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이, 이럴 수가! 어느새!’
진섭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요동쳤다.
은신이 발각된 것보다 적이 뒤를 잡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더 충격적이다.
무인이 등을 내주었다면 이미 목숨을 넘겨준 것과 마찬가지.
어찌할 것인가.
‘저항하면… 죽는다! 대화를 시도해? 아군이 틈을 노릴 때까지 시간을 끌까?’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무인의 본능이 이성을 앞질렀다.
검갑을 쥔 왼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간다.
엄지가 검격(劍格)을 밀어 올리고, 오른손이 검의 손잡이를…!
“그러지 않는 게 좋아.”
“큭…!”
의지를 벗어난 신음이 멋대로 입술을 비집었다.
악다문 이는 죽음의 문턱을 서성이는 자의 초조함이다.
검을 뽑는 순간, 아니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확실히 죽는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살려준다는 보장 따윈 어디에도 없다.
식은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네놈들 짓이지?”
“…….”
“피 보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예전에 지긋지긋하게 봤거든. 대답 여하에 따라 살려줄 수도 있다.”
위협이나 살기를 띤 협박이 아니다.
그냥 담담하게 말을 건네올 뿐.
그래서 더 무섭다.
등 뒤에 있는 노인에게 살인이란 특별한 일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저 필요에 따라 실행 여부를 결정하기만 하면 되는 일인 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하고자 하면 누구도 막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포괄적인 질문이리라.
짐승들을 유인한 방법, 소수부족들에게 땅을 넘겨받게 된 경위, 와족을 향한 적대적 행동…….
수많은 내용들이 뇌리를 스쳤다.
답을 주고 싶다.
살고 싶다.
아니, 살려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싶다.
하지만 제 목숨 하나 건지고자 입을 열 순 없다.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이라지만, 그리 살아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제는 어엿한 대 점창의 일원이 아닌가.
“날 뭐로 보는가! 내게 답변을 들을 수는 없…!”
“그렇군.”
빠악!
경쾌한 타격음이 울리고, 진섭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쿵!
“안 돼! 진 조장님!”
“이… 잔인한 놈!”
“네놈이 감히…!”
머리뼈가 부서진 진섭이 나무에서 굴러떨어지는 순간, 숲 여기저기서 숨죽인 채 지켜보던 무인들이 뛰쳐나왔다.
“읏차!”
나무에서 몸을 날린 그믐이 땅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삽시간에 그믐을 포위한 점창 무인들이 진한 분노를 내비쳤다.
“하여튼 웃기는 놈들이야. 적으로 만났고, 먼저 이빨을 들이댄 건 네놈들이지 않나. 잔인해? 감히? 운남의 들개들도 그런 개소리는 안 할게다.”
그믐이 자신을 포위한 적들을 태연한 얼굴로 훑었다.
“네놈들 때문에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목숨은 안중에 없느냐? 그 빌어먹을 탐욕 때문에 모든 걸 잃은 자들의 슬픔은? 니들, 정파인지 뭔지 하는 부류라며? 중원에서 만나는 놈들마다 사파니 마도니 일장연설을 해대더니만. 지금 네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욕하던 그놈들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이냐?”
포위망을 구성한 점창 제자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운남 벽지에서 정도(正道)에 대한 질책을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얼굴이 새까맣게 탄 야만 부족의 늙은이에게.
왜 모를까.
최근 점창이 벌인 일들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애써 눈감아 왔을 뿐이다.
강해지기 위해서.
비상하기 위해서.
장문인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겨우 안착한 구파의 울타리에서 튕겨져 나가는 게 싫어서.
훗날에 지금의 과오를 만회할, 더 큰 협의를 행하면 된다는 자기 위안으로.
애써 못 본 척했을 뿐이다.
삼백에 달하는 인원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낯짝 두꺼운 철면피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분개한 표정의 무인이 그믐에게 검을 겨눴다.
“닥쳐라! 어디서 감히 야만 무지렁이가 건방지게 정도를 논하느냐!”
“정도. 들어보니 뭐 별거 없던데? 의롭게 도리를 지키며 바르게 살자. 결국 그거 아니더냐? 협(俠)이니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들 말이다. 무지렁이라……. 근데 너 읽고 쓸 줄은 아냐? 니들 문자지만 아마 내가 더 많이 알 텐데?”
“뭐, 뭐라?!”
소리쳤던 무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읽을 줄 모른다.
이름과 숫자를 제외하면 당연히 쓸 줄도 모른다.
문자를 다룰 줄 아는 자.
중화 전체를 통틀어 2할이나 될까?
무공의 전수가 괜히 구결(口訣)과 암송 위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은 대 문파의 제자가 아니고서야 비급을 만들어줘도 읽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정도. 정파. 이따위 짓을 벌이고도 잘도 그런 헛소릴 지껄이는구나.”
“시끄럽다! 야만 원숭이가 대 점창의 행사를…!”
“그래. 야만 원숭이. 네놈들이 보는 우리는 그러하겠지. 변방 끝자락의 미개한 야만인. 얼마든지 짓밟아도 되는 짐승에 불과한 존재. 네놈들 목숨만 중하게 여겨지고 말이다.”
“그, 그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모르진 않을 거라 믿는다. 그저 외면하고 싶은 거겠지. 마음이 무거운 놈들도 많을 게야. 하지만 다를 바 없다. 잘못됐다 말하지 못하고, 휩쓸려 그른 일에 가담했다면 결국 똑같은 놈인 거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정론이다.
업신여겼던 야만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유창한 한어.
천시했던 인물이 생각지도 못한 때와 장소에서 쏘아 낸 비난은 정곡을 찔렀다.
적어도 정파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상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그래서 나도 마음이 편하다.”
“……?”
그믐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보이차나 홀짝이며 겨우 노여움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막상 전장에 임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흔들림 없는 평정을 유지한다.
백전노장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노련하기만 했다.
“우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먼저 이빨을 들이댄 놈들……. 말해봐라. 내가 너희를 몰살시키는 데 있어 망설여야 하는 이유를.”
소매를 슥 걷어 올린 가벼운 동작에, 그믐을 둘러싼 삼백의 검사들이 움찔댔다.
“할 말이 없나 보군.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 역시 너희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겠다.”
그믐의 신형이 푹 꺼지며 사라졌다.
“끄아아아악!”
숲을 통째로 도려낼 듯한 비명이 포위망 어딘가에서 터져 나왔다.
다섯 명의 검사가 눈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옜다.”
너무 자연스러워 얼떨결에 받아버렸다.
“어, 어, 으어… 으아악!”
휙 던진 열 개의 안구를 받아든 검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동료의 눈알을 사방으로 흩어버렸다.
손, 발, 무릎, 팔꿈치, 어깨.
현란하게 뻗어 나간 신체 각 부분들이 주어진 목표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한 명당 한 방씩.
삽시간에 십여 명의 점창 제자들이 의식을 잃고 무너졌다.
“에잇! 비켜라!”
장문인과 장로들에게 배운 일, 이대 제자들만 점창 무공의 정수를 습득한 게 아니다.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점창 무공만 파고든 삼대 제자 네 명이 빛살 같은 분광검을 토해냈다.
“차핫!”
흐릿한 잔상조차 허용치 않는 쾌검이 날아듦에도 그믐은 그저 무심하게 서 있었다.
스륵-
부드럽게 흐르는 발이 구름의 길을 밟아내고, 유연하게 휘어지는 몸체가 떨어지는 낙엽을 담아냈다.
빛을 쪼개는 검?
동시 발동된 구름 걷기와 낙엽 가누기가 오만한 이름의 검을 코웃음 치며 흘렸다.
“약자를 죽였으면. 너희도 너희보다 센 강자에게 죽어야지.”
탓-
그믐이 짧게 뛰어올랐다.
하반신을 공략하는 데 특화된 솔잎 털기.
하지만 평소보다 위쪽을 겨냥한 발차기 연격이 네 명의 턱과 명치뼈를 생으로 부쉈다.
빠바바박!
“컥!”
“커흑…!”
“지금이다! 쳐라!”
과연 점창파.
공방이 오고 간 그 잠깐 사이에 진형을 완성했다.
제1, 2, 3진으로 구분된 점창 검진이다.
마을에 남은 매서운 눈이 부딪혔던 바로 그 검진이지만, 한 방향이 아닌 사방을 에워싼 채 다가온다는 점이 다르다.
진섭이 죽고 이제는 11명 남은 조장들이 요처마다 섞여든 채 유기적인 움직임을 구현하고 있었다.
“니들,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그믐이 쯧, 짧게 혀를 찼다.
맨 처음 죽인 놈은 알아본 눈치였는데, 이놈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게 확실하다.
알았다면 30년 전에 진을 깨뜨린 장본인에게 발전 하나 없는 형태 그대로 밀고 들어올 리가 없겠지.
그믐이 주저 없이 땅을 박찼다.
제1진은 적의 날카로운 공세를 차단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30년 전, 굳건한 방어를 뚫지 못한 전사들이 수도 없이 목숨을 잃었었다.
“여긴 힘으로.”
어지간해선 진각을 밟지 않는 그믐이 오른발을 힘차게 대지에 내리찍었다.
꽈아앙!
뿌리 내리기의 응용.
수직으로 깊게 파고들어야 할 자연기를 수평으로 넓게 퍼뜨린다.
그믐의 오른발이 꽂힌 곳을 중심으로 주변의 땅들이 쩌저적 굉음을 내며 갈라졌다.
“윽!”
흔들리는 대지로 인해 제1진 검사들이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었다.
의도한바.
틈을 놓칠 리 만무하다.
오른쪽으로 휘돌며 자세를 잡은 그믐의 좌측 어깨에 강대한 자연기가 집중됐다.
“오랜만에 쓰는구먼.”
힘으로 몰아치는 산 허물기는 주로 바위 곰 전사들이 즐겨 쓰는 기술이지만, 와족 전투기술의 달인인 그믐이 못 쓸 리 없다.
원하는 곳만을 정교하게 두드리는 견격(肩擊)이 제1진을 덮쳤다.
콰카캉!
방어를 깨부수고 들어온 묵직한 타격에 다섯 명의 검사가 피를 뿌리며 날아올랐다.
미숙한 아이들처럼 단타로 끝내지 않는다.
이번엔 우측이다.
오른발 축을 다시금 지르밟고, 끌어올린 힘 그대로 들이받는다.
“크아악!”
“이런 미친…!”
비명이 샘솟고, 육두문자가 난무한다.
그믐이 발 디딘 대지 주변, 제1진의 첨단부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뭘 멍하니 섰나! 들이쳐!”
홀로 제1진을 뚫어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주춤했던 제2진 검사들이 내공을 있는 대로 쑤셔 넣은 초고속 분광검을 쏟아냈다.
“여긴 속도로.”
날아드는 검을 향해 도리어 돌진하는 그믐이다.
노장의 양손이 어둔 날개의 부리를 그렸다.
“이게 올빼미 사냥이니라.”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오랜 고련 끝에 터득한 그믐만의 비기.
검은 수리 전사들에게 전수했으니 이제는 와족의 비기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눈부시게 터져나간 쌍수 연격이 수십의 분광검을 앞질러 제2진 검사들 몸에 깔끔히 틀어박혔다.
“커, 커컥!”
“끄으으…….”
보지 않아도 알겠다.
제2진도 뚫렸다.
적들을 두드린 그믐이 손을 회수하는 찰나.
그믐의 공격에 노출된 검사들이 무너져 내리기도 전에.
마지막 제3진이 불꽃을 토했다.
“다 왔군.”
한없이 파고들 것만 같던 그믐이 갑자기 세 발짝을 물러났다.
제2진과 대치하면서 생긴 적의 빈틈을 쑤시는 게 제3진의 역할이다.
점창 검사들은 그믐이 더 깊게 파고들거나 급히 방어를 시도할 거라고만 여겼다.
그믐이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그의 육신을 저미기 위해 뻗은 검들이 허무하게 허공을 그었다.
“지금.”
간격.
이것이 간격이다.
간격을 지배하는 자가 전투를 지배하는 법.
거리를 벌려 적의 간격을 흩뜨렸고, 적들의 검이 허공을 때린 지금, 다시 들어가 나의 간격을 확보한다.
그믐의 신형이 급속도로 전진했다.
“여긴 역공이거든.”
매서운 눈에게는 제2진에 달려든 나무 표범 전사들과 반려수들 뒤에, 몸을 숨긴 검은 수리 전사들을 따라붙게 하라고 명했다.
그것으로 제3진에 대한 역공을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리 복잡할 필요가 없다.
전사들이 그믐과 같은 무위를 갖추지 못했기에 진형을 짠 것이다.
적들을 압도하는 무력이 있다면, 원리를 아는 것만으로도 홀로 검진을 깨부술 수 있다.
와족 특유의 체술들이 화염을 토하고, 제3진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털썩, 털썩- 쿵! 쿠쿵!
경악에 찬 점창 검사들의 두 눈 가득, 홀로 검진을 돌파한 노인의 등이 거대하게 비쳐 들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무슨…!”
조장들의 경악성과 함께 검진이 술렁였다.
노인은 전투와 기동은 물론이거니와, 한 토막의 시선조차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이치에 부합하는 움직임과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무력.
저 괴물 같은 야만 부족 늙은이는 고작 숨 몇 번 들이켤 사이에 단신으로 검진을 돌파했다.
직선 돌파였기에 쓰러진 인원은 사십 명도 채 안 되었다. 하지만 그의 힘을 똑똑히 지켜본 점창의 제자들은 급격히 전의가 꺾였다.
장문인은 이런 무위를 선보이는 게 가능할까?
봉검과 운검, 두 명의 대 장로라면?
운남 촌구석의 야만 부족 늙은이가 현 점창의 최고수들과 비견되는 무력을 지녔다니…….
온몸을 옭아매는 두려움이 악몽 같은 침묵을 동반한 채 점창 제자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회…효…! 당신이 회효인가?”