고 빠진다.
그리고 그 처리대상엔 겨울 달도 포함된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살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호국영의 눈이 진득한 살심을 품었다.
“굽은 뿔.”
알아듣지 못할 와족어가 흘러나오고, 잎의 노래의 뒤편, 횃불이 걷어내지 못한 어둠 속에서 허연 물체가 튀어나왔다.
쾅!
“큭!”
엄청난 힘이다.
두 손으로 붙잡았는데도 검을 놓칠 뻔했다.
찢어진 손아귀에선 피가 배어났다.
“산양?”
잡티 하나 없는 흰 산양이다.
깊게 굽은 뿔은 일반적인 숫산양의 그것보다 두 배는 크고 두꺼웠다.
날렵한 몸의 곡선과 두툼한 네 다리.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짐승이었다.
“어디서 금수 따위가!”
호기롭게 외쳤지만 신중해야 함은 맞부딪힌 본인이 가장 잘 안다.
백족천인공이 검을 감싸고, 백족 대대로 전해 내려온 백운검(白雲劍) 초식이 산양의 머리를 노렸다.
차차창!
“이럴 수가…!”
적의 공격을 거뜬히 막아내는 숙련된 방패 병처럼.
까딱까딱 흔드는 고개를 따라 우람한 뿔이 날아드는 검을 모조리 막아냈다.
투벅!
‘온다!’
네 다리가 대지를 박차자 산양의 몸이 간격을 지웠다.
‘빌어먹을! 받히면 죽는다!’
백운보(白雲步).
흰 구름을 자처하는 백족 특유의 발놀림이 산양의 돌진 궤도에서 호국영의 몸을 가까스로 빼냈다.
‘비었어!’
야만족 주술사의 앞을 가로막았던 짐승이 치워졌다.
다시없을 기회.
호국영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죽엇!”
혼신을 다한 검격이 쭉쭉 뻗어 나간다.
놀라서 우왕좌왕하다 검에 꿰뚫릴 줄 알았건만.
할멈이라 불린 여인은 침착하게 죽장을 들어 올렸다.
유려하게 반원을 그린 대나무 지팡이가 날아드는 검을 스르륵 바깥으로 밀어냈다.
“아니?!”
주술사라고 하지 않았나!
척 봐도 고절한 조예가 담긴 손짓이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흐른 지팡이가 호국영의 몸을 좁은 공간에 가뒀다.
처척.
공간을 제압했던 지팡이가 호국영의 왼쪽 어깨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어머니 땅의 부름을 받기 전엔 나도 전사였느니라. 애송아.”
뻐억!
“크아악!”
기의 발출?
부드러운 타격?
모르겠다.
호국영의 수준으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경지였다.
털썩 주저앉은 그가 몸을 덜덜 떨었다.
“굽은 뿔. 이 녀석을 잠시 보고 있어.”
되돌아온 산양이 뿔을 세운 채 하나뿐인 출구를 막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초점을 잃은 겨울 달의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일련의 상황들이 가리키는 건 잔혹한 진실이었다.
‘날… 이용한 거라고? 모든 게 거짓이었어?’
첫사랑이다.
몸과 마음, 모든 걸 다 주었다.
날카로운 회상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자신은 와족에 대한 핵심 정보들을 죄다 넘겨준 거나 다름없다.
게다가 금기인 줄 알면서도 묘에 외인을 들였다.
금이라고 불린 반짝이는 광석.
그것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호국영은 금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조른 게 틀림없었다.
“정신 차려라. 달아.”
달이는 저 백족 놈을 진심으로 대한 것 같다.
헝클어진 정신을 반영하듯 눈동자가 생기를 잃고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이면에 감춰진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겨울 달의 정신은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이성과 감정의 괴리가 끔찍한 파열음을 울린다.
미성숙한 정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택한 건 현실 부정이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목소리가 발해졌다.
“아, 아냐. 그럴 리 없어······.”
손녀뻘의 아이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짐작한 잎의 노래가 겨울 달을 다독이기 위해 다가갔다.
“달아, 괜찮다. 다 해결됐….”
“메에에에!”
굽은 뿔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틈을 놓치지 않은 호국영이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고, 잎의 노래의 날카로운 외침이 동굴에 메아리쳤다.
“굽은 뿔! 안 돼애애!”
겨울 달의 텅 빈 동공이 굽은 뿔을 향해 있었다.
거꾸러진 산양의 품에서, 동굴의 어둠보다도 새카만 광택을 흘리는 독사가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기어 나왔다.
영묘에서 굽은 뿔이 쓰러진 그 시각.
와족 마을은 또 다른 일로 긴장감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