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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0화 (40/463)

40화

“공 사형?”

선한 인상이지만, 굳게 다문 입술에서 강단이 엿보인다.

이십 대 초반의 말끔한 인상.

일대 제자 공유립이 엉망이 된 여규를 일으켜 세웠다.

“옮길까 하다가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깰 때까지 기다렸다.”

공유립의 얼굴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사형이… 치료를 해주신 건가요?”

몸을 내려다보니 얻어맞은 부위에 정성스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감촉으로 보아 약도 발라준 것 같다.

공유립은 아무런 대꾸 없이 자세를 낮추고 등을 돌렸다.

“업혀라.”

“아, 아니에요, 사형. 괜찮습니다.”

“처음도 아니잖느냐. 그래서야 걷다가 또 쓰러지고 말 거다.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업혀라.”

주저하던 여규가 머뭇거리며 몸을 맡겼다.

사박사박.

고요한 오솔길을 오르는 청년과 소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적막을 깬 것은 사형이 먼저였다.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느냐?”

일전에 만신창이가 되어 업혔을 때, 이 길 위에서 물었던 그 질문이리라.

“네. 아버지께 배우던 무학(武學)이 아닌 새로운 것을 접할 생각은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점창의 무공이라 해도요.”

“여 장로님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기초를 닦고 내공을 쌓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야. 어린 시절 짧게 배웠던 내용만 가지고 홀로 수련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스승을 바꾸는 건 여간해선 드문 일이다만, 여 장로님께서도 이해하실 거다.”

“구결과 초식, 내공의 운용과 심득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흡하여 아직 몸에 붙이지 못했을 뿐. 아버님 외의 분께 배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구나……. 안타까운 마음에 이야기를 꺼내긴 했다만,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정 뜻이 그렇다면 그리해야지.”

등에 업혀 물끄러미 달빛을 바라보던 여규가 전부터 궁금했던 부분을 묻기 위해 입술을 뗐다.

“왜… 저에게 잘해주시는 건가요? 사형.”

“잘해주긴. 사형이 사제를 챙기는 데 이유가 필요하더냐.”

“다들 저를 손가락질하지 않습니까. 변절자의 아들이라고.”

“너도 그리 여기느냐? 여 장로님께서 변절을 하셨다고?”

“아니요. 아버지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닙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가까운 사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창산에 계셨을 때의 여 장로님을 기억한다.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시지. 원 황실에 몸담기 전까지 그분께서 보인 행보 또한 그렇고. 나도 잘은 모르지만 분명 큰 뜻이 있는 결정이라 믿는다.”

여규가 등에 업힌 채 공유립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음성에서는 진실한 감정이 묻어났다.

결코 순간적인 위로를 위해 건네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사형은 정말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많이 힘들 거다. 외롭고 고통스럽겠지. 나는 잘 버텨주고 있는 네가 대견하구나.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때때로 내가 너를 보며 힘을 얻을 정도란다.”

“사형이 저를 보면서요?”

이게 무슨 소린가.

여규는 공유립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장문인의 아들로 남부러울 것 없는 처지이지 않나.

청목은 물론이고, 뒤에서 괴롭힘을 조장하는 그 가증스런 호국영조차 사형의 앞에서는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것을.

“이해가 안 되겠구나. 장문인의 아들인 네가 뭐가 아쉬울 게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냐, 그리 생각하겠지. 아니냐?”

속마음을 들킨 여규의 얼굴이 붉어졌다.

“후후. 그런 것이 있다. 서출이라는 출신 성분은 꽤 애매한 것이거든. 게다가 장문의 자리를 세습하려 하는 자들을 형과 아비로 두었다면 더욱 그렇지. 정작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는 그런 것 따위 아무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

열네 살.

총명한 머리를 타고났다 하나 복잡한 정치와 승계의 속사정을 들여다보기엔 벅찬 나이다.

여규는 그저 별걱정 없을 것만 같았던 유순한 사형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쓸데없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구나. 잊어도 된다. 내 너를 신경 쓰는 것이 알량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니 오해만 하지 말아라. 힘내란 뜻이다. 분명 언젠가는 여 장로님의 뜻을 모두가 알아주는 때가 올 것이다. 그릇된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정진해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도록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모옥의 앞이었다.

공유립이 내민 손에는 타박상에 좋은 약초가 들려 있었다.

“…….”

같은 사문임에도 적대적이거나 방관적인 태도만을 취하는 자들.

하지만 이처럼 아무 조건 없이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약초를 건네받은 여규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형. 살펴 가세요.”

사흘.

몸이 회복되는데 걸린 시간이다.

끙끙 앓아누웠던 여규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창산에서 멀리 떨어진 숲으로 향했다.

대리의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쪽의 고지대.

키 작은 나무가 드문드문 자란 숲에는 이리저리 흩어진 수련 도구들과 가느다란 나뭇가지 수십 개가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 계속 머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산에서의 수련은 고되다.

수련이 힘들다기보다는 시도 때도 없이 훼방을 놓는 사형제들이 문제였다.

원래는 허락 없이 산을 나올 수 없지만, 스승이 없고 동문들 사이에서도 겉도는 그를 위해 봉검 장로가 특별 허가를 내주었다.

장문인과 다른 장로들의 반발까지 무마시킨 대 장로의 조치 덕분에 여규는 이 숲에 있을 때만큼은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날카롭고, 예리하게.’

분광십팔수검(分光十八數劍).

점창을 상징하는 쾌검이다.

빛을 쪼갠다는 그 이름처럼 오직 속도에 모든 걸 내건 정파 최고의 쾌검식이며, 점창을 구파에 진입시킨 검술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소년이 취한 자세는 분광검의 그것이 아니었다.

수평으로 들어 올린 검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검 끝으로 목표를 노린다.

일직선으로 뻗은 왼팔과 손가락을 위로 세운 왼손.

왼손 손바닥은 표적을 향했다.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의 틈으로 바라본 나뭇가지에 가상의 일점이 찍혔다.

‘일수초현(日輸初現)!’

한 걸음 나가 있던 왼발에 모든 체중을 싣는다.

지난 몇 년간 매일 단련해 온 오른쪽 어깨가 검의 무게를 거뜬히 지탱해주었다.

쐐액―!

힘차게 내뻗은 찌르기 일격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목표를 관통했다.

‘후예만궁(后羿彎弓)!’

후예(后羿).

그 이름은 고대 신화 속, 해를 쏘아 떨어뜨렸다는 전설의 명궁을 일컬음이니.

여규의 손에 들린 검이 굽이쳐 흐르는 강물처럼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며 쏘아졌다.

파파팟!

검을 내뻗고 회수하는 동작의 틈이 보이지도 않는다.

땅에 꽂아둔 수십 개의 나뭇가지가 모조리 꿰뚫리며 부러져 나갔다.

훗날, 점창의 이름을 천하에 떨쳐 울릴 사일검(射日劍)이 아무도 모르는 변방의 땅에서 벼려지고 있었다.

‘응?’

수련에 몰두하던 여규가 미간을 찌푸렸다.

찌르기 일점에 몰입하며 날카롭게 갈아둔 감각, 그 경계의 거미줄에 무언가가 걸렸다.

홱!

하지만 휘돌린 시야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뭐지?’

점창을 대표하는 검, 분광십팔수.

여규가 분광검에서 취한 건 오직 하나, 검속뿐이다.

쾌검의 묘를 살리는 속도만을 떼어내 익히고, 초식이나 검형(劍形)은 제대로 수련한 적도 없다.

어설프게 익혀놓은 분광검이기에 그걸 토대로 겨루는 사형들과의 대련에선 번번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일검을 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천하를 헤매며 실전을 거듭한 그의 아버지, 점창제일검 여휘가 오랜 고뇌 끝에 창안한 검법의 정수인 것이다.

사일검에 맞는 내공의 운용이 여규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어!’

오직 찌르기 하나만을 위해 예리함에 특화시킨 감각이 말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숨어서 그를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고.

그리고 그건 절대 짐승 따위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데 못 찾는다? 이럴 수가…!’

커다란 나무나 수풀이 우거진 지형이 아니다.

시야가 트인 야트막한 숲일 뿐이다.

한데 찾을 수가 없다니!

무복의 등 부근을 천천히 적시는 건 긴장을 머금은 식은땀이었다.

“숨어 있는 걸 안다! 여긴 점창의 영역이야! 허락받지 않은 자, 무단 침입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무인의 수련을 엿보다니 즉참해도 할 말이 없을 터!”

작은 움직임 하나면 충분하다.

반응을 보여라.

순식간에 꿰뚫어 줄 테니.

여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스슥-

왼편 나무의 허리께!

미약한 움직임이 일었다.

“거기냐!”

가장 많은 수련을 거듭한 사일검의 일초식 일수초현이 공기를 찢었다.

쾌애액―!

“어엇?!”

놀람 섞인 외마디소리가 터져 나왔다.

위치를 제대로 잡은 것이다.

‘죽이진 않아.’

어느 한 곳을 꿰뚫어서 제압한 후 창산으로 끌고 간다.

첫 실전이지만 여규의 손속은 거리낌이 없었다.

촤악!

‘피해?!’

제대로 찔러 넣을 생각이었다.

한데 긁힌 생채기뿐이라니?

당황해선 안 된다.

바람처럼 이동한 두 발, 여규가 찰나 만에 적의 좌측 공간을 점했다.

‘후예만궁!’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전력을 다한다.

궤적을 예측할 수 없도록 사방을 빼곡히 채운 검의 그물이 정체 모를 적을 뒤덮었다.

“멈춰! 싸우자는 거 아냐!”

적은 다급한 외침을 쏟아내며 스르륵 유연하게 기동했다.

이리저리 흐르는 보법(步法)은 손닿지 않는 구름이요, 종잡을 수 없는 몸놀림은 너울너울 춤추는 낙엽이다.

몸의 중심이 시시각각 변하며 타점을 흩뜨리자, 쏟아진 찌르기 연격이 허무하게 허공을 쑤셨다.

“이익! 그만하라고!”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무두질한 가죽을 대충 걸친 저 행색!

그제야 두 눈에 담은 적은 운남에 퍼져 산다는 토착부족이 틀림없었다.

‘점창의 영역을 몰랐을 리 없지. 목적은 모르겠지만 명백한 침입자다!’

일수초현과 후예만궁으로도 잡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아직 미숙하지만…!’

진기를 집중한 검이 살아 있는 듯 빠르게 진동한다.

빛을 비껴내며 날아드는 어둠의 엄습!

파괴력을 극대화한 찌르기 일격이 빛을 지웠다.

‘사양무광(斜陽無光)!’

콰아앙!

관통이라기보다는 폭발이다.

검이 꿰뚫은 나무의 중심이 움푹 응축되는가 싶더니 거칠게 터져나갔다.

‘또 피했…!’

빠악!

시야의 밖에서 날아든 발차기가 여규의 턱을 사정없이 올려 찼다.

의식을 날리기에 충분한 한 방이었다.

“후우우……. 위험했네. 그러게 그만하라니까!”

몸 여기저기를 검에 긁힌 소년이 여규를 내려다보며 빽 소리 질렀다.

마른 비. 그리고 여규.

와족 소년과 점창 소년의 시간이 포개진 순간이었다.

조우

은빛 여우는 한 달여 만에 돌아와 마른 비의 흔적을 뒤쫓고 있었다.

그가 맡은 다른 아이가 늪지대의 적섬여(赤蟾蜍)를 잘못 만졌다가 사경을 헤맸기 때문이다.

붉은빛이 감도는 두꺼비는 딱 보아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토록 일렀는데 그걸 왜 만진 거야?!’

천년의 세월 동안 운남의 자연에 적응해 온 와족이다.

운남에는 온갖 종류의 독충과 독사들이 득시글대지만, 와족 후예들의 핏속엔 웬만한 독 따윈 무시할 수준의 강고한 저항력이 뿌리내렸다.

구향동굴(九鄕洞窟)의 사람거미나 곡정(曲靖)의 쌍두사(雙頭蛇)처럼 특별한 놈들이라면 모를까.

육체가 완성되고 자연기의 성취가 깊어지면 적섬여의 독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녀석, 분명 비아랑 동갑이었지.’

하지만 열다섯.

내독성이 발현되기에는 이른 나이다.

아니, 이 주일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가 살아난 걸 보면 다행히 그 씨앗은 움튼 상태였나 보다.

아이가 기운을 차린 걸 확인하자마자 은빛 여우는 마른 비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방향은…!’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몇 번을 확인해도 마른 비가 남긴 흔적은 대리를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이대로 쭉 가면 점창파의 세력권에 들어서는데……. 예전에 알력이 있었고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그쪽으로는 가지 말라 일렀거늘.’

교육시간 중 여러 차례에 걸쳐 숙지시킨 내용이다.

‘방위를 가늠하는 법도 가르쳤으니 방향을 잘못 잡았을 리도 없는데…….’

왜지? 왜 이리로 간 걸까.

은빛 여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 비아 이놈, 교육에 들어온 적이 없구나!’

마른 비는 모른다.

두 집단이 과거에 다투었다는 사실도, 현재 긴박하게 흘러가는 상황도.

심지어 방향을 가늠하는 법조차.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버지 하늘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사색이 된 은빛 여우가 다급하게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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