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할아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매서운 눈이 초조한 얼굴로 외쳤다.
사방팔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검은 수리와 흰 수리들이 급보를 들고 운남 전역에서 밀어닥쳤다.
탈진 상태의 태족 장로를 쉬게 하고, 수리의 눈 전사들을 밖에 대기시킨 그믐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회의실 중앙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정신이 없군. 정리해보자구나. 점창파 놈들이 돈이 될 만한 소수부족들의 땅을 빼앗은 건 확실해. 이토록 광범위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벌어졌다는 건 오랜 기간 미리 준비해 왔다는 뜻이다. 예전에 하니족의 보이차 밭만 따로 빼앗은 건…… 아마도 우리의 반응을 살핀 게 아닌가 싶다.”
“우리 반응을 살폈다고?”
“그래.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가늠해본 거지. 그 말인즉슨 놈들은 애초부터 우리와의 충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니족이 돈을 받고 문서에 신물을 찍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속았다고 항변하며 우리에게 중재를 요청했다면?”
“나섰겠지. 부당한 게 맞으니까.”
“그래. 하니족은 온순한 부족이다. 아마도 하니족 족장은 본인들로 인해 충돌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았던 게 아닐까? 우리와 점창이 과거에 전쟁을 벌였던 사이란 걸 알고 있고 말이야.”
“일리 있군. 그분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그믐이 장죽을 들어 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 결정 덕분에 당장은 부딪히지 않게 되었지만, 만약 하니족 족장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점창파가 그걸 몰랐을까? 당연히 예상하고 미리 준비했을 거다. 우리를 잡을 준비 말이야.”
“맞습니다. 전례가 있는데도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전쟁까지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겠죠.”
너른 하늘의 생각도 같았다.
“사절로 온 꼬맹이들. 마을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리 힘을 탐색하라고 일렀겠지. 분쟁이 생겼을 때 본인들은 사절까지 보내며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명분도 만들고 말이야.”
“뭐가 그리 복잡하오? 싸우면 싸우고 아님 마는 거지. 그전에 그냥 만족하며 살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 왜…! 창산은 대리석의 산지 아니오? 그놈들 몇십 년 전부터 한족이니 몽골족이니 하는 북쪽 놈들에게 대리석을 비싼 값에 팔아넘기던데. 그것만으로도 풍족하게 지내기 충분한데 왜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지 당최 이해가 안 되오!”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게지. 운남 땅을 다 먹어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다.”
그믐이 피워 올린 연기가 만족을 모르는 인간들을 한탄하며 대기에 스며들었다.
“이미 넉넉한 삶을 누리는 자들이 가뜩이나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것까지 모조리 빼앗으려 하는군요. 할아범 말씀이 맞습니다. 그들은 운남 전체를 손에 쥐어도 만족하지 못할 거예요. 그들은 선을 한참이나 넘었습니다.”
차갑게 뜬 눈동자가 북쪽 저 멀리 위치한 창산을 그린다.
너른 하늘의 예감이 맞았다.
슬프게도 운남은 또다시 인간의 피로 물들 운명이었다.
“특수한 상황이니 불러들여도 되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아이들이 마을로 돌아오는 게 더 위험해. 언제 마을이 습격을 받을지 모를 일이다. 성년식 중인 아이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깊은 곳에 숨어 있으라고 전하마.”
“네. 그게 좋겠습니다. 매서운 눈, 전사들에게 일러서 언제든 싸울 태세를 갖추라고 전해라. 반려수들도 풀어놓지 말고 항상 옆에 데리고 있으라고 해.”
“창산으로 갑니까, 족장님?”
“아니. 인간을 습격하는 맹수들에게 간다.”
“맹수요? 족장님, 점창파부터 확실히 정리하는 것이…… 아!”
“그래. 아창족을 제외하면 영토를 빼앗긴 부족들은 전투에 휘말리진 않았다. 땅에서 쫓겨나 힘들겠지만, 점창이 그들까지 공격하진 않을 거야. 아창족 쪽도 소규모 분쟁이라 이미 파견한 전사들로 충분하다. 가장 급한 건 마을을 습격하는 맹수들 쪽이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놈들은 가는 곳마다 인간을 몰살시키고 있어. 어떤 상황이건 사람의 목숨이 최우선이다. 맹수들부터 빠르게 정리한다.”
너른 하늘의 판단은 옳다.
하지만 그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뭐요, 할아범? 뭔가 문제가 있는 거요?”
“이상해.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맹수의 대규모 습격이 일어난 적은 없지 않느냐. 어쩌면 이거… 점창파 놈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럴 겁니다. 분명히.”
분노가 치밀지만, 지금은 차가운 판단이 필요한 때다.
괴후와 싸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너른 하늘은 터질 듯 차오르는 격정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성은 맹수들의 습격 역시 점창의 짓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 방법까진 아직 모르겠지만.
“의심 가는 부분이 있더라도 일단은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늦을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겠지요. 맹수들을 토벌하는 내내 냉정하게 행동해야 할 겁니다. 가시죠.”
운남의 수호자, 와족.
그들의 정예 전사단이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청죽림을 빠져나왔다.
영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인연
보산 일대에 펼쳐진 이름 모를 산맥.
어머니 대지가 빚은 대자연의 장벽은 웅장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마른 비는 감탄을 연발하며 산을 누비고 있었다.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깊은 산중에는 처음 보는 동식물들이 푸른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와~ 너 참 희한하게 생겼구나?”
손바닥만 한 도롱뇽이 갈기를 곧추세웠다.
사자의 그것처럼 털이 아니라 피부의 일부일 뿐이지만, 그래서 더 신기했다.
“묘한 녀석들이 많네.”
마른 비는 생소한 동물들을 발견하는 재미에 점점 깊은 곳으로 발을 들였다.
“어?”
시간을 잊고 헤매던 마른 비가 평소와는 다른 감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운이 짙어지네?”
대자연의 숨결을 느끼고, 받아들이며, 활용한다.
운용법을 터득한 이래로 숨 쉬듯 휘돌린 자연기가 색다른 감각을 전해왔다.
“자연기가…… 고이고 있어?”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느껴진다.
도도하게 흐르던 물줄기가 특정 지형에 갇혀 맴도는 것처럼.
켜켜이 덧쌓인 대자연의 기운이 점점 농밀해지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는 거지?”
처음엔 옅게 시작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농도가 짙어지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풍성해지는 자연기에 반응하여 온몸의 감각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와…! 힘이 넘쳐!”
깊은 산속에 들어가면 청정한 공기가 폐부를 채우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대기에 함유된 자연의 기운을 다룰 줄 아는 마른 비에게 자연기가 짙어진다는 건 힘의 원천이 증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밌는 게 있을 것 같은데?”
소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후아! 어디까지 가는 거야?”
일주일.
흐르는 기운을 뒤쫓은 시간이다.
잎을 늘어뜨린 활엽수림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금세 찾을 줄 알았던 목적지는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마른 비를 애태웠다.
“오기 생기게 하네?”
목적지라고 착각할 만한 지점들은 여럿 존재했다.
지난 일주일간 자연기가 짙게 가라앉은 곳을 서너 군데나 지나쳤기 때문이다.
세심하게 살펴본 끝에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흐름의 종착지.
일대의 자연기를 빨아들이듯 간직하고 있을 지형은 따로 있는 게 분명했다.
“찾고야 만다!”
소년의 발이 한층 더 빠르게 움직였다.
* * *
사아아아―
시원하다.
신선한 공기가 뺨을 적신다.
오랜 시간 산속을 헤매며 지쳐 있던 육신에 충일한 기력이 용솟음쳤다.
‘다 왔어!’
확실하다.
이번엔 틀림없다.
뻑뻑할 정도로 농밀한 대자연의 기운!
자연기가 고인 지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악! 피핏!
‘응?’
소음.
날카로운 물체가 부드러운 무언가를 스치는 소리.
아니, 할퀴는 소리?
‘맹수인가?’
몸을 숨길 방법이나 찾던 시절의 꼬마가 아니다.
소리를 듣는 순간 마른 비는 멈춰 섰고, 곧바로 수풀에 녹아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천천히.’
본능적인 행동이다.
이 깊은 산중에서 무엇이 이런 소릴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평범한 일일 리 없다.
마른 비는 조용히 땅을 기며 소리의 진원지에 접근했다.
쒜엑― 스각!
“큭!”
‘사람?!’
난데없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자연기가 이끄는 곳을 찾아 몇 날 며칠을 헤맨 끝에 어딘지도 모를 산속까지 들어왔는데 사람을 만날 줄이야!
더군다나 이 상황은…….
‘싸우고 있어!’
“이 빌어 처먹을 새끼들이!”
쐐액- 쾌애액―! 퍼퍽!
세월이 묻어나는 음성에 거친 욕설이 실려 왔다.
흰옷을 입은 한 명과 검은 옷을 걸친 다수가 뒤엉키며 혼돈의 장을 그려내고 있었다.
‘노인?’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욕설을 내뱉은 노인의 옷이다.
난생처음 보는 재질의 하얗고 단정한 옷.
말끔하게 재단된 옷은 식물을 가공하여 만든 듯 촘촘했다.
동물의 가죽을 무두질하여 대충 걸치는 와족의 그것과는 상이한 형태였다.
원래는 깨끗했을 옷이 군데군데 찢어지고 피에 절어 있었다.
“웬 놈들이냐! 어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잡놈이 보낸 게야?!”
노인의 입은 걸었다.
그리고 얼굴은 마른 비가 아는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아니, 사람의 생김새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부족의 사람들과는 이목구비의 형태가 미묘하게 달랐다.
“염라대왕의 똥구녕이나 핥을 개 망종 새끼들이!”
‘무슨 말이야, 저게?’
몇몇 단어는 알아듣지도 못하겠다.
척 보기에도 노인은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고, 충분히 그럴 만했다.
건장한 사내 여럿이서 노인을 둘러싸고 공격 중이었으니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고 있는 저거…… 검인가?’
검.
저게 말로만 듣던 검인 것 같다.
한족들이 싸울 때 쓴다는 무기.
짐승의 가죽을 벗길 때 쓰는 조악한 단도와는 비교가 안 된다.
맹수의 이빨보다도 날카롭게 갈아낸 칼날이 햇살을 머금고 눈부신 반사광을 울렸다.
‘대련이 아니야. 저 사람들, 할아버지를 죽이려 하고 있어!’
살을 에는 섬뜩함이 여기까지 전해져 온다.
살기.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해치려 할 때 뿜어내는 기운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은 잘 알고 있다
동굴에서 괴후가 자신을 속박했던 무형의 기운.
괴후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남자들은 무척이나 흉흉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저 할아버지한테 원한이라도 있나?’
답은 맨 앞에 선 검은 옷의 사내에게서 나왔다.
“흐흐흐. 어차피 죽을 텐데 뭘 그리 발악을 하는 거요. 선배를 쫓아서 이 오지까지 들어오느라 후배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오. 그냥 곱게 목을 내놓는 게 어떻소이까?”
옷 색깔만큼이나 칙칙한 음성이다.
사내의 조롱이 노인의 화를 돋웠다.
“염병하고 자빠졌네! 누가 네 선배냐! 더러운 살수 새끼들을 후배로 둔 적 없다! 어떤 시러베 잡놈이 보냈는지 당장 불지 못할까!”
후아악!
노인이 양손을 가슴 앞에서 빠르게 휘돌렸다.
작은 원을 그리는 손길을 따라 막강한 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백원약수공(白原藥手功)! 급해지면 쓸 줄 알았지. 일단 발동되면 우리로선 막을 수 없지만…….”
딱!
사내가 중지와 엄지를 튕기자,
쾌애애액―!
노인의 후방, 겹겹이 드리운 나무 위에서 그림자 두 개가 떨어져 내렸다.
촤차아악!
“컥…!”
검에 등을 베인 노인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
“후후. 무공이 강하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건 아니지.”
“쿨럭…! 돈만 쥐어주면 뭐든지 하는 개잡놈이 기고만장하기는……. 내가 기습을 받지만 않았다면…….”
“우린 선배를 치기 위해 2년을 인내했지. 그게 살수의 방식이라오. 선배.”
“카악, 퉤…! 살수는 얼어 죽을……. 일류 암살자들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지도 않아. 네놈들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삼류 찌끄레기라는 걸 네 주둥이가 증명하고 있지 않나. 큭…! 네깟 놈들에게 당한 게 원통할 따름이다.”
“……곱게 뒈지기 싫은가 보군.”
노인의 앞으로 걸어온 사내가 검을 휘둘렀다.
스각!
“컥!”
어깨를 베인 노인이 상처를 감싸 쥐며 넘어졌다.
“짐승들밖에 없는 산속이니 구원의 손길 따윈 기대하지도 마라. 노인네, 저승 가는 길에 선물로 알려주지. 당신이 왜 죽는지 알아?”
노인이 의문 어린 눈으로 사내를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