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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2화 (32/463)

32화

“환자라면 출신 성분과 소속도 묻지 않고 치료해준다지? 그것 때문에 죽는 거야.”

“그게 무슨 개소리…….”

의원으로서 한평생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

민초들은 물론이거니와 강호의 싸움판과 북방의 전장을 종횡하며 손에 닿는 모든 이들을 돌봤다.

제 욕심을 위해 칼 들고 설치는 인간들은 꼴 보기 싫지만, 의원인 이상 환자를 가려선 안 되는 법.

다친 자가 있다면 사연 따윈 미뤄두고 성심성의껏 치료한다.

그게 의원의 본분인 것이다.

한데 그것 때문에 죽는다?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높으신 분께서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났지. 당신의 뛰어난 의술 덕에 말이야. 처음엔 무척이나 고마웠다더군.”

“…….”

“하지만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신이 적들을 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대. 자신을 살린 것처럼 말이야. 그렇다고 당신이 누군가의 휘하에 들어갈 인간은 아니지 않나. 그거야. 당신이 죽는 이유.”

“뭐…… 이런 미친! 목숨을 붙여준 놈이 날 죽이라고 청부했단 말이냐?!”

“그러게 적당히 뻗대고 얌전히 어딘가에 소속되지 그랬어. 말이 좋아 정사지간이지, 정파도 사파도 아닌 회색분자일 뿐이잖아. 당신 정도의 능력이면 어딜 가든 맨발로 뛰쳐나와 환영했을 텐데 말이야.”

구명지은을 살인 청부로 갚는다.

하나의 생명이라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지난날이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허…! 무림인, 무림인……. 상종 못 할 인간들이 많은 건 알았지만, 별의별 씨부럴 놈이 다 있구먼…….”

이 시대 최고의 명의.

괴의 화통달의 눈에 허망함이 깃들었다.

“흐흐. 좋아. 아주 좋은 반응이야.”

바로 이 모습이다.

좌절과 회의, 배신감에 휩싸인 화통달의 얼굴을 보기 위해 청부 사연을 알려준 것이다.

검은 옷의 사내는 자신을 비하했던 노인이 낙담하는 순간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불쌍한 인생이군. 가만 놔둬도 죽겠지만 확실히 하도록 하지. 잘 가라구, 노인네.”

사내의 손이 하늘로 들렸다.

‘목숨을 구해줬는데 죽이려 한다고?’

마른 비의 맑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더불어 살고, 지켜야 하는 존재라고 배웠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더욱 납득할 수 없었다.

‘구해야 해!’

자연기가 전해주는 존재의 본질.

저들이 입은 옷의 색상 그대로다.

노인에게서는 밝고 하얀 선의가, 검은 옷의 남자들에게선 칙칙한 악의가 느껴졌다.

노인이 살해당하는 걸 막아야 한다!

마른 비가 적들을 가늠했다.

‘둘은 쓰러졌고, 남은 건 여덟.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

사내들은 검은 수리 전사들처럼 은신과 암습에 특화된 자들이 분명했다.

그러나 노인과 싸웠을 때의 움직임을 돌이켜보면, 백병전에도 능숙한 검은 수리와 달리 이들은 정면 대결이 취약한 것 같았다.

그래도 너무 많다.

마른 비는 실전 경험이 없는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았다.

‘잠깐만. 여기라면…!’

그믐 할아범은 말했다.

신령목 주변에서 와족의 전사들은 강해진다고.

대자연의 기운이 모여든 장소.

힘의 근원인 자연기가 충만하다면, 그 기운을 끌어 쓸 수 있는 사람의 신체 능력 또한 향상될 것이다.

‘해볼 수밖에 없어!’

마른 비가 주변 지형을 빠르게 훑었다.

‘뇌력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작은 녀석들 위주로!’

『이쪽이야! 어서 나와!』

자연기를 등에 업은 언령이 소년의 입술을 비집고 뛰쳐나왔다.

찌르륵, 찌륵! 짹짹! 사사사삭―!

그건 말 그대로 기현상이었다.

수풀. 덤불. 나무 위. 땅 밑으로 이어진 구멍에서.

손톱만 한 벌레부터 손바닥만 한 짐승들까지.

다종다양한 생명체들이 소년의 부름에 쏟아져 나왔다.

“뭐, 뭐냐 이게?!”

검은 옷의 사내들이 갑작스레 튀어나온 동물들에 놀랐을 때.

‘고요하게. 흔들림 없이.’

마른 비는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

편히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지만, 그믐이 펼쳐놓은 감각의 그물망을 피해냈던 마른 비다.

검은 옷의 사내들은 성년식을 떠나기 전보다 일취월장한 소년의 은신을 잡아낼 수 없었다.

쐐애애액!

“컥!”

슈아악! 쾌액!

“크헉!

“아아악!”

지척에 무언가가 있는데 잡아낼 수 없다.

시야를 가로막고 감각을 교란시키는 벌레와 짐승들이 문제였다.

화통달을 핍박했던 사내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하찮은 미물 따위가!”

푸화학!

응축시킨 내공을 터뜨리자 정신 사납게 날뛰던 동물들이 쓸려나갔다.

‘어디냐!’

시야가 트였다.

짐승? 사람?

뭐가 이 난리를 피운 건지는 몰라도 일검에 모가지를…!

‘없어?!’

눈에 잡히는 게 없다.

그러나 수많은 살행을 반복하며 갈고 닦은 감각은 경종을 울렸다.

“조장! 뒤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검을 움켜쥔 사내가 쾌속하게 반전했다.

슈아악―!

묵직한 돌풍이 엄습한다.

야생의 맹수들을 일격에 격침시킨 와족 강권 바위 부수기가 사내를 덮쳤다.

“까불지 마랏!”

뒤를 잡혔다 한들 쉬이 당할쏘냐.

누가 뭐래도 중원 삼대 살수 집단의 조장을 맡고 있는 몸이다.

암살자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격필살의 검이 공기를 갈랐다.

‘뭐야, 이놈은?’

‘꼬마?’

‘야만인?’

‘왜 이런 오지에?’

‘괴의를 돕는 이유가 뭐지?’

그제야 상대를 확인한 사내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연달아 스쳤다.

‘뭐든 상관없겠지.’

죽이면 그만이다.

생각지도 못한 목격자지만, 무슨 상관인가.

살인멸구.

가장 간편하고 깔끔한 일 처리 방식이다.

사내는 곧 의외의 변수가 정리될 거라고 믿었다.

평생을 함께했던 애검이 부러지기 전까지는.

챙강!

‘뭐…?!’

퍼어억!

“커허어…!”

검에 담긴 내력을 상쇄하고, 검을 부러뜨리는 걸로도 모자라 복부에까지 깊숙이 박혀 든 주먹이다.

앳된 얼굴의 야만인 소년.

흔들림 없는 눈빛이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 조장!”

의외의 결과에 눈이 커진 것도 잠시.

살수들은 금세 정신을 수습했고, 멀쩡한 네 명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자세를 잡은 그들이 마른 비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허리 숙여라. 꼬맹이.”

우우우웅-

어느새 가슴 앞에 새하얀 광구를 완성한 괴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싹 다 뒈져라. 삼류 나부랭이들아.”

자신을 죽이려는 자에게 손속이 너그러울 리 없다.

남은 내력을 모조리 때려 부은 백원약수공이 화통달의 손을 떠났다.

바우웅―

“엇?!”

황급히 엎드린 소년의 머리 위로 부채꼴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크아아악!”

적중했다면 그걸로 끝이다.

백색 돌풍에 휩쓸린 사내들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저 멀리에 털퍼덕 떨어져 내렸다.

“우, 우와아아~! 방금 그거 뭐야, 할아버지?”

싸움이 끝났다는 안도보다 난생처음 본 기예에 대한 감탄이 더 크다.

입을 떡 벌린 마른 비가 화통달을 돌아봤다.

“화가(華家) 비전의 기공이다. 덕분에 살았군. 고맙다, 꼬맹이.”

중원 7대 기인의 일좌.

화타의 재림이라 칭송받는 괴의 화통달이 하얗게 웃었다.

“누가 보낸 거냐?”

화통달이 조장이라 불린 사내를 내려다봤다.

마른 비에게 일권을 얻어맞은 그는 복부를 움켜쥔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커… 커허…!”

어지간한 고통에는 이골이 난 사내지만, 오장육부가 뭉개진 충격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충만한 자연기를 등에 업은 마른 비의 주먹은 상식적인 열다섯 살 소년의 힘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의술이 뛰어나다는 건 곧 인체에 해박하다는 뜻이다. 꼴에 살수라니 고문을 견디는 수련도 받았겠지. 그따위 것, 내 앞에선 무용지물이란 걸 미리 말해두지. 마음만 먹으면 일각 안에 네놈 입을 열 수 있어.”

더 큰 고통에 몸부림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불어라.

사람을 살리는 손으로 고문을 하고 싶진 않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생략된 말이었다.

“큭큭큭. 개소리. 당신이나 나나 결말쯤은 알고 있잖나. 내가 실패했다는 걸 알면 본문에서 더 강한 자들이 찾아올 거다. 당신은 결국 죽게 돼 있어. 먼저 가서 기다리지.”

와드득!

무언가를 깨무는 소리가 나고, 살수 조장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와드득, 까득!

마른 비의 기습을 받고 쓰러져 있던 나머지 세 명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

비정상적인 저 낯빛.

맹독에 의한 중독 증상이 분명하다.

마른 비는 깜짝 놀랐지만, 괴의는 차분했다.

“독환(毒丸)이군. 살수란 놈들은 왜 하나같이…….”

화통달이 눈살을 찌푸렸다.

목숨을 노린 이상 살려 보낼 수는 없다.

사람을 살리는 의원이라지만 그 역시 강호에 몸담은 무림인.

수십 년을 강호에서 구르며 어설픈 자비가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쯤은 체득했다.

서로가 알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목숨을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결하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심정이 좋을 리 없었다.

“살수라는 놈들은 항상 이렇지. 이놈들의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다. 죽거나, 죽이거나. 놈들에게 있어 청부 실패는 곧 죽음이다.”

운남의 토착부족으로 보이는 꼬맹이는 실전이 처음인 게 분명했다.

자신이 무력화시킨 상대의 죽음을 보며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이해가 안 돼. 왜…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거야?”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건 꼬맹이지만, 죽음을 택한 건 본인의 의지다.

꼬맹이가 직접 목숨을 거둔 건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소년은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는 게 힘든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냥 그런 놈들인 거다.”

마른 비가 죽은 사내에게 비척비척 다가갔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죽은 사내의 눈꺼풀을 쓸어내렸다.

화통달의 눈길은 소년의 떨리는 손끝에 닿아 있었다.

“그냥 그렇다니……. 죽이거나 죽는 거 외에는 길이 없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순간적인 판단으로 노인을 지키기 위해 끼어들었지만, 이렇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다수의 사람은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는 자들이라 욕하겠지만, 마른 비는 덧없이 스러진 목숨들이 아팠다.

“……할아버지를 죽이라고 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는 거지? 그 사람이 가장 나빠.”

“모른다. 명줄을 붙여놓은 게 어디 한둘이어야지.”

화통달이 그제야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소년을 살폈다.

“꼬맹아. 상처는 없는 거냐?”

“상처? 아까 검과 부딪히면서 주먹이 조금 긁힌 것 말고는…….”

“뭬야?!”

눈썹을 추켜 올린 화통달이 마른 비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놈들 검에는 독이 묻어 있단 말이다! 당장 손 이리 내!”

“독? 아……. 그래서 주먹이 간질간질했구나.”

“가, 간질…! 이놈아! 이건 뱀독과 전갈독을 혼합한 극독이란 말이다! 심장에 이르는 순간 즉사하는…!”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중독되었다면 벌써 거꾸러지고도 남을 시간인데…….

소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왜 호들갑이냐는 듯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독이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청죽사를 통째로 먹어도 멀쩡한걸. 그보다 할아버지도 베였잖아. 할아버진 괜찮은 거야?”

‘청죽사가 뭐야?’

이름으로 봐선 뱀의 한 종류인 것 같다.

화통달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마른 비를 쳐다봤다.

“나는 네가 아까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약초를 배합해서 삼켰다. 저 짝에 떨어져 있는 망태기에 그간 채집한 약초가 들어 있거든. 그보다 너, 정체가 뭐냐? 너 같은 핏덩이가 혼합 독을 억누를 내력이 있을 리는 없고……. 행여나 내 앞에서 만독불침(萬毒不侵)이니 하는 헛소리는 하지도 마라. 그리고… 아까 벌레와 짐승들이 날뛴 것. 네가 한 거냐?”

여유가 생기니 소년에 대한 궁금증이 치민다.

이런 깊은 산속에 혼자 있는 게 이상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을 구해준 것도 그렇다.

극독이 침투했음에도 멀쩡한 게 어처구니없고, 정황상 벌레와 짐승들을 움직인 것 같은데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소년이었다.

“나? 마른 비.”

“…….”

화통달은 뒷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소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전부냐? 마, 뭐라고? 그게 이름인 게야? 한어를 쓰는데 왜 이름은……. 아, 그렇지! 운남의 소수부족들이 고유의 언어와 한어를 섞어 쓴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아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뭐 하는 놈이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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