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9화 (39/463)

39화

외톨이

《“어서 오십시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우려낸 보이차가 다탁 위에 올랐다.

은은하면서도 그윽하게 퍼지는 차 향이 접객당을 감싸 안는다.

차라고는 녹차 몇 종류밖에 접해보지 못한 문외한이지만, 향을 맡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중원에서 물 대신 들이켜는 것들과는 품종 자체가 다른 극상품이라는 것을.

과연 세인들이 보이차를 천하 10대 명차로 꼽는 이유가 있었다.

“대리의 보이차 밭은 수백 년간 대를 이어 가꾸어 온 하니족의 자랑이지요. 막 들여온 녀석이라 상당히 괜찮을 겁니다. 드시지요.”

이런 귀한 차를 언제 또 맛볼 수 있을까.

시간을 두고 찬찬히 음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점창제일검(點蒼第一劍).

점창고검(點蒼高劍).

사일검법(射日劍法)의 완성자.

그 영광된 칭호들의 장본인이다.

이런 거물과 일대 일로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 것인가.

후루룩 들이마신 차의 향 따위는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접견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듣던 대로 키가 큰 편은 아니었다.

무예를 모르는 중원의 평범한 백성들과 비슷한 정도의 중키.

평소에 쓸데없이 기운을 흘리지 않는다는 세간의 소문도 맞는 듯했다.

점창 제일의 검사인 걸 모르고 만났다면 그저 몸이 제법 단단한 문사(文士)라고 오인했으리라.

하얀 피부와 해사한 얼굴은 보면 볼수록 무인 같지 않았다.

“아닙니다. 제가 뵙고 싶었던 걸요. 여규입니다.”

친근한 미소와 함께 오른 주먹이 슥 앞으로 나왔다.

처음엔 뭔가 싶었다.

“아! 남만 야수족의 인사법이라는!”

마주 내민 주먹이 툭 부딪히자 처음 만났음에도 묘하게 친근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

격식 차리기 좋아하는 여타 정파의 고수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라는 실감이 왔다.

“흠… 그렇게 부르면 별로 안 좋아할 겁니다, 그들은.”

“그들… 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와족 말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명색이 정보를 다룬다는 자가 이런 실수를…! 그간 별생각 없이 그렇게 불러왔네요. 주의하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괴의를 대면했을 때도 와족이란 이름을 놔두고 남만 야수족이란 호칭을 사용했던 것 같다.

중원에서 흔히들 일컫는 대로.

그들의 입장에서 절대 듣기 좋은 말은 아닐 것이다.

야수족은 차치하더라도, 남만이란 단어에는 남방 민족들을 멸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까.

그토록 조심했건만, 나 역시 한족 특유의 오만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아직 멀었구나…….’

믿고 보내주신 월주께 면목 없는 일이었다.

“편히 이야기 나누죠. 딱딱한 건 영 질색이라. 그렇게 난처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와족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들으면 싫어할 친구가 떠올라서요. 와족이란 좋은 이름이 있는데 왜 그렇게 부르냐고 툴툴거릴 게 눈에 선하네요.”

“아뇨.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칭 부분, 신경 쓰도록 하죠. 한데 그 친구라는 분… 역시 수왕(獸王)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중화의 변방에서 튀어나온 풍운아.

천하를 여러 번 떠들썩하게 만든 화제의 인물이 아닌가.

그가 고검과 친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수왕은 무슨……. 그 무식한 놈한테는 너무 거창한 호칭입니다. 진짜 무식하거든요, 그놈.”

빙긋 웃는 미소가 환했다.

저토록 편히 칭할 수 있다는 것.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가까운 관계임이 분명했다.

반드시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접견 요청을 받아들인 이유부터 말씀드리죠. 돌려 말하는 것, 소질 없습니다. 핵심만. 월주 님의 서찰……. 문파에 몸담은 입장이라서 대놓고 응원하긴 힘들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려울지 몰라도, 언젠가는. 월주께 꼭 그리 전해주세요.”

이거면 충분하다.

구파에 몸담은 자가, 그것도 점창 제일의 검사로 칭송받는 이가 심정적인 지지를 보낸다고 말했다.

게다가 미래를 기약하는 ‘언젠가는’이라는 말.

숱한 곳을 돌았지만, 정파로 분류되는 자들 역시 공고한 기득권 계층일 따름이었다.

대놓고 배척하거나 밀고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인가.

오늘의 인연은 언젠가 하나의 불씨가 되리라.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손을 모아 진심을 담은 읍(揖)으로 마음을 표했다.

월주께서 흐뭇해하실 게 눈에 선했다.

“운남까지 내려오며 쌓인 피로가 모두 씻겨 내려가네요.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 듯했다.

전대의 점창제일검인 그의 아버지는 세간은 물론이거니와 몸담은 사문에서조차 배척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검(孤劍) 여휘 대협.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그가 옳았다.

자신이 세운 신념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던 위대한 무인.

그의 아들 또한 이처럼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좋아서 뵙자고 한 것인데요, 뭘. 그나저나… 접견 시간을 한 시진이라고 잡았는데, 일다경 만에 끝났군요. 이제 뭘 한다…….”

“듣고 싶습니다! 수왕과의 만남, 여행, 일화! 전부 다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정말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허어… 절 만나면 전부 다 그것부터 묻더군요. 비아, 그 해괴한 놈이 뭐가 그리들 궁금한 건지……. 알겠습니다. 시간을 꽉 채워 들려 드리지요. 음… 처음 만난 건 대리 부근 숲이었는데…….”

한 시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즐거운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는 고검의 모습은, 어린 시절 독기 어린 싸움닭이었다는 소문이 근거 없는 낭설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혼세록 대담 편

「점창고검 여규」

삭월 월목대원 태빈 著

* * *

빠악!

“큭…!”

마룡봉 뒤편에 자리한 점창파의 연무장.

어린 소년이 건장한 청년의 발아래 깔려 있었다.

모질게 두들겨 맞은 듯 자그마한 몸 곳곳에는 상처와 멍이 가득했다.

“지독한 새끼.”

퉤 뱉은 침이 소년의 등허리를 적셨다.

몸을 가눌 수도 없을 만큼 흠씬 구타당한 소년은 벌레처럼 꿈틀댈 뿐이었다.

“변절자의 아들이 뭘 잘했다고 끝까지 개겨? 네 애비가 점창에 끼친 피해를 생각하면 너 같은 놈은 당장 쫓아내도 모자라! 알아?”

일어설 힘도 없이 엎어져 있던 소년이 그 말에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 정작 아버지 앞에 서면 찍소리도 못할 병신 같은 새끼가……. 그리고 누가 뭐래도 아버진 아직까지 점창의 장로야. 이대 제자 주제에 그따위 말을 내뱉은 거, 나중에 감당할 수 있겠어?”

온몸을 걸레짝으로 만들지라도 눈빛 하나만큼은 훼손할 수 없다.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가 불굴의 의지를 담고 자신을 짓밟은 청년을 노려봤다.

‘뭔 애새끼 눈빛이…!’

소년을 내려다보던 청년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그의 화를 돋웠고, 이어지는 건 가혹한 구타였다.

“더러운 북방 오랑캐에게 충성을 맹세한 변절자가 장로는 무슨! 불쌍해서 파문을 안 시켰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이름이 파인 거나 다름없는 거 몰라? 자기도 그걸 아니까 수년째 돌아오지 않는 거지!”

퍽! 퍽!

“그리고 이 쬐깐한 새끼야! 사형한테 그게 어디서 나온 말버릇이야? 너야말로 감당할 수 있겠냐!”

퍽! 퍼억! 퍽!

‘윽! 크윽! 이 개새끼…!’

악에 받친 말이 목구멍까지 치달았지만, 내뱉진 못했다.

더 맞았다가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청년을 노려본 소년이 털썩 고개를 떨궜다.

“약해빠진 새끼가!”

하지만 청년은 구타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죽어! 죽어! 오늘 그냥 뒈져라!”

퍽! 퍼억!

“처, 청 사형! 그 이상 때리면 위험합니다! 규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테니 이쯤 하시는 게…!”

구타의 현장을 둘러싸고 관망하던 제자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규라고 불린 소년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다.

여규와 청목.

맞고 있는 소년과 때리는 청년이다.

청목이 발을 멈추고 앞으로 나선 소년을 노려봤다.

“이 새끼가 나한테 욕하는 걸 들었을 텐데? 너, 지금 이놈 편을 드는 거냐?”

분이 안 풀렸는지 청목의 눈에는 살벌한 기운이 번들거렸다.

“그, 그건 아니지만……. 너무 과한 것 같아서…….”

“호오……. 지금 이러는 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협박에 가까운 으름장이다.

아니, 이건 그냥 협박이 맞다.

말리기 위해 나섰던 소년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죄, 죄송합니다. 사형.”

또래의 소년을 딱하다 여길 동정심은 있지만, 한 발 더 나서 구해줄 용기는 없다.

까딱하다 찍히면 자신도 저 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청목에게 말을 건넸던 아이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계속해야지?”

청목은 기절해서 대꾸도 못 하는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명문 정파의 제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잔인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당장 그만두지 못해!”

청목이 발을 들어 올렸을 때, 분노한 목소리가 연무장을 쩌렁 울렸다.

인파가 쫙 갈라지며 청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놈이…! 음……. 유립이냐.”

청년의 얼굴을 확인한 청목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청목. 왜 시도 때도 없이 여 사제를 괴롭히는 거냐! 그 어린아이를 왜!”

사절단으로 파견됐을 때의 부드럽고 서글서글한 인상은 온데간데없다.

진심으로 화를 내는 공유립은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기세를 온몸에서 발산하고 있었다.

“크흠! 오해다, 유립아. 정당한 자유 대련을 했을 뿐이야. 이 녀석이 밀리는 게 억울했는지 나에게 대뜸 욕을 하더군. 사형한테 욕을 하는 사제를 가만 놔둘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안 그러냐, 다들?”

청목이 사방을 둘러싼 사형제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공유립도 눈동자만을 움직여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런 대꾸도 없는 가운데, 그와 눈이 마주친 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후우…….”

분노와 답답함을 담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알았다. 여 사제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테니 이쯤 하자. 내가 돌볼 테니 다들 돌아가.”

추궁을 한다고 해도 여규를 옹호하는 발언이 나올 리 없다.

호국영에서 청목으로 이어지는 파벌은 젊은 제자들을 꽉 잡고 있었고, 그들의 눈 밖에 나는 순간, 고달픈 생활이 펼쳐진다.

힘없는 젊은 제자들이 그들을 거역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서둘러 부상을 살피는 게 최선이다.

공유립은 반발을 허용치 않는 단호한 어조로 상황을 종결시켰다.

“뭐, 네가 그러자면 그래야지. 이 형편없는 녀석도 이 정도면 잘못을 뉘우쳤을 거고.”

기절한 여규의 얼굴을 발로 툭툭 건드는 청목의 태도에 공유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자.”

청목이 움직이자 주위를 둘러싼 점창의 제자들이 뒤를 따랐다.

몇몇은 공유립에게 미안한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꾸벅였지만, 대다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질 뿐이었다.

“후우…….”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이런 일을 목격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공유립이 기절한 여규에게 다가갔다.

* * *

“쿨럭, 쿨럭!”

한나절이 지난 야심한 밤.

죽은 듯이 엎어져 있던 소년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윽…!”

가파른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처럼 몸 여기저기 안 아픈 구석이 없다.

대련을 빙자하여 목검으로 북어 패듯 다져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뼈가 안 부러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괴롭힘은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처음엔 그저 무시하거나 뒤에서 수군대는 등 기분을 건드리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아버지가 점창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길어지자 차츰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꼴에 명문 정파랍시고 집단 폭력을 가하진 않지만, 자유 대련 때마다 사형들에게 돌아가며 쥐어 터진 지가 벌써 반년에 가까웠다.

“스승이 없어서 배울 데가 없을 테니 대련을 통해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개풀 뜯어 먹는 소리하고 있네. 망할 새끼들.”

소년, 여규의 입에서 명문 정파의 제자답지 않은 상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련을 빙자한 구타.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어폭력.

노골적인 따돌림.

무공수련과 학문연마를 방해하는 치졸한 짓거리들.

얼마 전엔 즐겨 읽던 서책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타다 남은 잔해가 발견된 곳은 밥 짓는 아궁이 밑이었다.

애지중지 아껴보던 책들이 모조리 땔감으로 불살라졌다.

“비열한 새끼들 같으니라고. 차라리 대놓고 지랄을 하든가.”

수년에 걸쳐 짙어지는 따돌림에 남은 건 악밖에 없었다.

“으윽…!”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도 몸의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집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겠는데.’

마룡봉 뒤편에 있는 자그마한 모옥이 여규가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다.

원 황실에 몸담기 전까지 여휘가 지내던 그곳은 조용히 지내길 좋아하는 그를 위해 사문이 내어준 거처였다.

여휘와 여규.

부자가 단둘이 지냈던 추억 어린 그곳은 이제 아들 홀로 쓸쓸히 생활하는 폐가나 다름없었다.

“일어났느냐?”

휘청대는 여규를 부축하는 손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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