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엄청 신선해 보여서… 뜯어 먹었는데…….”
“……!”
화통달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미친…! 전부 다?!”
“으응…. 죄다 신선해 보이더라구.”
화통달은 이제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거… 그것들…! 1, 2년만 더 묵히면 영약으로…!”
“그게? 싱싱한 도라지 아니었어?”
화통달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과 함께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매복
달마저 구름 뒤로 숨어버리자 칠흑의 장막이 사위를 휘감았다.
어둠에 먹혀버린 청죽림은 밤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스스슥!
기척을 죽인 발소리가 숲의 정적을 저민다.
오십에 가까운 숫자가 움직이는 데도 흘러나오는 소리는 극히 미세하기만 했다.
척!
선두에 선 남자가 오른 주먹을 꽉 쥐며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약속된 수신호에 사십칠 명의 인원이 한 몸이라도 된 듯 동시에 멈춰 섰다.
‘반 시진.’
약속한 시간이다.
축시 말에 출발했으니 인시 중엽에 이르렀을 터다.
구름을 비집고 내려온 달빛이 대나무로 둘러싸인 숲 속의 마을을 어슴푸레 비췄다.
‘겨우 시간에 맞췄군.’
달리면 금세 당도할 거리인데 은밀한 이동 때문에 꽤 시간이 소요됐다.
‘아니지. 그보다는 망할 뱀들 때문이야.’
점창파 이대 제자 장경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미리 방문했던 사절단 덕분에 청죽림에 자리 잡은 뱀들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독사 주제에 의태까지 하며 잠복해 있는 놈들.
미리 알고 있었고, 신중을 기했는데도 세 명이 당했다.
물린 자들은 일곱 걸음도 못 가서 절명해 버렸다.
중원에서 악명이 자자한 칠보사(七步蛇)에 버금가는 맹독인 듯했다.
쓰러진 대원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은 장경이 허공에 짤막한 수신호를 그렸다.
‘시작하자.’
10년 전, 사천과 귀주를 떠돌던 절정의 무인이 점창파에 흘러들어왔다.
점창이 심혈을 기울여 등용한 그는 수년 만에 장로직에 올랐고, 대대로 점창을 대표해온 봉우리와 구름에 이어 또 다른 창산의 절경인 눈을 이름으로 써도 되겠느냐 물었다.
장문인이 희미한 웃음을 내비친 순간부터, 그와 그가 키운 무인들은 설(雪)자를 독점하게 됐다.
스릉-
설검 장로가 다년간 공들여 키운 설검대(雪劍隊)가 조용히 칼을 뽑았다.
화르륵-
뚜껑을 열고 불씨를 올린 화절자(火折子)가 횃불에 불을 옮겨 붙였다.
마을을 둘러싼 네 방향의 숲에서 일시에 불꽃들이 타올랐다.
휙- 휘익―!
화공.
설검대는 은신과 암습에 특화된 응목대와는 다르다.
제대로 검을 수련한 정통의 무인들인 것이다.
어두운 밤, 지리를 모르는 불리함을 안고 어설픈 암습을 가하느니 불을 질러 혼란을 유도하고 힘으로 몰아치는 게 백번 낫다.
힘껏 던진 수십 개의 횃불이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을 날았다.
화아악-!
대나무로 짠 집들을 화마가 덮친다.
기름을 듬뿍 먹인 횃불들이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와족의 마을을 집어삼켰다.
“쳐라!”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이백 개에 이르는 칼날의 파도가 휘몰아친다.
마을에 잔존해 있는 야만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리라.
몰살.
전쟁은 시작되었고, 칼을 겨눈 적에게 자비란 없다.
장경의 눈이 곧 시작될 살육의 밤을 허공에 그렸다.
“아니?”
고요하다.
집들이 불타오르는데 아무도 나와 보는 이가 없다.
이백 명 가까운 설검대가 마을을 가로질러 중앙에 있는 커다란 건물 앞에 집결할 때까지 야만인 한 명을 마주치지 못했다.
타닥타닥 불똥 튀기는 소리가 기습에 실패한 설검대의 가슴을 불안하게 울렸다.
“이게 다냐?”
장경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고 얼굴을 찌푸린 순간.
불타는 건물 사이사이에서 야만 전사들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장경이 화들짝 놀라며 설검대를 포위한 적들을 돌아봤다.
‘우리가… 뒤를 잡혔다고?’
불타는 건물 안에 숨어 있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숲뿐이다.
대나무 숲에 매복해 있다가 뒤를 따른 것이리라.
한데 저 많은 인원이 숨어 있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장경의 어깨가 긴장을 머금고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다냐고 묻잖아. 이 개 같은 새끼들아.”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이 타오르는 불길을 담았다.
맞받기 버거울 정도로 사나운 눈빛을 쏟아내는 사내는 안광만으로도 사람을 찢어 죽일 것 같았다.
팔뚝을 질주하는 오한에, 장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아차! 이 무슨 추태를…!’
무인이란 자가 상대의 시선이 두려워 눈을 돌리다니!
실태를 깨달은 그가 재빨리 사내에게 눈을 맞췄지만, 이미 늦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이 그 광경을 본 후다.
기세에서 밀려버린 것이다.
“병신 같은 놈.”
집결한 설검대 안에서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장경이 고개를 푹 떨궜다.
“설검대주(雪劍隊主) 정황이다. 이틀 전에 전부 나간 것 아니었나?”
급습을 시도한 이상 싸움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기습이 실패한 이유는 알아야겠다.
정황이 매서운 눈의 안광을 무리 없이 받아넘기며 물었다.
호국영에게 들은 바로는 힘이 좋은 장사들로 구성된 돌격대가 하나, 날쌘 놈들로 구성된 유격대가 또 하나, 마지막으로 첩보대의 역할을 수행하는 부대까지 해서 세 개의 무력집단이 존재한다고 했다.
오랫동안 마을 주변에 잠복한 응목대의 보고에 따르면 그에 부합하는 세 개의 무리가 이틀 전 마을을 떠났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계책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야만인 주제에 운남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놈들.
새끼로 야생 짐승들을 꾀어내 소수부족들을 덮치게 하면, 미개한 원시인 놈들은 그들을 도우러 갈 것이다.
주력 부대가 빠진 본거지에는 기껏해야 늙은이와 아이들, 소수의 전사들만 남게 될 테고, 그걸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천년의 세월 운운하는 야만 부족의 터전은 오늘로 지워진다.
정황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가 너한테 질문을 하래? 늪지대 거머리같이 생긴 놈이. 묻는 거나 대답해.”
매서운 눈은 정황의 질문 따위 가볍게 무시했다.
“…….”
그래. 상관없겠지.
다 죽이고 한 놈만 살려서 물으면 될 것 아닌가.
정황의 입가에 흉악한 미소가 번졌다.
“이게 다냐고 물었나? 그렇다면 어쩔 텐가? 고작 팔십에 이르는 인원으로 우릴 포위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대화를 나누며 가늠한 야만인들의 숫자는 설검대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대부분의 인원이 빠져나간 게 맞았다.
그렇다면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모조리 죽일 뿐.
“이게 다라고? 뭔 배짱이야, 이 멍청한 새끼들이? 이게 전부면 니들은 오늘 싹 다 뒈지는 거야. 더 있어도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리고 왜 팔십이냐? 백육십이지.”
번들거리는 눈은 그대로 둔 채 입이 저 홀로 살기 어린 곡선을 그렸다.
매서운 눈의 살소(殺笑)에 호응하듯 전사들 뒤편으로 야생의 살기를 피워 올리는 맹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 * *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이 세 군데다. 전상, 대망, 광서우. 수식어가 붙은 놈들이 출몰한 지점들. 코끼리 녀석은 이제 막 영역 밖으로 나왔지만, 무리를 모조리 끌고 나왔어. 뱀과 코뿔소는 홀로 움직이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가까운 마을을 초토화시킨 후에도 멈추지 않고 이동 중이다.”
그믐이 엉성하게 그려진 지도에 목탄(木炭)으로 이리저리 선을 그었다.
맹수들이 움직일 것이라 예상되는 이동 경로였다.
까만색 복잡한 선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너른 하늘이 지시를 내렸다.
“뜀박질이 느린 우둔한 땅과 바위 곰 전사들을 가장 가까운 야생곡으로 보내죠. 신평의 까마귀 떼는 하늘에 떠 있는 놈들이라 저희로선 막을 방법이 없네요. 할아범과 새를 부리는 전사들에게 맡기겠습니다. 남방의 대망에게는 제가 가죠. 가장 먼 문산에는 빠르게 이동 가능한 매서운 눈과 나무 표범 전사들을….”
“잠시만. 신중해라.”
조언을 더하는 그믐이다.
너른 하늘과 매서운 눈, 우둔한 땅이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만약 이게 점창의 짓이라고 한다면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벌였겠느냐. 간단하다. 이건 유인책이야. 우리를 노린 게 틀림없다.”
“싸우고 싶으면 그냥 덤비면 되지, 뭐 하러 이런 복잡한 짓을?”
매서운 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미 한 번 우리에게 밀렸던 과거가 있지 않느냐. 정면충돌은 부담스러운 거겠지. 아니면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저들 나름의 사정이 있던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오.”
전사, 아니 그놈들은 무인이라고 하던가.
싸우기 위해 단련해온 놈들이 뭐 이리 데굴데굴 잔머리를 굴린단 말인가.
너른 하늘 덕에 간신히 가라앉혔던 매서운 눈의 분노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우리의 인원을 쪼개려는 분산책이 확실하다. 노리는 건 둘 중 하나겠지. 여기저기로 흩어질 전사들, 또는… 전사들이 빠져나간 마을.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한 모양입니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던 너른 하늘이 말했다.
“어찌 됐든 우린 결국 갈 수밖에 없겠죠. 우리를 기다리는 소수부족들을 나 몰라라 할 순 없는 노릇이니.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 쪼갤 수밖에 없는 인원. 머리를 잘 썼어요. 외통수로군요.”
적의 술책에 빠진 걸 알지만 일말의 동요도 없다.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그가 서늘하게 웃었다.
“하지만 저들은 모릅니다. 지난 30년간 우리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서서히 일어나는 기세가 회의장을 잠식한다.
지도를 내려다보는 너른 하늘의 눈은 한 점 흔들림 없이 단호하기만 했다.
“전사는 걸어온 도전을 피하지 않습니다. 걸려주죠. 저들이 준비한 하찮은 계략에. 무엇을 들고 오든 그 이상의 힘으로 깨부숴주면 그뿐.”
고개를 든 너른 하늘이 수장들을 둘러봤다.
“다만, 우리도 덫을 하나 놓아두죠.”
* * *
매서운 눈은 너른 하늘의 결정을 듣자마자 무조건 자신이 남겠다고 떼를 썼다.
광서우를 저지할 사람이 모자라지만, 생각해보니 굳이 제압할 필요가 없었다.
때려눕힐 수 있는 사람이 올 때까지 시간만 끌면 되는 것이다.
‘안개걸음, 산. 조금만 버텨라.’
족장님, 그믐 할아범, 우둔한 녀석.
그들은 맡은 지역을 해결하는 대로 문산으로 달려갈 것이다.
계속해서 인원이 쪼개진 채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당면한 일을 해치운 후 문산에서 집결한다.
그건 매서운 눈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노약자들은 괜찮은 거겠지? 부디 무사하길…….’
점창파가 보기엔 전사 대부분이 빠져나갔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맹수들을 막으러 출정한 전사들 틈에 전투가 불가능한 노인과 아이들을 섞어서 내보냈으니까.
그들은 적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서 갈라져 나와 신령목으로 향했다.
습격을 눈치채고 일부러 마을을 비워둔 채 매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
‘좋은 먹잇감이라고 여겼겠지.’
이 멍청한 녀석들은 와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신령목으로 피신한 노약자들과 현재 성년식을 치르고 있는 아이들.
그들을 뺀 와족 성인 남녀 462명은 전원이 성년식을 통과한 전사들이다.
바위 곰 92명.
나무 표범 104명.
검은 수리 120명과 흰 수리 145명으로 구성된 총합 265명의 수리의 눈.
전투에 특화된 바위 곰, 나무 표범, 검은 수리 전사들만 따져도 316명이다.
그리고 족장인 너른 하늘.
점창파 놈들은 와족 역사상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시기에 싸움을 걸어왔다.
‘다 쓸어주마.’
매서운 눈의 눈동자가 그 이름처럼 사납게 빛났다.
“난 늙은이들의 말을 믿지 않아.”
설검장로의 수제자이자 설검대주인 정황.
삐딱하게 내뱉은 그의 말이 매서운 눈의 상념을 깼다.
“기억이란 항상 부풀려지기 마련이지. 운남 소수부족들의 수호자다, 절대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놈들이니 조심해라? 제대로 된 무공조차 지니지 않은 원시 부족 따위에게 패하다니! 그 무슨 수치스런 일이냔 말이다! 우리 윗세대는 몇몇을 빼곤 무능하기 짝이 없는 밥버러지들이야. 스승님과 나, 그리고 설검대가 그 시절에 있었다면 너희는 진즉에 쓸려나갔을 거다. 미개한 원숭이들아!”
설검 장로와 정황은 십 년 전 점창이 팽창할 무렵에 외부에서 영입한 인물들이다.
이번 토지 약탈 아니, 매매 사건을 앞두고서야 듣게 된 와족의 이야기는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짐승 팔십 마리가 있으니 백육십 병력이라고? 큭큭큭,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야수 제어? 별 시답잖은 잔재주 가지고 전사 어쩌고 하는 꼴이 실로 같잖구나.”
턱을 쳐든 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시선.
대강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알 만했다.
“남길 잘했어.”
정황이 떠드는 걸 지켜본 매서운 눈이 조용히 말했다.
“딱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다. 스스로를 특별하다 여기는 놈들. 타인을 업신여기고 깔보는 무뢰한들.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도 모르겠지. 그게 다른 이들을 대하는 너희 한족의 방식이냐?”
“예의는 사람에게나 차리는 것이지. 네놈들은 사람이 아니잖아?”
빙글거리는 정황을 보며 매서운 눈이 짓씹듯 내뱉었다.
“다 지껄인 거냐? 준비 끝났으면 덤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