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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5화 (35/463)

35화

차차창!

검갑에 꽂힌 검들이 시린 불꽃을 토한다.

점창파 독문신법 비천십이표(飛天十二飄)가 거리를 지우고, 납검되어 있던 설검대의 하얀 발톱이 눈앞을 가로막은 야만인들에게 점창식 발검을 쏟아냈다.

쾌애애액―!

설검대 선봉진에 맨몸으로 달려든 자들은 장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이십 명의 야만인들이었다.

사십 명의 검사가 그어낸 검격이 서늘한 밤공기를 갈랐다.

촤아아악!

“?!”

사십 자루의 검이 맨몸뚱이를 긋고 지나갔지만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오오오오!”

콰콰쾅!

그대로 달려든 이십 명의 육탄박치기에 사십 명의 검사들이 허공을 날았다.

“크억!”

“아아악!”

‘뭐 이런 무식한…!’

첫 접전을 지켜본 정황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저런 건 무공도 뭣도 아니다.

그저 내달려와서 부딪혔을 뿐.

어이가 없는 건 그런 공격에 밀렸다는 것이다.

모조리 튕겨 나가 널브러진 검사들을 휙 둘러보며, 정황이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조장들이 전면에 나서라! 검에 기를 주입해! 질기고 단단한 짐승 가죽을 자른다고 생각해라!”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단단한 피부.

저것이 봉검 장로가 이야기했던 와족의 강피(強皮)가 분명했다.

‘과장이라 여겼건만.’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덮기 위해 적들의 능력을 부풀렸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십 개의 발검식이 모조리 적중했음에도 적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1조부터 간다!”

선두에 선 1조 조장의 호령에 이십 명의 검사들이 땅을 박찼다.

바위 곰 전사들의 우측을 급습하는 검사들의 검에 백색 검기가 이글거렸다.

“섬전분광(閃電分光)!”

오직 속도에 치중한 극쾌의 검술이다.

조장의 호령에 따라 이십 명의 검사들이 일시에 호흡을 멈췄다.

휙휙- 휘휘휘휘휙―!

끌어모은 기를 검에 주입한 후 올올이 분배하여 펼쳐낸다.

파괴력보다는 적이 대응할 수 없는 속도로 휘두르는 무호흡 연격!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바위 곰 전사들이 양팔을 들어 올려 방어 태세를 취했다.

촤차착!

피가 튀고 살점이 흩날린다.

기를 머금은 검날이 바위 곰 전사들의 견고한 피부를 조금씩 갈라내고 있었다.

‘얕다!’

속도에 치중한 검식이지만, 근육을 자르고 뼈를 끊기에 충분한 힘이 담겨 있다.

하지만 뭘 먹고 자란 건지 야만인들의 단단한 몸뚱이는 혈선이 그어지는 정도로 섬전분광을 막아내고 있었다.

“2조!”

숨 돌릴 틈 없이 휘몰아친 공세에 바위 곰 전사들이 몸을 웅크렸다.

치명타를 꽂아 넣을 절호의 기회였다.

“분광추영(分光追影)!”

2조 조장 장경이 수치를 만회하려는 듯 힘차게 외쳤다.

텅 빈 좌측을 노리고 달려든 설검대 2조가 재빠르게 검을 놀렸다.

그림자를 쫓듯 민활하게 급소를 파고드는 초식.

조장이 분광추영을 선택했다면 공격방식은 명확하다.

목덜미. 겨드랑이. 갈비뼈의 틈.

내공을 날카롭게 가다듬은 이십 명의 검사가 근육이 취약한 지점만을 골라 검을 찔러 넣었다.

“크윽!”

기어코 신음이 터져 나오고야 만다.

쉴 새 없이 긁어대는 우측의 검들과 새로이 좌측을 파고들어 급소를 노리는 검.

연계하여 휘몰아치는 검격에 서너 명의 전사가 무릎을 꿇었다.

“끝낸다! 바로 들어갓! 3조, 분광…!”

“오래 버텼다.”

첫 격돌에서 날려버린 사십여 명.

그 충격적인 광경에 적들의 시선이 바위 곰 전사들에게 집중됐다.

주의를 끄는 데 성공한 이십 명의 거한들은 수비에만 치중한 채 수십 개의 칼날을 견뎠다.

고작 숨 몇 번 들이켤 시간이지만, 맨몸으로 칼을 받은 전사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런 순간들이었으리라.

그들이 벌어준 틈은 은밀하게 기동한 검은 수리 전사 사십 명이 적들의 배후를 잡기에 차고도 넘치는 시간이었다.

“이 악물어라!”

진형이라면 이쪽도 쓸 줄 안다.

30년 전의 전쟁에서 와족은 대오를 이룬 점창의 검진(劍陣)과 일사불란한 진퇴에 수많은 생명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개개인의 힘만을 믿고 각개전투를 벌이는 부족 전사들의 습성.

그믐은 기나긴 시간을 들여 그 습관을 밑바닥부터 뜯어고쳐 놓았다.

검은 수리 전사 사십 명의 쌍수가, 새의 부리 팔십 개를 그린다.

“올빼미 사냥.”

빠바바바바박!

경쾌한 타격음이 터지고, 뒤를 잡힌 설검대원 사십 명이 통째로 허물어졌다.

“이익!”

되돌리기엔 늦었다.

3조에서 차출한 이십 명의 검사는 좌우로 돌진한 동료들의 사이, 바위 곰 전사들이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지금.”

중앙에서 버티고 있던 바위 곰 고위 전사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크와아아앙!”

“크허헝!”

오래 기다렸다.

벗들이 적들의 칼날에 난자되는 내내 몸을 낮추고 살기까지 죽인 채 대기하던 반려수들.

스무 마리의 맹수들이 긴긴 인내의 시간을 건너 벗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촤아악!

콰앙!

우지지직!

“아아아악!”

“끄아악! 사, 살려줘!”

휘두르는 발톱과 들이받는 몸통, 목줄을 짓이기는 이빨.

예기치 못한 맹수들의 습격에 3조 검사들은 검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갈가리 찢긴 육편과 생생한 선혈이 달빛이 식혀놓은 대지를 새빨갛게 덥혔다.

“이… 미친……!”

사천성과 귀주성을 주유한 16년의 세월.

점창으로 흘러들어와 무예를 닦은 지난 10년.

검 한 자루에 기대 사십 년을 살아오며 온갖 것들을 두 눈에 담았다.

정황은 더 이상 자신을 놀라게 할 일 따윈 없으리라 자신했었다.

“짐승 따위에게…!”

하지만 찢어져라 부릅뜬 눈은 감당할 길 없는 경악의 증거였다.

십 년간 공들여 키운 무인들이다.

적에게 뒤를 잡힌 것도 충격이지만, 수하들이 짐승에게 물어 뜯겨 죽을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다.

정황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터질 듯이 불거졌다.

‘앞쪽에 시선이 쏠렸어.’

검은 수리 전사 ‘고요한 늪.’

은밀한 움직임에 특화된 사내가 짙게 깔린 어둠을 헤쳤다.

첫 충돌이 일어날 때 기척을 감춘 그는, 불타는 집들의 넘실대는 그림자를 타고 전장을 우회했다.

적들은 마을 중앙의 회의장을 등지고 서 있었다.

편평하게 깔린 대나무 지붕 끄트머리에 다다른 그가 조용히 정황을 내려다봤다.

‘저놈만 없애면 끝난다.’

첫 격돌에서 이미 적의 조장 넷 중 셋이 쓰러졌다.

이제 점창의 지휘부는 정황이라는 대주 놈과 조장 하나, 그 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둥근 꼬리.’

고요한 늪의 뒤를 따라온 족제비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우며 그를 바라봤다.

마치 다람쥐의 그것처럼 동그랗게 말아 올린 꼬리가 특이했다.

‘동시에 가자. 너는 눈을 노려라.’

스르륵-

대나무 지붕 위에서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짐승이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잡았다!’

정황은 머리 위의 암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들이 나를 아주 호구로 아는구나.”

스팟!

무언가가 스치는 느낌이 들자마자 전사의 눈에 비친 하늘과 땅이 급격히 휘돌았다.

털썩!

‘어?’

고요한 늪에겐 상황을 반추할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거다!’

예기치 못한 기습을 기회로 바꿀 발상이 정황에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쓰레기 같은 놈이! 이따위 실력으로 건방지게 암습을!”

퍽!

몸통에서 분리된 머리가 하늘을 난다.

무도하게도 고요한 늪을 두 동강 낸 장본인이 땅에 놓인 머리를 걷어찼다.

떼구루루 굴러온 형제의 머리가 매서운 눈의 발밑에 이르렀다.

“…….”

허리를 굽혀 조심스레 안아 들자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가 매서운 눈의 팔을 흠뻑 적셨다.

“도저히…….”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가 폭발하여 이성을 끊는다.

형제의 머리를 안은 그가 핏발 선 눈으로 정황을 노려봤다.

“상종 못 할 개새끼로구나…!”

맞선 적을 죽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죽은 자의 머리를 발로 걷어차 돌려주는 행위 따윈 듣도 보도 못했다.

원시를 미개하다 비웃었던 문명인은 그가 손가락질했던 야만보다 훨씬 저열했다.

“한 놈도…….”

확실히 알았다.

이놈들과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

분노를 갈아 넣은 음성이 그르렁 짐승의 소리를 울렸다.

“살려두지 마라.”

눈이 뒤집힌 전사들이 땅을 박찼다.

“점창파봉진(點蒼破峰陣)! 대열을 유지해라!”

정황의 명령이 밤하늘을 울리고, 산봉우리마저 깨뜨릴 점창 최강의 대인합격진이 달려드는 와족 전사들을 맞이했다.

‘크큭. 걸렸어.’

진의 중앙에 위치한 정황이 서늘하게 웃었다.

예상과 다르게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놈들의 자제력을 날려버리고 이쪽으로 달려들게끔 만들어야만 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짐승이나 다름없는 야만인의 모가지쯤이야 백번도 더 걷어차 주리라.

‘이것들이?’

설검대원 몇몇이 인상을 찡그린 채 이쪽을 힐끔거렸다.

머리를 걷어찬 행동에 반감을 표출하는 게 분명했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그따위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크아아아아!”

덩치 큰 야만 전사가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칼날에 어육이 되어 쓰러졌다.

“꾸어엉!”

같이 싸우던 곰도 목덜미에 꽂힌 십여 개의 칼날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좋은 전개였다.

‘이대로만 가면…….’

파봉진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공방의 물샐 틈 없는 조합으로 구성된다.

제1진이 적의 공격을 걷어내면, 바로 뒤에 선 제2진이 검격을 흩날린다.

거기서 끝내면 좋고, 못 끝내도 상관없다.

적이 가까스로 방어에 성공하더라도 곧바로 튀어 나간 제3진이 적의 급소에 검을 찔러 넣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강력하다.

파봉진은 쓸데없는 복잡함을 모조리 덜어낸 점창 검진의 정화였다.

“앞으로 나와라! 이 개 같은 새끼야!”

최전선에 선 매서운 눈이 정황에게 일갈했다.

“네가 와라. 여기까지.”

비릿한 미소는 갈아 마시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지휘 없이 분노에만 몸을 맡긴 전사들이 침착하게 응수하는 검진에 하나둘 목숨을 잃고 있었다.

“후욱, 후욱! 이 새끼가…! 역시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매서운 눈이 남겠다고 했을 때, 너른 하늘과 그믐은 그를 앉혀놓고 당부했다.

그리고 둘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다.

건네받은 조언을 실행할 순간이 온 것이다.

훌쩍 뛰어오른 매서운 눈이 검진이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까지 거리를 벌렸다.

‘진정해. 흥분하면 안 된다.’

너른 하늘은 말했다.

지휘자는 절대 감정에 몸을 내맡겨선 안 된다고.

형제가 죽어가는 순간일지라도 냉정해야만 한다고.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혔다.

또한 그믐은 말했다.

집단전이 된다면 백이면 백 짜임새 있는 진형으로 덤벼들 거라고.

그러더니 머리 아픈 파훼식을 구구절절이 풀어놓았다.

그 대처법, 지금 확인하리라!

『형제들이여! 준비하라!』

번쩍 뜬 눈에 짙푸른 자연기가 어린다.

언령.

하지만 이번에 한해 그 대상은 반려수가 아니다.

심신의 위압이 아닌 의지의 전파.

전장에 위치한 전사들의 뇌리에 직접 꽂혀 드는 명료한 지휘였다.

『흔들어라! 바위 곰!』

그 말만을 기다렸다.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연습시켜놓고 왜 이제야 시작하는가.

의지가 깃든 음성이 뇌리를 파고든 순간, 거한들의 한쪽 발이 땅에 틀어박혔다.

콰앙!

불끈 솟아오른 핏줄이 강맹한 일격을 알린다.

우둔한 땅은 바위 곰 전사들에게 조잡한 잔기술 따윈 가르친 적이 없다.

바위 부수기. 산 허물기. 거목 쪼개기.

집채만 한 맹수들조차 한방에 거꾸러뜨리는 필살의 일격이 불을 뿜었다.

꽈꽈꽝!

“크아악!”

방어 따위 염두에 두지 않고 전력으로 휘두른 맹타.

검에 다져진 바위 곰 전사들이 여기저기 주저앉았지만, 제1진도 절반이 날아갔다.

눈 돌릴 틈 없는 공방의 와중에 또 다른 의지들이 허공을 가른다.

바위 곰 전사들이 발한 언령이 그들의 반려수들에게 돌격을 명했다.

“크아앙!”

“푸륵!”

바싹 붙어 대기하던 맹수들이 제1진의 나머지 절반을 덮쳤다.

곰이 휘두른 앞발에 상반신이 날아가고, 포효하는 호랑이의 이빨에 목이 뜯긴다.

어금니를 세운 멧돼지의 돌진에 점창 검사 셋이 한꺼번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들어가라! 나무 표범!』

대기하던 전사와 맹수들이 섬전처럼 파고들며 허물어진 진형을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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