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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3화 (33/463)

33화

화통달은 마른 비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넌 와족이란 토착부족 출신인 거고, 이름은 마른 비. 독에 강한 건 원래 체질이 그렇다?”

“응.”

“허…! 독문 잡것들이 들으면 도전 의지를 불태우겠구만.”

마른 비는 토끼를 잡아서 구운 후 우물거리며 가끔씩 짧게 대답만 했다.

“강한 건 단련을 해서 그런 거다?”

“그렇다니까.”

“옘병할, 단련만으로 그 나이에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천지에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겠네.”

“내가 강하다고? 할아버지가 훨씬 세던데?”

강하다는 말에 마른 비가 귀를 쫑긋 세웠다.

“당연히 세야지! 너랑 나랑 나이 차가 몇 살인 줄은 아냐? 본분이 의원이라 죽을 둥 살 둥 수련하지는 않았다만, 강호에서 굴러먹은 세월이 몇 년인데! 이래 봬도 노부가 중원 7대 기인 중 하나인 괴의란 말이다!”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는 말을 너무 어렵게 해. 의원은 뭐고, 노부랑 기인은 또 뭐야? 괴의? 괴……. 할아버지도 수식어가 붙은 거야? 그럼 진짜 강하겠네? 근데 혹시 괴후랑 친구는 아니지?”

뭐라고 떠드는 거냐.

수식어가 붙었다는 말은 뭐고, 괴후는 또 뭔가.

도무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다.

마른 비와 말을 섞을수록 화통달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됐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 성년식인지 뭔지 하는 의식 중이라고 했지?

“어.”

“약초를 캐기 위해 별의별 곳을 다 가봤지만, 이런 살벌한 동네는 본 적이 없어. 식생은 물론이고 벌레와 짐승까지, 모든 게 규격 외다. 지금도 믿기 힘들지만, 석 달 전에는 기를 다루는 짐승도 마주쳤지. 바로 몸을 빼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이런 험난한 야생에 아이를 덜렁 던져놓고 살아남으라니…….”

“기? 자연기를 말하는 거지? 와~ 할아버지, 수식어가 붙은 놈을 만났구나! 어떤 놈이었어?”

“어떤 놈이냐니……?”

믿는 눈치다.

기를 다루는 짐승이 있다는 걸.

직접 마주친 자신도 믿기가 힘든데.

괴의가 혼란스런 얼굴로 답했다.

“뱀이었다. 어지간한 거목보다도 크고 두꺼운 대왕 뱀. 저 아래 남방 밀림에서 마주쳤지. 몸 전체에 시퍼런 기운이 맺혀 있는데, 커다란 바위를 휘어 감자마자 가루로 만들어버리더군. 내 눈을 의심….”

“대망이구나! 할아버지가 만난 건 대망이란 녀석이야! 와아~ 부럽다. 나도 만나보고 싶은데!”

“…….”

유명한 짐승인가 보다.

듣자마자 알아채고, 나름의 호칭까지 있는 걸 보니.

어쩌면 기를 다루는 야수라는 게 이 운남에선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족에서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성년식을 치르고 반려수를 길들여야만 해. 아까 벌레와 짐승을 움직인 건 그걸 위한 기술이야. 야수 제어라고 해.”

마른 비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천지군. 야수를 길들여서 데리고 다닌다? 허어, 참……. 수천(狩天) 사냥꾼 놈들이 알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구먼. 그럼 너희 부족은 모두가 너처럼 주변의 동물을 부릴 수 있는 거냐?”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막강한 무력과 마음먹은 대로 짐승들을 조종하는 능력.

상식을 깨뜨리는 건 둘째 치고, 전투의 판도를 뒤엎을 만한 힘이 아닌가.

“음…··. 잘은 모르겠지만 그건 아닐 거야. 원래 야수 제어는 위압과 제압이 기본이라고 했는데, 나는 좀 다른 거 같거든. 동물들이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진 달까? 다른 부족원들은 자신의 반려수만 부릴 수 있을 거야. 나도 아무 동물이나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고.”

어려운 이야기다.

제아무리 폭넓은 지식을 지닌 화통달이라지만, 그에게는 미지나 다름없는 야수 제어의 원리를 간단히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화통달은 골 아픈 내용은 제쳐 두고,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냐? 이곳을 처음 발견했을 때,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최소 10년 이상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어.”

“알고 찾아온 거 아냐. 자연기가 고이는 지점을 찾아왔어. 재밌는 게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연기가 풍부해서 힘이 넘치는 것 말고는 별게 없네.”

‘자연기는 또 뭐야?’

화통달은 난생처음 자신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맹아. 아까 의원이 뭐냐고 물었지. 의원은 다치고 상처 입은 이들, 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는 사람이다. 노부는… 아니, 이 할아버지는 중원 최고의 의술을 지니고 있지. 허흠! 엄청 대단한 사람이다, 이 말이야. 더군다나 더 좋은 약을 제조하기 위해 천하 구석구석을 다니며 직접 약초를 채집한다. 엄청 대단한 데 무지하게 부지런하기까지 하다, 이 말이지.”

“그렇구나! 할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구나!”

낯짝 두꺼운 소릴 태연히 내뱉는 화통달이나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마른 비나 평범하진 않다.

어쩌면 죽이 척척 맞는 대화 상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좋은 약초는 하늘이 베푼 기후와 땅이 선택한 지형, 대자연의 보살핌이 어우러져야 탄생한다. 소위 영약(靈藥)이라 불리는 것들은 훨씬 까다롭지. 오랜 세월이 흘러 그 효능이 발현될 때까지 사람이나 짐승에게 훼손당하지 않아야 하니까.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 여기서…….”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던 화통달의 얼굴이 굳었다.

“이런! 깜빡했다! 뿌리를 캐던 중이었는데…!”

“왜? 무슨 일이야?”

전속력으로 내달린 화통달이 바위를 뚫고 솟은 고목 아래에 쭈그려 앉았다.

“날 방해하지 마라, 꼬맹이! 뿌리 하나라도 잘못 건드리면 약효가 반감된다! 다 캐낼 때까지 주변을 좀 봐다오!”

살수들에게 기습을 허용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오매불망 찾아 헤맨 놈을 온전히 캐내기 위해 주변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마른 비는 어찌나 집중을 하는지 구슬땀까지 뻘뻘 흘리는 화통달의 곁을 지켰다.

찌르륵, 찌륵- 짹짹―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밤새 우는 소리가 들릴 때쯤.

“후우우……!”

꼼짝 않고 약초를 캐던 화통달이 허리를 폈다.

“봐라, 꼬맹아. 이 녀석이다.”

어둑어둑한 산중의 초저녁.

어둠이 깔린 대지 위로, 세수를 하고 나온 달과 별이 빛을 띄우기 시작한 시점이다.

하늘 말고는 한 줌의 빛도 찾아보기 힘든 그곳에서 초록빛 광원이 서서히 떠올랐다.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레 받쳐 든 손바닥에는 은은한 빛을 띠는 풀이 얹혀 있었다.

“와아아~!”

마치 꿈의 한 자락을 떼어온 듯한 광경이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야초의 모습에 마른 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야광초(夜光草)다. 지극히 맑은 자연의 품에서만 자라는 녀석이지. 중원에서는 이제 찾아보기가 힘들어. 30년이 되기 전까진 흔한 들풀과 다를 바 없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이 녀석들은 비로소 빛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자연의 기운을 듬뿍 머금었단 증거지. 빛의 세기로 보아 50년은 된 놈 같구나.”

“와……. 정말 예쁘다아! 이런 건 처음 봐, 할아버지!”

‘클클. 중원인이라면 탐욕에 눈이 번들거렸겠지.’

50년 된 야광초.

공청석유니 천년하수오니 하는 전설상의 영약들에 비할 순 없다.

아니, 그런 것들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다.

평생을 찾아 헤맸지만,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서책대로라면 대략 5년 치의 내공이 담겨 있을 터.’

하지만 이건 실존하는 영약이다.

상승의 내공 심법으로 약효를 제대로 흡수할 수만 있다면, 약초가 지닌 기운의 절반을 얻는 게 가능하다.

‘그리고…… 감각의 확장과 잠력의 개화!’

2, 3년간 심법 수련에만 죽어라 매진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내공도 군침을 흘릴 만하지만, 야광초의 진정한 효능은 그런 데 있지 않다.

육신의 감각이 야생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로워지고, 감지 가능한 범위가 극적으로 확장된다.

잠들어 있는 능력을 깨워 육체를 활성화시키고, 무공 습득 속도를 배가시킨다.

인간의 몸에 정통한 괴의가 보기에 현실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영약들 중 무인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데는 야광초만 한 게 드물었다.

특히나 이제 막 힘을 쌓아가는 젊은 재능에게는 더더욱.

“네 것이다.”

화통달이 신기해하는 마른 비에게 야광초를 내밀었다.

“구명지은. 내 목숨 값이다. 한참 모자라지만, 우선 이걸로 일부나마 갚겠다. 나머지는 평생을 두고 갚으마.”

“무슨 소리야? 대가를 바라고 한 거 아냐. 그리고 이걸로 약을 만들려고 찾아다닌 거라며.”

“시끄럽고. 당장 복용해라. 강해지고 싶지? 이걸 먹으면 힘을 쌓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거다.”

“응? 이 예쁜 걸 먹으라고? 싫어. 나한테 주면 가지고 다니면서 보기만 할 거야.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약초로 써.”

화통달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섰다.

“어른이 주는데 애새끼가 뭔 말이 이렇게 많아! 그냥 닥치고 얼른 처먹어라! 약효 떨어지기 전에!”

“약은? 약은 어떻게 할 건데?”

“다른 게 있다! 이미 봐뒀어! 얼른 안 처먹을래?!”

“거참……. 알았어. 고마워, 할아버지.”

서슬 퍼런 호통에 마른 비가 야광초를 입에 쏙 넣었다.

“그냥 씹어 먹으면 되는 거야? 어우, 뭐가 이렇게 써?”

중원에 내놓으면 난리가 날 영약을 줘도 구시렁댄다.

야광초를 꿀떡 삼키는 걸 본 화통달이 마른 비를 돌려 앉혔다.

“운기해라.”

“운기? 그게 뭐야?”

“우, 운기가 뭐냐고? ……명칭이 다른가? 단전에 쌓은 내공을 휘돌려서 기운을 조율하는 것 말이다.”

“운기? 단전? 내공? 무슨 말이야, 그게.”

“이런 우라질! 네가 아까 살수 놈 공격할 때 끌어다 쓴 기운 말이다아아!”

이 시간에도 야광초의 약효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화통달은 복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아, 자연기를 말하는 거구나? 알겠어. 후우웁―.”

휘아아악―

크게 들이켠 숨을 따라 대자연의 기운이 소년의 몸속을 일주한다.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던 힘의 파편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흐름에 호응했다.

‘뭐, 뭐야, 이게? 단전이 없어?’

화통달은 마른 비의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대고 기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야광초의 약효가 스며들 때까지 이끌어줄 생각으로.

한데 체내의 내공이 집약되는 단전이 없었다.

분명 내력이 존재하는데 단전이 없다?

화통달이 아는 한 이런 건 불가능했다.

‘외기?’

마른 비가 숨을 들이쉰 순간, 외부에서 가느다란 기의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한 줄기 질풍이 되어 소년의 육체를 질주했다.

육신 곳곳에 깃들어 있던 기운들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세를 불린 그것은 곧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이… 이럴 수가!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연기.

꼬마는 자연기라 말했다.

말 그대로다.

대자연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끌어다 쓰는 것.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명칭이었다.

‘놀라고 있을 때가 아냐!’

“꼬맹이! 몸 안에 깃든 이질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거다! 거부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양을 흡수하려고 노력해! 네가 기를 운용하는 방식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화통달의 설명은 무의미했다.

마른 비의 육신은 이미 야광초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이로운 물질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적극적으로 포용했기 때문이다.

화아아악―!

중원의 무인들이 말하는 일주천이 아니다.

특정 경로를 따라 인위적으로 기운을 움직이는 중원의 내공 심법과 달리, 와족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기운이 흐르도록 내버려둔다.

마치 혈액이 몸 전체를 순환하며 구석구석에 이르는 것처럼.

마른 비의 몸 안을 휘도는 초록색 기운은 외부에서도 뚜렷이 보일 정도였다.

사지 끝까지 골고루 퍼져나간 야광초의 기운 때문에 마른 비는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일이…!’

잘해야 절반이다.

중원에서 손꼽히는 내공 심법이라도 기껏해야 영약이 지닌 기운의 절반을 흡수하는 게 고작이거늘.

자연에 한없이 가까워지려 했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와족의 자연기는 야광초 기운의 9할 가까이를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허허허……. 세상은 정말 넓구나. 이 꼬마… 어떻게 성장할지 기대가 되는구먼.’

오늘은 경탄의 연속이다.

올해로 육십을 넘기고, 더 이상 놀랄 일 따윈 없으리라 여겼던 화통달은 운남 오지에서 만난 원시 부족의 소년에게 경이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와…! 몸 안에 쌓인 자연기의 양이 늘어났어! 신기하네. 고마워, 할아버지.”

밤을 꼬박 새우며 야광초의 기운을 녹여낸 마른 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소년의 눈빛은 전날보다 한층 깊고 맑아져 있었다.

“클클클. 몇 년 치의 내공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야광초의 진정한 효능은 차차 깨닫게 될게야.”

“굉장한 선물을 받았네. 근데 정말 괜찮은 거야? 약을 만들 재료는…….”

“걱정하지 마라. 야광초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약초들을 서너 뿌리 봐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서 당장은 효능이 없지만 1, 2년 후에 캐면 쓸 만할게야.”

화통달은 약초들을 찾아낸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듯했다.

“오, 다행이야. 할아버지는 진짜 대단하구나! 이렇게 신기한 걸 또 어디서 발견했대?”

“클클. 그럼, 대단하지. 대단하고말고. 여기로 오는 길에 이중으로 겹쳐서 떨어지는 폭포와 구불구불하게 뻗은 고목이 있다. 그 아래서 발견했지.”

“음? 희한하네? 나도 오는 길에 여기만큼은 아니지만 자연기가 풍부한 장소들을 지나쳤거든. 거기랑 할아버지가 말한 지형이 비슷해.”

“…….”

화통달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을 타고 오르는 걸 느꼈다.

“혹시…… 거기서 이렇게 생긴 풀들 봤냐?”

화통달이 땅 위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다.

“응. 자연기가 고인 중심 지점에서.”

“너 설마…… 아니지?”

불안감은 이제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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