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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1화 (41/463)

41화

키 작은 나무들이 늘어선 숲 속.

고지대에 위치한 지형 덕분에 사방이 탁 트인 곳이다.

시야가 닿는 대부분의 장소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그곳에서, 마른 비는 입을 떡 벌린 채 붙박인 듯 서 있었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확장된 동공이 난생처음 보는 풍경을 담아냈다.

‘세상에 저렇게 생긴 바위가…!’

칼로 자른 듯 네모진 백색 암석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고목만큼이나 높게 쌓인 돌들이 하나로 연결된 채 쭉 이어지며, 인간의 마을로 보이는 군락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건 마치 바윗덩이로 쌓은 높다란 담장 같았다.

빈틈없이 이어진 돌들의 동서남북에는 출입구로 보이는 문들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또한 웅장하고 화려했다.

대리고성(大理古城).

과거 대리국의 도읍을 휘감은 성벽은 야생이 우거진 천혜의 땅에 오롯이 선 순백의 방벽이었다.

“세상에…!”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성문마다 3층 높이의 푸른 전각이 놀라운 위용을 뽐낸다.

멋들어진 집들과 세련된 필치로 장식된 현판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세 개의 첨탑은 고개를 한참이나 꺾어야 그 끝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웅장함은 마치 하늘과 땅을 점거한 운남의 대자연에게 이곳은 인간의 영역이라고 선포하는 듯했다.

“이걸 전부… 인간이 만든 거야?”

마른 비가 성벽 안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두 눈에 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오색빛깔의 옷들은 부족원들이 입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곱고 부드러워 보였다.

형형색색의 지붕과 높다란 전각들.

깔끔하게 정비된 길 위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제각각의 생김새를 지닌 인간들이 자유로이 거닐며 복잡한 궤적을 땅 위에 그려내고 있었다.

도시.

그믐 할아범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도시가 분명하다.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을 처음 접한 소년은 그 장엄함에 압도된 채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허억, 허억…!”

은빛 여우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내달려왔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낸 초장거리 전력 질주에 허파가 튀어나올 듯 펄떡였다.

소리를 숨겨야 함에도 터져 나오는 숨소리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쿨럭, 카악…! 이 대책 없는 꼬맹이가…!”

그나마 다행인 건 마른 비가 짐승들과 겨루며 천천히 이동해온 덕에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은빛 여우는 몰랐지만, 화통달과의 만남이 마른 비의 이동 거리를 더욱 줄여놓았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짧은 거리가 아니라는 점엔 변함이 없다.

야트막한 산 세 개와 강 두 개, 숲 하나 정도?

한나절 만에 그 모든 지형을 주파한 은빛 여우는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억, 컥! 빌어먹을…… 토하겠네! 결국 대리까지 와버렸군. 후우… 이를 어쩐다?”

마른 비가 저 앞에서 얼빠진 얼굴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놀랐을 거다.

자신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원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대리국이 도읍으로 삼았던 대리고성.

원시에 가까운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와족의 아이들로서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풍경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고. 저 녀석, 점창파와 마주치면 곤란해질 텐데.”

난감한 상황에 놓인 은빛 여우의 고민이 깊어지거나 말거나 생애 처음 도시를 마주한 마른 비는 눈길을 사로잡는 찬란함과 압도적인 규모에 취해 있었다.

파삭!

무언가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소년을 둘러싼 세계의 껍질이 깨졌다.

‘문명……!’

경험해보지 못한 걸 그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야기로는 무수히 들었지만, 실제 목격한 도시는 상상했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모습으로 마른 비에게 다가왔다.

갑작스레 가해진 충격에 뇌가 아릿할 정도다.

직접 두 눈에 담은 문명이란 완전히 다른 세상의 어떤 것이었다.

‘더 보고 싶어!’

소년의 세계가 변하고 있었다.

세월을 축적해 빚어낸 인간 문명의 정수를, 더욱 광대한 세상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하고 싶다.

목마른 갈망이 마른 비의 젊은 가슴에 꺼지지 않을 불씨를 피워 올렸다.

‘응?’

마른 비의 의식을 제자리로 끌어당긴 건 야생에서 느껴보지 못한 이질적인 기의 준동이었다.

‘자연기?’

아니다.

야생의 기운, 날 것 그대로의 호흡에 기대어 자연의 힘을 빌려 쓰는 부족의 그것과는 상이한 감각이었다.

냄새가 다르다고나 할까.

자연기를 끌어와 성질이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킨 듯 현격한 차이가 느껴졌다.

‘뭐지, 이게?’

색다른 경험의 연속이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마른 비가 홀리듯 이끌렸다.

마른 비를 지켜보던 은빛 여우가 속으로 소리쳤다.

‘안 돼!’

이 기운.

내공(內功)이라 했던가.

자연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한족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고안한 자연기의 운용법이다.

자연기를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동일하지만, 그들은 그 성질을 내부에서 변화시킨다.

그리고 신체의 특정 지점, 주로 배꼽 아래 부근에 축적해놓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사용하는 것이다.

미숙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이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진보를 이루어냈다.

정제(精製)가 그것이다.

기나긴 시간을 들여 원하는 성질의 기운만을 뽑아내 쌓아나간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불순물을 걸러내는 작업인데, 그렇게 여과한 기운은 특정 성질에 특화된 순도 높은 기운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믐은 이를 두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헛짓거리라고 코웃음 쳤지만, 생각처럼 녹록지 않음은 30년 전의 전쟁이 방증하고 있다.

지금 마른 비가 이동하는 방향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점창파 특유의 정제된 내공이 분명했다.

‘미치겠군. 나서서 말릴 수도 없고.’

속이 터지지만 은빛 여우가 취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절대 개입 불가.

어떤 경우에도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심란함을 누르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가 마른 비의 뒤를 쫓았다.

‘어라? 사람이었어?’

기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건 낯선 행색의 소년이었다.

생김새가 운남의 소수부족들과는 달라서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마른 비 자신보다도 한두 살은 어린 것 같았다.

상대가 바람을 먼저 맞도록 위치를 잡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호흡을 멈춘다.

그리고 지형을 살폈다.

낮은 나무들밖에 없는 자그마한 숲이지만, 마음먹으면 숨을 곳은 널렸다.

상대를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곳.

하지만 상대방의 시야는 제한되는 곳.

지형의 결을 따라 소리를 죽이고 미끄러진 마른 비가 작달막한 나무의 중간에 찰싹 달라붙었다.

파파팟― 퓨퓩! 콰지직!

‘와…! 대단한데?’

검 끝이 표적으로 세워 놓은 나뭇가지들을 정확히 관통한다.

자신의 팔다리도 아닌 긴 철 막대기로 저렇듯 섬세한 움직임이 가능하다니!

괴의를 습격했던 암살자들의 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문명이 낳은 도시에 이어 또 하나의 놀라운 광경이었다.

‘웬만한 맹수보다 훨씬 위험하겠어.’

홀로 검을 휘두르는 정체불명의 소년에 대한 솔직한 감상이었다.

‘저게 나를 향한다면… 구름 걷기로 발을 움직이고, 동시에 낙엽 가누기로 몸을……· 엇?!’

소년에게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각을 세우고 급격히 확장됐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감각의 범위를 넓힌 게 틀림없었다.

마른 비가 은신에 집중했다.

‘나무의 호흡.’

몸을 맡긴 나무와의 일체화.

옅게 새어 나가던 마른 비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와!”

‘이런, 들켰네.’

생각보다 감이 좋은 아이였다.

한 번 존재를 들키자 화선지에 찍힌 작은 먹물처럼 지워지지 않는 감각의 흔적이 남았다.

정확한 위치는 잡아내지 못하지만, 누군가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무인의 수련을 엿보다니! 즉참해도 할 말이 없을 터!”

‘아, 보면 안 되는 거였나?’

마른 비가 중원 무인들의 불문율을 알 리 없다.

어찌 됐든 상대에게 불쾌함을 주었으니 사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숨어 있으면 상황은 점점 악화될 게 뻔했다.

스윽-

오해를 풀기 위해 마른 비가 몸을 드러낸 순간.

쐐애액―!

“어엇? 멈춰! 싸우자는 거 아냐!”

날카로운 찌르기가 날아든다.

속도, 정확성, 파괴력.

모두 상당하다.

지난 반년 간 맹수들과 싸우며 단련하지 않았다면 무척이나 고전했으리라.

상대의 공격 방식을 미리 살펴본 것도 큰 도움이 됐다.

“멈추라니까!”

어렵사리 피해내며 그만하라 외쳤지만, 상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익! 이게 진짜! 그만하라고!”

우우웅―

‘엇? 이건 위험해!’

솜털이 바짝 곤두설 정도의 첨예한 예기!

속도와 변화에 주력했던 전과 달리 막대한 기운이 응집되는 게 느껴졌다.

상대는 전력으로 자신을 쓰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반격해야 해!’

낙엽 가누기로 몸을 젖히고, 구름 걷기로 내디딘 발은 대지의 결을 밟았다.

패애애액―!

섬뜩한 파공음이 귓전을 스친다.

상대의 맹공을 비껴내며, 마른 비는 전진했다.

콰아아앙!

몸을 맡겼던 나무가 통째로 터져나갔다.

굉음이 울려 퍼질 때, 마른 비는 상대의 품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하앗!”

퍼어억!

시야의 사각에서 뻗어 나간 초근접 날짐승 떨구기가 여규의 턱에 작렬했다.

노장

운남 사모(思茅).

대대로 다양한 품종의 차를 재배해 온 차의 명산지다.

특히나 운남 홍차로 알려진 전홍(滇紅)의 그윽한 향은 중화인들의 까다로운 취향을 단박에 만족시키며 최고의 명차로 취급받아 왔다.

하지만 사모 일대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운남의 소수부족이라면 보이차를 최고로 친다.

대리의 하니족을 포함하여 운남 각지에서 보이차를 생산하고 있지만, 그 기원은 이곳 사모의 공명산(孔明山)이기 때문이다.

고대 삼국, 운남 원정을 단행한 제갈무후(諸葛武侯)는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데다 눈병까지 번져 더 이상 행군이 힘들어진 병사들을 치유하고자 했다.

신기하게도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바위에 꽂자 금세 차나무로 자라났고, 그 잎을 달여 마신 병사들은 기력을 회복하고 눈병도 낫게 되었다.

보이차 나무가 운남에 처음 심어진 순간이며, 보이차를 달리 공명차(孔明茶)라 일컫는 이유였다.

‘제갈공명이란 한족 놈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도 됐나 보지? 웃기지도 않는 소릴.’

사당까지 지어서 제갈무후를 기리는 순진한 부족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믐은 그런 허황된 이야기 따위 믿지 않았다.

‘보나 마나 강고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어낸 한족 놈들 특유의 거짓부렁이었겠지. 순진한 소수부족들은 홀라당 넘어간 거고. 맹획(孟獲), 그 멍청한 놈이 일곱 번이나 패하는 바람에!’

고대 운남을 지배했던 남만왕(南蠻王)이 무능한 멍청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맹획이 칠종칠금의 고사를 남기고 충성을 맹세한 이래, 제갈량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신적인 존재로 격상됐다.

특정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대상이 한족이라는 게 그믐의 심사를 더욱 뒤틀리게 했다.

그믐은 보았다.

드넓은 북쪽 땅을 지배해온 한족들의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을.

지난 20년간 중원과 운남을 넘나들며 마주친 인간 군상들은 무구한 운남의 소수부족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물론 좋은 이들도 있었다.

아니, 대다수의 한족들은 운남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처럼 선량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믐이 보고, 듣고, 만났던, 힘을 갖춘 한족들의 대부분은 만족이라는 덕목을 몰랐다.

저 점창파가 그렇듯이 말이다.

‘산 이름도 마음에 안 들어. 공명산은 얼어 죽을!’

제갈량이 머리에 걸친 관(冠)을 닮았다 하여 공명산이다.

점점 윤곽을 드러내는 점창파의 야욕 때문일까.

평소에는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던 산의 이름마저 못마땅했다.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그믐이 화풀이하듯 땅을 퍽퍽 내리밟았다.

‘할아범도 슬슬 오락가락하나? 하여튼 알다가도 모를 분이라니까.’

몸을 숨긴 채 그믐을 호위하던 수리의 눈 전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차를 홀짝이다가 갑자기 성질을 내는 그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염병할, 그래도 차 맛 하나는 오지게 좋구먼.”

진정한 차의 시조(始祖)가 운남 소수부족들이 믿는 것처럼 제갈량인지, 아니면 한족들이 이야기하는 신농씨(神農氏)인지 그따위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싹 다 마음에 안 들지만 숙성되어 우러나오는 이 향만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부글부글 끓는 그의 속을 진정시키고 붙들어주는 건, 뿌연 김이 올라오는 한 잔의 보이차뿐이었다.

그가 막 찻잔을 입으로 가져갈 때,

『찾았습니다! 할아범!』

또렷한 언령이 그믐의 귓가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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