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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42화 (42/463)

42화

위치를 잡아냈는가.

비로소 움직일 때다.

마음이 급했지만, 그믐은 재차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생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가자. 전사들은 그대로 대기하라고 일러라.』

『……·혼자 가실 생각입니까?』

『저딴 조잡한 짐승들 때려잡는데 우르르 몰려갈 필요가 있나. 나한테 맡기고 지시가 있기 전까지 전원 대기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켠 그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신형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순식간에 공명산을 빠져나갔다.

“찾았군.”

공명산 근방의 큰 산 하나를 넘자 새까만 구름이 시야에 잡혔다.

야트막한 숲 위를 지나는 그것은 숫자를 헤아리기도 힘든 까마귀 떼였다.

그믐이 아련한 눈으로 반나절 전에 본 기낙족(基諾族) 마을을 떠올렸다.

청죽림을 빠져나와 까마귀 떼가 최초로 습격했다는 태족 마을로 내달렸으나, 상황은 오래전에 끝나있었다.

수리의 눈 전사가 와족 마을로 달려온 게 이미 습격을 받은 시점이었으니 당연하다.

흔적을 뒤쫓았고, 몰살당한 두 개의 마을을 더 발견했다.

마지막 마을은 차밭을 일구며 근근이 살아온 기낙족의 본가가 있는 곳이었다.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모조리 살점이 뜯긴 채 처참한 시신만이 남아있었다.

그믐이 짙게 분노했던 이유다.

‘까마귀가 무리를 지어 인간 마을을 습격하다니. 마치 황충(蝗蟲)의 대이동 같지 않은가.’

간혹 운남 동남부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메뚜기 떼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그 작은 곤충들은 지나는 경로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모조리.

까마귀 떼가 지나간 흔적은 마치 황충의 대이동 때와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생명체, 특히 사람을 집중적으로 노렸다는 점이겠군.’

상황을 되짚어 볼수록 수상하다.

기나긴 운남의 역사 중 이런 기이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다양한 종류의 짐승들이 서로 모의라도 한 듯 동시다발적으로 인간을 습격한다고?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믐은 일련의 사태가 점창파의 짓임을 확신했다.

아직 그 방법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여전히 이동 중이군. 다음 마을을 습격하러 가는 건가.”

만약을 대비해 놈들의 이동 경로에 있는 마을에 수리의 눈 전사를 파견해두었다.

자신이 까마귀 떼를 막는 동안 그가 부족민들을 대피시킬 거다.

직접 나선 이상 만약이라는 경우가 발생하도록 놔두지 않겠지만,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인간 마을을 덮친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지 않나. 지능이 발현된 녀석이 우두머리로 있다면 좋았으련만.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해볼 텐데.”

수많은 까마귀 중 한 마리도 수식어가 붙거나 이름을 획득할 정도로 강한 녀석이 없다.

그 정도 되는 놈들은 자아를 획득하고 상황과 사물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다짜고짜 싸우기보다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시커먼 놈들을 멈춰 세울 수도 있지 않을까.

부질없는 아쉬움이었다.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원 없이 싸우겠구나. 놈들이 두려움에 질려 흩어질 때까지 사정 봐주지 말고 쓸어버려라.”

뒷짐을 진 그믐의 눈에 짙푸른 자연기가 어렸다.

“가라. 어둔 날개.”

“삐이익!”

커다란 잿빛 생명체가 그물처럼 덮인 숲을 헤치며 쏜살같이 치솟았다.

날개를 활짝 펴니 안쪽에 숨겨진 검은 깃털이 드러나며 바야흐로 어둠이 열렸다.

밝은 태양 아래 짙게 드리운 칠흑의 장막은 놀랍도록 이질적이었다.

“사십여 년 전에는 이 일대의 하늘이 모두 네 것이었지. 보여줘라. 네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어둔 날개는 그믐에게 패하기 전까지 사모 일대를 지배했던 밤의 제왕이었다.

표범? 호랑이? 곰?

그따위 것들이 감히 맹수를 칭하는가.

한쪽 다리면 족하다.

낚아채서 사지를 찢어발기는 데는.

시야에 들어온 생명체는 모두 먹잇감일 뿐이었다.

펄럭이는 날개가 난데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몸을 수평으로 세운 창공의 지배자가 하루살이만도 못한 까마귀 떼에게 짓쳐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드는 어둠은 사모 일대에 두고두고 회자 될 격전의 서막이었다.

“다 좋은데 올빼미가 왜 ‘삐이익-’ 하고 우는 게야? 내 반려수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구먼.”

어둔 날개가 체면을 구기는 순간은 오직 그믐이 중얼거릴 때뿐이었다.

“까악! 까악!”

까마귀 떼가 날아드는 어둠을 감지했다.

웬만한 녀석들보다 곱절은 큰 외눈박이 까마귀가 하늘 꼭대기에서 공격을 명했다.

“삐이익―!”

수백? 수천?

몇 마리가 모여 있든 알 바 아니다.

보이는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어둔 날개의 발톱이 활공하는 궤도를 따라 대기를 길게 찢었다.

종잇장 같은 날개들이 반 토막 나고, 새까만 깃털들이 사모의 하늘을 뒤덮었다.

종횡무진 하늘을 누비는 어둔 날개는 양떼에 뛰어든 늑대나 다름없었다.

“까아악!”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외눈박이의 울음을 따라 새까만 녀석들이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투퍼벅- 퍼벅-!

몸으로 부딪는 수백의 까마귀 떼가 어둔 날개의 비행을 방해한다.

날아오를 공간을 차단한 채 덮쳐든 녀석들이 어둔 날개의 몸 곳곳에 달라붙었다.

유일하게 우위에 있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숫자뿐이다.

제아무리 강대한 녀석일지라도 날개를 봉쇄하면 추락할 수밖에 없으리라.

개미 떼처럼 징그럽게 달려든 까마귀들이 어둔 날개의 양 날개에 눌어붙었다.

“삐익?!”

질량이 무게를 만든다.

움치고 뛸 공간도 없이 어둔 날개를 빽빽하게 둘러싼 까마귀 떼의 모습은 하늘 한복판에 떠오른 시커먼 태양 같았다.

무게에 눌리고 날개를 움직일 공간조차 확보하지 못한 어둔 날개가 지상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이 잡것들이!

빽빽하게 몰려든 놈들 때문에 숨도 쉬기가 힘들다.

징글징글하게 달라붙은 까마귀 놈들은 제 목숨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호흡이 벅찰 정도로 사방이 막혀버린 구(球)의 안쪽.

어둔 날개의 눈동자가 푸른빛을 품었다.

여타의 반려수들처럼 빌려 쓰는 자연기가 아니다.

사십여 년 전 그믐을 만나기 전부터 어둔 날개는 자연기의 활용을 스스로 깨닫고 자유자재로 구사 가능했다.

육신 곳곳에 잠들어 있던 대자연의 기운이 고개를 들고, 어둔 날개의 몸에 무한의 공능을 불어넣었다.

“삐아악―!”

하늘을 메우는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새까만 구가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떨어져 내리는 속도와 휘도는 회전력이 달라붙은 놈들을 떼어낸다.

외곽부터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까마귀들이 입으로 베어 문 것처럼 뭉텅뭉텅 뽑혀 나와 허공으로 내던져졌다.

헐거워진 압박, 가벼워진 무게.

알을 깨고 나오듯 힘껏 휘저은 날개가 육신에 달라붙은 피식자(被食者)들을 우악스레 떨쳐냈다.

다 까불었나?

그럼 이제 죽을 시간이다.

도도히 펼친 날개가 칠흑의 장막을 재현했고, 추락했던 어둠이 포식자의 포효를 떨쳐 울리며 고공으로 비상했다.

쏟아지는 햇살을 가르는 어둔 날개의 뇌리에 상념이 스쳤다.

‘아니 글쎄, 고속이동을 하더라니까. 원숭이 놈이?’

‘네 발로 지면을 탕! 박차는데, 움직이는 게 보이지도 않더라고!’

‘족장님도 달려드는 순간의 속도는 잡아내지 못해서 선회하는 틈을 노렸어!’

얼마 전, 괴후 토벌전에 다녀온 인간들의 대화였다.

회의장 지붕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코웃음 쳤다.

괴후?

갓 수식어가 붙었다가 토벌된 어설픈 원숭이 놈?

고속이동?

날개가 없어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놈들이?

보여주마.

맹수로서 지니는 격의 차이를.

창공을 지배하는 맹금의 가공할 비행속도를!

귀찮은 놈들을 떨궈 내고 하늘로 치솟은 올빼미가 날개를 활짝 폈다.

상공을 흐르는 기류를 타고 정지 상태에 가까운 체공이 이어진다.

잠시 기억을 훑은 어둔 날개가 저 아래 위치한 까마귀 떼를 내려다봤다.

스르륵 흘러내리듯 유연한 낙하 비행이 시작된다.

바람을 거스르는 날개를 몸통에 붙이니 차츰 가속도가 붙었다.

어둠이 깃 속으로 숨고, 잿빛 궤적을 그리는 거대 비조의 하강이 검은 구름을 덮쳤다.

패애애애액―!

와족 전사들의 철골을 아득히 능가하는 뼈의 강도.

강피보다도 단단한 가죽과 근육.

날짐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무게와 덩치.

가지고 태어난 모든 것이 흉기다.

급기야 반백년 쌓아 올린 자연기로 몸을 감싸니, 하강하는 어둔 날개는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잿빛 운석이나 다름없었다.

투버버버버벅!

둔탁한 충돌음이 사모의 하늘을 울리고, 맷돌로 갈아낸 곡식 낱알처럼 검은색 깃털과 붉은색 고깃덩이들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린다.

고속 비행하는 어둔 날개는 거신이 던져낸 돌팔매나 다름없었다.

까마귀 떼를 폭죽처럼 터뜨리며 사모의 하늘에 붉은 구름을 피워 올렸다.

“까악, 까아악-!”

궤도에 발이라도 걸치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

죽은 새끼들에 대한 복수와 혹시나 살아 있을 어린 것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일념은 조막만한 뇌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손쓸 도리 없는 괴물이 주는 무저갱 같은 공포가 가련한 피조물들의 생존 본능을 일깨웠다.

두텁게 뭉쳤던 까마귀 떼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까아아악!”

외눈박이 우두머리의 외침도 아무 소용이 없다.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는 녀석들은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우두머리답게 지능이 조금이나마 발달했던 걸까?

금수답지 않게 또렷한 눈동자에는 심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떠올라 있었다.

허탈함. 그리고 처연함.

외눈박이 녀석은 분명 이 상황을 애통해하고 있었다.

“깍?!”

그늘이 드리운다.

까마귀 무리를 헤집어놓은 괴수가 머리 위에서 저주스런 날개를 편 채 외눈박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 악!”

부르르 떨리는 몸체에서 억누를 수 없는 공포가 새어 나왔다.

볼 수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공격을 퍼붓던 상대다.

마주친 순간부터 대적은 고사하고 도망조차 불가능했던 것을.

콰악!

새끼들을 향한 애끓는 심정에 외눈박이가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었지만, 어둔 날개는 두 발로 녀석의 날개를 간단히 움켜쥐었다.

장막 같은 깃을 펄럭이며 체공 상태를 유지하는 어둔 날개와 외눈박이가 잠시 서로를 마주봤다.

길지만 짧은 시간이 지나고, 두 날짐승의 길이 갈렸다.

한 마리는 그를 기다리는 따스한 벗에게.

다른 한 마리는 차가운 대지 위로.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외눈박이를 보며 어둔 날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짐승을 부리는 게 사실이었다니!’

나무 위, 힘차게 뻗은 가지들과 무성한 잎사귀 사이에 몸을 숨긴 진섭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10년 전, 점창파의 파격적인 개문(開門)으로 중원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수많은 무인들이 운남 땅에 발을 디뎠다.

정도의 길을 걷는 자들에 한해 문을 열어준 것이지만 유례없는 일이었다.

천하 구파에 소속되고 싶은 자들이 줄지어 창산에 올랐다.

거부된 자들도 많았지만, 상당수가 꿈에 그리던 구파의 문지방을 넘게 된 것이다.

비록 진신절기를 배울 수 없는 삼대 제자의 신분이라지만 그게 어딘가.

구파에 속한 문파답게 체계를 갖춰 쌓아 올린 무공들은 기본공일지라도 그 효능이 탁월했다.

무엇보다 점창파란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게 되었으니 더 이상 황야를 서성이는 이리처럼 무림을 헤매다 죽어갈 일도, 같잖은 사파의 방파에게 시비가 걸려 억울하게 당할 일도 사라진 것이다.

절대다수의 무인들은 점창파에 몸담게 된 것이 천운이라 여겼다.

‘허황된 이야기라 여겼는데…… 저 야만인들은 정말로 짐승을 부리는구나!’

사모 일대는 운남 곳곳에서 전개된 짐승 유인 작전 중 가장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다.

전원이 삼대 제자로 구성되었다지만 일, 이대 제자 중 실전 경험이 없는 어설픈 자들보다는 그들이 훨씬 뛰어나다.

점창파에 입문하기 전, 최소 수년씩을 무림에서 구르다 온 노련한 무인들이기 때문이다.

놀랄 만한 일은 볼 만큼 보았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경악에 사로잡혀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군. 어떻게 저게 짐승의 움직임이란 말인가…!’

저 올빼미를 부리는 노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가만. 한데 그 노인… 분명 어디선가…….’

경이적인 공중전에 시선을 빼앗겼던 진섭이 눈을 크게 떴다.

그자다!

출정하는 날, 장문인이 초상화를 보여주며 신신당부했던 그자!

회효라는 괴상한 이름의 야만 부족 장로!

‘그자가 확실해!’

진섭의 고개가 노인이 있던 쪽으로 홱 돌아갔다.

‘엇! 없어?!’

놀란 건 한순간이었다.

곧 서늘한 음성이 등을 타고 올라와 진섭의 목덜미에 차갑게 눌어붙었다.

“날 찾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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