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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6화 (36/463)

36화

제2진.

전열이 무너진 순간, 곧바로 치고 들어올 건 예상한바다.

기다렸다는 듯 수십 자루의 분광검이 시린 검광을 토했다.

쾌애애액!

방어는 오롯이 반려수에게 맡긴다.

앞서나간 맹수들이 이빨로, 발톱으로, 몸으로 살의에 찬 검을 받아냈다.

“캬앙!”

“크아앙!”

역할이 바뀌었다면 벗 또한 나를 위해 주저 없이 희생했으리.

영혼으로 이어진 벗에 대한 신뢰가 반려수들로 하여금 기꺼이 몸을 던지게 했고, 그 희생을 발판삼아 전사들이 전진했다.

검의 간격 안으로 파고든 사십 명의 전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배로 갚아주마.’

억누른 분노를 토해낼 시간이다.

꾹꾹 눌러 담은 자연기가 빛살 같은 권각(拳脚)을 예고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안 돼! 막아라!”

정황이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이대로 제2진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대기하던 제3진의 검사들이 나무 표범 전사들을 노리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지금! 꿰뚫어라! 수리의 눈!』

이 순간만큼은 매서운 눈의 지휘가 부질없다.

제2진을 파고든 나무 표범 전사들과 반려수들의 아래.

기척을 숨기고 바짝 따라붙은 수리의 눈 전사들이 은신을 풀고 치솟았다.

“안 돼애애애!”

정황은 곧 펼쳐질 참담한 미래를 예감했고, 그가 내지른 비명이 물고 물리는 전장을 가로질렀다.

슈아아악!

바위 곰이 그랬듯 나무 표범도 방어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뒤따라온 수리의 눈을 믿고, 제2진을 박살 낼 뿐이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뻗어낸 필멸의 연격들이 설검대 검사들의 전신에 틀어박혔다.

‘피하긴… 늦었다!’

나무 표범 전사에게 검을 쳐낸 제3진의 검사는 죽음을 예감했다.

검은 이미 날아가고 있었고, 비열하게 몸을 숨긴 암습자들이 발밑에서 유령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놈만은!’

역공에 역공.

부질없는 소망이 뇌리를 맴돌고, 힘껏 깨문 어금니가 마찰음을 울리기도 전에.

꽈앙!

육신을 뒤흔드는 통렬한 충격과 함께 그의 의식이 끊어졌다.

아수라장.

삼백에 가까운 인간과 백에 근접한 짐승들이 한꺼번에 맞붙은 전장이다.

불타는 건물들을 배경으로 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이… 이……!”

경련하는 눈이 엉클어진 심정을 드러낸다.

정황은 눈으로 보고도 현 상황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어찌, 어찌 야만족 따위에게…!”

심혈을 기울여 단련시킨 진형이다.

10년 전 점창에 들어와 그 위력을 확인하고 감탄했던 검진이다.

파봉진은 쓸데없이 복잡한 변화를 가미한 중원의 검진들보다 훨씬 실전적이고 신랄했다.

하지만 결과를 보라.

서 있는 점창의 제자는 찾기 힘들었다.

반면 야만인 놈들은 상처를 입긴 했지만 6할 이상이 제 다리로 서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결과였다.

“어때? 놀랐나?”

적의 수괴가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잔인한 도발에 이성의 끈을 놓았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놈은 수하들이 쓰러지는 걸 보자마자 몸을 물려 전권을 이탈했다.

입을 열어 외치진 않았지만, 입술을 달싹였던 걸 보면 모종의 방법으로 야만인들을 통솔한 게 틀림없었다.

‘내가… 이 정황이…… 야만인에게 병력의 운용에서 밀렸다고?’

처참하게 구겨진 자존심이 폐부를 쑤셨다.

“나도 너희랑 붙은 건 처음이지만, 질리도록 들었지. 망할 노인네가 몇 달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해대서.”

“……그자로군. 회효라는 괴상한 이름의 장로.”

“회효? 아, 그믐올빼미? 그래, 맞다. 그 영감. 30년 전에 본 거라고 자신 없어 하더니만 딱 들어맞네. 무서운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검진을…·· 미리 대비했었군.’

부끄러운 과거를 쉬쉬했던 점창과 달리 와족은 작은 기억 하나까지도 들추어내 모두에게 공유했다.

그 차이가 결국 치명적인 간극을 만들고야 말았다.

스르릉―

검갑을 벗어난 검이 맑은 검명을 토했다.

죽음?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이 이상 비참해질 생각은 없다.

전투는 패했지만, 결투에선 이기고 가리라.

정황의 검이 매서운 눈을 겨눴다.

“벌레 같은 야만인 놈. 우쭐대지 마라. 그저 나에게 없는 정보를 네놈만 쥐고 있었을 뿐. 개인의 기량이라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 같나? 덤벼라. 단칼에 죽여주마.”

“그래. 좋은 생각이다.”

숨쉬기 답답할 만큼 억눌렀던 분노가 고개를 든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할 만큼 오래 참았다.

서서히 끌어올린 자연기가 치미는 격노에 호응하며 매서운 눈의 전신을 달궜다.

“안 그래도 너는 내가 직접 갈기갈기 찢어주려 했거든.”

폭사된 안광이 어둠을 불살랐다.

‘속도. 놈의 장기는 속도다.’

설검대와 싸울 때, 야만인의 움직임을 눈여겨보았다.

범상치 않은 몸놀림과 날카로운 공격.

놈은 민첩함이 특기인 게 확실했다.

‘크큭. 가소롭구나.’

그렇다면 놈에게 승산은 없다.

자신이 누군가.

10년 전, 귀주성 제일의 쾌검이라 칭송받던 급살검(急煞劍) 정황이다.

검을 맞댄 상대가 영문도 모른 채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하여 붙여진 별호.

검속만 놓고 본다면 스승인 설검 장로조차 뛰어넘었다 자부한다.

곧 경악에 휩싸일 야만인의 얼굴이 선했다.

“선 채로 죽어라!”

섬전분광, 분광추영.

빛살 같은 무호흡 연격에 급소를 노리는 정밀함을 담았다.

분광검 일초식과 이초식의 정수만을 뽑아내 엮은 연계식(連繫式).

사방팔방을 뒤덮은 검 그림자가 이름 그대로 빛마저 쪼갤 듯 매서운 눈을 덮쳤다.

“후우웁.”

깊게 들이마신 숨이 몸 구석구석에 자연기를 퍼뜨린다.

굳건히 땅을 디뎠던 다리가 스르륵 부드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매서운 눈의 육신이 너울너울 춤추며 예측할 수 없는 낙엽의 동선을 그렸다.

와족 비전, 낙엽 가누기가 엄습하는 검을 모조리 흘려냈다.

“무슨 움직임이…!”

타점을 잡기가 힘들다.

찌르기, 베기, 가르기.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

나풀대는 상체는 눈앞에 있지만 잡히지 않는 신기루였다.

‘어디냐!’

예상을 뛰어넘는 몸놀림에 놀랐지만 단지 그뿐.

놈은 반격은 엄두도 못 내고 있고, 기묘한 움직임의 구심점만 찾으면 된다.

정황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면서 매서운 눈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저기다!’

도무지 검을 적중시킬 수 없는 움직임은 지면 위를 흐르는 유연한 발놀림에서 나온다.

정황의 검이 직각으로 꺾이며 매서운 눈의 발목을 쓸어갔다.

“칫!”

대주라더니 과연 이름값은 하는 놈이다.

한순간에 낙엽 가누기의 약점을 찾아낸 걸 보면.

발목이 잘리는 걸 피하기 위해 매서운 눈이 펄쩍 뛰어오른 순간!

“넌 끝났다!”

정황이 기세 좋게 외치며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건 놈의 치명적인 실수다.

체공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동작은 한정되기 때문이다.

내공을 흠뻑 머금은 검이 검명을 토해내며 몸부림쳤다.

“차핫! 급살천망(急煞天網)!”

천망. 하늘의 그물이다.

자신의 별호인 급살을 초식명에 넣은 그것은, 설검 장로에게 사사 받은 검술에 점창파 분광검의 묘까지 섞은 그만의 검이었다.

그림자도 눈에 담기 힘든 쾌검이 허공에 뜬 매서운 눈을 베어갔다.

‘빠르다!’

과연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토록 빠른 공격은 매서운 눈도 처음 본다.

그렇다. 보는 건 처음이다.

자신이 펼치는 걸 스스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휘릭-

사뿐히 몸을 뒤집자 매서운 눈의 발이 날아드는 검 쪽을 향했다.

끝났다고 확신한 걸까?

실전에서 기술 이름까지 힘차게 외치다니.

이런 거, 싫지 않다.

어디 똑같이 어울려 볼까?

“소낙비.”

시작은 미약하나 터져나가는 순간 무궁히 창대하리라.

쉭쉭 바람을 가르며 뻗어 나간 다리가 무수한 발 그림자를 허공에 그렸다.

챙! 차창! 채채채채챙!

철과 철이 부딪는 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다리가 검과 맞부딪히며 날카로운 금속성을 울렸다.

“이, 이런 미친…!”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일인가.

검기(劍氣)를 뿜어내는 검이 인간의 다리를 자르지 못하다니!

이런 강도의 다리는 중원 전체를 뒤져도 몇 없다.

각법으로 이름을 날리는 절정의 고수라면 모를까.

듣도 보도 못한 변방의 야만인이 그 수준이라고?

‘빌어먹을! 밀린다…!’

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도 야만인은 공중에서 떨어지기는커녕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부딪히는 검을 발판삼아 차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심지어 포물선을 그리며 머리 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카악! 뒈져라아아아!”

죽을힘을 다해 검을 쏟아내 보지만, 끝도 없이 뻗어 나온 다리가 모든 공격을 상쇄한다.

맞부딪힌 검을 디딤돌 삼아 상승한 야만인이 정수리 위에 이르렀다.

차차차앙!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이냐!’

이런 무공은 듣도 보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무공이 맞기는 한 건가.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발차기가 정황의 몸을 조금씩 지면에 때려 박고 있었다.

‘안 돼!’

이대로는 선 채로 죽는다.

정황은 쾌검식을 멈추고 남은 기를 검날에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카아악!”

사선으로 휘두른 검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정강이를 노렸다.

매서운 눈 역시 자연기를 응집하여 크게 휘둘렀다.

카카캉!

귀를 찢는 금속성이 울리고, 반으로 부러진 검이 허공에서 춤췄다.

“쓰읍, 까졌잖아.”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

매서운 눈이 얼얼한 정강이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둘러친 자연기와 검기의 상쇄.

강맹한 기운을 담은 검이 강피를 찢고 뼈까지 가닿았으나, 뼈와 충돌하는 순간 부러져 버렸다.

‘철골! 그저 단단하다는 비유인 줄 알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강도라니…!’

뼈 자체가 중원인보다 단단할 순 있겠지만 진짜 철일 리는 없다.

저들이 쓰는 기묘한 기의 운용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에 검까지 부러지자 정황은 급격히 전의가 꺾이는 걸 느꼈다.

“너도 속도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그 정도론 나무늘보도 못 잡아. 숨질 준비 됐냐?”

서서히 차오르는 핏빛 광기가 사나운 눈동자를 잠식한다.

오른발을 조금씩 쩔뚝이면서도 매서운 눈은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밀린다고? 저 야만인에게?’

첫 격돌에서 검을 모조리 피해냈을 때 내심 짐작했던 일일지 모른다.

인정할 수 없었을 뿐.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황이 꺼져가는 투지를 불태웠다.

‘한쪽 발에 타격을 입었다. 아까 같은 큰 기술은 못 쓸 거야. 할 수 있다!’

“차아앗!”

검이 반으로 부러지는 바람에 간격 또한 원래의 반이다.

매서운 눈의 품으로 뛰어든 정황이 근접 백병전을 시도했다.

“그래야지.”

좌 전방으로 내디딘은 발과 우측 뒤로 젖힌 어깨.

매서운 눈의 육신이 검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정황의 품으로 깊게 파고든 그가 번개 같은 발차기 단타를 차올렸다.

빠악!

비어 있는 턱에 깔끔한 일격이 꽂혔다.

정황은 찌르기가 빗나간 순간 공격을 허용할 것을 알았다.

예상한 타격이라면 버텨낼 수 있다.

정황이 이를 악물며 흔들리는 시야를 억지로 바로잡았다.

‘급살낙안(急煞落雁)!’

패애액!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떨어뜨릴 혼신의 수직 베기가 매서운 눈을 덮쳤다.

“느려.”

짧게 치고 빠진 단타.

발은 이미 회수한 지 오래다.

하늘을 거니는 구름의 발자국.

사뿐히 내디딘 구름 걷기가 최후의 일격을 흘렸다.

부아아악!

‘빌어먹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사납지만, 그럼 뭐하랴.

빗나간 순간 역공은 예정된 미래다.

‘턱? 명치? 복부? 어디냐!’

치명적인 한 방이 올 게 틀림없다.

정황이 황급히 상반신의 근육을 조이며 급소에 내공을 둘러쳤다.

매서운 눈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솔잎 털기.”

발목, 정강이, 종아리, 오금, 허벅지.

솔잎을 털기 위해 소나무의 밑동을 흔드는 나무꾼처럼.

인체의 하반신을 집중 공략하는 초근접 발차기 연타가 정황의 하체에 작렬했다.

빠바바바박!

“크어억…!”

하반신이 작살난 정황이 더러운 침을 질질 흘렸다.

새우처럼 굽은 등 위로 매서운 눈의 오른 다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불벼락.”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뇌신의 전광이 이러할까.

자연기를 머금은 뒤꿈치가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정황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콰자자작!

왼편 상반신 뼈가 통째로 바스러진 정황이 끔찍한 고통에 바닥을 기었다.

지체 없이 멱살을 쥐어 올린 매서운 눈이 화염을 담은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사죄해라.”

“어… 어억…! 끄어……!”

“너희들에게 터전을 빼앗긴 억울한 자들에게. 네놈들 때문에 피 흘리며 죽어간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네가 모욕한 고요한 늪에게. 당장 사죄해.”

“킥, 킥킥…!”

“그러면 고통 없이 보내주마.”

“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냄새나는 야만인에게 굴복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겠다.

그것이 위대한 한족의, 문명을 이룬 후손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니.

정황은 매서운 눈이 분노하여 날뛰는 모습을 기다렸다.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마음껏 비웃어 주리라 다짐하며.

“그럴 줄 알았다.”

피 섞인 더러운 침이 질질 흘러내린다.

매서운 눈은 닦아내지도,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점점 짙어지는 오롯한 광기로 정황을 꿰뚫듯 노려볼 뿐이었다.

“고맙다.”

원시의 화염을 담고 이글거리는 눈동자.

그 아래에서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흉신악살과 같은 미소에서 그의 의중이 생생히 읽혔다.

그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깔끔히 죽을 기회를 차버린 정황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게 분명했다.

수천 마리의 벌레가 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은 오한에 정황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가 황급히 말했다.

“자, 잠깐! 사죄…!”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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