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7화 (37/463)

37화

“할아버지, 어디로 갈 거야?”

화통달은 며칠 사이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할아버지?”

부르지 마라.

입을 열 기력도 없으니까.

화통달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가?”

대꾸가 없으면 말하기 싫은가 보다, 짐작하고 조용히 좀 걸으면 안 될까.

더럽게 눈치 없고 시끄러운 꼬맹이였다.

“아이, 참. 할아버지! 어디로 가냐구우?”

빠직!

가뜩이나 터럭처럼 가냘픈 화통달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이 우라질 놈의 애새끼가! 내가 산꼭대기에서 공중부양을 하든, 땅 밑을 뚫고 들어가 용암에서 헤엄을 치든! 네가 뭔 상관이냐!”

얼굴까지 벌게지며 내지른 고함이다.

하지만 마른 비는 헤벌쭉 웃었다.

“오! 기운 차렸다! 진짜 그런 게 가능해? 역시 대단하구나, 할아버지는!”

‘이, 이놈의 새끼가…!’

이 새끼는 진심이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지금 진심으로 감탄하는 거다.

그래서 더 열 받는다.

뭐라 표현하기 힘들지만, 이 꼬마는 희한한 방식으로 사람 엿 먹이는 재주가 있었다.

“노부가, 아니,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거든? 이럴 때는 조용히 있어 주는 게 예의다, 꼬맹아.”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한 한 마디였다.

“왜 기분이 별로야?”

화통달은 또다시 뚝 끊어질 뻔한 정신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내가, 내가…… 커흑…! 몇 년 동안 찾아 헤맨 약초들을 네놈이 다 처먹었잖아! 한 뿌리도 남김없이, 모조리! 차라리 영약으로 자란 후에 처먹었으면 아깝지나 않지! 1, 2년만 묵히면 귀한 영약이 될 것을……. 고작, 고작 건강보조용 풀떼기로…!”

화통달은 톡 건드리면 눈물을 주르륵 쏟아낼 것만 같았다.

“아……. 미안. 할아버지.”

이 새끼, 또 진심이다.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

화통달은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좋게 생각하자. 그 약초들이 1, 2년 후에도 그대로 있을 거란 보장이 없잖아?’

차라리 이놈이 먹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장을 주르륵 타고 내려와 똥으로 나오겠지만, 적어도 장 활동에라도 도움을 줄 것 아닌가.

꼬맹이 말대로 ‘무지하게 싱싱한 풀’이니까.

‘아깝다. 너무 아까워…….’

생각하면 할수록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 벌써 다 왔네?”

몇 날 며칠을 축 처져서 멍하게 걸었다.

운남에서 헤맨 지난 몇 년이 너무나 허탈해서.

한바탕 화를 쏟아낸 데 이어, 다 왔다는 말까지 듣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여기는…… 여기가 어디냐?”

“자연기가 옅어지는 쪽을 거꾸로 따라왔어. 할아버지, 이제 정신이 좀 든 거야?”

방위. 대략적인 거리. 그리고 지형.

보산이다.

산맥을 벗어나 평탄한 산으로 접어들었지만, 아직 보산 일대 어디쯤이 분명했다.

‘내가 뭘 하고 있던 거지?’

꼬맹이가 넋이 나간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했나 보다.

며칠 동안 멍하게 있거나 벌컥벌컥 화를 낸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허어…….”

차라리 혼자 있었다면 억지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렸을 거다.

중원 한복판이건 운남의 야생이건 간에 넋 놓고 있다간 비명횡사하기 딱 좋으니까.

한데 희한하게도 이 녀석이 옆에 있으니 마음을 놓고 감정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운남을 헤맨 몇 년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허탈하긴 하지만 별거 아니다.

약초야 또 찾으면 되니까.

화통달이 넋을 놓을 만큼 침울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허허… 난 그동안 대체 뭘 위해서…….’

목숨을 붙여놓은 놈이 살인청부를 했다는 점.

그게 평정을 뒤흔들었다.

인간에 대한 회의와 지독한 배신감.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뒤로 한 채 제 살을 깎아가며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런데 그 대가가 겨우 이거란 말인가?

자부심과 보람만으로 버텨온 일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느낌이다.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것 같은 허망함은 참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할아버지, 괜찮아?”

눈치 없는 꼬맹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맑은 눈망울에 한가득 진심을 담아서.

그 눈길을 마주한 순간, 화통달은 위안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허… 날 걱정하는 거냐? 내가 마음 아플까 봐?’

누군가가 염려해주는 느낌과 설명할 수 없는 따스함.

괜찮냐는 한 마디일 뿐이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그것은 분명 비할 데 없는 위로였다.

‘묘한 꼬맹이로고.’

허점을 드러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정에 푹 빠졌다.

허망하고 참담했던 심정이 진심을 담은 염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에 풀어지고 있었다.

긴 삶을 돌이켜봐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내가 요 꼬맹이한테 의지를 한 건가?’

이런 상황.

생소하면서도 신기하다.

곁을 지켜준 꼬마에게 새삼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 되게 힘들어 보이더라.”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이며, 공감한다.

그것은 곧 단단한 유대를 형성하는 밑거름일지니.

마른 비의 천성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화통달 같이 노련한 노강호마저 무장 해제시키는 그것을 단순한 공감 능력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마른 비만의 독특한 야수 제어의 술.

야수 친화가 그 저변을 인간에게까지 넓히며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네가 일부러 떠나지 않고 옆에 머물러준 거였구나. 내가 기운을 차리길 기다린 거냐?”

“응. 할아버지, 영 힘이 없어 보이더라구.”

골 때리는 꼬마지만 참으로 선한 녀석이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싸움에 뛰어든 것부터, 곁을 지켜준 것까지.

육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이런 녀석은 보지 못했다.

비아는 사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맙다. 내가 너를 챙겨야 했는데 반대가 되었구나.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일인데……. 아니지, 이런 건 놔두면 마음의 독이 되는 법이지. 네 덕분에 내 안을 들여다보고, 풀어낼 수 있었다. 많이 나아졌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 흔들리지 말자.

세상에는 막돼먹은 놈들도 많지만, 선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바로 옆에 그 증거가 있지 않나.

상처 입은 자들을 돌보는 것.

하늘이 내린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

목숨을 건지거나 부상에서 회복한 자들이 다시금 삶으로 돌아가는 걸 볼 때, 내색은 안 했지만 얼마나 큰 보람을 느꼈던가.

화통달은 마른 비 덕분에 번민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괜찮아졌다니 다행이야. 할아버지.”

마른 비가 씨익 웃자 화통달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기운을 차렸으면 난 이제 가볼까 해.”

“음? 어딜 말이냐?”

“성년식 중이잖아. 단련하고, 내 짝을 찾아야지.”

‘아, 그 가혹한 의식 말인가.’

그런 터무니없는 의식을 통과의례랍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마른 비를 이해할 수 없지만, 부족의 전통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래. 나도 필요한 약초를 다시 찾아봐야겠다. 성년식을 무사히 마치길 기도하마. 그… 뭐라고 했지? 반려수? 고놈 찾으면 나중에 소개해주고.”

“응. 할아버지도 항상 건강해. 야광초 고마웠어.”

“쓸데없는 소리! 아무리 귀한 영약이라도 목숨만 할까. 구명지은, 절대 잊지 않는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백원 의원을 찾아라. 제자 놈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을 테니. 네 이름만 대면 뭐든 최우선적으로 협조하라 일러두마.”

마음의 깊이가 꼭 교류한 시간에 비례하진 않는다.

마른 비도, 화통달도 서로의 마음을 받아 가슴에 담았다.

“으싸! 그럼 다시 가볼까!”

생각지도 못한 인연을 겪은 마른 비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 * *

쌍강, 운현, 봉경, 보산…….

마른 비는 단련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북상했다.

야생에서 반년을 보낸 소년의 육체는 마을을 나설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해져 있었다.

긴 원시의 땅을 가로지른 소년이 마침내 대리의 경계를 밟았다.

암습

발밑에서 올라오는 메마른 흙냄새가 코의 점막을 적셨다.

곧 시작될 우기를 앞두고 비를 갈구하는 대지가 신음하고 있었다.

킁! 우둔한 땅이 코를 풀자 흙먼지 섞인 콧물이 튀어나왔다.

와족 여인들의 허벅지보다도 두꺼운 팔뚝이 잔여물이 묻은 입 언저리를 슥 훔쳤다.

“도올아아 가아라아아아~.”

유순해 보이는 얼굴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곰 같은 체구.

우둔한 땅은 장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바위 곰 전사들 가운데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컸다.

“뿌오오오오!”

답변이라고 해야 할까.

바위 곰 전사들과 대치하고 있는 코끼리 무리의 선두에서 귀가 저릿저릿해지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모옷 비이키인다아아~. 도올아가아아~.”

바위 곰 전사들은 느리다 못해 속 터지는 우둔한 땅의 말투에 적응한지 오래다.

아니, 적응보단 체념에 가까울까.

답답하다고 가슴을 쳐봤자 바뀌는 건 없고, 자신들만 화병이 날 뿐이라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그들이 대단하다고 느끼는 건 전상(戰象)이었다.

같은 인간도 알아먹기 힘든 우둔한 땅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있었다.

척 봐도 흥분해서 날뛰기 직전인 코끼리 무리를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우둔한 땅과 무려 ‘대화’까지 주고받는 것이다.

“뿌오! 뿌우오오!”

시야를 가려버릴 만큼 거대한 코끼리 무리 사이에서도 놈은 압도적으로 컸다.

육중한 몸체 곳곳에 남은 전투의 흔적들.

왼쪽 상아의 부러진 첨단부가 시선을 끌었다.

너른 하늘의 목걸이에 걸린 상아의 파편이 있던 자리다.

놈은 과거에 족장과 맞붙어 패배했었다.

“나아도오~ 너어랑 싸우기이 시러어어~.”

반려수인 ‘긴 코’의 영향일까?

우둔한 땅은 별 무리 없이 전상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뿌우오! 부오오오…….”

전상의 울음소리가 급격히 잦아들었다.

맹수에게 당했는지 오른쪽 눈가에는 깊게 찢어진 자국이 선명했다.

성한 왼쪽 눈이 번쩍이며 빛났다.

“하아…… 결국 싸우는 건가?”

바위 곰 고위 전사 거친 모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울음소리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저 눈빛의 의미는 단박에 이해가 간다.

어쩔 수 없군. 힘으로 돌파한다.

전상이 인간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거다.

바위 곰 전사들이 말라붙어 넘어가지 않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이인가안 마아을에엔~ 가아면 안 된다.”

전투를 예감한 것인가.

우둔한 땅의 말투가 점점 명료해지고 있었다.

“너어희 가면 마을 부순다. 아창족, 갈 곳 없다.”

경홍(景洪).

야생곡과 가까운 아창족의 터전이다.

특이하게도 쇠를 만지는 철장이 되길 거부하고 평지에 내려와, 물고기를 낚으며 살아가는 아창족의 분가가 이룬 마을이었다.

전력으로 달려온 바위 곰 전사들은 아창족 마을 한복판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있는 새끼 코끼리를 발견했다.

“진정한다. 우리가 새끼 찾아준다. 믿고 돌아간다. 너희랑 싸우기 싫다.”

지금 코끼리 무리가 마을에 들어가면 볼 것도 없이 부락은 초토화된다.

서둘러 피난을 준비하고 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주변이 죄다 야수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새끼를 건네주며 솔직히 말하더라도 일단은 코끼리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뿌오…….”

자연기의 운용을 깨닫고 사고가 가능해진 전상이 고심을 거듭할 무렵, 저 멀리 강을 등진 인간 마을에서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울렸다.

“쁘오오―!”

고통에 구슬피 우는 새끼의 울음소리였다.

전상의 하나 남은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빠오오오오!”

“젠장! 맨 뒤 한 명! 무슨 일인지 알아본다! 나머진 막는다!”

“뿌오오오오!”

쿵, 쿠쿵! 두두두두―

흥분한 코끼리 무리가 평원을 뒤덮으며 쇄도한다.

거수들의 돌격에 지진이 난 듯 대지가 요동쳤다.

“빌어먹을. 이거 까딱하면 밟혀 죽겠는데.”

거친 모래가 식은땀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피할 수도 없다.

자신들이 뚫리면 아창족 마을이 박살 날 터.

힘껏 버텨선 두 다리와 교차시켜 정면을 막은 양팔에 자연기를 있는 대로 때려 부었다.

우둔한 땅이 전사들을 돌아봤다.

“일단 때려눕힌다! 가급적 죽이지 않는…! 아니, 최선 다해 쓰러뜨린다.”

죽이지 않게 힘을 조절하라는 건 가혹한 명령이다.

전사들이 힘겨워하는 걸 본 우둔한 땅이 지시를 수정했다.

“빠오오오!”

“피햇!”

부아아아앙!

거목을 일격에 부러뜨리는 코가 지면을 휩쓴다.

납작 엎드린 전사들의 머리 위로 공기를 찢는 굉음이 훑고 지나갔다.

“뿌오오!”

이번엔 상아다.

미처 피하지 못한 바위 곰 전사가 온몸에 자연기를 둘러쳤지만, 무지막지한 체중을 실은 어금니는 방어를 우습게 찢어발겼다.

푸아악!

날카로운 뼈창에 복부를 꿰뚫린 전사가 더운 피를 울컥 뿜었다.

“반격해!”

쾅!

지면을 내리찍는 진각.

대지에 뿌리내린 다리가 막강한 힘을 전달한다.

산 허물기, 거목 쪼개기, 바위 부수기.

바위 곰 특유의 거력을 실은 강격이 짐승들을 덮쳤다.

뻐어엉!

가죽 푸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코끼리 몇 마리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부오오오!”

“?!”

산더미 같은 물체가 태양을 가렸다.

흙먼지가 날리고,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인간들을 짓밟기 위해 두 발을 들어 올린 전상은 설화 속 태양을 떠받쳤다는 거대 코끼리의 모습 그 자체였다.

“끝났어… 다 죽었다…….”

올려다본 하늘에선 바위기둥 두 개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저런 건 막을 수 없다.

망연자실한 바위 곰 전사가 시야를 꽉 채우고 떨어지는 발바닥을 넋 나간 얼굴로 바라봤다.

“크아합!”

푸콰카앙―!

쩌저적 갈라지는 대지의 균열 한가운데.

두 다리가 무릎까지 땅속에 파묻힌 남자가 전상의 다리 한쪽을 지탱하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실핏줄이 터진 눈자위가 새빨갛게 물들고,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핏줄은 팔 근육을 뚫고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암석을 통째로 깎아 만든 것 같은 등 근육이 전상의 앞발을 하늘로 밀어 올렸다.

“크아아아아!”

하늘이 내린 역사(力士).

너른 하늘이라도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

힘에 일생을 바친 남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쿠쿠쿵!

뒤로 밀려난 전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나뿐인 눈을 부릅떴다.

“후우우……. 전상, 내가 맡는다. 전사들, 다른 코끼리 막는다.”

“우오오오! 우둔한 땅 부 족장!”

용기백배한 전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투지를 불살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